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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소가, 이 놈의 소가…”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32>

어느 해 늦가을 산이 깊은 곳에서 ‘무소유’를 내세운 생태공동체를 만났다. 씨고구마를 묻어둘 움을 파고 마늘을 심던 무렵이었다. 공동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복원’과 ‘창조’이기도 하고, 미심쩍을 땐 ‘실험’이기도 하다.

그 공동체의 좌장 격인 분과 밀밭을 일궜다. 마을 사람에게 품삯을 주고 트랙터로 밭을 갈았다. 이랑과 골을 만드는 작업은 트랙터 대신 우리가 손수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다소 기이하게 보이는 일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 골을 타는 작업을 ‘손쟁기’라는 걸로 했다. 쟁깃술이라고 부르는 나무에 보습을 끼우고, 그 쟁깃술 밑에 다시 외발 바퀴를 달아 만든 게 ‘손쟁기’였다. 공동체 안에 소가 없기도 했지만, 그 손쟁기는 본래 소가 끄는 쟁기가 아니었다. 누구 한 사람이 그 쟁기에 매단 밧줄을 어깨에 매고 앞에서 소처럼 끌어야 한다. 그날은 내가 소가 됐다. 공동체의 그분은 그 손쟁기를 몰고 가는 쟁기꾼이 됐다.

내가 끙끙거리며 그 쟁기를 끌고 앞으로 나아갈 때 그분은 뒤에서 “이랴!” “저랴!” “워워!”를 외치며, “이놈의 소가, 이놈의 소가…”하며 다그쳤다. “늙은 소는 서툰 농부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때의 형국은 서툰 소를 노회한 농부가 가르치는 격이었다. 소를 찾아 길들이는 선화인 심우도(尋牛圖)의 풍경 같기도 했다. 소는 본래의 마음자리 곧, 본성에 대한 은유이다. 아마 나의 큰 복이었으리라. 그날의 일 때문에 소의 노고를 뼈에 사무치게 알게 됐다. 한 마지기 분량도 채 못 갈았을 때부터 벌써 어깨가 쓰리고 뻐근했다. 숨도 가빴다. 쟁기 자체야 작고 간소한 것이어서 무거울 게 없었지만 보습날 앞에 놓인 흙의 무게를 온몸으로 떠 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니 힘깨나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대목에선가 내가 물었다.

“선생님, 마음 공부를 어떻게 하신가요? 구성원들 모두 참선이나 명상 같은 걸 하십니까?”

“참선이나 명상요? 달리 그런 것은 하지 않아요. 우리는 노동선(勞動禪)입니다. 노동과 마음 공부를 따로 분리하지 않고, 참된 노동이 곧 마음 공부가 될 수 있도록 일상생활 하나 하나를 그렇게 꾸려 갑니다.”

노동선은 내게도 화두이다. 애초에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 나에겐 농사를 짓고 사는 삶과 수행이 일치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다. 중국 당대의 선사인 백장(百丈)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통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와 같은 노동의 전통을 세웠다. 당시의 불교적 관행은 탁발을 통해 먹을 것을 해결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는 농경사회 속에 머무르며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의 체제를 세웠다. 그 노동이 바로 ‘보청(普請)’이었다. 일종의 공동 울력이다. 그 보청이 큰 호소력을 가졌던 것은 농사노동을 종교적 수행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수행은 종전처럼 좌선과 같은 방식으로만 행해진 게 아니라 노동행위를 통해서도 행해졌다. 선사들이 노동현장에서 남긴 선문답들만 해도 부지기수다. 이른 바 선농일치(禪農一致)였다. 이 선농일치는 노동선의 시원이기도 했다. 내가 그분에게 마음 공부에 대해 물었던 까닭은 그분이 농사와 더불어 오랜 세월 명상을 해온 분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보면 수많은 상념이 일어납니다. 노동을 실답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십니까?”

“집중해야지요. 잡념이 일어날수록 일에 집중하려고 애씁니다. 집중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손쟁기질을 끝낸 후 보리수나무의 빨간 열매를 따먹으며 목을 적시던 기억이 지금도 여전하다. 목이 탔었다. 그러나 ‘벌똥나무’나 ‘파리똥나무’라고도 부르는 그 보리수나무에서 ‘보리(菩提)’를 만나진 못했다. 물론 나무 탓을 할 일은 아니었다. 훗날 그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탁월한 덕성과 자기헌신, 지향했던 가치들에 대한 학습능력에도 불구하고 해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근엔 나와 손쟁기질을 함께 했던 그분의 소식도 들었다. 선가에 ‘내려놓아라(放下着)’라는 말이 있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이다. 그분의 고백적인 자기성찰을 들어보니,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겐 ‘내려놓아라’고 주장했지만 자신부터 내려놓는 일에 실패했다고 했다.

무소유는 아름답다. 멀리서 바라보거나 관념이나 추상으로 접근할 땐 더욱 그렇다. 공동체와 같은 공간에서 무소유의 외형은 종종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공동소유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무소유는 본질적으로 제도의 문제가 아니며, 신념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의 문제도 아니다. 무소유는 욕망과 같은 인간 내면의 어떤 근원과 관련된 문제다. 무소유는 욕망 따위를 비워내고 내면의 그 근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하니 구성원들 모두가 치열하게 자기를 비워내는 영성적 힘이 없으면 ‘무소유’ 공동체는 존재하기가 어렵다.

얘기가 다소 옆길로 샜다. ‘선(禪)’이라고 하면 종교적 시각으로 접근하기 쉽지만, 그곳에 달리 특별한 게 없다. 별무기특(別無奇特)이다. 명상과 명상을 통한 존재방식의 총화를 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의 경우 노동선에 관심을 가졌던 까닭은 농사노동으로 살아가는 나의 일상적인 삶이 좀 더 실존적이기를 바라고, 그 삶으로부터 자기소외 따위를 덜 겪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든 호미로 풀을 매든 일을 할 때마다 늘 겪는 것이지만, 무슨 일이든 집중해서 바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일을 할 때 일어나는 무수한 상념들을 보라. 때로는 욕망과 미움, 분노, 자책 따위로 마음속은 범벅이다. 심한 경우 ‘악마구리’ 끓듯 한다. 어떤 시공간에서 한 인간이 무슨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는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행위이다. 그 행위에는 존엄성이 넘친다. 그러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함으로써 대부분의 인간은 그 순간의 자신의 삶에 스스로 모욕을 가한다. 그런 삶은 매우 비실존적이고 자기소외적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처럼 자신과 호미와 풀을 매는 행위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완전하게 존재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실존’은 때로 개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선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각적인 존재방식이다. 그러나 망상이나 잡념이라고 부르는 그런 상념들에 끌려 다닐 때 몸은 습관처럼 풀을 매고 있지만, 마음은 풀을 매고 있지 못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선의 3대 테제는 ‘지금’ ‘여기’ ‘자기’이다. 그러나 그 ‘자기’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어디론가 구만리 장천을 달린다. 여기서 자기소외가 발생한다. 그만 주체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존재방식은 참으로 비실존적이기도 하다. 그런 삶을 벗어나기 위해 내가 공부한 게 명상이었다. 이를테면 노동선이다.

노동선은 특별한 방식의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외려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그곳에서 만난다. 노동이라고 하는 것만 해도, 굳이 농사노동과 같은 것으로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 밥을 짓고, 먹고, 똥을 누는 일부터 마당을 쓰는 일 모두가 노동이다. 의지를 갖고 행하는 모든 행위를 노동이라고 한다면, 심지어는 아무 행위 없이 그냥 앉아 있는 것도 노동의 한 유형이다. 결국 노동이란 어떤 시공간에서의 자신의 존재양식에 대한 통칭이라 할 만하다.

인도 출신의 녹색운동가인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가 암소의 젖을 짜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그는 완전히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일상적인 활동에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명상이 그 방법이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 하나 하나에 마음을 다하여 몰입하면 그게 바로 명상이라고 했다.

“나는 라드하와 아침마다 명상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아침 일찍 마음을 다하여 라드하의 젖을 짜는 것이 바로 나의 명상이었습니다. 젖을 짜기 시작하면 모든 생각이 멈춰 버립니다. 과거에 대한 추억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모두 정지해 버립니다. 그 순간만은 오로지 라드하만을 생각하며, 라드하의 숨소리와 나의 호흡 그리고 젖이 양동이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내 온몸은 편안해지고, 나는 끝없는 법열의 경지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티쉬 쿠마르>, 한민사)

라드하는 그가 기르던 젖소의 이름이었다. 사티쉬 쿠마르는 인도의 전통 종교인 자이나교(Jaina敎)의 승려를 지낸 적이 있는 내력 때문에 명상에는 익숙할 법도 했다. 젖을 짜는 그 순간 그는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다. 라드하와 그의 숨소리, 젖이 떨어지는 소리와 사티쉬 쿠마르 자신 모두가 완전히 일체가 된 모습이다.

누비장 분야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한 여성의 말도 사티쉬 쿠마르의 말과 다름이 없었다.

“누비옷을 만드는 과정이 나를 매료시켰어요. 처음부터 같은 간격으로 바느질을 해야 하는데, 번뇌망상이 안 떠오를 리 없죠. 자기 안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똑같은 작업을 하루 종일 집중해서 하다 보면 나중엔 내면이 고요해져요. 한 땀 한 땀이 바로 자기를 다스리는 길인 거지요.”

누비장 여성은 명상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누비질을 통해 명상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주었다. 법(法)은 도처에 있었다. 그러나 온전히 존재하거나 내적인 평화를 만날 수 있을 만큼 집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행일사(一行一思)’, 어떤 행위를 할 때는 오로지 그 일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일행다사(一行多思)’이다. 그 일과는 무관한 수많은 상념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져간다. 내 자신부터도 그러하고, 품앗이를 오가며 지켜본 이웃들, 농사 지을 꿈을 갖고 찾아와 체험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명색이 이렇게 살다보니 생태적 가치랄지 명상이나 영성 따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난다. 그러나 함께 밥을 먹든 술을 먹든 내가 지켜본 그들 역시 온전하게 존재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었다. 비오는 날 버스나 전철을 탔다가 우산을 놓고 내린 경험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몇 번쯤은 그런 일이 있을 법하다. 흔히 ‘건망증’이라고 그저 치부해버리는 그런 일은 사실 어떤 순간에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산을 선반에 놓을 땐 온 마음을 집중해서 그 행위를 해야 한다. 눈으로 우산 놓을 자리를 살피고, 그곳에 손으로 우산을 놓아두는 행위 하나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산을 놓는 일과는 무관한 상념 속에서 그런 행위들을 대충 하는 게 상례다. 그것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다. 거기에는 비실존적이며 자기소외적인 삶이 숨어있다.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한 행위는 다음에 온전하게 기억을 살려내지 못하기 마련이다. 우산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미 자신을 떠나버렸다.

요즘은 명상 언어도 상품화했다. 유행도 탄다. 대표적인 게 바로 ‘있는 그대로’란 말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도처에서 들려온다. 한문으로는 ‘여실(如實)’로, 영문으로는 ‘애즈 잇 이즈(As it is)’로 번역되는 이 말은 기실 명상이 지향하는 궁극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모두 자기 나름의 프리즘이 있다. 그것은 신념이나 가치관이기도 하고 세계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사물을 본다. 어떤 이는 빨갛게 보고, 어떤 이는 노랗게 또는 파랗게 본다. 어떤 이는 시(是)를 보고, 어떤 이는 비(非)를 본다. 어떤 이는 선(善)을 보고, 어떤 이는 악(惡)을 본다. 대부분 허상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래 실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행위는 직관의 영역에 속한다. 그와 같은 직관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력한 방법이 바로 명상이다. 사물의 허상이 아닌 실상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명상은 신비주의가 아닌 리얼리즘이기도 하다. 내가 명상과 노동선에 관심을 갖고 있는 까닭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소망에 다름 아니다.

사티쉬 쿠마르가 젖을 짜는 일을 통해 보여준 깊은 집중과 ‘물아일체’의 모습은 사실 ‘있는 그대로’와도 깊이 닿아 있다. 자신과 젖소, 젖 짜는 일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가능했다. “그 순간만은 오로지 라드하만을 생각하며, 라드하의 숨소리와 나의 호흡 그리고 젖이 양동이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조화와 평화, 온전한 방식의 삶이 엿보인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 생태공동체에서 손쟁기질을 할 때, 나는 소의 노고는 알게 됐지만 소 자체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소가 되어 하는 일과 내 자신 사이에는 분리가 있었다. 쟁기꾼으로부터 “이 놈의 소가, 이 놈의 소가…”라고 타박을 들을 만도 했다.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이래 ‘작은 것’이 유행을 탔고, 피에르 쌍소 등이 ‘느림’을 이야기 한 이래 ‘느림’도 그러했다. 그런가 하면 ‘문을 열고 낮은 곳으로 흘러라(開門流下)’와 같은 ‘낮음’도, ‘단순함’과 ‘간소함’도 자연주의적 삶이나 참살이 따위를 해명해주는 주요 언어가 됐다. 아름다운 말들이다. 명상의 외연을 풍부하게 해준다. 주변을 보면 이런 언어들을 천둥벌거숭이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잖다. 그러나 이 같은 언어들 속에 담긴 삶들은 단순히 신념이나 가치관으로만 접근해선 그 참뜻을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과 정화가 없으면 그 실천이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명상이 유력한 방법론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명상은 개혁을 넘어서서 혁명이 될 수도 있다. 명상은 항상 우리의 지식체계와 같은 틀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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