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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41ㆍ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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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41ㆍ끝>

연재를 마치며

***Ⅰ**

이제 ‘삼국지 바로읽기’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연재가 끝이 나서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에 쫓겨 충분히 준비를 못하여 제대로 된 ‘삼국지’ 해석을 보여주지 못하여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삼국지 바로읽기’를 연재한 지난 10개월간은 길다면 긴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연재물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재물이 두 세 번이 나가자 강호제현(江湖諸賢)의 질정(叱正)이 끝없이 이어지고 마치 동양학(東洋學)의 사랑(舍廊 : 사랑방)과 같이 되어 연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는 바는 부족하고 들은 것도 모자라는데다 한문 실력도 형편이 없어 제현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어서 항상 송구스러웠습니다.

‘삼국지’ 해석은 정말 우연히 하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 여름 가까운 친구가 ‘삼국지’에 대한 해석을 부탁하였는데 처음에는 시큰둥했습니다. 요즘같이 놀이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누가 ‘삼국지’를 보겠는가 생각했지요. 그러나 친구의 끈질긴 요청으로 ‘삼국지’가 과연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를 고민하는 중 어느 날 청계천의 중고서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책과는 달리 ‘삼국지’는 없어서 못 판다는 것이 서점 주인의 말이었지요. 그리고 ‘삼국지’ 시장이 충격적일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모 작가의 ‘삼국지’는 무려 1천5백 만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국지’는 어린이용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1백여 종은 된다고 하니 대충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우리나라 가정에 ‘삼국지’가 없는 집이 거의 없는 셈이지요. 그러면 ‘삼국지’는 단순히 이야기책이 아니라 일종의 국민 교과서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부터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삼국지’란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고, 교조적(敎條的)이고, 편협한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씌어진 책인데 이 책을 국민 교과서처럼 읽고 있다니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상한 교조적 중화주의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문제지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천년의 고전, ‘삼국지’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삼국지’는 성경과 불경보다도 더 많이 읽힌 책입니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 안에 담긴 많은 고사(故事)들은 역사 공부뿐만 아니라 국어·한문 등 여러 가지 분야의 학습에도 도움이 되므로 학생들에게 매우 유용한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삼국지’는 상당히 위험한 책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나관중 ‘삼국지’가 가지는 몇 가지의 효용성(效用性) 때문에 우리 생각 전체가 오염되는 일을 경계해야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면, 마크 트웨인의 ‘톰소여의 모험’이 아무리 재미있고 훌륭한 동화(童話)라고 해도 도처에 ‘깜둥이’라는 말이 나온다면 흑인의 입장에서는 권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시작된 ‘삼국지’ 연구는 관련 서적들을 보면서 더욱 우려하게 되었습니다.‘삼국지’에 나타나는 주제들은 대부분이 사회과학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자들이 사회과학적인 인식으로 접근하지는 않고 단순히 충효(忠孝)니, 춘추사관(春秋史觀)이니, 대의명분(大義名分)이니 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놀라게 되었습니다. ‘삼국지’는 현실 정치에도 많이 응용되는 책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이런 단순논리로 남북한의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더욱 곤란한 문제겠죠.

과거 1985년을 전후로 저는 당시 대학 내에서 많이 논의되는 (다소 감상적인) ‘통일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 통일에 따른 비용문제와 경제구조의 문제, 이념 갈등 및 민족분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가 회색분자로 몰려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습니다(이 내용은 졸저 ‘역사변동에 대한 일반이론’에 일부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 대학은 계급투쟁이 극심하고 소위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학생(주사파)들이 학교를 점거한 상태였는데, 후배들이 제게 몸조심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제 말은 5~7년이 지난 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서야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현상에 대하여 지나치게 단순한 한, 두 개의 이론으로 접근하다보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대학의 연구실일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실제의 정치현장에서 단순 논리로 접근하게 되면 상당한 파국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삼국지’를 사회과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삼국지’는 인문과학적인 시각만으로 분석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문사회과학적 현상들은 과거의 사건들도 역사적 현재로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도 비슷한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삼국지’의 연구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연구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말썽이 되는 중국의 동북프로젝트(동북공정 : 쥬신 역사 말살정책)나 대중화주의 건설이라는 중국 정부의 정책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특히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비하가 우려의 수준을 넘어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삼국지’ 연구와 더불어 그 시대의 우리 역사도 같이 묶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삼국지’ 연구에 우리의 뿌리인 쥬신족에 대한 연구를 동시에 진행한 이유입니다.

‘삼국지’를 읽을 때 무엇을 바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40회 이상의 강좌를 통하여 충분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나관중 ‘삼국지’를 읽을 때 제가 제시해드린 부분들을 고려하고 읽으시면 ‘삼국지’의 실체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우리의 뿌리를 찾는 작업들도 동시에 진행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하여 더욱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설령 우리에게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과거를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랑할 만한 과거의 역사가 있었다면 그것을 일부러 피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하여 제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풀어낸 느낌입니다. 마치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달리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가다가 어느 주막에 들러서 이야기 한 보따리를 펼쳐 놓은 기분이 들어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사실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부분은 고대사(古代史)나 한문(漢文)을 전공하시는 분이 나서야 될 일입니다. 저 같은 경제학자가 나설 일은 아니지요.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듯이 우리나라에서도 한문의 대가들을 초빙하여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북사(北史)·요사(遼史)·금사(金史)·몽골비사·청사(淸史) 등의 번역을 서둘러야 합니다. 더 이상 미루게 되면 그 같은 책들을 번역할 수 있는 분들이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뿌리는 더욱더 역사의 미궁(迷宮)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외람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고교 이후 긴 세월을 오직 ‘한국(Korea)’, ‘한국인(Korean)’, 그리고 ‘죽음(death)’이라는 주제를 화두(話頭)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교수로서 한 가지 학문에 정진하여 그 분야에 큰 업적을 내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하게 된 것도 모두 이 화두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세월, 세 가지 문제에 천착(穿鑿)해 왔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한가?”였습니다.

그런 연구들을 하면서 저는 한반도를 생각했습니다. 이 한반도는 세상 대부분의 문제가 섞여있는 ‘미지의 상자’였습니다. 동양학-서양학의 교차, 종교의 용광로, 자본주의-사회주의, 독재-민주, 전체주의-자유주의, 인터넷의 테스트베드, 세계IT 정책의 캐스팅보드, 세계 최고의 인터넷공화국,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교차점, 빈곤-경제적 성공의 가능성, 과거와 미래의 퓨전(fusion)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등 세계의 문제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한반도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스스로 한(恨)에 사무친 민족이라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잠시 머무를 때, 외국인 친구들에게 떠밀려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생각나는 노래가 없어 ‘아리랑’을 불렀더니 외국인 친구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서러움이 배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흔히 한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못 사는 나라였다고들 합니다. 1970년대 말 고교 시절 저는 필리핀(Philippines)과 태국(Thailand)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기나긴 한(恨)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도 과연 ‘영광’의 날들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항상 했습니다.

1980년대 기나긴 가난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 헤쳐 나오자 우리나라에도 이제 국풍(國風) 불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이전이 서풍(西風 : 서양바람)이었다면 70년대는 동풍(東風 : 중국 바람)이 불었었지요. 그런데 당시의 국풍은 다소 편협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제가 우리의 뿌리에 대해 집착하게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아마 저의 전공인 ‘인터넷비즈니스와 디지털 경제(Internet Business & Digital Economy)’를 연재했더라도 무슨 꼬투리든 잡아서 쥬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Ⅱ**

‘삼국지’는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달리 실제의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일생 전체를 동시에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처세서(處世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나오기 때문에 응용하기에 좋은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시대는 수많은 영웅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영광이 다만 책 속에 잠들어 있음을 때로 아쉬워합니다. 그들 영웅들의 투쟁과 희로애락을 보면서 그들의 가슴에 사무치는 충성과 애국심, 후세의 명성에 연연해하는 모습들에 감동했고, 그리고 끝을 모르는 추락과 절망을 보면서 저는 애독했던 월터 호레이쇼 페이터(Walter Horatio Pater : 1839~1894)의 ‘쾌락주의자 메어리어스(Marius the Epicurean, 1885)’를 생각합니다. 월터 호레이쇼 페이터의 입을 빌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말합니다.

“As words once in use are antiquated to us, so is it with the names that were once on all men's lips : Camillus, Volesus, Leonnatus : then, in a little while, Scipio and Cato, and then Augustus, and then Hadrian, and then Antoninus Pius. How many great physicians who lifted wise brows at other men's sick-beds, have sickened and died ! Those wise Chaldeans, who foretold, as a great matter, another man's last hour, have themselves been taken by surprise.”

[한 때 통용되던 단어들이 사어(死語)가 되어 사멸해가는 것처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던 이름들, 예컨대 멀리는 카밀루스·볼레수스·레오나투스, 조금 내려오면 스키피오와 카토, 가까이는 아우구스투스·안토니우스 피우스 등 이런 위인들의 이름들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간다. 근심스러운 얼굴로 병든 다른 사람들의 병상을 지키며 그들의 치료로 명성을 날리던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그 자신 병들어 죽어갔는가? 타인들의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임종 시간까지도 예언하던 저 칼데아의 점쟁이들도 그 자신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먼 길을 떠나고 말지 않았는가?]

“Aye! and all those others, in their pleasant places : those who doated on a Capreæ like Tiberius, on thief gardens, on the baths : Pythagoras and Socrates, who reasoned so closely upon immortality : Alexander, who used the lives of others as though his own should last for ever - he and his mule - driver alike now! - one upon another. … The watchers over Hadrian's dust have slipped from his sepulcher. - It were jesting to stay longer. Did they sit there still, would the dead feel it ? … This too is but the breath of the tomb, and a skinful of dead men's blood”

[삶의 즐거움에 겨운 모든 다른 사람들, 티베리우스와 같이 카프리섬의 아름다운 정원과 온천에 흠뻑 빠졌던 사람들, 진리의 불멸성에 대하여 그렇게 치열하게 논증하던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라스, 그리고 마치 자신은 영원히 살 것처럼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유린하던 알렉산더, 지금 알렉산더 대왕(大王)과 그의 마부(馬夫)가 다를 것이 무어 있는가? 이들 모두 차례대로 이승의 삶을 마감하지 않았는가? … 하드리안(로마황제)의 묘지기도 이미 사라져 버렸다.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설령 그들이 아직도 살아서 그 군왕들의 묘를 지킨다한들 죽은 군왕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 이 또한 무덤의 생명이요, 사자의 피를 담은 가죽부대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영웅들의 이야기들은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인간사(人間事)의 무상(無常)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그들의 전진(戰塵)의 자취, 그들의 분노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이야기들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우리는 더욱 허무감만 쌓이게 되는 것이죠[色卽是空]. 그러나 그들 영웅들이나 제왕, 그리고 범부(凡夫)들의 고민은 아직도 끝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요. 현실은 언제나 칼날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空卽是色].

돌이켜보면 우리 삶이 지금 여기서 다한들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삼국지’는 보여줍니다. 우리가 ‘삼국지’에 열광하는 것은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딘가 기대고 싶은 우리 마음속의 깊은 욕구를 분출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슬프지만 우리의 삶은 냉정한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Ⅲ**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는 때로 사람들이 신(神)으로 믿는 존재조차도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우리를 평가할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별로 다르지 않는 사상과 종교를 가진 집단간의 싸움으로 세상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독재자(獨裁者)들이 오직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볼모로 삼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제갈량과 같은 공평무사한 정치가와 유비같이 후덕한 군주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 오이디푸스는 현대의 군주(君主)나 사가(史家)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잘 아시겠지만 소포클레스의 최대 걸작인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자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神託)을 받았기 때문에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자기의 뿌리를 찾아 헤매던 오이디푸스는 무례한 귀족 노인의 무리를 죽이고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내는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여왕과 결혼하여 왕이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그 여왕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지 모르고 아내로 삼습니다. 그 후 테베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돌게 되고 당시의 예언자는 그 원인이 “왕가의 불륜(不倫 :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사는 사람)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태를 짐작한 왕비는 자신의 아들이자 남편인 오이디푸스에게 왕가의 비밀을 추궁하는 것을 극구 말립니다. 그 진실이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비록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끝까지 역사의 진실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한이 있어도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정신과 진실과 진리를 찾아가는 정신, 그것이 오이디푸스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든 것이지요.

때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이 같은 고결한 정신적 자세와 영혼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실체(historic reality)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죠. 사실 신성(神聖)에 도달한 인간(人間)이 위대한 것이지 사람이 창조(創造)한 신(神)이 위대한 것은 아니지요.

말이 길었습니다. 지난 10개월 간 ‘삼국지 바로 읽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게 용기를 북돋워주신 많은 분들께 고마운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 글에 대하여 매서운 질정을 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 능력의 부족으로 그 분들의 생각들을 제대로 반영해드리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그 동안 수고해 주신 프레시안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어떤 주제를 두고 여러분을 뵙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란을 통하여 저는 참으로 많은 분을 뵙게 되어 큰 행운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성공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004년 10월 18일

淸鏡 金 雲 會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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