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수상한 탓일까. 저무는 한 해를 바라보는 마음도 새해를 맞는 마음도 편치가 않다. 이른 아침에 하늘을 살펴보니 ‘쨍’하고 금이 갈 듯한 그 푸른 동천(冬天)에 보름을 며칠 지난 이지러진 달이 은화처럼 달랑 박혀 있었다. 달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그런 생물이 아니었다. 정물이었다. 밤새 불던 그 바람도 없었다. 억새나 갈대 같은 풀도 이 산 저 산의 나무들도, 그 ‘서 있는 놈’들 누구 하나 몸을 흔들지 않았다. 산골의 아침은 숨막힐 듯이 고요했다. 기온은 벌써 여러 날 째 영하 15도를 밑돈다. 눈도 내리지 않는 마른 추위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 묵내기 화투를 치고 /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 펑펑 쏟아지는데 (중략)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 하얗구나.”(신경림의 <겨울밤>에서)
신경림 시인이 <겨울밤>을 썼던 게 60년대 중반이었던가. 이 시는 본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며 농민들의 고달픈 삶을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경제개발의 와중에서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기 직전의 마지막 풍경 같은 것도 담고 있다. 방앗간이나 닷새장과 같은 공동체적인 공간이 존재하고, 보리밭도 한겨울이면 만날 수 있는 들녘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신랑 다루기’와 같이 신부집 사람들이 벌이는 혼례문화도 여전했었다. 적막강산. 요즘 이런 산골의 겨울은 그렇다. 읍내 나가는 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다 보면 동남아에서 온 여성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아랫마을 노총각들에게 시집온 베트남 여성들이다. 다룰 ‘신랑’도 드물지만, 그 여성들을 신부로 맞은 신랑은 또 누가 다룰 수 있을까.
지난 세밑엔 마을에서 대동회가 열렸다. 마을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한해 살림살이를 결산하고, 새해의 대소사에 대한 밑그림도 그려보는 자리다. 메밀 부침개와 삶은 돼지고기에 술도 몇 순 배 돌긴 했다. 그러나 오고가는 입담들은 쌀랑쌀랑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의 먹고사는 처지가 워낙 힘에 겨운 탓이었을까. 예전엔 대동회를 두고 ‘유물회(有物會)’라 부르는 마을도 있었다. 사물놀이 같은 풍물이 있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농가들은 풍물을 칠 만큼 그렇게 신명을 낼 만한 형편이 아니다. 그나마 몇몇이 소리 내어 웃었던 것은 약초원 어르신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강 건너 사시는 그분은 대동회에 참석하겠다고 ‘줄배’를 타고 건너왔다. 그 배는 나룻배이긴 하지만 노를 젓는 배가 아니었다. 이 쪽 언덕과 저 쪽 언덕사이에 매달아 놓은 길다란 밧줄을 붙잡고 배를 전진시켜 오고간다. 그래서 ‘줄배’다. 정선의 아우라지강을 건너는 배도 바로 이런 ‘줄배’다. 그런데 날이 춥다보니 얼음이 얼고, 그 얼음 때문에 그만 배가 묶이고 말았다. 그러나 얼음은 그 두께가 얇았던 모양이다. 그 어르신은 고심 끝에 얼음을 몽둥이로 깨어가며 뱃길을 만들어 건너왔다고 했다. 강변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나루터는 불교적 세계관의 상징처럼도 보였다. 이쪽 언덕인 ‘차안(此岸)’과 저쪽 언덕인 ‘피안(彼岸)’이 있고, 그 두 개의 언덕 사이에 가로놓인 강과 그 강을 건너는 수단인 ‘줄배’가 있다. ‘차안’과 ‘피안’이 본래는 모두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나루터는 그 상징의 외연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그 얼어붙은 강을 보다가, 강이 그만 그 아름다운 상징을 잃고 말았다고 생각했었다. 약초원 어르신은 내게 술 한 잔 하자며 하루 날 잡아 건너오라고 한다. “닭도 한 마리 잡겠소.” 내가 이 겨울 과연 피안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을까.
어느 바라문이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물었다.
“차안과 피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목숨을 해치는 것이 차안이요,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은 피안이다.”
나는 약초원 어르신의 초대를 생각할 때마다 <잡아함경>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생각하며 홀로 실소를 짓고 있다. 내가 그 강을 건너가면 닭 한 마리가 죽는다.
<겨울밤>에 나오는 그 보리밭은 있는 것일까. 마침 대동회에 나온 김씨네가 보리밭을 일구었다고 했다. 게으른 사람은 메밀을 해먹고, 손 없는 사람은 보리를 해먹는다며 자조 섞인 푸념을 했다. 그는 농사를 일상적으로 챙기기 어려운 중장비 기사였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산골에서 보리밭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드물다. 며칠 미루다가 마음을 내서 그 보리밭을 찾았다. 겨울을 나는 풀들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그 풀들을 볼 때마다 인고와 기다림, 생명력 같은 걸 느낀다. 어느 때인가 월동하는 두해살이풀들에 대한 헌사를 쓰려니 하다가 못쓰고 있다. 보리는 밀과 함께 인간이 기르는 두해살이풀이다. 밭을 보니 까칠까칠했다. 추위에 몹시 시달린 기색이다. 파종을 늦게 한 탓일까. 잎을 달고 있는 모습도 부실했다. 대체로 대여섯 잎은 달고 있어야 겨울을 무난하게 난다. 너무 어리면 얼어죽기 때문이다. 날씨가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는 보리 파종시기를 두고 “입동 전 보리씨에 흙먼지만 날려주소”라고 말한다. 늦어도 입동 무렵인 11월 5일까지만 보리씨를 파종하면 되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운 이곳 산골에선 “보리농사는 장땡농사”다. 추위가 빨리 오는 탓으로 늦어도 10월 10일경까지는 파종을 해야 한다. 그래야 겨울을 날 만큼 자란다.
김씨네 집 보리가 까칠까칠 한 데는 눈이 내리지 않는 마른 추위에도 그 까닭이 있는 것 같다. 대지가 눈에 덮여 있으면 그 눈 밑에서 월동하는 풀들은 얼어죽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눈이 이불 같은 몫을 한다. 보온작용이다. “찬바람에 죽은 보리 폭설에 살아난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산골의 동지섣달은 산야가 노상 눈에 덮여 있을 때다. 요즘처럼 마른 추위가 이어지는 경우도 흔치 않다.
보릿국 생각이 났다. 배게 난 곳에서 몇 뿌리를 캤다. 보릿국은 향도 맛도 특별하지는 않다. 다만 겨울을 겪어내는 그 경이로운 생명의 기운을 만나는 느낌이 좋고, 한겨울에 맡는 그 풋내가 일품이다. 오래 전 흑산도에서 해안 초소 생활을 할 때 동료들에게 손수 보릿국을 끓여 준 적이 있었다. 충청도 출신의 한 동료는 그 국에서 소 여물 냄새가 난다고 먹지 않았다. 흙과 함께 딸려 나온 뿌리를 보니 뿌리 사이사이로 하얗게 낀 얼음이 보였다. 보리는 그렇게 언 흙 속에서 겨울을 난다. 김장김치 한 포기를 썰고, 동치미에 김도 몇 장 굽고 거기에 보릿국을 얹어 놓으면 세상 어느 성찬이 이보다 더 할까 싶다.
‘문둥이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의 <보리 피리>는 얼마나 서정적이었는가. “보리 피리 불며 / 봄 언덕 고향 그리워 / 피-ㄹ 늴리리 // 보리 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ㄹ 늴리리” 그러나 우리의 전통에서 보리는 대체로 가난과 열등성의 상징이었다. 예전에 내가 살던 지방에선 정미소를 꾸려 부를 축적한 정치인 김아무개씨가 ‘쌀아무개’로 불렸었고, 국회의원선거에서 그와 경쟁했던 동명이인의 한 가난한 후보는 자신을 ‘보리아무개’로 자처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가하면 어리무던하게 생긴 사람을 조롱하는 뜻으로 ‘보리동지’라는 말도 쓴다. 법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노는 윷은 또 보리윷이라 했다. 보리는 그런 대접을 받았다. 세상이 달라진 것인가. 그 보리가 지금에 와선 향수의 상징도 됐다. 요즘 보리밥은 향수음식이기도 하고 건강음식이기도 하다. 보리밭은 또 도시인들을 상대로 문화상품이나 관광상품으로도 팔린다. ‘보리밭 축제’를 내걸고 보리밥 먹기, 보리피리 불기 같은 행사도 갖는다. 가곡 <보리밭>의 노랫말에 빗댄 ‘보리밭 사잇길 걷기’ 같은 프로그램도 있다. 어떤 곳에선 보리밭에서 시 낭송회도 연다.
도시인들의 감성이야 그렇다 치고 농민들 사이에선 보리 심는 사람은 ‘보리동지’로 보이기 십상이다. 들고 난 것을 셈해 보면 워낙 수익이 낮은 까닭이다. 겨울 들녘이 대체로 거의 비어 있는 것도 이런 내력 때문이다. 그 들녘을 예전엔 보리와 밀이 채웠었다. 지난 해 여름 남부의 한 보리 생산 농가들이 ‘보리 적재 투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150여 농가들이 보리 3천여 가마를 시청 앞에 쌓아 놓았다. 농민들은 당국에게 이 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헐값인 보리가 수매마저 채 안 됐기 때문이었다. 식량자급도가 30%도 채 미치지 못하는 이 땅에서 보리는 여전히 옛날의 그 보리대접을 받고 있다.
읍내 장날에 나가 끼니 때울 일이 있을 땐 막국수 한 그릇이면 족했다. 그러던 게 얼마 전 보리밥집이 한 군데 들어섰다. 반가웠다. 비빔밥의 나물을 보니 취나물류에다가 곤드레까지 꽤 맛깔스러웠다. 주인에게 보리장사가 잘 될 듯 싶다고 했더니 “메밀만큼이야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는 평창 봉평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선 그 메밀을 소재로 한 음식이 제법 호가 나 있다. 메밀 부침개부터 메밀 전병, 막국수 따위가 곧잘 팔린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 다시 들렸을 땐 보리밥집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보리가 설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동지가 지난 이후 해가 짧아졌다. 달포쯤 지나면 또 우수 경칩이다. 그 무렵이면 보리밟기를 할 때다. 농부들은 보리밭으로 나서서 겨우내 서릿발이 서거나 얼어서 부풀어 오른 땅을 밟는다. 보리가 대지 속에 깊이 뿌리 내리는 걸 돕기 위해서다. <겨울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 보리밭을 질러’가도 밭 주인이 탓하지 않는다. 외려 보리를 밟아주면 ‘술이 석 잔’이다. 이 보리 밟기는 삼월 삼짇날 무렵의 그 ‘답청(踏靑)’과는 다르다. 답청은 꽃놀이를 나가거나 봄나물을 캘 때 들녘의 풀들을 밟게 되는 걸 표현한 말로 노동행위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보리밟기는 인간이 보리와 대단히 인문적으로 만나는 형식이라 할 만하다. 인간이 보리에게 겨우내 잘 살았는지 안부를 묻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실어 그를 밟아준다. 한겨울 산골의 들녘을 모두 둘러보아도 풋것이 있는 곳은 보리밭 하나뿐. 그 밭에 들렸다가 풋것을 둘러보고 몇 뿌리를 캐 나오는 길에 문득 뒤돌아보니 그곳에서 무수한 생명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저 생명들이 희망일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엊저녁 읍내 다녀오는 밤길에 마을사람 한 분을 만나 그의 차를 탔다. 농사는 텃밭농사 정도만 짓고, 지하수 관정을 하는 게 본업인 분이다. 이렇게 땅이 얼었는데도 일감이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발로 딛고 사는 땅이야 꽁꽁 얼었지만, 그래도 땅속의 물이야 주야장천 흐르지 않겠수? 지하 깊은 곳을 흘려서 생명력이 강한 수맥을 찾는 게 문제이지.” 거참, 수맥을 찾는 일에도 세상사의 이치가 들어 있었다. 내심으로 그럴듯한 말이라고 감탄했다. 이 동지섣달에도 그의 얘기처럼 어디선가 물이 흐르고 있긴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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