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입춘(立春) 부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입춘(立春) 부근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34>

***입춘 전날(2월 3일)**

‘입춘 추위에 김장독 깬다’더니 여전히 춥다. 입춘 무렵이지만 봄 같지가 않다. 문자 그대로 ‘불사춘(不似春)’이다. 더욱이 입춘 전날인 오늘은, 천성산의 뭇 생명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건 한 비구니 스님이 단식 100일째를 맞는 날이기도 하다. 하루 내내 마음까지 얼어붙었다. 어느 신부는 “죽어 천성의 전설이 되지 말고, 살아 천성의 어미가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누군가가 빛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 자기 빛을 꺼야 한다.”

멕시코 원주민의 저항운동을 이끌어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 마르코스. 그가 한 아름다운 산문을 통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한 생명의 불빛이 그만 꺼지고 마는 듯도 싶었다. 결국 그 스님은 참으로 힘겨운 곡절 끝에 ‘전설’이 아닌 ‘어미’로 다시 남게 됐다. 그 스님이 ‘전설’이 되었더라면, 이 봄도 역시‘전설’로 남을 뻔했다.

그 스님은 “단식하는 내 모습만 보지 말고, 천성산을 보아 달라”고 호소했었다. 천성산은 도롱뇽이기도 하고, 꼬리박각시와 푸른큰수리팔랑나비, 고란초와 꿩의바람, 노루귀와 같은 자연의 뭇 생명들이기도 하다.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다가 정작 달은 잊고 만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성산과 뭇 생명들의 상징인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100일’이라는 단식일수만 보려 했다.

‘나무 위의 여자’로 잘 알려진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이 생각난다.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헤드워터숲을 지키기 위해 2년도 넘는 세월을 나무 위에서 보냈던 처녀다. 당시 25세였던 그녀는 그 숲속의 9백년 된 삼나무 위에 올라가 저항했다. 한 목재회사가 그 삼나무숲을 벌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삼나무의 56m 지점에 자신의 둥지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폭풍우와 벌목회사의 포위를 견디며 생활했다.

줄리아 힐이 올랐던 그 삼나무의 이름은 ‘루나’였다. ‘루나’는 달을 뜻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 삼나무에 오르던 밤, 달은 밝은 빛을 비추어 그녀를 도와주었다. ‘루나’는 그 달의 도움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그녀의 저항은 주류 언론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그러나 그녀의 뜻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힘을 얻었다. 목재회사는 결국 벌목을 포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줄리아 힐만을 보지 않고 그녀가 가리키는 ‘루나’를 보았던 것이다.

비구니 스님의 단식은 단순히 이 땅의 제도나 정책이랄지 경제적, 사회적 관행에 대한 ‘안티테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과 ‘생명’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명제에 대한 호소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뜻에 공명해 종이 도롱뇽 12만 6백 마리를 접었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큰 화두로 남았다.

***입춘(2월 4일)**

입춘날 전자우편으로 봄 안부를 챙겨주신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남도 쪽에 계신 분이다. “폭설과 한파가 여전하지만 여기 남쪽이야 며칠 가겠는가”라고 하셨다. 하긴 남도지방에 살 때 겪어본 일이지만, 봄은 일단 오기 시작하면 ‘여우 불’처럼 번진다. 기척도 없이 들녘을 덮는다.

그분은 우주인의 존재를 믿고 그들과의 소통을 탐색하는 한 채널링(Channelling)그룹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분을 생각하니 귀농했던 첫해 가을 어느 날의 일이 떠오른다. 내 집을 찾아오셨던 그분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20대 중반 무렵 그 어르신은 우연한 계기로 당시 유명세를 탔던 한 역술인을 만났다고 했다. 그 역술인이 점괘를 보고 난 후 그걸 한 문구로 표현했다.

“稀八可知(희팔가지)”

무슨 말일까. 문구가 아무래도 한자성어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문맥도 낯이 설고 뜻도 새기기가 쉽지 않다. 내가 어르신께 물었다.

“‘稀八(희팔)’의 ‘희’자가 혹시 ‘희수(稀壽)’라고 할 때의 그 ‘희’자를 뜻한 것일까요?”

어르신이 웃으셨다. 그렇다고 했다. ‘희수’는 나이 일흔을 뜻한다. 그렇다면 ‘희팔’은 일흔 여덟을 가리킨 말로 보인다. ‘희팔가지’를 풀이하면 “(그대의 수명이) ‘일흔 여덟’임을 가히 알겠다”라는 정도일 것 같다. 닷새 후 설을 쇠게 되면 어르신의 연세가 바로 그 ‘일흔 여덟’이 된다. 그분이나 나나 당시 그 이야기를 나눌 때 가벼운 소화(笑話)처럼 주고받았었다.

시중의 역술인들이야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일부 출가수행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공간에서 사주팔자를 통해 점괘를 보는 행위들은 참으로 못마땅하다. 그런 행위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과도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명상적 전통을 갖고 있는 종교나 혹은 종교를 떠난 순수한 명상적 삶의 방식에선 늘 명상의 3대 테제인 ‘지금’ ‘여기’ ‘자기’가 화두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류의 스승들은 그런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라고 하나같이 말했다.

하시디즘이라는 유대교 신비주의의 한 성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스승인 랍비를 만나러 간 것은 그분으로부터 율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신발 끈을 매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그가 배우려 한 것은 관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었다. 랍비가 신발 끈을 매는 행위는 ‘지금’ ‘여기’에서의 그의 실존적 존재방식의 모든 것, 그 자체인 까닭이다.

불가의 전유경(箭喩經)에 나오는 ‘독화살의 비유’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세계는 영원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별개인가. 인간은 죽은 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사후세계는 있는가 없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그 ‘독화살의 비유’다.

독화살을 맞은 한 어리석은 사람이 말한다.

“나를 쏜 사람이 누구인가. 귀족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 그의 이름은 무엇이고 성은 무엇인가. 나를 쏜 그 활은 보통 활인가 아니면 큰 활인가. 그 화살의 깃털은 무슨 털인가. 독수리의 깃털인가 솔개의 깃털인가. 아니면 공작의 깃털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그가 그런 것을 알기 전에 화살을 뽑지 않는다면 결국 그는 죽는 수밖에 없다. ‘독화살의 비유’는 형이상학적 의문 따위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은유적인 가르침이었다.

내게 입춘 안부를 물어주신 그 어르신은 올 한해를 살며 혹 그 ‘희팔가지’의 주술적인 비의를 의식하실까. 아마 그분의 세계관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다만 ‘일흔 여덟’이면 생물학적으로 보아 영혼이 몸을 벗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정도의 생각은 하실 듯도 싶다. 그 어르신의 건강과 평화를 빈다.

***입춘 뒷날(2월 5일)**

마을 입구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읍내 나가는 길이었다. 소소리바람 속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아침나절의 햇살은 제법 따사롭다. 추위 속에 서있어 본 사람은 여린 햇살 한 올에도 마음이 사무친다. 옆에 서계시던 백발의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거, 시청료 내라는 거 맞지유?” 그분이 작은 가방에서 꺼내 내민 걸 들여다보니 유선방송수신료 고지서였다.

매달 나오는 그 고지서를 그분이 모를 리 없었다. 낯이 선 그분은, 홀로 산다고 했다. 할머니가 쓸쓸하셨던 같다. 어떤 이는 언어나 문자를 잊고 싶어 하고, 또 다른 이는 ‘말’을 그리워한다. 문득 먼데 산을 바라보니 ‘박가분(粉)’을 뿌려놓은 듯 하얗다. 잔설(殘雪)이었다. 햇살에 취해 어느 곳엔가 남아있던 눈을 잊고 있었다.

겨울 닷새장이 모처럼 붐볐다. 설을 앞둔 대목 장날인 까닭이다. 난전의 좌판 사이 통로가 장꾼들로 메워졌다. 취나물과 고사리, 숙주나물 따위의 제수용 나물을 파는 채전과 어물전이 가장 수선스러웠다. 산간이다 보니 육류야 지천이지만 어물은 귀했다. 이쪽 사람들이 ‘물곰’이라 부르는 꼼치와 조기, 대구, 생태, 볼락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열기’들이 좌판 위 냉장용 얼음 위에서 입들을 벌린 채 누워 있다. 그 생선들을 보면 정말 춥다. 하이쿠의 명인인 바쇼(芭蕉)는 그런 생선을 매우 깊게 만났던 시인이다. “생선가게 좌판에 놓인 / 도미 잇몸이 / 시려 보이네.” 적어도 그 순간 바쇼와 도미는 한 몸이었다. 그 하이쿠의 풍경은 역설이게도 따스했다.

난전을 둘러보다가 길바닥 위에 보자기를 펼쳐 놓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보자기 위엔 냉이 두어 줌이 보였다. 냉이는 싱싱해 뵈긴 했지만 잎에 검붉은 기운이 돌고 태깔이 썩 곱지가 못했다. 시설하우스에서 재배한 냉이가 아니었다. 겨울을 나면서 서리와 눈에 쓴맛 단맛을 다 본 야생의 그 겨우살이 냉이였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요즘처럼 언 땅에서 냉이를 캤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 언 땅에 어떻게 냉이를 캐실 수 있으셨던가요?”

“호호호, 다 방법이 있어유. 땅이 얼기 전에 캔 거에유. 캔 지 달포도 넘었어유.”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단한 지혜가 숨어 있었다. 그 냉이는 산자락 밑 묵정밭에서 달포도 더 오래 전에 캔 것이었지만, 보관 방법이 독특했다. 캔 냉이를 흙도 털지 아니 한 채 비닐봉지에 밀봉해서 헛간에 그냥 놓아둔다고 했다. 요즘처럼 날이 춥다보면 냉이는 언다. 그러나 냉이는 죽지 않았다. 냉이는 본래 겨우살이풀이기도 해서 내한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얼어있는 냉이를 녹일 때 적당히 그늘진 곳에서 천천히 녹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상하지 않고 싱싱하다고 했다. 햇살 따뜻한 곳에 널어놓고 녹여보았더니 흐물흐물해지다가 곧 까맣게 색이 변하더라고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재배학의 이론과도 딱 맞아 떨어졌다. 작물이 서리에 상해(霜害)를 입거나 동해(凍害)를 입었을 때, 그 작물을 치유하는 첫 번째 원칙은 바로 할머니의 말씀과 똑 같다. 아침 햇살이 비치기 전 이른 새벽에 약제를 뿌려 그 언 몸을 서서히 녹여가며 회복을 돕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얼어 있는 작물이 따스한 햇살에 바로 노출되면 그 식물체의 세포조직이 금방 와해돼 버리기 때문이다.

할머니로부터 큰 지혜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수업료’를 지불할 셈으로 냉이를 한 줌 사서 일어섰다. 2천원의 그 냉이 값은 대처 사람에겐 비싼 값이고, 농사를 짓는 내겐 헐값이다. 장날 나들이치고는 소득이 두둑한 기분이었다.

정월 대보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혜로운 농사꾼이셨던 어머니께서 언젠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연장도 남의 집에서 보름을 쇠면 운단다.” 연장이란 농사짓는 데 쓰는 지게나 호미나 낫 같은 농기구를 말한다. 어머니의 말씀은 마치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는 속담을 상기시켜 주셨다. 정월대보름날엔 소에게도 인간이 먹는 오곡산채를 그대로 한 상 차려주곤 했으니, 우리 선인들이 농사를 어떤 마음으로 지었는가를 짐작 할만도 하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는 해토(解土)머리가 멀지 않았다. 다시 연장을 챙겨야 할 때가 왔다. 봄은 두려움이기도 하고 그리움이기도 하다.

(이 글을 퇴고하고 있는 지금, 이 산골에는 눈이 내립니다. 독자 여러분 설 잘 쇠십시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