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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달래가면서 사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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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달래가면서 사는 거지요”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33>

입춘이 한 열흘 남았다. “여윈 몸을 뒤척이네.” 봄을 앞둔 산하를 두고 그렇게 노래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윈’ 산은 여전히 겨울산이었다. 몸을 뒤척이는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이 산 깊은 곳 어디선가 복수초가 노란 꽃을 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체로 이 산골의 첫 화신은 처녀치마였다. 입춘 무렵이면 꽃대가 나오는 그 처녀치마도 아직 무소식이다. 은은한 보랏빛의 작은 별 같은 구슬봉이의 꽃들도 우수경칩은 돼야 만난다.

양지 바른 쪽의 산자락을 지나다보니 무덤 하나가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파헤쳐졌다. 구멍 안팎에는 부스러진 벌집들이 보였다. 두 개의 큰 발굽으로 된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찍힌 걸 보아 멧돼지가 다녀갔던 것 같다. 구멍 속의 그 벌집은 ‘땡삐’라고도 부르는 땅벌의 집이었다. 먹잇감을 구하기가 어려운 겨울철에 ‘땡삐’의 벌집은 멧돼지에겐 좋은 먹이다. 그 녀석들은 벌집 속에 들어있는 꿀과 땅벌의 애벌레를 노린다.

무덤가 한편엔 엽총 실탄의 탄피 한 개도 떨어져 있었다. ‘EXPRESSS(익스프레스).’ 탄피에 적힌 문자다. 물도 세월도 느리게 흘러가고, 들고양이도 느리게 걷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그러한 이 산골에 무슨 ‘특급’이며, ‘속사(速射)’일까. 수렵철이랍시고 엽사들이 다녀간 흔적이었다. 이 산골은 올해 조수보호구역에서 제외돼 수렵장으로 지정됐다. 탄피만 하나 달랑 주어들고 산을 내려왔다.

간밤엔 고추알바람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눈이 내렸다. 손가락 한 마디쯤 쌓였을까. 마른 추위뿐인 올 겨울치고는 귀한 눈이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 마당의 숫눈을 보니 그곳에 대각선으로 가로질러간 발자국이 보였다. 누군가 다녀갔다. 발자국들은 작고 외줄기로 나 있었다. 들고양이가 남긴 것이었다. 발바리 같은 작은 개의 발자국도 고양이 발자국을 닮긴 했지만, 그 자국은 외줄이 아닌 두 줄로 찍힌다. 따라가 보니 발자국은 두엄자리 주변에 머물러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 자리는 내가 먹고 남은 음식물을 모아두는 곳이다. 굶주린 생명 하나가 어둠을 타고 먹이를 구하러 왔음에 틀림없었다.

인간이 남긴 발자국은 참으로 시비도 많다. 그것이 유위(有爲)인 까닭일까.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밟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그러나 동물들이 남긴 발자국은 자연 그 자체이다. 그것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새들이 노래하는 시(詩)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 발자국은 무위(無爲)처럼도 보였다. 그런 발자국을 볼 때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인간이 아닌 어떤 ‘타자(他者)’의 존재감 같은 걸 체험한다. 그런 느낌은 늘 경외감이었다.

깊은 산골에 살다보면 야생동물들을 시나브로 만난다. 이곳보다는 예전의 낡은 흙집에서 살 때엔 더욱 그랬다. 본래 그 집에는 걸음을 뗄 때마다 다리를 잘록거려 ‘자춤발이’ 소리를 듣던 일흔 안팎의 노인부부가 살았다. 그 집을 처음 방문했던 무렵 그분들은 그 곳을 떠날 채비를 했다. 인적도 드문 외진 산골에, 지은 지 백년도 더 됐음직한 흙집이었다. 너무 허름하다싶어 걱정도 됐다. 여름 장마 때랄지 그런 경우 탈이 없는지 물었다.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울의 63빌딩은 무너져도 이 집은 안 무너질 터이니 걱정 마슈.” 몸소 살아보니 장마 때 아궁이 안에서 물이 솟아 부엌이 물바다가 됐다. ‘푸세식’이었던 뒷간도 물에 잠겼다. 그러나 집이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었으니 노인이 빈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집을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던 한 스님은 “토굴이 따로 없다”며 내심 ‘감명’을 받은 기색을 내비쳤다.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쓸쓸하기도 했고, 한편 생태적으론 가장 풍요로운 시절이기도 했다.

겨울철엔 무릎 가까이 발이 빠질 만큼 눈이 엄청 내리곤 했다. 그런 날 아침,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눈은 지상의 소란스러움 따위를 모두 덮어버렸다. ‘나’도 ‘너’도 ‘그’도 모두 하얗다. 서로 차별이 없는 까닭에 ‘나’도 ‘너’도 ‘그’도 모두 사라져버린다. 거기에다 짙은 안개까지 낄 때는 세상은 망연하고도 망연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랫마을의 트랙터 기사가 ‘굳세어라 금순아’ 따위의 노래를 확성기에 틀고 큰길 위에서 제설작업을 시작하면 그 아침은 깨어난다. 그런 날 깊은 감동으로 만나는 게 또 집 주변에 남겨진 동물들의 발자국이었다. 한겨울, 눈에 잘 띄진 않았지만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생쥐 녀석들. 흙집의 터줏대감이었다. 당시 내가 기거했던 방은 한 평 남짓의 매우 작은 방이었다. 소반 같은 탁자 하나에 책들을 조금 들여놓고 나니 겨우 몸을 눕힐 만했다. 그 방의 천정에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쥐들이 달리기 경주를 벌였다. 눈이 온 날 집을 둘러보면 흙벽 둘레의 바닥이나 수리취와 용담 군락이 서식하던 뒤란에는 그 녀석들의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혔다. 흙집은 생쥐들의 천국이었다. 흙벽 곳곳에 구멍투성이였다. 그 녀석들은 몸길이가 가운데손가락 정도밖에 안될 만큼 작다. 몸은 잿빛이었지만 발은 또 빨갛다.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그 녀석들로부터 시달림도 많이 받았다.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 중 체로키족은 4월을 ‘씨앗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달’이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이 생쥐들 때문에 동지섣달 내내 씨앗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창고처럼 쓰던 빈 골방에다 갈무리 해둔 홍화씨가 어느 날 보니 생쥐들의 겨울 양식이었다. 결국 머리맡에 그 씨앗을 가져다두고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생쥐 녀석들은 내 방에도 구멍을 내고 기어들어와 내가 잠자는 틈을 타 그 씨앗마저 까먹기도 했다. ‘쥐알봉수’ 같은 녀석들이라는 육두문자가 나오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 생쥐들이 다른 동물들을 불러들였다. 들고양이와 족제비도 소리 없이 기어들고 밤이면 뒤란의 밤나무에 날아와 “우우, 우후후후”하고 음산하게 울어대던 올빼미도 찾아왔다. 생쥐들은 그들의 귀한 먹잇감이었다. 족제비는 출입문이 격자문이었던 그 골방의 창살을 물어뜯고 들어와 진을 치고 살았다. 끝이 실처럼 가늘고 꽈배기처럼 꼬인 족제비의 똥을 꽤 치워내야 했다. 깊은 산속에 들어선 흙집 한 채를 인연으로 인간과 생태계의 여러 존재들이 서로 얽혀 사는 풍경이었다.

이들뿐 아니라 거의 들개가 되다시피 한 아랫마을의 비루먹은 개 한 마리도 자주 들렸고, 고라니와 산토끼, 멧돼지도 집 주변의 버덩과 솔수펑이의 자드락길을 꽤 들락거렸다. 드문 일이었지만 어느 굴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너구리도 배가 고팠던지 기어 나와 집 주변에 발자국을 남겼다. 너구리와 개의 발자국은 매우 닮았지만 너구리의 발자국엔 개와 달리 발톱의 흔적이 선명했다. 고라니의 발자국도 초승달 같은 두 개의 발굽과 넓은 보폭 때문에 곧장 눈에 띄었다. 고라니와 산토끼는 눈 위에 똥들을 남길 때도 많았다. 그 녀석들은 뛰어가면서도 흩뿌리듯 똥을 싸는 녀석들이다. 동글납작한 산토끼의 똥은 거의 예술작품이었다.

수풀 언저리엔 꿩이나 까치 같은 새들의 발자국도 지천이었다. 꿩 발자국은 외줄, 아장아장 걷는 까치는 두 줄이다. 씨앗을 심든 모종을 심든 작물에 따라서는 밭의 이랑이 넓을 경우 두 줄로 심을 때가 있다. 이때 그루 사이를 넓혀주는 효과를 위해 나란히 심지 않고 엇갈리게 심기도 한다. 삼, 사십대쯤 되면 그걸 ‘지그재그’로 심는다고 하고, 그 나이를 좀 지난 사람은 ‘지꾸자꾸’로 심는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노인들은 ‘까치 발자국’처럼 심는다고 비유했다. 그분들은 두 줄로 엇갈려 찍힌 까치 발자국의 그 궤적을 놓치지 않았다.

농사를 짓다보면 야생동물들과 조화롭게 지낸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천오백 평 남짓한 밭에 옥수수를 심었을 때 그 삼분의 일쯤을 멧돼지와 너구리가 망쳐놓기도 했다. 콩 농사도 어렵다. 파종 직후엔 멧비둘기와 까치가 흙을 헤집고 파먹는다. 콩이 자라면 이번엔 산토끼와 고라니가 찾아온다. 녀석들은 콩잎을 워낙 좋아했다. 키가 큰 고라니는 콩의 순과 같은 잎줄기의 윗부분을 뜯어먹고, 키 작은 산토끼는 순 대신 아래쪽 가까운 곳의 잎을 먹어치웠다.

“콩은 소의 침이 묻어야 풍년 든다”는 말이 있다. 콩은 대체로 어느 시점이 되면 순을 질러준다. 웃자람과 쓰러짐을 막고, 곁가지를 많이 치게 해주는 까닭이다. 콩잎을 좋아하는 소의 경우, 콩잎을 뜯어먹어도 대체로 순이 있는 윗부분을 뜯어먹는다. 그러니 순 지르기 효과를 볼 수도 있어 수확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산토끼가 뜯어먹는 것은 순이 아니라 순 아래쪽의 잎들이다. 그 녀석들이 다녀간 콩은 그래서 순만 남은 줄기가 앙상했다. 좋은 결실을 바랄 수도 없었다. 결국 콩 농사를 망친다. 차라리 고라니가 다녀갔을 때는 그래도 수확할 거리가 얼마간은 남아 있는 편이다.

농부가 한 구멍에 콩 세알을 심는 까닭을 옛 선인들은 아름답게 해석해 냈다. 한 알은 날짐승이 먹고, 한 알은 들짐승, 나머지 한 알만 인간의 몫이라고 했다. 인간이 생태계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공생의 당위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하는 고전적인 농사격언이다. 그러나 막상 농사를 망치다 보면 미움도 솟는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도 있다”는 말처럼, 입에 풀칠하기에도 바쁜 처지가 되다보면 베푸는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다. 생태계의 다른 존재들과의 조화나 공생이랄지 그런 인문적인 가치만을 내세우는 것도 어렵더라는 얘기다.

내 옥수수 밭을 거덜 낸 멧돼지는 휘뚜루마뚜루 오지랖도 넓었다. 새끼 두 마리를 달고 와서 이웃집의 고구마 밭도 통째로 거덜 냈다. 그 이웃은 “멧돼지에게 반드시 고구마 값을 받아내겠다”고 벼르기도 했다. 그는 수렵면허를 갖고 있는 엽사였다. 얼마 전, 환경부는 무덤을 훼손하는 멧돼지를 ‘유해조수’로 지정해, 포획을 할 수 있도록 고시했다. 겨울철 멧돼지가 무덤 속에서 서식하는 두더지나 들쥐, 뱀, 땅벌 같은 걸 잡아 먹기 위해 무덤을 파헤치는 사례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산에 올랐다가 만난, 구멍 파인 그 무덤도 그런 경우였다.

언젠가 새들 때문에 콩, 수수와 같은 잡곡 농사를 망친 어느 선배농부가 말했다.

“마음을 달래가면서 사는 거지요. 그래도 다 먹질 않고 남겨둔 것이 있으니 조금은 나를 봐준 셈입니다.”

그분은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 인과(因果)에 대한 통찰이나 연기적(緣起的) 사유가 깊은 분이다. 생태계의 조화와 균형이 깨어지고 먹이사슬이 무너져 내린 마당에서 인간이 책임져야 할 몫을 육화해낸 말처럼 들렸다.

요즘 이 산골에선 두 부류의 폭음이 들려온다. 엽사들의 총구로부터 들려오는 것과 강물의 얼음장이 금 갈 때 들려오는 소리가 그것이다. 강의 얼음장 두께는 한 뼘 길이를 넘는다. 그 폭음은 얼음장이 금 갈 때 그 안에 있던 물이 요동을 치며 내는 소리였다. 정말 폭음이었다. 얼음장 위에 서서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땐 그 소리의 출처를 의심했다. 얼음장 밑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소리는 둔중하지만 힘이 있었다. 물이 줄어 ‘여윈’ 강이 봄을 앞두고 그 몸을 뒤척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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