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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사변(思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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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사변(思辨)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35>

여행은 짧았지만 사념은 길었다. 사념이 길다 보면 마음도 쉬이 지친다. 차창을 넘어 들어온 볕이 예사롭지 않다. 경칩도 지난, 봄볕이었다. 봄날의 햇살 속에는 단단히 갈무리해 놓은 끈들을 느슨하게 풀어 버리는 힘이 들어 있다. 지친 마음이 그 햇살의 힘에 치인 것도 같다.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나 차창 밖을 보니 눈앞에 보이는 산에는 잔설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산 너머 산은 여전히 그 봉우리가 하얗다. 봄은 이미 곁에 와 있기도 하고, 겨울은 또 어느 곳에선가 그 잔설만큼 남아 있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산과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간다. 그들이 ‘스쳐간다’고 생각하니, 풀어졌던 마음이 다시 긴장한다. 문득 스쳐가는 것들과 대비되면서 한 점 움직임도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내 자신이 보인다.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는 내가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게 맞는 얘기인가. 한 순간 사유는 멈추어버리고 머릿속은 백지처럼 되고 만다. 도대체 나하고 산과 나무들 중 어느 쪽이 진정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아홉 낱말로 이루어진 짤막한 시 한편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꽃 그려 새 울려 놓고/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소식”(<봄, 파르티잔> 전문, 서정춘). 해방공간이나 전후(戰後)에 있었음직한 어느 빨치산의 이야기다. 시는 짧고 과묵한 그 언어 때문에 여운은 또 길다. 꽃 피는 봄이 오면 그것이 꽃이든 인간이든 대체로 떠났던 존재들도 돌아오거나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봄날에 떠나는 사람, 어느 빨치산의 이야기는 적어도 계절적으론 매우 비일상적이다.

차창 밖의 산과 나무들을 보다가 시인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그 시가 다시 읽혀졌다. 떠난다는 것과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다는 것일까. 나는 머물러 있고 산과 나무들이 흘러가는 것처럼, 혹 ‘파르티잔’은 남아 있고 ‘새’가 떠난 것은 아닐까. ‘뜨물’을 먹고도 취한다는 얘기도 있거니와 봄날의 햇살이 새삼 요사스럽다.

마을 입구의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마을 안의 고샅을 통해 곧장 가는 길과 마을과 얼마간 떨어져 있는 강둑을 통해 에둘러 가는 길. 나는 늘 강둑길을 택한다. 사치라면 사치다.

둑 위에서 내려다보니 얼었던 강이 그 몸을 풀고 있었다. 강둑 밑의 그늘진 곳과 강물의 가장자리엔 눈과 얼음이 남아 있었지만, 강심에는 푸른 물이 넘실넘실 흘렀다. 겨우내 ‘하얀’ 강을 보다가 ‘푸른’ 강을 대하니 물색(水色)도 신비스러웠다. 강이 그 육신의 속살을 드러낸 것처럼도 보였다. 눈이 녹고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물도 많이 불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이처럼 만나는 강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생명의 본성은 본디 부드럽거나 유동적이다. 그것은 대체로 곡선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회한다. 몸을 푼 강물에서 그런 생명력을 다시 만났다.

인간은 종종 강의 저 물결에서 시류를 읽는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도 그렇다. 그들은 그 물결을 통해 세월과 대세의 흐름을 보기도 하고, 새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하는 세대교체 따위도 본다. 그래서 그 대구는 또 ‘일대신인환구인(一代新人換舊人)’이다.

그런가 하면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은 ‘파불리수 수불리파(波不離水 水不離波)’를 읽는다. ‘파도는 물을 떠나지 않고, 물은 또 파도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체(體)와 용(用)을, 이(理)와 사(事)를, 공(空)과 색(色)을, 본체와 현상을 둘로 보지 아니한다.

인기척을 느낀 수십 마리의 붉은머리오목눈이 떼가 갈대숲에서 솟구쳐 올라 왁자지껄하며 강 건너 편으로 날아갔다. 인간에게 강은 때로 건너야 할 대상이지만, 새들은 강을 건너지 않는다. 새들은 일상처럼 그냥 날고, 강은 또 그 새들이 나는 허공 아래편에 그냥 놓여 있다.

내가 만나는 저 강물의 또 다른 아름다움은 앞물결이 보여주는 그 깊은 ‘수동성’과 앞물결이 다시 뒷물결이 되는, 그런 걸림 없는 넘나듦 같은 것이었다.

밀려오는 뒷물결에 온몸을 맡긴 채 그저 출렁이며 흘러가는 그 앞물결을 보라. ‘온 몸을 맡긴’ 그 모습을 두고 인간은 의지와 관계없이 ‘밀려간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곳엔 깊은 수동성이 숨어 있다. 앞물결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외려 자기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도착된 주체성이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종종 아상(我相)이나 아집(我執)의 다른 표현일 때가 많다. 앞물결엔 그런 아상과 아집이 보이지 않는다. 달리 보면 뒷물결이 존재함으로써 앞물결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뒷물결은 앞물결의 자기 구현을 돕는 한낱 조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그 앞물결은, 자기 앞에 놓인 ‘다른 앞물결’의 뒷물결이기도 하다. 이처럼 물결이란, 말 그대로 물 샐 틈 없이 서로 물려 앞물결도 되었다가 다시 뒷물결도 되고, 그 뒷물결은 다시 앞물결로 회향(回向)한다. 이 회향은 걸림이 없는 무애(無涯) 같기도 하고, 서로 통하여 두루 막히는 데가 없는 원융(圓融) 같기도 하다. 어떤 존재의 정체성은 바로 그 물결처럼 가변적이며, 늘 타자(他者)와의 관계 속에서 그 참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다.

시골에 살다 보면 흔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덕성이 훌륭한 노인들도 만난다. 그분들은 거의 흙에 가까워진 분들로서 함께 얘기하다 보면 ‘식물성’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잔잔한 미소와 조용한 웃음, 깊은 눈빛. 어느 자리에서건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한다. 그분들은 사람을 대할 때도 좀처럼  상대편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없다. 이쪽에서 살짝 밀고 들어가면 그만큼 뒤로 물러서고, 이쪽에서 뒤로 물러서면 소리 없이 또 그만큼 다가온다. 마치 강물의 그 물결 같다. 나는 그분들이 나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기이하게 그분들을 통해 나의 허물을 느낀다.

남도 쪽 말로 ‘경오지다’라는 게 있다. ‘경위 바르다’라는 말의 사투리다. “이것은 ‘이만저만’ 하고 저것은 ‘암만암만’ 해서 시(是)는 이렇고 비(非)는 저렇다”며, 이른바 ‘경오지게’ 잘 ‘개탕’을 쳐대는 혈기방장한 사람들은 때로 그런 노인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세상일을 두고 그 시비를 두부 모 자르듯이 그렇게 선을 긋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 노인들의 ‘식물성’은 앞물결의 그 수동성과도 깊이 닮아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 이 산골엔 눈이 제법 내렸었다. 마른 추위 끝에 겨울이 계절치레를 하나 싶었다. 다소 다른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 눈발 속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다가 기이한 체험을 한 적도 있다.

눈발이 짙다 보니 어느 순간 먼 산이 사라져버렸다. 하늘과 허공은 온통 눈뿐이어서 모두가 하얗다. 일상적으로 대하던 육덕 좋은 그 산들의 산색도, 능선이 하늘을 만나 이루던 공제선 따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뭔가. 문득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 생각에 미묘한 모순 같은 게 느껴진다. 혹시 산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산이 보이지 않는 이 풍경이 실상(實相)이고, 산이 보였던 그 풍경은 허상(虛相)이 아니었을까. ‘기억’이라고 하는 나의 내면의 장치가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걸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유형의 느낌은 깊은 밤, 밖에 나왔을 때 만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달밤에 산을 바라는 경우도 그렇다. 달밤에 산을 보면 산은 완벽한 어둠 그 자체이다. 나무 한 그루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이다. 상대적으로 달이 떠 있는 하늘은 밝다. 그러나 내 ‘기억’은 그 어둠을 산이라고 부른다. 내가 내게 묻는다. 저 어둠이 정말 산이 맞는 건가. 어찌 보면 그 어둠은 산이 아니라, ‘하늘이 아닌 어떤 존재’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그 하늘은 어둠이 그러하듯이 하늘이 아니라, ‘어둠이 아닌 어떤 존재’가 아닐까. 도대체 어떤 게 참 모습인가.

우리는 기억이랄지 혹은 일상생활을 통해 학습했거나 체험한 결과물들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다. 수동성과 같은 존재방식은 그런 결과물로부터 자유로울 때 만난다. 수동성은 얼핏 보면 주체성을 잃거나 자기포기처럼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걸 통해 더 큰 자기가 구현될 수도 있다. 사물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사물 하나를 두고도 그걸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그 강물도 그렇다. 언젠가 도오겐(道元)선사가 쓴 <산수경(山水經)>을 읽다가 물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물을 보더라도 함부로 “물이 흐른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물고기들이 물을 볼 때는 물을 집으로 보는데, 이때의 그 집은 인간이 사는 그 집과 같다. 인간이 자신의 집을 두고 ‘흐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물고기들 역시 자신들의 집이 ‘흐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치가 그러한데도 인간이 물고기들의 집을 두고 '흐른다'고 말하면 어찌 그들이 크게 놀라지 않겠는가.”

도오겐은 인간은 물을 물로 보지만, 존재들에 따라서는 물을 물로 보기도 하고 물을 물로 보지 않기도 한다고 했다. ‘물’이라는 대상도 각 존재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식하며, ‘흐른다’는 표현도 각 존재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도오겐은 상대적인 걸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의 고정관념을 질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橋流水不流).” 부대사(傅大士)가 남긴 선어이다. 도오겐의 이야기는 그 선어를 떠올리게도 했다.

봄볕을 받다가 다시 생각한다. 차창 밖으로 보았던 그 산과 나무들은 정말 흘러갔던 것일까. ‘파르티잔’과 ‘새’ 중에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는가.

다섯 해를 끊었던 담배, 중간에 ‘파계’를 하고 몇 달 피운 적이 있긴 했던 그 담배를 다시 피워 문다. 쓸쓸한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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