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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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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8>

동탁 다시 보기(상): 공경과 제후의 공적(公敵) 동탁

***들어가는 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 : ?-?)을 아시죠. 의자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그가 거느렸던 삼천 궁녀(三千宮女)입니다. 이들은 백제가 멸망하던 날 낙화암에 몸을 던졌습니다. 의자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 왕으로 우유부단하고 음행(淫行)을 일삼은 군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의자왕의 모습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삼천궁녀는 '삼국사기'의 어느 구석에도 없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관련 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구당서(舊唐書)'에도 없는 말입니다. 삼천궁녀라는 말은 조선시대의 문인(文人)들이 감성적으로 사용한 문학적 수사(修辭)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의자왕에 대하여 계속 긍정적으로 묘사하다가 말년에 가서 "왕이 궁인과 함께 음황탐락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라고 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의지왕의 아들인 태자 융의 묘지석(부여박물관)의 기록으로 추정해보면, 의자왕은 40대 중반에 왕위에 올랐고 백제가 멸망할 즈음에는 거의 60대 중반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80대에 해당합니다. 궁녀들과 음행을 일삼거나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나이가 아니죠.

실제의 의자왕(義慈王)은 이름 그대로 의(義)롭고 자애(慈愛)로운 훌륭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의자왕은 직접 지방을 돌며 민정을 살폈고, 죄수들도 돌보는 등 어진 품성을 가졌으며, 빼앗긴 고토(故土)를 회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고, 일생을 바쳐 백제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려한 왕이었습니다. 다만 당(唐)나라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라는 말이죠. 물론 의자왕에게 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사('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의자왕이 음탕하고 오직 주색잡기(酒色雜技)만을 일삼아서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 의자왕은 안정된 내정(內政)을 바탕으로 신라를 크게 압박하였기 때문에 이에 견디지 못한 신라(新羅)는 국운을 걸고 대당외교(對唐外交)를 하였고, 당나라는 숙적(宿敵) 고구려를 꺾을 기회를 얻자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백제를 버리고 신라와 연합한 것이지요. 결국 백제의 멸망은 국제정치관계에서 파생된 비극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의자왕에 대한 기록들은 우리를 난처하게 합니다. 이 기록들을 안 믿을 수도 없고, 믿자니 너무 불합리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정사라고 부르는 사서(史書)들에서 이 같은 불합리한 서술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같은 불합리한 서술들은 왕조 교체기(권력 교체기)에 주로 나타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왕조나 권력 교체기에 이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歷史)란 기본적으로 승자(勝者)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무력으로 승자가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명분이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 이 전의 마지막 군주에 대해서는 온갖 중상모략을 할 수밖에 없지요. 이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고, 긍정적으로 볼 까닭 또한 없습니다.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왕조의 개창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그 왕조(또는 권력)를 유지하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자기 이전의 왕조에 대하여 가혹하게 폄하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1) 서러운 마지막 군주**

그 동안 저는 정사를 기준으로 하여 나관중 '삼국지'의 허구성을 지적해 왔습니다. 여러 분들이 그러면 정사는 과연 완벽히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정사란 많은 학식과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당대의 석학(碩學)들이 편찬한 것이므로 가장 신뢰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사의 내용 가운데서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은 몇 군데씩 나타납니다. 특히 국가가 멸망할 시점의 마지막 군주 또는 공적(公敵), 즉 모든 사람들의 적이 되는 사람이 나타날 경우에는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집니다[물론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부분에서도 이 같은 서술이 나타나지요]. 제가 보기에 정사(진수의 '삼국지')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나타나는 듯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손호(孫皓)입니다.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孫皓)에 대한 정사의 평가는 "형벌을 남용하여 죽거나 쫓겨난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신하들과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정사에 따르면 손호는 연회를 열 때마다 모든 사람들을 완전히 술에 취하게 하여 그들의 실수를 유발하게 만들고 잘못하는 것을 살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회가 끝난 후 서로 무고를 하게 만들었다고 하지요. 또 황궁(皇宮) 안으로 물살이 센 물을 끌어들여 궁녀들 가운데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그 물에 흘러가게 했으며 어떤 때는 사람의 얼굴을 벗겼고, 어떤 때는 사람의 눈을 뽑기도 했다고 합니다(오서 : 손호전).

글쎄요 저는 바로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네요. 다른 부분은 그렇다 하더라도 궁녀는 황궁의 중요한 노동력인데 아무리 폭군이라지만 얼굴이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죽여 물에 버린다니요? 이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궁녀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문직 여성이죠. 예를 들면 요리전문가·미용전문가·세탁전문가·패션디자이너· 향수전문가·보신전문가·의사·황실경제 전문가·육아 전문가 등등인데 아무리 정신 나간 황제라도 이들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잔인하게 죽일 사람이 있을까요? 이들을 죽이면, 그만큼 노동력의 손실이 나타나 막대한 비용이 다시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손호의 입장에서 궁녀들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이자 보위계층인데 그들을 적대시하면 암살 위험성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더구나 이 시기는 국가적인 비상사태인 상태가 아니었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지나친 묘사라고 판단됩니다.

손호가 등극했을 때(265)는 오나라는 이미 극심한 정변에 시달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손호가 수습하기에는 벅찬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촉이 멸망(263)하여 국경지역에서는 심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나라의 많은 장수와 관리들이 위나라에 투항을 하고 있는 상태였지요[이런 경우는 워낙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정사 '삼국지'(오서 손호전)와 진서(晋書) 무제기(武帝紀)에 상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마치 침몰할 배에서 쥐들이 몰려나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나라 조정이 거의 공황(panic)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적으로 모반사건에 의한 죽음이 많았고 많은 사람이 위나라로 투항하였는데, 그것은 위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손호가 광포해서 위나라로 간 것이고 손호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손호는 국체(國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같이 위나라에 투항하려는 움직임을 빨리 파악하여 사전에 차단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사실 위나라에 투항한 사람들은 위나라의 침공 가능성이 상존한 상태에서 개인의 안전을 위해 위나라로 투항해간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즉 손호가 황제로 있었던 시기(265~280)는 진(晋)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만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다 양국의 국력 격차가 워낙 심하여 오나라의 조야(朝野)는 항상 어수선한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 시기에 오나라는 여러 차례 연호(원흥-감로-보정-건형-봉황-천책-천새)도 바뀌고 대사면(265, 267, 269, 270, 272, 273, 275, 278, 280)을 실시합니다(오서 : 손호전). 이것은 흐트러지는 국가 기강과 체제를 다시 잡고 민심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죠. 아마 중국 역사상 15년 동안 연호를 7번이나 바꾸고, 대사면을 아홉 번이나 실시한 황제는 오나라의 손호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민심을 수습하려고 안간 힘을 쓴 사람이 자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궁녀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같은 기간에 진(晋)나라는 연호가 두 번 바뀝니다(태시-함녕). 그리고 사면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기근(饑饉)으로 약간의 사면이 있었고, 익주(益州)의 남부지역을 영주(寧州)로 나누면서 사면을 실시합니다(271). 그리고 275년 연호가 태시(泰始)에서 함녕(咸寧)으로 바뀌면서 대사면(咸寧元年春正月戊午朔大赦改元)을 실시하는 정도입니다(진서 : 무제기).

이것을 보면 당시 오나라의 정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를 보여줍니다. 당시의 오나라는 손호가 수습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봐야합니다. 손호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공명정대한 육항(陸凱)을 중용하여 그의 간언(諫言)에 따라 정사를 돌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오나라의 멸망을 손호 개인적인 문제로 돌린다는 것은 다소 부당한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진수는 촉(蜀) 출신이지만 정사를 편찬할 때는 진(晋)나라의 사가(史家)였고, 그는 진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해야만 하는 타당한 명분(名分)을 분명히 제시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수는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에 대해서 이 같이 가혹하게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동탁은 어떨까요?

***(2) 희대의 살인마 동탁**

정사에 나타난 동탁(董卓 : ?~192)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폭군이자 희대의 살인마입니다. 주요한 부분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위서 : 동탁전).

① 동탁의 군대가 낙양에 출병하였을 때, 봄에 제사가 있어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모여 있었다. 그런데 동탁의 군대는 (이를 모반으로 오해하여) 그 곳에 있는 남자들의 머리를 모두 벤 후 여자와 재산을 실은 그들의 수레와 소를 타고 잘린 머리를 수레 축과 바퀴에 매어 돌아왔다. 참수된 머리는 불태웠고 여자들은 사병들에게 주어 종이나 첩을 삼도록 했다.

② 동탁 자신은 북지(北地)에서 항복한 반란군 수백 명 속으로 들어가 앉더니, 그들의 혀를 자르고 손과 발을 절단하고 눈을 뽑아 큰 가마솥에 삶았다.

③ 동탁은 낙양성을 모두 불태우고 능묘를 모두 파헤치고 진귀한 물건들을 모두 탈취하였다.

이상을 보면 마치 로마의 네로 황제를 보는 듯합니다. 정사에 의하면 동탁은 성격이 잔인하고 비정했으며 가혹한 형벌로 사람을 위협하고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복수하였다고 합니다. 동탁은 형벌의 적용에도 일관성이 없어 사람들이 서로 무고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서로 마주치면 눈으로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탁은 자기 친척들로 조정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동탁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정사를 살펴보면 동탁은 낙양에 와서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한 번 보고 넘어갑시다(위서 : 동탁전).

① 젊은 시절 의로운 일을 즐겨하였고 강족과도 잘 어울렸으며 진심으로 그들과 교류하여 강족의 우두머리들은 천여 마리의 가축을 동탁에게 주기도 하였다.

② 동탁은 재능이 있고 용감했으며 두 개의 화살 통을 차고 말을 탄 상태에서 좌우로 활을 쏠 수 있었다.

③ 동탁은 큰 공을 세워 비단 9천 필을 받았는데 이것을 모두 관리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④ 동탁은 탁월한 전략으로 강족의 군대들을 궤멸시켰다.

이와 같이 적어도 동탁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으로 정사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본 대로 낙양에 입성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후의 동탁에 대한 기록은 사람이 상상하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마치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의 기록을 보는 듯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제부터 이 점들을 분석해 봅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기록들은 진수가 저술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의 위나라 사가들이 편찬한 것을 진수가 편집한 것입니다. 즉 원래 정사의 기초가 된 것은 왕침(王沈)의 '위서(魏書)'나 어환(魚Ο)이 개인적으로 편찬한 '위략(魏略)' 등입니다. 왕침은 위나라의 대신으로 조방(曹芳 : 위황제) 때 시중(侍中)을 지낸 사람입니다. 정사의 주석에 많이 나오는 '위략'은 감추는 부분이 많아서 후세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위나라의 대신의 입장에서는 위나라의 사실상 건국자인 무제(조조)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한나라의 마지막 군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나라가 삼국 통일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에 대한 중상모략에는 다소 한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나라가 새로 건국한 것을 옹호하기 위해서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를 무능하거나 황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으로 몰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 헌제는 조조의 손아귀에 있는 하수아비 황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대안이 필요합니다. 즉 조조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의 정부가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렇게 해야만 조조 정권의 명분이 서게 되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가장 적절한 사람이 바로 동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동탁이 손호와 같이 마지막 군주로서의 역할을 해주어야만 조조 정부의 명분이 선다는 말입니다.

동탁이 중원 사람들의 표적이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동탁이 중원 사람들과 상당한 이질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중원 사람들은 동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동탁은 서량 출신의 사람으로 한족들에게는 도저히 인정받을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동탁은 농서(隴西) 임조(臨洮) 사람으로 하동(河東) 태수를 거쳐 병주목을 지낸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장 중요한 접적(接敵) 지역의 야전군 사령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림 ①] 삼국지 주인공들의 출신지도

동탁이 차별을 당한 것은 가후가 차별을 당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실력은 막강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한나라를 위협한 것은 서량를 통해서 들어오는 유목민들인데 이들의 지역에서 동탁은 한나라를 방어하는 중책의 임무를 맡았으므로 이들의 군사력은 한나라 최강일 수밖에 없지요.

'구주춘추(九州春秋)'에 따르면 동탁이 낙양에 들어올 때 보병과 기병을 합해도 3천명이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卓初入洛陽,步騎不過三千)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성밖으로 나가서 군기와 북을 치며 시위하여 사람들이 동탁의 군대가 많은 것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합니다(輒夜遣兵出四城門 明日陳旌鼓而入 宣言云 西兵復入至洛中 人不覺).

위의 사실을 보면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탁이 겨우 3천 명 정도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 군대는 정예부대로 매우 강병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적은 군대를 대병(大兵)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봐서 동탁은 매우 명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정사에서 동탁과 관련된 부분 가운데 허구일 가능성이 있는 결정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탁이 미오(郿塢)를 세웠는데 높이를 장안의 성벽과 똑같이 하고 30년간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비축하였다(築郿塢,高與長安城埒 積穀爲三十年儲 : 위서 동탁전)."

'영웅기(英雄記)'에서 말하기를 "미오는 장안으로부터 267리(郿去長安二百六十里)가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미오는 장안에서 대략 1백여 km 떨어진 곳인데 (불과 1~2년 만에) 장안의 성벽과 똑 같이 건설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죠[이 정도의 거리라면 서울에서 거의 대전(大田)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30년간의 식량을 비축했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동탁이 낙양에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의 장안과 그 주변의 관중 지역은 상당히 피폐한 지역이었습니다. 아무리 백성의 고혈을 짜내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장안으로 수도 이전을 하고 난 뒤 수습할 일도 태산 같을 텐데, 미오성을 장안의 성벽과 같이 지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까요? 제가 보기엔 최소 10년 이상은 걸릴 것 같은데요(아마 새로운 수도인 장안 성벽도 많이 허물어져 공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상황일 텐데 1백 km 떨어진 곳에 또 성을 수도 규모로 지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곽인 수원 화성(華城 :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경우를 봅시다. 화성은 기록(王朝實錄, 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1794년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대략 2년 8개월이 걸렸지요. 그런데 화성은 완전히 새로운 성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이미 토축(土築)되어있던 읍성(邑城)을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한 것이죠. 따라서 실제로 토축된 읍성이 없었더라면 그 공사 기간이 2~3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 당시에는 성곽축조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상태였습니다. 즉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성설(城說)을 설계 지침으로 하여 서양식 축성법인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기초로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등 고도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성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성은 동탁이 미오성을 건설한 것보다는 무려 1천5백여 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현재 서안(과거의 장안)을 감싸고 있는 명고성(明古城, 밍구청)은 높이 12m, 둘레 14km, 폭은 12~18m로 이 성은 1370년(명태조 3년)에 공사가 시작하여 1378년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즉 8년이 걸린 것이죠. 이 성은 고대 성벽들 가운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성벽으로 남경(南京) 고성과 더불어 중국 양대 고성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 또한 '삼국지' 시대와 비교해보면 무려 1천년 뒤의 이야기입니다.

'삼국지' 시대에 비교적 가까운 시대로 성을 잘 쌓기로 유명했던 고구려의 경우를 봅시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중국 수나라의 도성제를 참고하여 현재의 평양일대에 건설한 것이라고 합니다. 평양성은 552년(양원왕 8년)에 쌓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34년이 지난 586년(평원왕 2년)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됩니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구려 도읍은 통수에서 대성산 일대의 평양으로, 다시 장안성 일대의 평양으로 옮기면서 국력에 상응하는 도성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의 아파트 재건축 공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작은 규모라도 시멘트를 부어 짓는데도 웬만한 공사가 3년은 걸리지 않습니까?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제가 보기에 당시 기술로 장안성과 같은 공사를 했다면 규모가 작다고 하더라도 최소 10~15년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동탁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는 겨우 2~3년으로 그리 길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시 장안은 대규모 토목공사나 성곽공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즉 당시 장안은 극도로 피폐해 있고 불안하여 건축 물자를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30여 년간의 식량을 비축할 상황은 더욱 아니었지요.

화교(華嶠)의 '한서(漢書)'의 기록에 나타난 양표(楊彪)의 말에 따르면, "(장안은) 과거 왕망이 반역했을 때 큰 변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미적(赤眉賊)의 난 때 또 한번 장안은 불에 타고 백성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안을 떠나 유랑하게 되었고 백 가구 가운데 한 가구도 제대로 없으며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할 당시 수도를 굳이 낙양으로 옮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往者王莽簒逆 變亂五常,更始赤眉之時,焚燒長安,殘害百姓,民人流亡,百無一在。光武受命,更都洛邑,此其宜也)"라고 하고 있습니다.

동탁은 189년 낙양으로 들어와 190년 2월에 장안으로 천도(遷都)하였고, 192년 4월에 왕윤(王允)에 의해 살해되었지요. 만약에 정사에 나오는 대로 장안 성벽과 똑같은 높이의 성벽을 쌓고 미오궁을 쌓고 30여 년간의 식량을 비축하려면 최소한 10~15년 이상이 걸릴 텐데 동탁의 집권기는 2~3년 밖에 되지 않았고 장안에 있었던 기간은 불과 2년입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동탁에 대한 중상모략에 가까운 서술입니다.

[그림 ②] 장안(현재의 서안)에 남아있는 각종 성(城) 유적들

***(3) 군웅들의 공통의 적 동탁**

정사를 보면 동탁이 적어도 낙양에 들어와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사의 기록으로 판단해보면 동탁은 ① 성격이 의로우며, ② 지역민과의 유대를 돈독히 하였고 부하들을 매우 아낀 장수이며, ③ 탁월한 전술을 구사하여 대유목민 전투에도 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앞서 본 대로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면서는 온갖 포악무도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와 같은 사건 자체는 있었을지라도 그 사건들에 대한 서술이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특히 동탁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들을 분석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 강의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정사의 기록을 신뢰하여 동탁이 이 같은 포악한 일들을 다 행했다고 본다면 왜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네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동탁은 너무 준비도 없이 중앙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규합하는 데 실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조와 같은 중앙 귀족들도 당시의 중원 귀족들에 의해 배척을 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농서(隴西) 출신의 동탁을 대부분 사람들이 천하게 생각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 동탁은 중원(中原)의 정치문화(政治文化)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탁이 청춘을 보낸 곳은 주로 강족(羌族)들의 영역이었습니다. 이들은 티베트 계통의 민족으로 전투력이 강하여 상당히 중국화(中國化)되어 있었으면서도 중국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어떻게 보면 통일하는 만큼이나 다스리기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아무리 칼로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복잡한 성격을 가진 한족을 통치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이간계(離間計)에 능한 한족(漢族)의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 속에서 다혈질의 동탁이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셋째, 동탁은 무리하고 조급하게 한족(漢族)을 다스리려고 한 것이 오히려 부작용으로 나타난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벌백계(一罰百戒 : 여러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한 두 사람을 시범적으로 무거운 벌로 다스림)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한족들의 공분(公憤)을 사게 되어 공적(公敵)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중국과 같이 복잡한 세력이 어우러진 곳에서는 조조나 사마의와 같이 상당한 기간을 두고 서서히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동탁은 너무 서둘러 제위(帝位)를 넘보았고 구석(九錫)에 준하는 예우를 받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동탁의 결정적 과오입니다. 예컨대 조조는 천자를 영접(196년 1월)한 지 무려 17년 만에 구석을 받게 됩니다(213년). 그래도 순욱과 같은 일부 인사들이 강경하게 조조의 구석을 반대합니다. 이러한 복잡성을 동탁은 몰랐던 것입니다.

넷째, 동탁은 이전의 권력자들의 문제점을 알아내어 좀더 지속적이고 안정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중심으로 한 독재권력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나라의 전통적인 정치제도를 함부로 바꾸어 버렸는데, 그것이 많은 공경(公卿)들이나 중신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된 것 같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최고의 관료들인 삼공(태위·사도·사공)과 상서 이하의 관료들은 동탁이 거처로 와서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召呼三臺尙書以下自詣卓府啓事 : 위서 동탁전). 이것은 정치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즉 군벌정치(軍閥政治)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동탁이 만들어간 기구는 조조 이후에 더욱 발달하여 권력의 새로운 형태로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되지요. 사실 동탁이 만든 정치제도의 가장 큰 덕을 본 사람은 조조(曹操)입니다. 동탁의 전례가 있으니 자기도 그와 유사한 통치제도를 만들기가 쉬웠을 테니까요[원래 한(漢)나라 때의 정치는 황제의 권력과 재상의 권력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즉 한나라의 경우 재상은 13조(十三曹), 황제는 6상(六尙) 등의 각자의 보좌진을 두고 있어 황제가 전횡을 할 수 없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나라 때의 통치제도는 현대의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와 다소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다만 황제는 종신제이고 재상은 일정한 임기가 있었다는 차이는 있지요. 그런데 동탁은 이 제도를 무시하고 군부(軍府)에 의해 13조와 6상을 모두 장악하려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군부 통치 즉 군벌정치(軍閥政治)이죠].

이와 같이 동탁의 문제는 낙양의 정치문화를 거의 몰랐던 데서 비롯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그저 "칼이나 무력으로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인 것이 동탁의 비극이었습니다. 이로써 동탁은 모든 제후들과 낙양 사람들의 공적(公敵)이 되어버린 것이죠[특히 장안에로의 천도(遷都)도 한몫을 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강의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림 ③] 낙양의 역사 유적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탁은 출신지가 양주 땅의 농서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탁이 죽은 후로 장안에서는 "양주 땅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말이 횡행합니다(長安中欲盡誅凉州人,憂恐不知所爲 : 위서, 동탁전). 이것은 당시의 중원 사람들이 양주를 포함하여 변경지방의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동탁이 왜 제후의 표적이 되었고, 또한 공적(公敵)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동탁의 가장 큰 문제는 중원의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탁은 무리하고 조급하게 한족(漢族)을 다스리려고 했고, 이것이 오히려 부작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에 안정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인 정치제도를 함부로 바꾸어 많은 공경(公卿)들이나 중신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중앙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경우 무엇보다 주의할 점은 서두르지 말고 중앙의 정치문화를 이해하고 서서히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해서 개혁을 한다거나 하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달성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면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달성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미움을 사 공적(公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동탁의 실패를 통해서 성공의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탁이 왜 공경(公卿)과 제후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강의에서는 동탁 정치의 실체와 동탁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에 대해서 상세히 분석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본문에 '후한서'가 여러 종류가 나오고 있는데 제가 정사 '후한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범엽(남조의 송나라)의 '후한서'입니다. 이 책 이전에도 후한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많았죠. 사승의 후한서, 사마표의 '속한서', 화교의 '후한서' 등이 있었는데 범엽은 이 책들을 참고로 하여 '후한서'를 편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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