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궁예(弓裔 : ?-918)를 아시죠? 궁예는 국호(國號 : 나라이름)를 기분 내키는 대로 바꾸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 사람으로, 폭군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 보면 이름 높은 스님인 석총을 때려죽이고, 부인 강씨가 간언(諫言)을 하자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음부를 쑤셔 죽인 후 두 아들까지 죽입니다. 궁예가 나라를 다스릴 당시 장수 및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는 사람이 많으니, 백성들이 그 해독을 견디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도 궁예는 악행을 일삼은 무도한 국왕입니다. 궁예는 반역이라는 죄명을 씌워 하루에도 백여 명씩 죽였다고 합니다. 궁예는 신라를 병탄(倂呑 : 다른 나라를 평정하여 하나로 만듬)할 뜻을 품고 신라에서 투항해 오는 사람을 모두 베어 죽입니다. 그리고 궁예는 소위 '관심법(觀心法)'을 체득하여 부녀(婦女)들의 음행(淫行)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하면서, 걸리면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음부를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여 장수나 정승으로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사라고 알려진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액면 그대로 믿자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슬픈 궁예'라는 책에서는 궁예에 대하여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국호를 여러 번 바꾼 것도 신라 백제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고구려 중심의 국호에서 삼국을 모두 포함하는 마진(摩震 : 대동방국이란 뜻)으로 바꾼 것도 당연하다는 말이지요. 저자에 따르면, 국호 변경은 고구려적 요소와의 결별이자 삼국통일의 의지를 보여준 것인데 이것이 고구려계의 불안감과 반발을 가져왔고 이 때문에 왕건(王建 : 고려 태조)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자는 철원지방의 전설을 토대로 궁예는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는 점도 제시합니다.
궁예가 아내와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에 대해서도 학계에서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궁예가 아내와 아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죠. 정치세력의 대립과정에서 궁예는 부인 강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학계에서는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궁예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의 기록들은 궁예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궁예가 양길의 휘하에 들기까지 그리고 황제에 오르기까지는 영웅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저작물이니 궁예에 대해 가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책에도 궁예가 병사들과 동고동락했던 사실을 들고 이것이 궁예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궁예에 대한 지지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는 왕건이 집권한 후 나타난 반정부(反政府) 투쟁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지요. 태조 왕건이 즉위한 후에 환선길의 반란, 청주 지역의 반란, 웅주 성주 이흔암의 역모, 김순식의 저항, 의성 태수 홍술의 반란, 명지성 성달의 반란 등이 일어납니다.
결국 궁예는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패서인들 뿐만 아니라 기타의 호족세력의 규합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들의 공적(公敵)이 된 경우로 생각됩니다. 초기에 왕건 세력들은 궁예에게 적극 도움을 주지만 결국 궁예는 왕건 세력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궁예는 호족 세력의 통합에 실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호족 연합에 의해 제거당한 군주였다는 말이죠. 즉 궁예는 중앙 집중적인 권력을 추구한 반면 호족들은 지방분권적인 자신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랐다는 말이지요. 그 와중에서 궁예는 호족들의 공적(公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궁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참고로 고려의 호족 세력은 고려의 건국(915) 이후 성종(981~997)을 거쳐 문종 때 비로소 왕권 아래 놓이게 됩니다. 즉 왕권(王權)이 호족세력을 제압하는 데 거의 1백년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궁예가 너무 조급했던 것이죠].
***(1) 동탁 정권의 역사적 의미**
동탁 정권은 '삼국지'의 분수령입니다. 동탁(董卓)은 나름대로 이전의 정치제도와는 다른 형태로 정권을 장악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탁 이후로 본격적인 군벌정치(軍閥政治)가 시작되면서 한(漢)나라 체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즉 이전까지는 황제 주변의 권력적 질서들이나 정치적 관례나 관습들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동탁의 군벌 정치가 도래한 후에는 군벌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국가정책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나 정사를 유심히 보면 동탁의 몰락 이후 중국은 더욱더 극심히 해체(解體)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요?
'삼국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탁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탁의 성격과 동탁 정치의 특성을 한번 분석해 봅시다.
① 동탁은 성격적으로 포악무도하다는 일반적인 견해.
② 동탁은 폭정을 일삼고 원칙도 없는 정치를 했다는 일반적 견해.
첫째, 동탁이 성격적으로 포악무도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객관적으로 보면,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기 전(중앙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하진(何進 : ?~189)이 동탁의 군대를 이용하여 환관(宦官)을 주살(誅殺)하려고 했을 때 동탁이 앞서 본대로 무도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으면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정사의 기록에도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는 긍정적인 묘사를 하다가 동탁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낙양 입성(入城)전까지 동탁은 조야에 긍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동탁이 성격적으로 포악하다는 것은 중앙 권력을 장악한 2년간의 성격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요. 다시 말해서 동탁은 다혈질(多血質)이기는 하나 성격적으로 별 다른 결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상으로는 권력을 장악했던 단지 2년간 성격적으로 상당히 포악한 면들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동탁은 중앙 정치에 미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동탁이 정치에 능했는데도 이 같은 기록이 있다면 역사의 기록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둘째, 동탁은 폭정을 일삼았으며 동탁의 정치는 원칙도 없었다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과연 동탁 정치의 실제는 어떤 모습일까요?
동탁 정치를 보기위해 일단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먼저 동탁은 이전의 대부분의 중신들을 그대로 기용하고 이름 높은 선비들을 불러들입니다. 당대 최고의 관료들인 채옹(蔡邕)·왕윤(王允)·양표(楊彪)·공융(孔融)·황완(黃琬)·노식(盧植)·순상(荀爽) 등이 동탁 정권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동탁은 조조와 원소에 대해서도 중용하려 했지요). 이들 가운데 채옹(蔡邕)은 몇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문인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채옹은 왕윤과 더불어 동탁이 가장 신임했던 사람입니다.
채옹은 비록 동탁이 윽박질러서 조정에 불러들인 사람이었지만 조정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시어사(侍御史) → 지서어사(持書御史) → 상서(尙書) 등 삼대(三臺)를 거치고 다시 시중(侍中)을 맡았으며 (수도 이전을 담당하여),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해지기도 합니다. 동탁은 채옹의 말에 따라 정책을 수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행동을 바꾸기도 합니다(후한서 : 채옹전). 채옹과 왕윤은 동탁의 정권에서 대표적인 실세(實勢 : 실제의 권력을 가진 사람)였습니다.
왕윤의 경우에도, 동탁이 매우 신뢰하여 때로 낙양에 가서 머무를 때 조정의 대소사를 모두 왕윤에게 맡겼습니다(時董卓尙留洛陽. 朝廷大小 悉委之託於允 : 후한서 왕윤전). 따라서 정책이 잘못되었다면 왕윤과 채옹이나, 당대의 최고의 중신들도 그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지요.
그리고 동탁의 휘하에는 당대 최고의 용장 여포(呂布), 당대 최고의 군사(軍師) 가후(賈詡), 충성스러운 용장 이각(李隺)ㆍ곽사(郭汜)ㆍ번주(樊裯)ㆍ장제(張濟) 등이 있었지요. 이들 장수들은 동탁이 암살당하자 이내 장안을 점거하여 신군부(新軍部) 세력을 형성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동탁이 암살되자 이각은 가후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쪽으로 가서 군대를 모으고 장안(長安)에 진주했을 때는 군사가 이미 10만여 명에 이르렀다(用賈詡策,遂將其衆而西,所在收兵,比至長安,衆十餘萬 : 위서 동탁전)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동탁 휘하의 장수들과 연합하여 장안성을 불과 10여 일만에 함락합니다.
이각ㆍ곽사의 난 진행과정을 보면 이들 신군부(新軍部 : 이각ㆍ곽사의 군벌) 정권의 사태 수습력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동탁의 정권이 상당한 정도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각과 곽사는 황제에 대하여 특별히 무례를 행하지 않고 왕윤(王允)을 제거하는 데서 일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헌제가 이각ㆍ곽사의 난 중에도 황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헌제의 이해관계와 이각ㆍ곽사의 이해관계가 별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동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바와는 다르게 상당히 합리적으로 정권을 유지했으며 인재들을 최대한 등용하여 나름대로는 새 시대를 열어가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정사의 기록들에 따르면, 동탁은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합리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전문가(專門家) 정치를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위의 사실을 분석하면, 동탁의 정치는 제대로 뿌리도 내리기 전에 뽑히고 만 듯합니다. 동탁의 정치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때 어떤 변화가 있을지를 무시할 일만은 아니죠. 왜냐하면 실제로 동탁의 죽음 이후 중국 전토(全土)는 완전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대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동탁 이후의 중국은 혼란 그 자체의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동탁이 정치를 잘 했다는 말이 아니라 동탁 사후 중원은 완전히 사분오열(四分五裂)되고 군웅(群雄)들의 야욕이 극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탁은 애초부터 새 왕조를 개창한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탁은 나름대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같이 혼란한 천하를 평정한다는 생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탁은 전문가들이나 한나라의 중신들을 유임시킬 뿐만 아니라 소제(少帝 : 176~189)를 폐하고 총명한 헌제(獻帝 : 181~234)를 세웁니다.
만약 동탁 자신이 전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 구체적인 계획이 애초에 있었다면 차라리 한나라의 중신들을 내쫓고 권력의 맛을 보려는 새로운 장년층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편이 현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 우둔하다고 알려져 있는 소제(少帝)도 그대로 두는 편이 더욱 나았을 것입니다.
당시 동탁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황제 교체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헌제기(獻帝紀)에 따르면, 동탁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것은 천지(天地)요, 그 다음은 군신(君臣)인 바 이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것인데 지금 황제께서는 암약(어리석고 허약함)하여 종묘사직을 받들어 모시기는 어렵다(卓謀廢帝 會群臣於朝堂 議曰 大者天地 次者君臣 所以爲治 今皇帝闇弱 不可以奉宗廟)"고 합니다. 나아가 동탁은 현재의 천자는 우둔하고 연약하여 군주의 자격이 없고(天子幼質 軟弱不君), 과거 한나라 무제 때의 대신인 곽광(霍光)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창읍왕(昌邑王)을 폐한 것과 마찬가지(皇帝宜如昌邑)라고 합니다. 이에 비하여 진류왕(헌제)은 어질고 효성스러워(陳留王仁孝) 의당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宜卽尊皇祚)고 동탁은 말합니다.
사실 그 이후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헌제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제는 조조의 군부정권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상태에서도 지속적으로 한나라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한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동탁이 진정으로 새 나라를 건국(建國)하려는 생각을 했다면 헌제보다는 오히려 소제가 더 적합한 파트너가 아니었을까요?
동탁을 최악의 인간으로 묘사하는 나관중 '삼국지'에서도 동탁이 황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나관중의 실수였을까요? 정사에도 동탁이 헌제에 대하여 무례한 행동을 한 기록은 없지요. 그리고 질병에 걸린 천자가 완쾌되어 신하들이 모이는데 동탁은 이 때 참석하러 갔다가 암살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동탁은 천하에 대한 야심은 있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 조급한 개혁**
동탁은 장기집권을 위하여 대대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듯 합니다. 동탁은 낙양의 기득권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는 두 가지 정책을 시행합니다. 하나는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기 위해 수도 이전을 단행하고 다른 하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화폐 개혁을 단행합니다.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① 동탁의 정치개혁 : 수도 이전
동탁은 낙양의 기득권 세력을 뿌리 뽑고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세력 기반에 가까운 장안(長安)으로 수도(首都) 이전을 단행합니다. 189년 경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동탁을 타도하기 위한 연합군이 편성되자 동탁은 이를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동탁은 190년 2월 전격적으로 장안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그림 ①] 동탁이 천도하는 장면(드라마의 한 장면)
수도 이전은 과거나 지금이나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화교(華嶠)의 '한서(漢書)'에는 이 당시 수도 이전에 대한 극심한 논쟁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에 동탁은 수많은 중신들의 반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과거 한고조가 (전한을 건국하고) 관중(關中) 땅에 도읍을 한 뒤 11세에(대략 200년) 걸쳐서 중흥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지요.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 지도 이제 11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사 짐을 챙겨 마땅히 수도를 장안으로 옮겨야 합니다(昔高祖都關中,十一世後中興 更都洛陽 從光武至今復十一世 案石苞室讖 宜復還都長安)."
[그림 ②] 현대의 낙양
이 말에 대해 모든 중신들은 경악하게 되고 그 누구도 감히 말하려는 자가 없었습니다(坐中皆驚愕,無敢應者). 왜냐하면 수도를 이전하는 문제가 단순히 동부지역의 제후들의 공격을 막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구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또한 동탁이 낙양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결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동탁에 대하여 지지하던 세력조차도 동탁이 단순한 정권의 유지만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음모자라고 판단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③] 장안의 현대 모습(서안)
따라서 동탁은 수도를 이전함으로써 제후들의 공격도 피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개혁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사('후한서', '삼국지')의 기록에는 동탁이 수도 이전에 대단히 집착하여 속전속결로 밀어붙입니다. 이것은 동탁이 ①'정권의 안정'과 ②'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탁의 수도 이전은 지나치게 성급한 정책으로 동탁이 실패한 대표적인 정책의 하나였으며 동탁의 죽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도 이전의 문제점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첫째, 무엇보다도 수도 이전은 장기적이고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인데 충분한 연구와 여론(與論)의 수용이나 조야(朝野)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 불과 몇 달 사이에 전격적으로 결정되고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둘째, 신수도(新首都)로 확정된 장안(長安)은 이미 황폐하였기 때문에 재건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설령 낙양에서 수도 건설 재원(財源)을 일부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건설 자재(물자)나 인력을 충분히 구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 점은 지난 강의에서 충분히 지적되었습니다.
셋째, 수도 이전이 장기적인 국가 비전(vision)이나 마스터플랜(master plan)도 없이 오로지 정권 유지라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동탁의 수도 이전은 새로운 왕조 개창이라는 의혹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대부분 공경과 제후들로부터 동탁이 공적(公敵)이 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반(反)동탁 연합전선(聯合戰線 : United Front)이 형성되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죠.
넷째, 한(漢)나라 조정은 장안-낙양으로 수도의 이전(移轉)과 환도(還都)를 되풀이하여 국가예산을 탕진했다는 점입니다. 동탁이 죽은 후 장안이 수도 구실을 제대로 못 하자 또 다시 낙양으로 또 수도이전을 하였기 때문이죠. 이것은 국가 예산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낭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로써 한(漢)나라 정부는 자체적으로 정부를 유지하기도 힘든 재정적자(財政赤字) 상태에 봉착하여 정부(政府)가 군벌(軍閥)에 의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수도 이전은 동탁의 대표적인 실정(失政)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다 유연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면서 추진해야할 국가적인 과업을 오로지 정권의 안정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수행하다보니 생긴 당연한 결과이지요.
② 동탁의 경제개혁
동탁은 수도 이전과 더불어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화폐개혁은 현재의 화폐개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일단 일반적인 화폐개혁을 간단히 살펴보고 동탁의 화폐개혁을 봅시다.
화폐개혁은 통상적으로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숨겨진 돈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거래를 증대시키고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시행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경제규모가 커진다거나 인플레이션이 심할 때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 한 나라의 화폐를 가치 변동 없이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표현하거나 이와 함께 새로운 통화단위로 화폐의 호칭을 변경시키는 조치)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동탁의 화폐개혁과는 다른 경우입니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화폐개혁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사실 화폐개혁이 필요한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혼란이 극심할 것이라는 점이 문제지요. 제 생각에는, 일시에(또는 급격히 짧은 기간에) 디노미네이션 즉 '1천원 = 1원(또는 1환)'이라는 식으로 추진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명칭 예를 들면 1천원 = 1□이라고 하여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두 화폐를 동시에 사용하여 서서히 통화단위를 바꾸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환은 이미 사용했던 소액의 명칭이라 좋지 않고 가령 온(On : 백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 10원 짜리의 1백배라는 의미)이나 보(寶 : Bo)와 같은 전혀 다른 명칭은 어떨까요? 외국인들이 부르기도 좋고 쓰기도 좋으니까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원화가 퇴장하고 새로운 화폐 □화가 전체 화폐로 자리 잡을 수가 있습니다(과거 널리 통용되던 1원 짜리 지폐나 동전이 자연스럽게 퇴장하지 않았습니까?). 미국도 센트(cent)와 달러(dollar)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회적 비용이나 혼란을 줄이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화폐개혁이 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화폐개혁의 성공에는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정치적 의도를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화폐개혁의 이유는 정치적 동기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① 거래를 활성화 하려는 의도, ②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억제, ③ 기장(記帳 : 장부를 기록함)의 간소화 등의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지하에서 음성적으로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자금(또는 정치자금)들을 양성화하려한다는 것입니다.
동탁이 화폐개혁을 하려 한 의도는 기본적으로는 서민경제(庶民經濟) 활성화 대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탁은 아사(餓死) 상태에 빠진 서민경제의 부활을 도모하고 기득권 세력이 가진 음성적인 방대한 자금들을 끌어내어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상품 거래를 원활히 하여 경제성장을 추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로써 전란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회복시키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탁은 구리로 만든 각종 장식물과 종들 및 종을 다는 틀(鐘虡)을 녹여서 작은 동전(신화폐)을 만들었습니다(이 점을 보면 동탁은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동전의 무게는 5푼 정도라서 가벼워서 휴대하기 용이했으며 문자나 무늬가 없고 닿거나 갈아지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상품의 유통을 촉진시켜 서민경제를 활성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려한 것이지요(悉椎破銅人 鐘虡 及壞五銖錢 更鑄爲小錢 大五分 無文章 肉好無輪郭,不磨鑪 : 위서 동탁전). 이를 보면 동탁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경제개혁을 단행한 셈입니다. 이것으로 그는 낙양(洛陽) 지역의 민심을 잡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④] 한나라 때의 화폐
그러나 화폐 개혁은 어느 시대나 성공하기 힘든 위험한 정책입니다. 왜냐하면 화폐개혁은 국가 시스템 변경에 따른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은 국민들의 불안심리(不安心理)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화폐를 해외에 유출시키거나 부동산으로 이전함으로써 자신의 화폐가치를 유지하려 합니다[경제에서는 화폐의 불법적인 해외 유출이나 급격한 퇴장(退場)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이내 주식가격의 하락과 경기 침체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책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지 못하고 상황만 악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전란이 심할 때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 동탁은 지나치게 조급하게 경제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평화 시의 화폐개혁도 성공하기 어려운 판에 어지러운 시대에 화폐개혁을 단행한 동탁정권의 경우는 실패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화폐를 제조할 때는 반드시 실물경제(實物經濟)의 생산기반이 이를 받쳐주어야 합니다. 화폐개혁이라고 해서 생산물은 일정한데 돈만 찍어내서는 안 되지요. 왜냐하면 화폐(돈)는 그 나라 생산물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탁의 경우, 여러 차례 전란으로 생산시설이나 생산력(生産力) 자체가 황폐해있는 상태에서 화폐의 통화량만 많아지니 자연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Inflation :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요. 다시 말해서 상품은 귀하고[品貴] 돈만 유통되고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결국 상품이 귀해지고 물가는 뛰어서 곡물 한 석이 수십 만전이 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서 동탁의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이 납니다(于是貨輕而物貴 穀一斛至數十萬 自是後錢貨不行 : 위서 동탁전). 이것은 동탁이 전체적인 경제적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고 너무 개혁을 서둘러서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화폐개혁을 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매우 개혁적인 것이죠. 구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로 인하여 동탁은 세 가지 시련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① 기존의 의식(儀式)을 위해 만들어진 많은 기념물을 파괴하여 동전을 제작함으로써 낙양 사람들의 분노를 샀으며, ②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고, ③ 물가상승으로 인하여 하층민까지 지지를 상실하게 된 것이죠.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동탁은 개혁 의지가 대단히 강한 실용주의(實用主義) 정치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개혁이라는 것이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서둘러서 경제도 후퇴시키고 민심도 이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3) 동탁의 죽음**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동탁의 개혁은 갑작스런 그의 죽음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동탁의 죽음은 그 어느 누구의 동정도 받지 못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동탁의 죽음을 묘사한 기록들도 동정적인 경우는 없습니다. 특히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동탁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동탁의 시체는 어찌나 살이 쪘는지 군사들이 그의 배꼽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이니 기름이 지글지글 끓어 땅바닥으로 넘쳐흘렀다. 오가는 백성들이 모두 동탁의 머리통을 발로 차고 시체를 짓밟았다(卓屍肥,看屍軍士以火置其臍中爲燈,膏流滿地.百姓過者,莫不手擲其頭,足踐其屍 : 나관중 '삼국지' 9회).
나관중 '삼국지'의 묘사는 '후한서'의 기록과 거의 같습니다[다만 '후한서'에는 "오가는 백성들이 모두 동탁의 머리통을 발로 차고 짓밟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후한서'에서는 "원소 집안의 문생들이 이리저리 잘려나간 동탁의 시신(屍身)을 끌어 모아 불에 태우고 그 재를 길 위에 뿌렸다(후한서 : 동탁열전)"고 합니다(이전에 동탁이 50여 명의 원소 일가들을 살해한 적이 있습니다).
정사에서도 "이각과 곽사가 다시 정권을 장악한 후 왕윤을 죽여서 저자에 널었고 동탁의 시신을 미현에 매장했는데, 거센 바람이 불고 사나운 비가 내리쳐 동탁의 무덤을 진동시키더니 물이 무덤으로 흘러들어가 관을 뜨게 하였다(위서 : 동탁전).
이와 같이 나관중 '삼국지'와 '후한서'는 직접적으로 동탁을 비난하고 있으며 정사 '삼국지'에서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술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는 '삼국지' 이전 시대인 후한(後漢)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정사 '삼국지'보다도 최소 130여년은 늦게 나온 책입니다. 그런데 정사 '삼국지'에서는 "동탁의 시신을 이각과 곽사 등이 수습하여 미현에 묻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 후에 나온 '후한서'에서는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남은 부분은 모두 모아 불에 태워져 길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어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점을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볼까요?
먼저 저술된 순서대로 동탁의 죽음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보겠습니다.
ⓐ 정사 '삼국지' : "(동탁이 죽자) 장안의 선비와 백성들은 모두 서로 경축하고 동탁에 영합했던 자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넣었다(위서 : 동탁전).
ⓑ 정사 '후한서' : "(동탁을 죽인 후 다른 사람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발표가 있자) 병사들은 바로 '만세'를 크게 외치고 (동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장안 성안의 모든 거리와 가게는 패물과 옷가지 등을 팔아서 술과 고기를 사먹으면서 서로 축하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후한서 : 동탁열전)"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후한서'는 정사 '삼국지'보다 훨씬 뒤에 저술되었는데 '후한서'의 내용이 정사 '삼국지'의 내용보다도 훨씬 풍부하고 생생합니다. 그런데 앞뒤는 맞지 않지요.
다시 말해서 '후한서'가 정사 '삼국지' 보다 훨씬 더 과장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정사 '삼국지'에는 "동탁이 죽었고 장안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서로 축하했고 후에 이각과 곽사가 동탁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정도인데, '후한서'에는 동탁의 시체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이고 불에 태워 길 위에 뿌린 것으로 되어있으며 또 모든 사람이 패물과 옷을 팔아 가며 신나게 즐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그대로 엄정한 사서로 정평이 나 있는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대에 갈수록 동탁의 죽음을 더욱 가혹하게 과장(誇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정사('삼국지', '후한서')나 나관중 '삼국지'는 모두 당시의 백성 누구라도 동탁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실제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역시 정사들의 숨겨진 다른 기록들을 이용하여 두 가지 각도에서 분석해 봅시다. 하나는 지배계층 내부에서 나타나는 동탁에 대한 시각, 다른 하나는 민중들의 동탁에 대한 시각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① 지배계층 내부의 동탁에 대한 평가
저는 앞서 동탁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나빴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타나는 상황은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채옹이 동탁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동정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채옹(蔡邕 : 132~192)과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동탁의 죽음을 아쉬워했다는 것은 동탁의 정치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후한서' 채옹전에 따르면, 채옹이 동탁의 죽음을 탄식하자 이로 인하여 왕윤의 미움을 사서 옥사(獄死)합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의 기록도 대동소이합니다. 이에 따르면, 채옹은 동탁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탄식하자 왕윤은 채옹을 크게 꾸짖습니다(蔡邕在王允坐 聞卓死 有歎惜之音 允責邕). 이에 대하여 채옹은 왕윤에게 사과하면서 월족(刖足 : 죄를 지어 발꿈치를 베는 형벌)의 형벌로 마무리해주면 여생을 한나라 역사를 완성하는데 바치겠다(願黥首爲刑以繼漢史)고 하자, 왕윤은 한무제 때 사마천(司馬遷)의 예를 들면서 어린 황제 주변에서 아첨하는 신하를 두어서는 안 된다(不可令佞臣執筆在幼主左右)고 거절하고 채옹을 죽이고 맙니다. 당시 많은 공경들은 채옹의 능력을 아깝게 생각하여 모두 이를 말리지만(公卿惜邕才 咸共諫允) 왕윤은 이를 거절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사대부나 공경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는 오히려 왕윤의 행위가 지나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태위(太尉) 마일제(馬日磾)는 왕윤을 설득했으나 듣지 않자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왕윤은 아마 오래 가지는 못 할 거요. 좋은 사람은 나라의 기강이요, 글을 짓는 것은 국가의 전고(典考)입니다. 그런데 기강을 파괴하고 전고를 부수고서야 어찌 이 정권이 오래 갈 수 있겠소? (王公其不長世短乎 善人國之紀也 制作 國之典也 滅紀廢典,其能久乎 : 후한서 채옹전)"
정사('후한서')의 채옹전에는 당시의 명성이 있던 사대부나 유생들이 이 소식(채옹의 죽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搢紳諸儒莫不流涕)고 합니다. 그리고 당대의 석학이었던 정현(鄭玄)은 채옹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제 채옹이 죽었으니 한나라의 역사를 누가 바로잡아 후세에 전해줄 수 있으리오?(漢世之事 誰與正之)"라고 하였습니다(후한서 : 채옹전).
물론 채옹의 경우를 가지고 지배계층 내부에서 동탁의 통치가 서서히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라도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다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채옹은 왕윤과 더불어 동탁정권의 실체(entity)이기도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② 동탁에 대한 민심
채옹과 같은 일부 지식층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심도 동탁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정사('후한서'와 '삼국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당시에 시중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었다고 합니다.
'천리초(千里草) 푸르고 푸르구나.
이제 열흘만 지나면 죽고 말겠지.'
여기서 천(千)ㆍ리(里)ㆍ초(艸)는 바로 동탁의 동(董)이라는 글자의 파자(破字)였기 때문에 동탁이 곧 죽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노래는 동탁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가는 길에 위급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노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웅기'에 한 도사가 있어 큰 베[布]에 여(呂)라는 글씨를 써서 동탁에게 보여주었는데 동탁은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又道士書布爲呂字以示卓 卓不知其呂布也 : 영웅기)고 합니다.
'후한서'에는 '사람이 있어 큰 베에 여(呂)라는 글씨를 쓰고 그것을 지고 걸어 다니면서 노래하여 말하기를 '포[布(옷감)을 사라는 말]'요 라고 하여 이를 누군가 동탁에게 알렸는데 동탁은 깨닫지를 못했다(有人書呂字於布上, 歌曰布乎 有告卓者 卓不悟 : 후한서 동탁열전).'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동탁은 한번 정(情)을 주거나 믿은 사람은 끝없이 신뢰한 듯합니다. 사실 동탁을 배반한 여포·왕윤 등은 누구보다 동탁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이 외에도 동탁의 죽음을 경계하는 일들이 '영웅기'에는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민심(民心)의 일부를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민심 중에는 동탁의 죽음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상당히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동탁의 죽음이 민중들의 일방적인 환영의 대상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동탁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았습니다. 동탁은 우연하게도 권력의 중앙에 진입하여 나름대로 큰 꿈을 꾼 듯합니다. 전문가들을 모으고 그들을 바탕으로 경제 개혁과 수도 이전을 단행하여 새 시대를 열려고 한 실용주의적 개혁주의자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탁은 중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매사를 지나치게 서둘다가 민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자신도 암살되고 맙니다.
그러나 동탁의 정치제도가 가진 의미는 큽니다. 무엇보다도 한나라 말기 인재들 대부분이 동탁이 장악한 권력 속에 있다가 동탁이 죽자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고 중원 천하를 두고 서로 대립합니다. 이것은 동탁이 한나라의 사실상 마지막 실권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동탁은 이전과는 달리 문민통치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군벌정치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다음 군벌들이 그 제도를 그대로 모방 발전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동탁의 행위들의 최대 수혜자는 조조(曹操)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탁이 정권을 전횡하고 자의적인 권력기구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조조도 전통적인 통치구조와는 상관없이 헌제를 영접한 후인데도 승상이라는 지위로 군부독재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조조는 중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나라 조정의 권한을 극히 제한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 쉬운 토대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본문에 '후한서'가 여러 종류가 나오고 있는데 제가 정사 '후한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범엽(남조의 송나라)의 '후한서'입니다. 이 책 이전에도 후한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많았죠. 사승의 '후한서', 사마표의 '속한서', 화교의 '후한서' 등이 있었는데 범엽은 이 책들을 참고로 하여 '후한서'를 편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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