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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자유인의 길!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37> 소설의 시점(視点)과 명상의 원리(1)

(박꽃이 핀 어느 달밤에 박각시나방이 다녀갔던 것일까. 산전(山田)에는 박이 열 두 덩이나 속절없이 익어 간다. 잎은 푸르고 박은 하얗다. 다시 가을인가. 산자락을 따라 긴 안개 띠가 생겼다. 여명의 강물 위로 피어오른 물안개였다. 풍물패의 잡이가 돌리는 열 두발짜리의 기나긴 상모(象毛). 안개 띠는 그 상모처럼 휘늘어졌다. 강은 물로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이처럼 안개로서도 현현한다. 해는 서산에 지고 강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밤, 강물이 시나브로 "찰락! 찰락!"거리며 법음(法音)으로서 존재했던 것처럼.

안개 띠를 따라 강둑을 걷다가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였다. 강 건너 편에서 시커먼 짐승 한 마리가 내리막길을 지치듯 내려왔다. 견공(犬公)이었다. 나루턱에 버티고 선 품새가 앙팡지고 짱짱하다. 갑자기 이쪽을 보고 컹컹 짖는다. 산도, 강도 쩌렁쩌렁하다. 무슨 연유일까. 내게 무슨 허물이라도 있는 것일까.

큰 비가 지난 뒤끝의 강물은 푸르고 맑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물안개뿐이었던 수면이 가까이 다가가자 투명하게 날이 선 그 물빛을 보여주었다. 몸을 숙여 들여다보니 얼굴 하나가 보인다. '그'였다. 다시 그대인가.

'나'는 '그'를 보고, '그'도 '나'를 본다. 서로가 서로를 본다. 그러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묻는다. 누구인가, 그대는? 그대는, 누구인가?

어떤 '노역(勞役)' 하나를 떠올리며 강둑으로 올라섰을 때, 문득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너편의 그 짐승이었다. 발걸음을 멈췄다. 함부로 굴지 마라! 그 녀석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지조 높은' 짐승은 돌아오는 길 내내 서슬이 파랗다. 구폐(狗吠)! 아침 산책길은 어쨌거나 무슨 영문인지 알 수도 없는 가운데 썩 명예롭지 못 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 말하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지어 부르는 이름은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첫 구절이다. 서양인들은 노자의 이 '도(道)'를 영어로 번역할 때 많은 갈등을 겪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합리주의적 사유에 익숙하다. 그 사유를 담아내는 문법에도 익숙하고 관행적으로 써온 그 언어들도 그렇다. 그런 그들에게 이 '도'는 심오하면서도 한편 그 정체가 안개처럼 모호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 했으니, 동양인도 "도(道)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소이부답(笑而不答) 외엔 딱히 기댈 만한 현답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서양인들 중 어떤 이들은 '道'의 훈(訓)이 '길'이니 'way(길)'이라 직역했다. 다른 이들은 'nature(자연)'으로 의역했다. 그런가 하면 아예 'logos(理性, 悟性)'이나 'reason(이성, 양식)'과 같은 서양철학의 언어로 해석했다. 결국 동양의 그 '도'에 맞춤한 말을 찾아내지 못한 그들은 별 수 없이 음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타오(Tao)'였다. '타오'가 순리이리라. '무위(無爲; no-action)'는 또 어떠한가. 'no-action'이라는 표현으로 '무위'의 그 뜻을 바다 건너 그 머나먼 땅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독자 입장에서는 그 역(逆)도 존재한다. 동양의 고전과 사상을 동양적 언어로 만났을 때보다 때로 영문(英文)으로 접했을 때, 외려 그 뜻이 분명하게 와 닿는다. 동양적 언어는, 특히 노장(老莊)이나 선불교와 같은 명상적 전통이 있는 사상을 표현할 땐 대단히 함축적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적 언어의 그 독특한 표현양식과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비의를 온전하게 풀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 과정에서는 서양적 시각도 투사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번역하거나 해석한 책들이 동양의 원전보다 때로 쉽게 읽히는 까닭은, 그들 언어의 명료성 때문이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어떤 동양학자는 자못 영탄조로 말했다.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야 비로소 동양을 보았네!"

그때가 언제였던가. 여러 해 전에 일본인 선사(禪師) 스즈끼 다이세쯔(鈴木大拙)가 쓴 <선불교(禪佛敎) 입문(Introduction to Zen Buddhism)>을 읽었다. 스즈끼 다이세쯔는 스즈끼 슌류(鈴木俊隆)와 더불어 동양의 선이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도 선답게 했던 선의 대가였다. 그 책의 앞부분엔 심리학자였던 칼 융(Jung C. G.)이 쓴 글 한 편이 실렸다. 일종의 선(禪) 해설문이었다. 기이했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선을 해설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두루 살펴보니 융은 당시 미국과 유럽인들에게 선을 가르쳤던 스즈끼 선사와 깊은 교류를 나눈 흔적이 많았다. 그런 교류를 통해 그는 선과 같은 동양의 정신적 전통에 대해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갖게 됐던 것 같다.

융은 그 장문의 해설문에서 선(禪) 수행자들의 내면과 '깨달음'의 심리적 구조를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했다. 당대 서양의 심리학자가 쓸 수 있는 논문치고는 탁월한 글처럼 보였다. 그 시대의 서양은 선에 대해선 무지했고, 학계 일반의 관심 따위도 얕았다. 융의 해설문은 그런 학문적 토양 속에서 나왔다. 동시대의 정신분석학자였던 프로이트(Freud, S)와 달리 융의 심리학은 다소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다. 그 까닭은 선이나 명상과 같은 정신세계를 깊이 고찰하고 천착했던 그의 학문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융은 그 글에서 선 수행자의 '의식(意識)'의 중층적 구조를 묘사했다. 몇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문이었다. 융은 그러나 비록 심리학자이긴 했지만, 그 '의식'의 중층적 구조를 해명하진 못했다.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난해한 문제였으리라. 그 '의식'들은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가 일상적으로 접했던 인간 내면의 그 의식과 달랐다. 특히 그 '의식'들 중 하나는 본질적으로 명상 세계의 의식인 까닭이다. 융은 심리학자였을 뿐 명상 수행자는 아니었다. 임상의 대상이 된 수행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명상과 직접적인 수행을 통해 몸소 체험한 명상의 차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그게 융의 한계였다. 선을 해설한 융의 논문이 어떤 부분에서 심도를 잃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다음은 융이 쓴 그 해설문의 일부이다.

"우리는 의식(意識)에 발전의 단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게 서구의 사고방식이었다. '사물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과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사이에는 엄청난 심리학적 차이가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그 같은 발상조차도 해명될 수 없는 난해한 것으로 밀쳐놓았다. 따라서 아무도 그 문제의 심리학적 여러 조건과 상황을 분석해 보지 않았으며, 의식의 차원을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다루어 보지 않았다. 바로 이 문제 혹은 이와 비슷한 문제의 설정은 대개 지적(知的)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언제나 근원적이고 종교적인 물음과 깊이 연관되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일상적 의식의 불완전함을 느낀 결과 그 불완전한 의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에 커다란 힘이 됐던 것이 인도에서는 요가(Yoga)였고 중국에서는 불교였다."

'사물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과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바로 이 부분이었다. 뜻밖에도 나는 융이 지적한, 질적으로 차원이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두 개의 '의식'들로부터 명상수행법과 관련해 깊은 시사를 받았다. 특히 두 개의 '의식'들 중 후자(後者)인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그렇다. 이 후자의 '의식'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명상 수행법의 비의(秘義)를 만나게 되리라.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내력이다.

결국 나는 어느 동양학자의 고백처럼 서양의 한 심리학자를 통해 동양의 명상수행법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잡은 형국이었다. 융의 글을 읽던 당시 나는 명상수행법의 이론적 구조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 무척 마음고생을 하던 처지였다. 강을 건너고 싶었으되, 도강(渡江)의 수단인 나룻배에 많은 의문을 품었다. 나룻배는 다름 아닌 명상수행법이었다.

명상적 언어나 문법들,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우주나 자연, 삼라만상의 존재들의 실상(實相)은 사무치게 아름답고 신비적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걸 독해하지 못하는 내 일상의 사유는 한겨울 들녘에 서 있는 메마른 들풀처럼 쓸쓸하고 적막했다. 깊은 밤 만월(滿月)이 뜬다. 그러나 나는 달을 보되 달을 보지 못한다. 나는 달을 보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보는 달은 '본래'의 달이 아니라 내 자신의 기억이나 상념, 몇 푼어치의 인문적 지식 따위로 이루어진 달이었다. 그것은 나의 내면이 투사된 '나'만의 달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탄식할 일은, 나는 '나'를 볼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명상 수행의 스승들은 늘 말한다. 생각하지 마라. 그냥 바라보라. 그대의 마음속에 어떤 망상이나 사념, 상념 따위가 떠오르거들랑 그냥 바라보라. 해석하지 마라. 호오(好惡)나 시비(是非)와 같은 가치판단을 하지 마라. 그래, 그들은 말한다.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이 말은 명상의 본질과 그 목적을 표현하는 고전적인 수사(rhetoric)가 되었다. 본질은 '바라봄'이요, 목적은 '자유인'이다. 그렇다. 이 '바라보는' 행위야말로 명상 수행법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스승들은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대는 이것을 '민들레'라 이름 붙이지 말라. 그대는 이것을 '꽃'이라 부르지 말라. 그대는 이것의 색깔을 '노란색'이라 이르지 말라. 자, 그대는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말해 보라.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대체로 '민들레'라는 이름을 통해 그 풀을 사유한다. 꽃을 보면 '꽃'의 이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을 통해 '꽃'이라는 언어로 사유한다. '노란' 색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와 지식, 가치체계, 신념 따위를 통해 해석하고 판단할 뿐이다.

불두화(佛頭花)가 핀 것일까. 상사화(相思花) 따위가 핀 것일까. 무엇이 법화(法花)이고, 무엇이 꽃인가. 어느 선방. 풍경소리가 파적을 할 때, 선사가 손에 쥔 주장자(拄杖子)도 바닥을 쿵쿵 울린다.

"속도(速道)! 속도(速道)!"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

여기서 '빨리'라고 하는 말은 시간의 경과랄지 혹은 시간의 길고 짧음과는 무관하다. 다만 사물을 대할 때 선입견을 통해 해석을 하거나 가치판단을 하지 말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선입견 따위에 매이지 말고 화살처럼 곧장 사물의 실상(實相), 그 참모습으로 다가가라는 뜻이다. '심사숙고' 따위는 선적(禪的) 혹은 명상적 존재방식과 반대편에 존재한다. 직관(直觀)을 모토로 하는 선리(禪理)라는 게 있다면, '심사숙고'는 그 근원적 존재방식에 대한 배리(背理)이다. 그런 맥락에서 '빨리'는 명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종의 은유이다.

다시 적는다.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그렇다면 도대체 '생각하다'와 '바라보다'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자는 누구이고,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누가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인가. 생각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생각하는 객체는 무엇인가. 바라보는 주체는 누구이고, 바라보는 객체는 또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어떤 사물을 바라본다고 했을 때, 이 '바라보는' 행위를 '생각하는' 행위와 선을 긋고서 그 차별적 의미를 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명상 수행법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그 비밀은 또한 현실세계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영역처럼 보이는 명상에서만 그 의의를 갖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공리성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바라보다!

사전적인 뜻은 쉽다. 그러나 막상 명상수행 과정에서 이 '바라보다'라는 말을 만나게 되면, 이 평범하고도 단순한 언어는 돌연 고도의 관념과 추상으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여기서 '바라보다'라는 말은 적어도 감각기관의 시각적인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다. 그것이 '바라보다'를 난해한 관념과 추상으로 보이게 하는 소치이다. 명상수행의 초보자들은 이 '바라보다'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곧잘 어둠 속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칠통배(漆桶輩)! 칠흑 같은 그 어둠 속에서 그들은 절망한다.

인도와 중국에서 주로 발전한 명상수행법은 그 종류가 참으로 많다. 수행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수행법에 따라 천변만화의 체험을 한다. 수행법에 관한 전적들과 이론도 그 수행법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과학적인 논리와 언어로 설명된 수행법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나의 경우 대부분 불교적 수행법을 따랐는데, 처음에 화두(話頭)를 들고 공부했다. 화두는 '이뭣고(是甚麽; 쓰선머)'였다. 영어로 직역하면 '홧 이즈 디스(What is this?)'일 게고, 의역하면 '후 앰 아이(Who am I)?' 정도일 게다. 존재의 근원을 찾는 물음이다. 화두를 들고 공부할 때 깊은 벽을 체험했다. 우선 내 자신이 화두 수행의 방법론을 깊이 이해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그 수행법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화두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과 관련한 전적들을 학습하거나 수행을 지도하는 선사들의 육성을 직접 듣기도 하고, 때로는 사숙(師淑)도 했다. 그러나 간화선에 관한 전적들과 선사들의 법문을 통해 만난 그 수행 방법론의 이론적인 체계나 구조는 독해도 어려웠고, 따라서 쉽사리 체화하지도 못했다.

결국 뒷날 나는 관법(觀法) 수행으로 그 공부의 방향을 바꿨다. 관법 수행을 통한 수행법의 이론적 구조에 익숙해졌을 때 다시 간화선으로 돌아와 화두 수행법을 검증해보기도 했다. 관법 수행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내가 선택한 텍스트는 <대념처경(大念處經)>이었다. 이 경전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아함경부에 속한다. 적어도 내겐 그 경전 속의 수행법은 참으로 과학적이었다. 나는 이 <대념처경>의 수행법을 의지처로 삼고, 칼 융의 질적 차원이 다른 두 개의 '의식'들과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自由人)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따위와 같은 명상적 레토릭을 분석했다.

명상수행법은 다양하지만, 공통분모도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갖는 게 그 하나이며,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사유의 중지' 곧, 자아(自我)의 침묵에 도달하는 게 그 둘이다.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여기서부터 본론이다. 칼 융이 지적한 '사물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과 '사물을 의식하는 바로 그 의식을 의식하는 것(Consciousness of the consciousness)' -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이 두 개의 '의식'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생각하다'와 '바라보다'의 차이가 무엇인가. 명상수행법의 이론적 구조에서 이와 같은 의식행위들의 심리학적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으며,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걸 분석하고 해명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그 분석과 해명의 틀로 나는'소설의 시점(視点)'을 빌릴 심산이다. 과연 소설의 시점을 통해서 명상의 기본원리를 해명할 수 있을까.

<자유, 자유인의 길! 소설의 시점(視点)과 명상의 원리>.
이 글의 제목이다. 이런 주제의 글쓰기는 기실 대단히 모험적이다. 더욱이 공부가 깊지 못한 탓으로 오랫동안 망설였다. 명상에 대한 내 자신의 학습과 체험으로 그 수행법의 이론적 구조를 해명할 수 있을까. 고백하자면 두렵다. 소설의 시점 따위를 통해 명상수행법에 접근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몇 해 전 그의 망명지인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Dharamsala)에서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가 말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마음의 과학(science)이다."

자문한다. 명상은 여전히 우리의 이성을 넘어선 신비스러운 영역인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와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일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자문에 답한 게 이 글이다. 명상 공부를 할수록 명상의 본질은 신비주의(mysticism)보다 리얼리즘(realism)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적어도 명상은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 허상(虛相) 대신 그 참모습을 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맥락에서 그렇다. 사물을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특정한 시공간(時空間)에서 가장 실존적(實存的)일 수 있다.

불교 대신 명상을 대치시켜 적는다.

"명상이 반드시 신비주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명상은 마음의 과학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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