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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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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40>

병력 인플레이션과 팔진도

***들어가는 글**

나관중 '삼국지'를 보다가 조선시대 말기를 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돕는답시고 겨우 3천명을 보내고, 우리의 신식군(新式軍)인 별기군(別技軍)은 겨우 수 백 명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이 정도의 병력들이라면 관우(關羽) 하나도 상대할 수준이 안 됩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보면 관우 하나를 잡으려고 모이는 병력이 거의 5백 명에서 1천명 수준이니까 말이지요.

[그림①] 별기군의 모습

나관중 '삼국지'에 보면 병력은 기본이 2만이요, 조금 모였다 싶으면 십만 대군이요, 전쟁이라고 하면 으레 백만 대군입니다. 1800년 전에 백만 대군을 모을 수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고도 남을 수준입니다. 그러나 사실로 보기는 좀 어려울 듯 합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가 1백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하(南下)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단기적으로는 성인이 된 모든 사내들이 징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든 사내들이 전쟁터로 가버리면 국가경제(國家經濟)도 마비됩니다. 문제는 전쟁이라는 것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장성한 남자들을 모두 동원해버리면 결국은 그 전쟁 자체를 수행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해를 거듭하는 장기전(長期戰)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1) 십만 군대를 동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보기에 '삼국지' 시대에는 오랜 전란으로 말미암아 경제 전체가 피폐해서 십만 대군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쟁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수십 억 짜리 탱크가 5분도 안되어 고철 덩어리가 되지 않습니까?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돈 문제로 직결되는 것이지요. 전쟁이 나면 인플레이션도 심해져 경우에 따라서는 1천 % 인플레이션이 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래서 한 수레의 돈을 싣고 가서 양말 두 켤레를 사오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전쟁을 하기 위해 사람만 십만을 동원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을 전쟁에 투입할 경우 의복이나 식량, 그리고 개인용 전투 장비 등의 각종 군수품(軍需品)의 보급 문제가 복잡하게 대두됩니다.

가령 10만 명의 병력이 1개월 동안 전투를 치른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록에 따라 1인당 통상 700g의 식량을 소비한다고 하면, 10만 명이 1개월 동안 먹는 식량은 8만 8천석(가마)이 필요하게 됩니다[계산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즉 1되 = 1승 = 160g(10승 = 1두)이므로 700g = 4.4승(병사 1인 1일 식량 소비량), 4.4×30 = 132승 = 13.2두 = 0.88석(병사 1인 1개월 식량 소비량), 왜냐하면 통상 15~20두 = 1석(가마)인데 만약 1석 = 15두라고 계산하면 이상과 같음. 따라서 10만 명의 식량은 0.88×10만으로 계산한 것임].

쌀가마니(1석 가마니)가 가로 100cm(1m), 세로 80cm(0.8m), 높이는 20cm (0.2m) 정도 된다고 보면 1천 가마니를 가로 50개, 세로 20개로 하여 1천 가마니를 펼쳐놓으면 가로는 50m, 세로는 16m, 높이는 20cm(1층만 쌓은 경우)가 됩니다[가마니의 크기는 조금 차이가 날 수 있는데 최소로 잡은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가로 1.7m 세로 0.88m 크기의 가마니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8만 8천가마가 되려면 이것을 88회 높이로 쌓아야 하므로 높이는 20m 정도가 됩니다(아파트의 경우, 대개 1층의 높이는 2.6~2.8m). 그러면 가로 50m, 세로 16m 높이 20m 가 됩니다. 이것은 7층짜리 대형 빌딩을 쌀가마니로 쌓는 것과 유사합니다. 여기에 병사 5십 명 당 무쇠 솥을 1개씩 있다고 하면 거의 2천 개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다 부식(반찬)까지 합친다면 그 크기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말먹이 풀도 같이 계산해야 합니다. 요즘 말이 하루에 먹는 식량은 대개 600~700g 정도라고 하는데 (기병대의 말과 운반용 수레의 말을 포함하여) 말이 1만 필 동원되었다고 한다면 하루에 말의 식량은 6~7톤이 소요됩니다. 그러면 전쟁 기간이 1개월을 초과한다면 180톤~210톤의 말먹이 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식량(말과 사람)은 아무데나 쌓아둘 수 없습니다. 비를 맞아도 안 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 식량들이 들어갈 창고를 대충 가건물(假建物)처럼 지어야 합니다. 창고는 식량의 크기보다는 최소 1.5배 정도는 커야 합니다. 아니면 이것들을 보관할만한 텐트(tent) 수백 채를 지어야 합니다.

또 운반용 수레는 어떻게 될까요? 만약 한 수레에 10가마를 실으면 8천 8백대의 수레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열흘을 기준으로 순번제로 돌린다 해도 880대의 수레가 필요하게 됩니다. 특히 적벽대전과 같이 먼 곳으로 가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 수레를 열흘마다 순번대로 돌리기가 어려우니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한번 가면 다시 왔다 갔다 할 수 없으니 8천대에 가까운 수레가 이동해야 될지도 모르고 수레 하나에 말이 하나 있어야 하면 전쟁에서 사용해야할 말을 거의 8천 마리를 동원해야 하고 수레 하나에 병사들이 1~2명이 있어야 하면 거의 1만 5천~2만 명의 병사들이 보급부대(병참부대)로 편성되어야 합니다.

10만 대군이 움직여도 이 정도인데 1백만 대군이라면 위의 10배가 됩니다. 이것이 원정군으로서 가능할까요? 제가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당시의 유력 제후들이 총력을 다하여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최대로 잡아도 5~10만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조조가 기주를 점령한 후 최염(崔琰)을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삼은 후 "기주 호적을 보니 총인구가 30만"이라고 합니다. 만약 기주 인구가 30여만 정도라면 산술적으로 남자는 15만 정도이고 3분의 1이 장정(壯丁)이라고 한다면 5만 정도이고, 경제활동 인구를 60% 정도라고 하면 2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기주는 다른 주에 비하여 비교적 큰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대개 하나의 주를 장악한 제후들은 1만 5천 내지 2만 정도의 병력을 거느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의 이 기록은 정사에서도 그대로 확인됩니다. 즉 "태조(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후 기주목을 겸하면서 최염을 별가종사로 삼으면서 '어제 호적을 조사해 보니 삼십만이 됩니다.(太祖破袁氏,領冀州牧,辟琰爲別駕從事,謂琰曰 昨案戶籍 可得三十萬衆 故爲大州也 : 위서 최염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기록인 '신라촌락문서'의 기록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0%를 정남(丁男 : 병역 동원이 가능한 16~60세 사이의 남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30만 기주 인구 가운데 20%는 6만이고, 그 가운데 50%를 병력으로 동원하게 되면 3만 정도가 나옵니다. 대체로 위의 분석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원소와 같이 유주ㆍ병주ㆍ청주ㆍ기주 등의 4개 주를 장악한 정도가 되면 군사가 8~10만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서 원소전의 주석에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인용하여 "원소는 보병 5만과 기병 8천을 거느렸다(世語曰 紹步卒五萬,騎八千 : 위서 원소전 주석)라는 말이 있으니 대체로 제가 한 분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중원을 통일하는 전쟁이었던 관도대전에서 정사에 따르면, 원소는 정병 10만을 이끌고 근거지인 업(鄴 : 河北省臨漳)을 출발하였는데 이것도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조조와 같이 10여 개 주를 장악한 경우, 대략 20만 대군이 기존의 경제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던 진(秦)나라는 통일기에는 정남(丁男)의 50% 정도를 병력으로 동원했다고 합니다. 징병 대상이 되는 나이는 23세부터였습니다. 진나라의 경우, 통일하기 직전의 군대 규모는 대략 60만에 육박했다고는 하지만 이 기록조차도 정확한 인구센서스나 통계 자료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림 ②] 진시황릉에 나타난 진나라 군대의 모습

심지어는 기록한 사람들이 비슷한 시대라도 기록들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요. '삼국지' 시대보다는 몇 백 년 뒤이지만, 백제가 멸망할 때의 백제 인구에 대한 기록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 쪽의 사서인 '구당서'에는 멸망 당시 백제의 인구가 450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대당평제비(大唐平濟碑)에는 62만 명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계산해 봐도 무려 7배 차이가 납니다. 이럴 경우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2) 실제로 동원된 병력은 어느 정도가 될까요?**

그러면 이제 실제로 '삼국지'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동원되었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정사의 본기(本紀)에 해당하는 '위서(魏書)'의 주요 군 동원 내용을 봅시다.

① 190년 원소·한복·공주 등이 군대를 일으켜 원소를 맹주로 추대했는데, 이들은 각기 수 만 명이 되었다 … 조조가 산조로 돌아왔을 때 여러 갈래의 의병 10여만 명은 매일 성대한 주연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무제기).

② 192년 조조가 항복한 황건 농민군 30여만 명과 남녀 1백만 명을 받아들였으며 그 가운데 정예들만 거두어 청주병에 편입하였다(무제기). - 정규군이 아님

③ 195년 여포는 1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왔는데 조조는 병력이 적어서 매복했다가 기습하여 여포군을 쳐부쉈다(무제기).

④ 200년 (관도대전 당시) 원소군은 사산(沙山)을 따라 진군할 때, 조조의 군대는 만 명도 채 못 되었다(무제기).

⑤ 215년 저족의 왕 두무(竇茂)는 1만 여명의 군대를 인솔하여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저항하였다(무제기).

⑥ 238년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토벌하러 가는데 황제(조예)는 4만의 병력을 동원하려 하였으나 중신들은 모두 4만 명을 보내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명제기)

⑦ 263년 가을 황제는 촉 정벌을 위해 조서를 내려 등애와 제갈서에게는 각각 3만 여명의 병사를 통솔하게 하고, 종회는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사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나누어 들어갔다(종회전).

'촉서(蜀書)'의 경우를 보면

① 199년, 유비는 서주자사를 죽인 후 하비에 주둔하였는데 당시의 군현이 유비에게 의탁하여 유비의 병력은 수 만 명이었다(선주전).

② 211년, 유장은 보병과 기병 3만 여명을 인솔하고 수레에 휘장을 달고 유비를 만났다(유장전).

③ 211년, 유장이 유비에게 병력을 지원하여 장로를 공격하도록 했는데 유비는 전군 총 3만여 명을 모으고 전쟁물자들을 충분히 갖추었다(선주전).

④ 214년 유비는 성도(成都)를 포위하였다. 성도 성안에는 유장이 이끈 3만의 정예병사가 있었고 곡식과 의복은 1년 분량이 있었다(유장전).

⑤ 208년, 적벽대전의 경우, 손권은 주유 등에게 수군 수만 명을 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대파하고 그의 군선을 불태웠다. (선주전)."

'오서(吳書)'의 경우를 보면,

① 214년, 손권은 (유비가 형주를 돌려주지 않자) 즉시 여몽을 파견하여 2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장사·영릉·게양 등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라고 하였다. …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을 이끌고 익양(益陽)까지 가도록 했다(오주전).

② 219년 한수가 홍수로 물이 불어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오주전).

③ 222년 (이릉대전에서) 대패한 촉군의 병사들 가운데 죽거나 투항한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오주전).

④ 231년 2월 태상 반준(潘濬)을 파견하여 병사 5만을 이끌고 무릉의 이민족을 토벌하게 하였다(오주전).

⑤ 252년 위나라 장군 제갈탄과 호준 등이 보병과 기병 7만으로 동흥을 포위했다(오주전).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당시의 전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규모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적벽대전의 허와 실' 편에서 적벽대전에 동원된 병력이 나관중 '삼국지'에서 말하는 1백만이 아니라 10~15만 정도가 아닌가 추정하였습니다. 실제로 정사를 다 뒤져봐도 20만 이상의 정규군(正規軍) 대병이 동원된 경우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마염의 진(晋)나라가 건국(265)되기 이전에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을 경우는 관도대전(200)이나 적벽대전(208), 위나라가 촉을 정벌(263)할 때 동원된 병력 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알아봅시다. 먼저 진나라 건국 이전의 최대 병력 동원 상황입니다.

관도대전 당시 조조의 최대의 정적(政敵) 원소가 동원한 병력은 10만으로 공식적인 정규군 병력으로는 거의 최대 수치에 가깝고, 적벽대전은 위나라가 10~15만, 촉 정벌전은 16만여 명 정도 입니다. 정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263년 가을 황제는 촉 정벌을 위해 조서를 내려 등애(鄧艾 : 107-264)와 제갈서(諸葛緖)에게는 각각 3만여 명의 병사를 통솔하게 하고, 종회는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사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나누어 들어갔다(위서 : 종회전)."

다음으로 진나라가 건국된 이후 '삼국지' 시대가 끝나는 태강(太康) 원년(280년)까지를 보면 최대의 병력은 진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였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진서(晋書)의 기록을 통해 알아봅시다.

"279년 11월 대대적인 오나라 정벌이 있었다. 황제(사마염)는 진군장군 낭야왕 사마주(司馬伷)를 도중으로 … 건위장군 왕융(王戎)은 무창으로 … 광위장군 당빈(唐彬)은 파군(巴郡)의 군대를 이끌고 강을 따라 남하하게 하였다. 이 때 동서에 뻗은 군대는 모두 이십여 만 명에 달하였다. 황제는 태위인 가충(賈充)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咸寧 五年 十一月 大擧伐吳 遣鎭軍將軍琅邪王伷出途中 … 建威將軍王戎出武昌 … 廣威將軍唐彬率巴蜀漢之卒浮江而下 東西凡二十餘萬 以賈充爲大都督 : 진서 무제기)." [그림③] 진군의 오나라 정벌도(파란글씨는 진군 지휘관)

즉 진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할 때 동원한 병력이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 정규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의 병력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20여 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당시에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위나라도 동원한 최대의 병력은 15~20만 정도로 추정할 수가 있겠지요.

[그림 ④] 사마염

그러나 저의 이 같은 분석에도 불구하고 나관중 '삼국지' 식으로 수십만~백만 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 자체는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우기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구수를 비교해보면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진등이 유비에게 서주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이 주는 인구가 백만(촉서 : 선주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주에서는 당신(유비)를 위하여 보병과 기병 10만명을 모으려고 하고 있습니다(촉서 : 선주전)." 라는 말이 있지요.

문제는 그것이 아니지요. 기병이나 보병을 십만 명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6개월이라도 유지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는 얘기지요. 전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십만의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당시의 경제 사정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와 같이 될 경우 서주 인구의 10%가 모두 군대에 동원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전체 장정(17만) 가운데 약 60% 정도가 군인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 경우에는, 앞서 본대로, 군대 유지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경제활동에 종사해야할 장정들의 절반 이상이 군대에 징집되어버리면 산업이 마비되어버립니다. 그 경우 한 두 해도 버티기가 어렵지요[춘추전국시대의 '관자(管子)'에 "한 남자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누군가 굶게 되고, 한 여자가 옷감을 짜지 않으면 누군가는 추위에 떨게된다"고 하고 있지요. 전한(前漢) 때 가의(賈誼)는 "생산하는 자는 매우 적은데 소비하는 자는 매우 많으니 천하의 재산(財産)이 어찌 부족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합니다(漢書)].

실제로 '영웅기'에는 유비가 광릉(廣陵)에 주둔할 때 식량이 없어서 계급과 관계없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어(서로 잡아먹었다?) [備軍在廣陵, 飢餓困踧, 吏士大小自相啖食(촉서 : 선주전)] 기아가 극도에 이르자 자발적으로 여포에게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병력이 문제가 아니라 식량이 더 문제지요. 195년 여름 조조가 승씨에 군대를 주둔할 때 기근이 닥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었다(二年夏,太祖軍乘氏 大饑 人相食 : 위서 순욱전)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古代)에 많은 군대를 운영할 때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정벌하는 상황을 보면 이 점을 좀더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위나라 명제(조예)는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케 하기 위해 병사 4만 명을 내 주려고 했는데, 회의에 참석했던 중신들이 모두 4만 명을 보내는 것은 너무 많으며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였다.(帝議遣宣王討淵,發卒四萬人。議臣皆以爲四萬兵多 役費難供 : 위서 명제기)"

당시의 공손연은 4천여 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사마의의 원정은 상당한 규모의 전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최 강대국이었던 위나라가 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비용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상황이죠.

뿐만 아닙니다. 정사(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가 멸망할 당시 오나라 병사가 23만 명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진서 : 무제기). 그런데 정사의 기록에 오나라 장수 도준(陶濬)이 오나라 황제 손호에게 2만여 병력을 요청하자 손호가 황급히 병력을 모집하여 보냈는데 이들은 다음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授濬節鉞 明日當發 其夜衆悉逃走). 이것을 보면 오나라가 말하는 병력 23만이라는 것도 허수(虛數)일 수도 있고 일일이 통제할 수 없는 호족의 군대일 가능성이 높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삼국지' 시대에 실제로 병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나관중 '삼국지'와는 다르게 병력의 규모가 매우 축소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당시의 많은 병력들이 동원된 대규모 보병전의 운용 방식을 팔진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3) 육손, 팔진에 고립되다**

나관중 '삼국지'의 신비하고 엽기적인 대목들 중에 하나가 팔진도(八陣圖)입니다. 그 대목을 직접 간략하게 한 번 보시죠.

오나라 장수 육손이 공을 세우고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다가 어복포(魚服蒲 : 현재 사천성 봉절 동쪽)에서 강가에 돌무더기가 있는 것을 보고 조사해보니 제갈량이 촉 땅으로 들어가면서 이 곳으로 군사를 끌고 왔는데 모래로 성을 쌓을 수 없자 돌로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항상 돌무더기 속에서 구름이 피어오르더라는 것이죠. 육손은 껄껄 웃으면서 그 돌무더기를 살펴보러 들어갑니다.

"육손이 돌무더기 성을 빠져 나오려 하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돌과 모래가 한꺼번에 바람에 날려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육손이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돌무더기가 마치 창과 칼 모양과 같이 보였다. 그리고 붉은 모래더미가 산처럼 여기저기에 솟아나 있었다. 들려오는 장강의 파도소리는 마치 북을 울리며 창검 소리를 내면서 쳐들어오는 군사들이 소리처럼 들렸다(나관중 '삼국지' 84회)"

그러자 당황한 육손이 출구(出口)를 찾아서 탈출하려 했는데도 도무지 나올 수가 없었지요. 즉 육손은 제갈량이 만든 팔진도의 돌무더기 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웬 노인이 나타납니다. 그가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이었습니다. 육손은 황승언에게 애걸하여 겨우 어복포의 팔진도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제갈량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기양법(祈ꞁ法)을 사용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이야기입니다[기양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갈량이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기의 막사 주변에 49인의 갑사를 호위시키면서 막사 안에는 향을 피우고 꽃과 제물을 올립니다. 이어 땅에는 일곱 개의 큰 등을 준비하고 밖으로는 50개의 등을 놓습니다. 결국 이 시도는 촉장(蜀將) 위연(魏延)이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불이 꺼져 실패로 끝나지요]. 아마 '삼국지'를 통하여 가장 황당한 장면 중의 하나를 꼽으라 하면 팔진도나 기양법이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손이 팔진도(八陣圖)에 갇혀 고생했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정사에 따르면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하고 백제성으로 도망가자 오나라의 장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비를 추격하여 생포할 것을 주장하지만 육손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위나라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대를 후퇴시킵니다(오서 : 육손전). 따라서 육손이 유비를 추격한 일이 없으므로 팔진도에 갇혀서 고생할 까닭도 없지요.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어복포는 백제성을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니 육손이 유비를 추격하여 백제성으로 간 일도 없으니 없었던 이야기죠.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제갈량의 팔진도에 대한 유적이 중국에는 세 군데나 있다는 것이죠. 구체적으로는 ① 현재 사천성의 봉절(奉節)의 백제성 아래, ② 사천성 성도(成都)의 청백강 미모진(彌牟津), ③ 섬서성(陝西省) 면혐(勉縣)의 정군산 기슭 등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나관중 '삼국지'가 팔진도를 유난히 강조한 것은 아마도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 때 이흥이 쓴 '촉기(蜀記)'에 "제갈량의 팔진도는 이전의 손자나 오자의 병법(兵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정사(촉서 : 제갈량전) 자체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제갈량은 선천적으로 기민하여 연발식 쇠노를 만들었고 목우·유마도 고안하였다. 제갈량은 병법을 응용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전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긴요하게 사용되었다(亮性長於巧思, 損益連弩, 木牛流馬, 皆出其意;推演兵法, 作八陳圖, 咸得其要云)."[이 기록에서 팔진(八陳)에서 사용된 진(陳)이라는 자는 '늘어서다' '배열하다'는 의미이니 진(陣)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듯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팔진에 대한 유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저는 팔진도의 유적이 세 군데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백제성 인근의 것은 후세 사람들이 나관중 '삼국지'에 따라서 만든 것일 것이고 성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군산의 유적은 어찌된 것일까요? 그것은 나관중 '삼국지'의 편찬자들이나 후세 사람들이 정사에 나타난 다음의 구절에서 힌트를 얻어서 만든 것으로 판단됩니다. 즉 정사 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234년 8월 위군과 촉군은 대치하다가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영에서 사망했는데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영과 보루, 군막 등을 일일이 살펴보고는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라고 말했다(촉서 : 제갈량전)."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제갈량이 팔진법을 고안한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제갈량 이전에도 팔진법에 대한 용어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팔진도와 관련된 고래의 서적들은 팔진도가 중국의 고대로부터 전하여져 오는 특별하고도 위력적인 군진(軍陣)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972년 출토된 '손빈병법(춘추전국시대의 저작물)'에서도 이미 팔진편이 나오고 있습니다(물론 이 책에는 팔진법의 정확한 운영 내용은 없지요). 뿐만 아니라 '후한서(後漢書)'의 주석에도 "옛날부터 팔진이 있었는데 제갈량이 그것을 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팔진법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나오고 있는데 그 운영방식과 효용성을 성공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한 책은 찾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팔진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삼국지' 시대에는 대규모의 전쟁이 일상적으로 나타났으므로 각 군단은 진법을 주로 사용하여 대규모의 보병전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진법이란 병사를 훈련시키거나 행군(行軍)ㆍ숙영(宿營)ㆍ전투(戰鬪) 등의 여러 상황에 대비한 병력의 배치와 작전 방안입니다. 그 동안 논의된 내용으로 보면, 진법이란 전쟁을 수행할 때 ① 종합적인 군대배치, ② 자연적인 지형지물이나 장애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 병법, ③ 실제로 평원에서 전쟁을 하거나 원정하여 전투를 치를 때 병력의 실전 배치 및 운용방식 등이 포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강의에서는 실전에서의 병력 배치를 중심으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왜냐하면 그 나머지 경우는 워낙 경우의 수가 다양한데다 비슷한 내용들이 다른 병법서에 많이 나오기 때문이죠. 그 부분이 궁금하신 분들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구변(九變)의 장, 행군(行軍)의 장, 지형(地形)의 장을 참고하세요].

진법 가운데는 앞서 본대로 팔진법(八陣法)이라는 전투대형이 널리 연구되고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전쟁이 발발하면 대규모 보병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은 군대의 한 가운데에서 중군(中軍)을 두어 전체 병력을 지휘하게 되는데 이 중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개의 방향과 북동·북서·남동·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두는 병력 배치의 방법이 팔진법입니다. 먼저 [그림 ⑤]을 보시죠.

[그림 ⑤] 화기(火器) 출현 이전에 유행한 팔진법(八陣法)

[그림 ⑤]은 흔히 알려진 대로 제갈량이 고안했다는 일반적인 모양의 팔진도입니다[물론 앞서 본 대로 제갈량이 팔진도를 고안한 것은 아니지요]. 흔히 팔진법은 화기(火器) 출현 이전의 완벽한 전투대형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상세한 상황은 알 수가 없지요. 더구나 위의 팔진법에 대한 내용에 대한 정확한 기록(실제 전투에서의 운영)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나라ㆍ송나라 이후 엉뚱한 이야기나 신화·설화들이 여기에 첨가되면서 더욱 허황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군사 전략가들이 이 진법에 대한 연구를 매우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팔진법의 운용원리를 추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규모 보병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팔진법을 보면 64개의 소부대와 그 배후에 대기하는 유병(遊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개 소대(小隊)는 5명의 기수를 포함하여 55인이 되고 8개 소대(小隊)로 일진(一陣)을 구성해서 440명, 8진이 되면 합해서 3520명이 됩니다.

그런데 위의 [그림 ⑤]에는 바람이니 하늘이니 하는 말이 나옵니다만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운용되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팔진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대강 요약해 보면, 일반적으로 팔진(八陣)은 예로부터 금(金)ㆍ토(土)ㆍ수(水)ㆍ화(火)ㆍ목(木)ㆍ지(地)ㆍ인(人)ㆍ천(天) 등을 가리키기도 하고 황제(黃帝)의 신하인 풍후(風后)가 만든 천(天)ㆍ지(地)ㆍ풍(風)ㆍ운(雲)ㆍ호익(虎翼)ㆍ사반(蛇蟠)ㆍ비룡(飛龍)ㆍ조상(鳥翔)ㆍ사(蛇)를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天)ㆍ지(地)ㆍ풍(風)ㆍ운(雲) 등의 용어들은 주역(周易)의 용어들로 보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그 많은 용어들을 다 분석할 필요는 없겠지만 주요한 것만 뽑아서 주역에서 말하는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먼저 하늘과 땅은 부모에 비유할 수 있고 이들로부터 자식들이 태어나듯이 여섯 명의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즉 진(震 : 長子)·손(巽 : 長女)·감(坎 : 中男)·이(離 : 中女)·간(艮 : 少男)·태(兌 : 少女) 등이 그들이죠. 그리고 이들은 각각이 하나의 자연물을 상징합니다. 즉 태는 연못(澤), 이는 불(火), 진은 천둥(雷), 손은 바람(風), 감은 물(水), 간은 산(山) 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천(天)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두루 묶는 총체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元)이란 어짐(계절로는 봄), 형(亨)은 질서(계절로는 여름), 이(利)는 베품(계절로는 가을), 정(貞)은 명철한 지혜(계절로는 겨울)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늘[천(天)]이라는 이름을 가진 팀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도 규율이 엄하고 중군을 보호하는 전위부대로서의 임무를 가진 부대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地)는 천(天)을 따르되, 원형이(元亨利)을 두루 묶는 종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지(地)는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행하고 만물을 포함하여 풍성하게 만든다는 뜻을 가집니다. 따라서 땅[지(地)]은 기본적으로는 전체 군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천(天)의 움직임에 따르되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움직이는(柔而動) 특성을 가진 팀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역에서 보는 구름[운(雲)]은 마치 구름이 비를 몰고 와서 만물이 그 형상을 갖추듯이[운행우시(雲行雨施)] 건형(乾亨)의 원리를 가진 것입니다. 즉 엄정한 규율을 유지하되 천(天)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팀을 말합니다. 구름은 용을 따르지요[雲從龍].

주역에서 보는 바람[풍(風)]은 유순하고 공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인함을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바람을 이름으로 하는 팀은 마치 범을 따르듯이[風從虎] 빠르고 각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말합니다. 눈에 띠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는 팀을 말하는 것이지요. 방향은 동남쪽입니다.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팔진법에 등장한 주요 명칭들을 주역의 원리에 따라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이 말들은 극히 추상적이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팔진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중군(中軍)을 공격하려면 어떤 방향에서도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10개~15개 이상의 소대를 격파해야만 중군(中軍)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소대들은 그대로 있으면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적을 겹겹이 에워싸면서 공격하기 때문이죠(이 점은 '기효신서'에 상세히 서술되고 있습니다).

팔진법은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실전팀과 지원팀이 매우 조화롭고 다이내믹하게 짜여져 있어 최적의 공격 및 방위 진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팔진법은 전투 지휘 사령부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전투대형은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군사배치법입니다(사실 실제 전장에서 보병들은 흩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총사령관은 중앙[중군(中軍)]에 위치하여 어떤 소대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전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될 수 있고 통일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팔진이 실전(實戰)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팔진은 대규모의 보병전을 염두에 둔 것인데 빠른 기동력으로 북방 유목민(쥬신) 기마군단이 [그림 ⑤]의 바람과 새 부분 쪽 등 기병이 없는 방향에서 공격해온다면 이 진법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지요. 그럴 경우에는 오히려 아군 들 간의 부대들이 복잡하게 얽혀 더욱 아군의 혼란을 부채질 할 가능성도 큽니다. 전투대형이 무너진 보병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진법들은 전술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유목민과의 대규모 전쟁을 치를 때 유목민과 비교하여 각 부대 간 작전 명령의 전달이 느리기 때문에 일부 병력이 작전상 후퇴를 할 경우 다른 부대들은 이를 전군(全軍)의 후퇴로 착각하기도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전군이 한꺼번에 후퇴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 때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여 수만(數萬)의 군대가 순식간에 붕괴하는 일도 나타납니다(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의 붕괴도 이 같은 현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북방의 유목민(쥬신)들은 이 같은 보병전의 전투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사냥기술을 응용하여 길게 줄지어 오다가 갑자기 흩어지고 후퇴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되돌아서 활을 쏘고 적이 주춤하는 사이 대병을 휘몰아쳐서 적을 섬멸합니다. 이 같은 북방 유목민(쥬신)의 전술들은 팔진법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농경민들의 진법들도 무력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3세기의 일이기는 하지만) 몽골의 칭기즈칸이 사마르칸드를 공격할 때, 몽골은 소수의 기마군단인데도 몇 개로 나누어 동쪽과 서쪽 방향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시켜 적진을 혼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후퇴하는 척하다가 다시 군대를 되돌려 전격적으로 기습하고 허둥대는 적을 향하여 북쪽에서 칭기즈칸이 친히 주력군을 몰아가 섬멸시킵니다. 이와 같이 북방 유목민(쥬신)들은 마치 현대전을 방불케 하는 양동작전과 각종 기만전술(欺滿戰術)들을 실전(實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병(騎兵)을 주축으로 하기 때문에 워낙 기동성(機動性)이 탁월해서 가능한 전술이지요.

팔진법은 같은 중국인들 간의 전쟁이나 대규모의 보병전에서는 물론 유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팔진법은 전쟁이 가진 역동성을 무시하고 너무 이론에 치우친 측면이 있습니다. 전쟁은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중국인들은 매사를 철저히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이 팔진법은 바로 그러한 중국인들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진법의 운영 방식**

팔진도의 운영방식을 알 수 있는 확실한 기록들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앞서 본대로 자연의 이치에서 군형(軍形)을 유지 운영하는 방법을 터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도(六韜)'에 "현익(玄黓 : 팔진도)은 음양이 도를 따르고 계절의 변화를 따른다 … 지혜로운 자는 이 원리에 따르므로 이익을 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서'에는 팔진법의 운용은 "군대가 수세에 몰릴 때 숨기 쉽도록 엄호하는 곳이 있어야 손실을 줄일 수 있으며 그 후 기회를 포착하여 적의 약점을 공격한다(晋書 : 職官志)"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전(通典)'에는 팔진도에 대해 "5개의 부대를 편성해 정사각형의 바둑판무늬로 9칸을 나누어 중앙에 1대, 주변의 8개의 사각형 모서리에 1대씩 배치하고 중군은 움직이지 않으며 나머지는 위치를 바꿀 수도 있다. 대형을 자유로이 바꾸어 전방위적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라고 하여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이 또한 팔진법이 다른 진법들과 특별히 구별되거나 무슨 비밀의 전술이라는 생각이 들 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후에도 진법은 많은 군사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명나라의 군사 전략가였던 척계광(戚繼光)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에는 진법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상세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효신서'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이미 총과 대포가 등장한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보고자 하는 '삼국지' 시대의 전술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법이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었는지는 이 책을 통하여 일부 알 수 있습니다.

'기효신서'에서 말하는 진법 훈련은 팔진도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다만 그 훈련의 원리와 전쟁에서 실제로 어떻게 운용하는 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

'기효신서(1562)' 18권은 명나라의 걸출한 군사 전문가였던 척계광(戚繼光)이 쓴 병서입니다. 중국의 군사학 관련 고전 중의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책입니다. 척계광은 군인의 집안에 태어나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북으로는 달단(韃靼)의 침입을 막는 등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척계광은 개혁적인 군사상가로 문무를 겸비한 중국의 영웅으로 제갈량이나 악비 등과 어깨를 겨루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효신서'는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척계광 자신의 군대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책입니다.

이 '기효신서'에 진법 훈련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훈련의 모습들은 내용이 복잡하여 이해하시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진법 훈련들이 진행되었는지를 보시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먼저 '기효신서'에서 말하는 진법 훈련은 주로 깃발과 징 및 북소리를 통하여 군령을 전달합니다.

"중군(中軍)에서 나팔을 불면 모두 일어난다(各起身). 나팔을 한번 불면 주의하고(必警), 두 번 불면 대열을 가지런히 정렬한다(必劑). 다시 나팔을 불면 중군에서 북과 깃발을 배치하고 기수(掌旗者)가 원래 대열에서 두 행으로 있는 기를 취하여 하나는 장대(將臺)에 올리고 다른 하나는 배치한 후에 양 변의 장교와 병사들이 장대 앞에서 (군령을 전하는) 북소리에 들어야 한다. 길이 넓으면, 한 초소에 네 줄이 서고 길이 좁으면 각 초소의 대가 대를 이어 원앙진법(鴛鴦陣法)으로 행진하여 맨 앞에 가서 정렬을 완료하면 북소리 징소리가 멈춘다(기효신서 : 권제8)."

아래의 [그림 ⑥]은 이상의 내용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림 ⑥] 각 군이 군령을 알리는 나팔과 북소리를 듣는 그림(기효신서 : 권제8)

척계광은 이 훈련이 실전에 효과가 있으며 원앙진이야 말로 아군이 포위되었거나 적의 공격을 받을 때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대열이 난잡하거나 싸움할 때 후퇴하는 자는 즉각 군법(軍法)으로 다스린다."는 말이 여러 번 강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군진을 배치할 때는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반드시 매복(埋伏)시킬 것을 주문합니다.

적과 1리 이내에 대치할 때는 맨 앞[전영(前營)]에 도열한 주력군은 즉각 원앙(鴛鴦)의 모양으로 한 일(一)자 대형을 갖추고 전초(前哨)를 제1겹으로, 후초(後哨)를 제2겹으로 좌초(左哨)는 좌익, 우초는 우익으로 변형한다고 합니다. 적이 50보 가까이 왔을 때는 불을 놓아 신호를 하고 이어 활·쇠뇌·불화살 등을 쏘고 기러기 나팔 소리가 들리면 각 대오(隊伍)는 용감하게 앞으로 진격합니다. 전영(前營)에 위치한 주력군은 길 한가운데서 앞장 서 적을 막으며 왼쪽 영은 적의 우측을 강타하고 오른쪽 영은 적의 왼 좌측을 강타합니다. 모두 원앙의 모양을 한 진을 만들고 1개의 대(隊)가 두 줄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원앙진 전술이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즉 수시로 흩어졌다가 상황이 종료되면 이내 다시 되돌아가야 합니다(기효신서 : 권제8).

[그림 ⑦] 부대들이 적과 교전할 때 이동하는 방향을 나타낸 그림(기효신서 : 권제8)

이 복잡한 과정을 우리가 모두 알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편성되어있는 각 대열의 소대들이 모두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기존의 대오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이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선생이 군대의 훈련과 국방에 대비하여 '진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삼봉집(三峰集)' 권13에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중국의 병서들을 참고로 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 가운데 정진(正陣)·결진십오지도(結陣什伍之圖)·오행출진가(五行出陣歌)·각경가(角警歌)·기휘가(旗麾歌) 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 후 세조(수양대군)도 이와 유사한 병서를 간행하였습니다. 세조가 편찬한 책의 내용에는 하도(河圖)·낙서(洛書)·곡진도(曲陣圖) 등 진도 7종, 오위도(五衛圖) 5종이 실려 있습니다. 하도니 낙서니 하는 용어로 보면 진법훈련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역(周易)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철학적으로 본다고나 할까요? 이 책에는 형명(形名)·결진식(結陣式)·일위독진(一衛獨陣)·합진(合陣)ㆍ승패지형(勝敗之形)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상의 강의를 통하여 팔진법을 다소나마 이해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군대의 배치와 운용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진법, 특히 팔진법과 관련된 내용이 다소 사변적이며 철학적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반드시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이죠. 문제는 이 진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기병들과의 전쟁에서는 무용지물일 수도 있다는 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삼국지' 시대에 동원된 실제 병력의 수를 살펴보고 당시 일반적으로 행하여졌던 대규모 보병전의 진법 훈련 방식을 '팔진도'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병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팔진도'는 대규모 보병전에 매우 유용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식으로 운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기는 어렵고 다소 이론에 치우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동북방 유목민(쥬신)들과의 전투에서는 효용성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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