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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서 만난 가을 생명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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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서 만난 가을 생명들의 이야기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30>

강도 가을을 타는가.

아침 산책길에 들여다보니, 강은 그새 많이 야위었다. 물은 줄고, 둑 양편의 풀들도 그 푸른빛을 많이 잃었다. 모래톱에는 못 보던 풍경도 눈에 띄었다. 사과 하나, 배 둘, 그 위에 놓인 시루떡 한 조각 그리고 종이컵 속에는 타다만 양초 한 자루. 지난 밤 이곳에서 누가 누구를 추모했던 것일까. 강물에 비친 산색(山色)도 다소 초췌했다. 가을이 깊었다. 새벽에는 올 가을 이후 처음으로 올빼미 우는 소리도 들렸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대가 외로우면 나도 외롭다네.”

강이었다. 육친(肉親) 같은 강이 아니라, 이미 육친인 강이었다. 인간이 ‘강’이라고 부르는 ‘그’를 나는 오래 전부터 사랑해왔다. 출렁! 문득 마음이 흔들린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보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멀리서 수달 모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미 한 마리와 새끼 세 마리. 어미와 새끼는 조금만 떨어져도 그렇게 서로를 찾으며 운다. 새끼들은 “삐잇, 삐잇” 작은 새처럼 울고, 어미는 염소 울음소리처럼 울었다. 적어도 나는 그 녀석들의 속셈쯤은 들여다보고 있다. 녀석들은 서로 그리울 때마다 우정 그렇게 떨어져선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했다. 상습범들이다.

가을 들녘이 많이 비워졌다. 추수가 끝난 논은, 종종 작은 텃새들만 찾을 뿐 적막했다. 가을햇살에 말려둔 참깨도 대부분 털어낸 모습들이다. 들깨와 고추, 고구마, 호박 따위는 서둘러 가을걷이 중이었다. 사람들은 서리를 걱정했다. 수확이 일찍 끝난 옥수수 밭의 그 그루터기들은 벌써 검어졌다. 옥수수의 그 넓고 긴 잎이 바람에 춤을 추고, 그 키가 인간의 키보다도 훨씬 높이 자랐던 지난여름, 어린 소년은 말했었다. “저는 옥수숫대를 보면 꺾고 싶어져요.” “왜?” “옥수숫대 꼭대기에 깃발을 매달고 달리고 싶어서요.” 어른들이 옥수수 열매만 생각하고 있을 때, 소년은 ‘깃발’을 꿈꾸고 있었구나.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시구가 있었던가. 소년의 그 꿈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한편 몸피를 부풀려가며 더욱 푸르러지는 생명들도 있었다. 김장용 무와 배추다.

강둑의 길이 햇살에 하얗다. 들 고양이 한 마리의 뒤를 바람만바람만 따라가는데, 길 위에선 문득 그림자 둘이 바빴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추잠자리 한 마리. 그리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하얀 각시멧노랑나비 한 마리.

노인장대, 물봉선, 꽃향유 군락, 마을 사람들이 ‘까마귀 오줌통’이라 부르는 쥐방울덩굴, 선이질풀, 방아풀, 가장 지천으로 피어난 나도송이풀, 진득찰, 차풀, 쑥부쟁이, 열매 껍질 속에 씨앗을 가득 담고서 큰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장구채, 고려엉겅퀴, 참취, 구절초, 까만 열매를 단 까마중, 미역취, 왕고들빼기, 이고들빼기, 아, 눈부시게 환한 산국(山菊) 군락. 비수리,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억새와 갈대….

깍지 터지는 소리를 내는 돌콩과 새팥. 그러나 눈길을 주었을 땐 벌써 콩과 팥은 보이질 않는다. 나팔꽃 주변에 거미줄을 친 호랑거미. 거미줄엔 꿀벌 네 마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방 두 마리, 흰전동싸리의 낙엽 몇 잎이 걸려 있다. 생을 마친 여뀌는 몸이 벌써 말랐지만 여전히 붉다. 며느리밑씻개의 보라색 열매. 소녀가 보았다면 팔찌를 만들겠다고 욕심을 냈을 법하다. 마침내 참나리! 느낌표를 찍는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은 겨울 들판에 서서 몸을 흔드는 그 모습을 보라.

환삼덩굴 위의 사마귀 한 마리. 그의 앞에서 움직이는 곤충은 모두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사마귀의 인내심은 당대 최고. 결국 제풀에 지친 곤충은 움직이고 만다. 허공을 날 때 햇빛에 속날개가 반짝이는 방아깨비.

<뱀, 너무 길다>라는 이름의 프랑스 소설이 있었던가. 강둑에서 만난 호박잎은 너무 넓다.

여린 강아지풀은 바람이 불어올 때, 김수영(金洙暎)의 <풀>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 조금 억세다 싶은 억새와 갈대는 바람보다 늦게 눕고 바람보다 늦게 일어난다.

군락을 이룬 쑥대밭에서는 미국실새삼도 보였다. 토종 실새삼은 콩과식물에만 기생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미국실새삼이 맞다. 이 새삼은 노란 덩굴줄기에 하얀 꽃을 달고 있었다. 인간은 이런 새삼류를 기생식물이라 부른다. 숙주식물에 달라붙어 양분을 빨아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이 아닌, 어쩌면 ‘호생(互生)’일지도 몰랐다. 자연생태계의 비의(秘意)를 인간이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기생이든 호생이든 어찌됐든 쑥과 실새삼의 엉켜진 운명이 그곳에 있었다.

<四字小學>에 ‘봉생마중 불부자직(蓬生麻中 不扶自直)’이라는 말이 있다. ‘쑥도 삼 가운데서 자라면, 돕지 않아도 스스로 곧아진다’는 뜻이다. 섬유식물인 삼은 높이 3m 안팎까지 자란다. 그러나 쑥은 기껏 자라야 1m 안팎이다. 쑥은 봉두(蓬頭) 곧, 쑥대머리처럼 자라는 게 그 본성이다. 수많은 가지를 치고 그래서 옆으로 펑퍼짐한 몸피를 이루며 자란다. 그런데 쑥이 삼 가운데서 자라면 곧아진다니, 이는 무슨 뜻일까. 식물학에선 이를 ‘광경합(光競合)’에서 빚어진 현상으로 풀이한다. 광합성작용을 해야 하는 모든 식물들에겐 빛은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키가 작은 쑥이 키가 큰 삼 군락 속에 있다고 가정해보라. 빛을 얻지 못한 쑥은 죽을 수밖에 없다. 결국 쑥은 빛을 얻기 위해 쑥대머리처럼 자라지 못하고 위로만 곧게 자라게 된다. 자기의 본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쑥의 이런 모습에서 ‘곧다’는 뜻의 ‘직(直)’을 보았다. 인간은 ‘직’에서는 ‘바른’ 것을 보고, ‘굽다’는 뜻의 ‘곡(曲)’에서는 ‘그른’ 것을 보았다. 쑥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일이다. 인간은 콩을 콩나물로 먹기 위해 빛을 막는다. 콩나물의 그 하얗고 긴 줄기도 빛을 찾는 ‘향일(向日)’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돼지풀도 보였다. 이 풀도 미국에서 들어온 풀이다. 환경부에서는 이 풀을 인간에 유해한 식물 1호로 지정했다. 꽃가루가 눈에 알레르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더러는 외래식물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잖다. 그러나 우리의 풀과 나무도 외국으로 진출한다. 그 아름다운 꽃과 운치 있는 이름으로 사랑받는, 이 땅의 인동(忍冬)덩굴도 미국으로 건너가 목장과 삼림지대에서 ‘맹활약’ 중이다. 이 땅에서는 야산자락이나 산 밑의 밭 가장자리에서 수굿하게 자라던 그 덩굴이 미국으로 건너가선 상상을 초월하는 번식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풍문이다. 여북했으면 인동덩굴의 구제에 큰 상금을 걸었을 정도일까. 칡이나 찔레꽃도 그러하고, 이 가을의 아름다운 그 억새 같은 풀도 그러하다.

풀숲을 보니 작은 텃새들이 다시 모여 날고 있었다. 박새, 딱새, 곤줄박이, 동고비, 멧새, 노랑턱멧새, 진박새, 쇠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이 작은 새들은 봄철 번식기엔 짝을 지어 흩어졌다가 가을에 다시 모인다. 둘이 모이면 생존능력이 두 배로, 열이 모이면 열 배로 는다. 천적에 대한 위험을 빨리 감지하고, 먹이를 찾는데도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풀숲을 지나는 유혈목이 한 마리! 꽃뱀이나 화사(花蛇)라고 부르는 바로 그 뱀이다.

새는 날고 뱀은 긴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은 인간의 편견이다. ‘나는 놈’은 ‘기는 놈’ 위에 있지 않다. 새에게는 새의 삶이, 뱀에게는 뱀의 삶이 있을 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해살이풀들도 보였다. 월동하는 풀들이다. 조만간 서리가 내리면 이 풀들이 말을 하게 되리라. 개망초, 방가지똥, 쇠서나물, 달맞이꽃, 지칭개, 망초, 냉이, 보리뺑이, 서양민들레…. 작게는 손톱만한 잎, 크게는 손가락만한 잎을 달고 있는 이 풀들은 로제트(rosette) 형태로 겨울을 난다. 로제트란, 잎들이 여러 겹 서로 겹쳐서 방사상으로 나와 있는 모양을 뜻한다. 그 잎들은 땅에 바싹 붙어 있다. 땅 속에서 올라오는 지열도 받고 또 햇볕을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서다.

농사를 짓던 첫 해 겨울엔 나는 이 두해살이풀들을 겨울철의 비타민 공급원으로 생각했었다. 춥기 짝이 없는 이 산골에서 겨울철에 나는 야채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야채 대용으론 이 두해살이풀이 안성맞춤이었다. 나물로도 해 먹고, 효소로도 담가 먹었다. 그러나 결국 두해살이풀들과 가깝게 만나면서 먹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이 겨울을 나는 모습이 눈물겨웠던 것이다. 푸르고 곱던 그 잎의 색깔은 겨울을 나면서 검붉게 변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 변색은 겨우살이의 고통과 시련의 상징처럼 보였다. 나는 두해살이풀을 먹지 않는 걸 ‘선(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느 할머니를 보라. 시장 출입도 잘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또 생활비도 아낄 겸 해서 나물감으로 한 겨울에 냉이를 캐는 그분의 모습은 또 그것대로 아름답다. 나는 내 방식대로 존재하고 그 할머니는 또 그녀의 방식대로 존재할 뿐, 그곳에 선악 따위는 없다.

생태적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학문적인 정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생각 같아선 자연생태계 속에서 자신의 어떤 존재방식과 관련되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가려면 나는 그 첫 번째 조건으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생태계의 다른 종(種)들이 진정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또 그들의 삶도 만날 수가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원칙 중 하나가 ‘1인1표’주의인데, 이런 경우엔 ‘1종(種)1표’주의라 할만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곤충 한 마리를 인간인 자신과 등가(等價)로 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으론 전면적인 ‘자기포기’이다. 달리 표현하면 무아(無我)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따위를 버리고 생태계의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아야 그들의 실상(實相)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풀을 보되, 역시 그들을 바로 보지 못한다.

우리 역사를 짚어가다 보면 나는 두 인물을 만난다. 원효(元曉)와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海月) 최시형이 바로 그들이다. 무위당 장일순선생이 해월을 ‘생태적’으로 재조명한 이래, 나는 그의 이야기에 넋을 뺏겼다. 그가 남긴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엔 생태적으로 절창이라 할만한 ‘말씀’들이 있다.

어느 날, 해월의 앞을 어린 아이 하나가 나막신을 신고 빠르게 지나갔던 모양이다. 그 나막신 소리에 땅이 울렸다. 해월은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 어린 아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프더라.” 그러면서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니의 살같이 하라(惜地如母之肌膚)”라고 덧붙였다.

그 <법설>의 ‘내수도문(內修道文)’편에 있는 이야기도 아름답다.

“가신 물이나 아무 물이나 땅에 부을 때 멀리 뿌리지 말며, 가래침을 멀리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며, 침과 코가 땅에 떨어지거든 닦아 없이 하고, 또한 침을 멀리 뱉고, 코를 멀리 풀고, 물을 멀리 뿌리면 곧 천지부모님 얼굴에 뱉는 것이니 부디 그리 아시고 조심하옵소서.”

‘가신 물’이란 뭘 씻고 난 허드렛물을 말한다. 그가 본 ‘땅’은 참으로 깊고도 깊었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이다. “침과 코가 땅에 떨어지거든 닦아 없이 하라.” 그런 삶이란 나 같은 사람에겐 얼마나 멀고도 먼 것일까.

내 삶을 들여다보면 깨어있지 못할 땐 땅에 침을 뱉고, 어쩌다 깨어있을 땐 뱉지 못하기도 하고 그러했다. 들길에 서서 문득 앞을 보면 애기똥풀이요, 양 옆을 보면 망초와 여뀌, 뒤를 돌아보면 달맞이꽃. 곳곳에 생명들이 있었다. 결국 가래침을 뱉지 못하고 그냥 삼켜버릴 때도 있다. 처음엔 그 뭉클한 것을 삼킬 때 고약스러웠다. 기분이 느끼해져 속에서 잘 받아내질 못했다. 그러나 하다 보니 나중엔 무심해졌다. 기관지에 달라붙어 있던 가래침이 위장 속으로 자리바꿈을 한 정도로 치부했다.

살다보면 눈에 콩깍지 같은 게 씌워질 때도 있다. 지난 늦봄엔 백화효소(百花酵素)라는 걸 담았다. 산과 들에 핀 수많은 꽃들을 꺾어서 설탕에 절이고 발효시키는 차(茶)였다. 어찌해서 꽃들을 꺾을, 그런 모진 생각을 했던 것일까. 여러 해전 종로 인사동에 들렸을 때였다. 한 찻집 주인이 ‘팔지 않는 차’라며 기이한 차 한 잔을 내놓았다. 가로되, ‘백화차(百花茶)’라 했다. 차로 우려낸 물빛이 예쁘고, 향이 독특했다. 수많은 꽃잎들을 따서 말렸다가 우려냈다고 했다. 옛 생각이 났던 것일까.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그 차를 한 잔 내놓으며 생색을 낼 생각을 했던 것일까.

자리를 펴고 따온 꽃들을 바닥에 부었을 때,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백여 마리도 넘는, 이름도 불러줄 수 없는, 깨알처럼 작은 수많은 종류의 곤충들이 그 꽃들 속에서 기어 나왔다. 벌과 나비, 꽃무지류, 꽃등에류, 노린재류 같은 곤충들이 꽃을 찾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리도 많은 곤충들이 꽃을 찾는 줄은 참으로 상상을 못했다. 그 곤충들은 황망하게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꽃으로 모여들 땐 ‘구심(求心)’의 그리움 같은 걸 갖고 모여들었을 터였다. 이제 꽃이 생명이 끊기자 그곳엔 ‘원심(遠心)’의 탈출과 유랑이 있었다. 망연해진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그 탈출과 유랑은, 물론 나의 허물로 빚어진 것이었다. 생태적 감수성이란 것도 한 순간 마음을 놓치면 이렇다.

가을 햇살은 귀하다. 아침나절과 늦은 오후의 햇살은 썩 쓸모 있는 햇살이 아니다. 볕의 기운이 워낙 약한 탓이다. 낮 한 대목의 햇살이 무척 좋아 멍석을 펴고, 키질을 해놓은 참깨를 널었다. 그런데 어느 한때 그 참깨를 들여다보니 해괴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연필만한 지렁이 한 마리가 그 참깨 멍석으로 기어들어와 있었다. 몸이 축축하다 보니 그만 온몸에 참깨가 다닥다닥 달라붙고 말았다. 마치 ‘깨엿’처럼 보였다. 청개구리 한 마리도 보였다. 그 녀석도 피부가 축축하긴 마찬가지여서 온몸이 깨로 범벅이었다. 청개구리의 그 ‘푸를 청(靑)’자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청개구리가 아니라 ‘깨개구리’였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움직이는 깨엿’과 ‘깨개구리’여, 그대들의 그 형국이 나의 허물인가, 그대들의 허물인가? 나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세상사의 이치를 굳이 모르니, 마음만은 문득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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