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감나무가 흔한 이곳, 이슬 내려앉은 붉은 감이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남 먼저 잎 지우고 붉게 드러낸 열매, 꼭대기에 까치 보시용만 남기고 거두어지면 본체만 남게 될 터였다. 때가 그러하다. 어떤 때인가.
스님 한 사람이 운문 문언(雲門 文偃)에게 물었다.
― 나뭇잎이 시들어서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 본디 모습이 가을바람에 드러나느니라(體露金風).
무명을 어미로 삼았던 번뇌의 이파리가 다 지고, 분별로 그려 보이던 온갖 형상도 스러지고, 색(형상)에 끄달리던 온갖 미혹이 그치어져 고요할 때에 당체(當体)가 드러난다.
가을 법문의 내용이 그러하다.”
- ‘산야(山野)’님의 <체로금풍(體露金風)>에서
미리 동곳을 빼두는 얘기를 하자면, 위의 인용 글은 ‘무단전재’이다. ‘무단전재’를 하는 마음은 우선 조금 두렵다. ‘산야’님의 손에 들린 죽비 때문이다. 그러나 미몽을 깨우는 것이 바로 그 죽비이니, 매 값을 벌어서라도 그 죽비에 맞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어떤 인연을 통해, 사이버상의 대화명인 ‘산야’님의 원고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원고에 대해 얼마간의 품평을 해야 될 소임도 받았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늘 떠오르는 말, ‘체로금풍!’ 운문선사 일행의 문답을 전후로, ‘산야’님이 짤막하게 덧붙인 몇 마디의 글이 맑고 투명했다. 다가가면 베일 듯하다. ‘산야’님의 그 ‘체로금풍’을 빌리고 싶었다. 여기서 ‘당체(當體)’라 함은 ‘바로 곧, 그 본체(本體)’를 뜻하는 것으로, 달리 표현하면 ‘본디 모습’인 ‘진면목’이기도 하다.
가을이 벌써 깊었다. 봄비는 내릴수록 따뜻해지지만, 가을비는 내릴수록 추워진다. 춥다. 비가 사흘을 잇달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여름 철새인 소쩍새와 뻐꾸기, 호랑지빠귀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도 꽤 됐다. 모두 떠났다. 아직 떠나지 못한 자들끼리 남아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건만, 나목(裸木)과 같은 ‘본디 모습’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좀처럼 찾을 길이 없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이 산문적이라면, 이 깊은 산 속 도린곁에서 홀로 파도치듯 출렁이는 이 산전(山田)은 한 편의 시(詩)이다. 내 삶에 눈부시게 푸른 생명을 주고, 외로움을 주고, 눈물을 주고, 침묵과 선(禪)을 주고, 아침햇살을 주는가 하면 저녁노을을 주고 그리고 어머니를 준 이 산전은 한 편의 시이다.”
비망록을 들췄다. 산골로 들어와 맞은 첫 해의 어느 가을날, 무슨 유물처럼 남긴 글 한 편이 보였다. 다시 읽어보니 옛 생각에 가슴이 젖는다. 농사짓는 일은 삶의 방식을 뿌리 채 바꿨다. 글을 보니, 첫 해 농사였던 만큼 그 느낌이 사무쳤던 것 같다. 올해가 벌써 몇 해째인가. 돌아보니, 세월은 또 속절없이 그렇게 갔다. 지금의 산전은 예전의 그 산전과는 다르지만, 밭을 오고가는 마음이야 다를 수 있을까.
가을바람을 타는 것일까. 마을이 술렁였다. 언덕 위에서 하얀 집을 짓고 살던 부부도 마을을 떠난다고 했다. 몇 해 전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초등학교 시절의 짝꿍이었던 옛 연인과 재회해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았었다. 사슴목장도 축사를 모두 비웠다. 목장 주인은 말을 아끼고 있지만 역시 떠난다는 풍문이다. 부음도 들려왔다. 예전에 살던 마을의 한 노인. 굵게 패인 주름살에 검버섯으로 뒤덮인 그 얼굴은 얼마나 위엄이 가득했던가. 사람을 바라볼 때의 그 눈빛은 또 깊은 호수의 검푸른 물빛 같았었다.
“울지 마라, 풀벌레야
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이싸(一茶)
음력 초하루를 갓 지났다. 밤이 이슥하건만 달은 보이질 않았다. 풀벌레들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수선스럽다. 철써기와 긴꼬리가 앞장을 서고, 방울벌레도 사이사이 끼어들었다. 귀뚜라미 몇 마리는 마루 건너 빈방에서 아예 주인 노릇을 하며 울었다.
시인(詩人)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러나 어쩐지 오늘따라 이싸(一茶)의 시는 뭔가 석연치가 않구나.
무상(無常) 혹은 무상성(無常性). 나는 그 동안 그들과는 비교적 ‘사이좋게’ 잘 지내왔다. ‘무상’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그런데 올 가을엔 그 ‘무상’의 낌새가 심상찮다. 그 아름다운 진리가 허무랄지 상실감 혹은 스산함의 느낌으로도 오고 있는 것이다.
‘무상’이란 뭘까. 가장 흔한 뜻으로 쓰이는 게 바로 ‘덧없음’이다. ‘인생무상’ 따위에 쓰이는 그 무상이 바로 그렇다. 한편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다소 철학적이다. ‘생멸(生滅)의 변화에 상주(常住)함이 없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모든 사물에 내재된 본성 곧, ‘변해 가는 것’, 그것이 무상이다. 나는 ‘무상’을 늘 후자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변해 가는 것’이야말로 이 우주 삼라만상의 본성이며 또 존재방식이라고 여겨왔다.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어떤 변화를 구해보려 한 적이 있는가. 아마 어려웠을 게다. 그러나 설령 변화를 원치 않았더라도 ‘불변(不變)’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게 무상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변하는가가 문제일 뿐.
개화와 낙화 그리고 결실! 생성과 소멸! 생로병사(生老病死)!
달을 보라. 반달과 보름달, 다시 반달이었다가 그믐달 그리고 마침내 초승달!
그렇게 삼라만상은 늘 머무르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무상성의 상징으로 구름과 물을 든다. 그래서 운수(雲水)다. 운수의 본성을 드러낼 땐 또 행운유수(行雲流水)다. 운수납자와 운수행각이 여기서 나왔다.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랫말이다. 그렇다. 꽃도 달도 머무르지 않는다. 어떤 가수는 <그대여 변치 마오!>라고 절규하듯 노래를 불렀지만 ‘그대’는 변해간다. ‘그대’만 변해가는 게 아니라, ‘불타는 이 마음’도 세월이 가면 한 줌의 재로 남는다. 남인수는 욕심도 많았다. 별빛 아래서 ‘천년을 두고 변치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을 노래했다. 그러나 결국 그 님도 ‘야속한 님’이 되고 말았다.
어떤 천연 염색가의 말을 듣다가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옷감에 밴 그 천연물감이 햇빛을 받아 색이 바래가는 걸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백색(白色)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백색은 ‘무(無)’이고 모든 사물의 근원이지요.”
그는 옷이 갈수록 낡고 헤지는 것도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옷의 입장에선 그 모든 게 일종의 ‘자기완성’이라고도 했다. 듣고 보니 그곳에도 ‘무상’이 있었다. 아, 도(道)란 참으로 도처에 편재하는구나. 그러고 보면 도는, 찾아내는 사람의 몫임이 분명했다.
‘무상’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비선비악(非善非惡)이다. 호오(好惡)를 떠나서 존재한다. 그저 이 우주 삼라만상의 본성이요, 존재방식일 뿐이다. 나는 가을과 같은 계절이면 삼라만상의 그런 존재방식을 온 마음으로 절절하게 겪어냈다. ‘무상성’이야말로 ‘가을의 미학’이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상성을 다시 들여다보니, 나는 나를 속이고, 나는 나에게 속고 있었다. 무상성을 우주에 편재하는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또 그곳에서 사무치는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한편으론 ‘덧없음’을 뼛속까지 느꼈던 것이다. 그 ‘덧없음’은 자아(自我)의 가치관이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의 반영이었다. 이 가을에 무상성이 허무나 상실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무상성에 허무주의 따위가 스며들면 진리로서의 그 생명은 끝나고 만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상성이라고 하는 게 ‘변해가는 것’을 뜻한다면, 봄과 여름도 얼마나 무상한가? 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풀과 나무는 생명력으로 넘친다. 모든 게 절절한 변화다. 그대는 봄과 여름을 겪을 때도 ‘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법리상으로는 봄과 여름의 무상성도 가을의 그 무상성과 동일하다. 그러나 봄과 여름엔 그런 생각이 거의 없었다.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니 실상이 분명해졌다. 머릿속에서는 ‘무상성’을 우주 삼라만상의 본성과 그 존재방식이라고 보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덧없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봄과 여름날의 그 생명력 넘치는 변화는 그 덧없음과 무관했다. 나는 무상성에서 덧없음만 보고 진리는 바로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었다. 그 덧없음도 이를테면, 낙화나 소멸, 노(老)와 병(病), 사(死) 따위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허무와 상실감, 스산함 따위에 빠져들곤 했던 것이다.
생성과 소멸이란 무엇일까. 사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든 다른 만물이든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생로병사(生老病死)란 애초부터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개체의 생성은 다른 개체의 소멸과 표리를 이루고, 또 어떤 개체의 소멸은 또 다른 개체의 생성과 표리를 이룬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서 씨앗이 자라고, 또 낙화는 흙으로 돌아가 땅보탬을 한다. 생성과 소멸은 본디 둘이 아닌 하나였다. 생성과 소멸의 기준은 또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것인가.
인간은 ‘열흘 이상 붉은 꽃은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에서 덧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풀이나 나무가 이 말을 들으면 크게 놀랄 일이다. 낮에 있었던 소화(笑話)를 야심한 달밤에 귓속말로 나누며 웃을지도 모른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엄청난 긴장감과 함께 힘을 소진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무탈하게 마치고, 이를테면 벌과 나비가 날아오거나 아니면 바람이 불어와 짝을 맺어주면 그때부터 씨앗을 키운다. 꽃이 지면 그때부터 ‘아기’를 키우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이 ‘잉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듯 풀과 나무도 그러하지 않을까. 그러니 무지한 인간이 꽃이 진 것을 두고 덧없다고 말하면 그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까.
누군가가 물었을 때, 어느 고인(古人)이 답했다.
“어떤 것이 본래의 근원입니까(如何是源)?”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네(月落不離天)!”
월출(月出)과 월몰(月沒)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싸(一茶)여, 밤하늘의 별과 사랑하는 이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도 저 ‘고인(古人)의 달’과 같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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