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한족(漢族)의 대표적인 영웅이자 용의 상징인 한고조 유방(劉邦)은 거의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한번은 유방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을 칩니다.
이 때 한 농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척의(戚懿)라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납니다. 그래서 유방은 그녀를 첩실로 맞았고, 자신이 출정하는 길에 이 소녀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유방과 척의 사이에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 여인을 흔히 척부인(戚夫人)이라고 합니다.
유방은 척부인을 사랑하여 자신의 본부인이자 온갖 고초를 함께 겪은 여씨(呂氏)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척의는 신분이 미천했지만 여씨는 유방보다도 신분도 귀하고 부유했으며, 유방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여씨의 아버지가 유방의 인물됨을 보고 그 딸을 주려할 때 여씨의 어머니는 불평하였다고 합니다). 여씨는 한 마디로 조강지처(糟糠之妻)지요.
기원전 202년 유방은 초나라의 항우(項羽)를 격파하고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유방은 여의를 사랑하여 태자로 삼으려 하였지만 중신들의 반대로 여씨의 소생인 유영이 유방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됩니다. 그가 바로 혜제(惠帝)입니다. 이제 여씨는 여태후(呂太后)가 되어 실권을 장악합니다.
여태후는 자신의 연적(戀敵)이었던 척부인(戚夫人)의 머리를 삭발하고 논에서 일을 시킵니다. 그러자 척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여 자기 아들인 여의가 언젠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그러자 여태후는 여의를 불러서 죽인 후, 척의는 팔다리와 귀·코·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냈습니다. 또 목에다 음약을 부어 벙어리로 만든 후, 귀에다 약물을 부어 귀머거리가 되게 해 변소에서 돼지처럼 똥을 먹으면서 살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혜제는 2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여태후는 그 후로도 8년간을 철권통치를 합니다.
참으로 잔인한 일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발생할까요? 고대 여인들의 심성이 근원적으로 잔인해서일까요? 아니면 이 일은 여태후만의 개인적인 일일까요? 차라리 남자들이라면 잔인할지언정 단칼에 죽이고 말았을 텐데 도대체 고대 여인들은 왜 이렇게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복수할까요?
***(1) 손익의 아내 서씨의 복수 : ‘삼국지’의 크림힐트**
옛날 도나우 강 유역 부르군트 왕국에는 아름다운 크림힐트(Kriemhild) 공주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영웅들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네덜란드의 영웅 지크프리드(Siegfried) 왕자도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부르군트로 옵니다. 부르군트의 왕 군터(크림힐트의 오빠)는 아이슬란트의 까다로운 여왕 브륀힐트와 결혼하려 했는데, 지그프리드가 적극 나서 군터를 도움으로써 지그프리드는 크림힐트를 차지합니다.
그 후 크림힐트가 브륀힐트에게 모욕을 주자 이에 분노한 브륀힐트가 남편을 부추겼고 군터왕은 하겐을 시켜 지크프리드를 암살합니다. 남편이 죽자 슬픔으로 넋이 나간 크림힐트는 곧 군터와 하겐이 비열하게 남편을 죽인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됩니다. [그림 ①] 악몽을 꾼 크림힐드(목판, 1890 : F. Piloty의 작품), 지그프리드의 죽음(1845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의 작품)
크림힐트는 당시 유럽의 지배자였던 훈국의 에첼왕이 과부가 된 자기에게 청혼을 하자 에챌왕의 힘을 빌어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결국 크림힐트는 남편 지그프리드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살해당합니다.
이상이 유명한 ‘니벨룽의 노래(Das Nibelungenlied)’의 내용입니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중세 독일 기사문학을 대표하는 것이죠. ‘니벨룽의 노래’는 훈족(흉노족?)이 437년 라인 지방에서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킨 일과 453년 유럽의 지배자였던 훈족의 대왕 아틸라가 잠자리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게르만인 왕비 곁에서 급사한 일 등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 ②] 아틸라 대왕의 그림(1870년 작품 : 원제목은 Feast of Attila, 헝가리 국립박물관 소장)
그러면 나관중 ‘삼국지’에는 ‘니벨룽의 노래’와 같은 여인들의 복수극은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복수극의 주인공은 손익(孫翊 : 손권의 동생)의 아내였던 서씨(徐氏)입니다. 서씨는 암살당한 남편을 죽인 범인들을 미인계(美人計)로 유혹, 그들을 죽여서 남편의 한을 풀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 38회에 이 사건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손권의 아우 손익은 단양 태수로 있었는데 성질이 괴팍하고 술을 좋아하여 술에 취하면 군사를 때리기 일쑤였다. 이를 보다 못한 군사감독관 규람(嬀覽)과 군의 승지 대원(戴員)은 손익을 죽이려고 결심한다. 두 사람은 손익의 시자인 변홍(邊洪, 또는 邊鴻)과 내통하여 연회에서 손익을 암살한다. 그런데 규람과 대원은 즉각 손익을 죽인 죄를 씌워 변홍을 참수하였다. 두 사람은 손익의 시첩(侍妾)과 가산(家産)을 몰수하였는데 규람은 손익의 처인 서씨까지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씨는 “남편이 죽은 마당에 가릴 것도 없지만 남편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규람은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 때 서씨는 죽은 남편의 심복인 손고(孫高)와 부영(傅嬰)에게 두 가지를 주문한다. 하나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오군에 있는 시아주버님인 손권에게 남편(손익)의 죽음을 알리고 다른 하나는 규람과 대원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서씨는 규람을 은근히 유혹하여 깊은 밤에 자신의 처소에 오도록 한다. 규람은 욕정에 겨운 마음을 억누르며 돌아가고 서씨는 손고와 부영 두 장수를 은밀히 불러 자신이 규람을 내실로 그를 불러들이겠으니 그를 처치해달라고 하면서 큰절을 올린다.
그날 밤 서씨는 상복(喪服)을 벗고 꽃향기 진동하는 향물로 깨끗이 목욕한 다음 화장을 진하게 하여 요염한 자태로 몸을 감싸고(沐浴薰香 濃妝艶裹), 고급술과 안주ㆍ다과 등을 준비하였다. 이윽고 규람이 도착하자 서씨는 더욱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면서 독한 술을 권하여 규람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 때 서씨는 “손고·부영 두 장수는 어디에 계시오?”라고 하니 장막 속에서 손고와 부영이 나와 규람을 죽였다. 서씨는 대원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밀실로 유혹하여 죽였다.
서씨는 복수를 마치고 규람과 대원의 수급을 손익의 영전에 제물로 바쳤다. 손권은 손고와 부영 두 장수에게 아문장(牙門將)의 벼슬을 내렸고 서씨를 강동으로 모시어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했다.‘
어떻습니까? 마치 한편의 영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점들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고 과연 실제의 사건일까? 등등 말이죠. 아마 독자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대목은 너무 간략하여 보는 이가 아쉽지요(특히 제갈량의 삼고초려가 있는 부분과 겹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위에서 길게 인용한 것이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 사건을 따라서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먼저 서씨의 남편 손익(孫翊)은 날래고 과감하여 사람들은 형이었던 소패왕 손책(孫策)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손익은 태수 주치(朱治)의 추천으로 사공(司空)에 초빙되었고, 서기 203년 편장군이 되어 단양태수(丹陽太守)의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이 때 손익의 나이가 20세였습니다. 손익은 포부가 크고 천하의 대사를 도모할 만한 기개를 가졌지만 성격이 좀 급하여 신중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오서 : 손익전).
손권이 오군태수 성헌(盛憲)을 죽이자 성헌의 선임 효렴인 규람(嬀覽)과 대원(戴員)은 산으로 피신하였는데 손익은 단양태수가 된 후 대인의 풍모로 이들을 예의로 초빙하여 규람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병사를 지휘하게 하고 대원을 군승(郡丞)으로 삼았지요(오서 : 손소전). 아마도 큰 꿈을 가진 손익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혹시 강태공과 같은 역량이 있는 사람인지 어찌 아느냐고 반문하면서 이들을 기꺼이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였을 것입니다. [그림 ③] 단양(丹陽)의 현대 모습[현대의 선성(宣城)]
그런데 여기서 규람과 대원은 손익의 호의(好意)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손익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듯합니다. 즉 규람과 대원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성헌을 죽인 손권의 동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손권이나 손익은 주인을 죽인 무도한 자에 불과했다는 얘기지요.
정사에 따르면, 규람과 대원이 모셨던 주군은 성헌[盛憲 : 자는 효장(孝章)]이었는데 그는 공융과 가까운 사람이었고, 덕망(德望)이 높은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회계전록(會稽典錄)’에 의하면, 성헌은 도량이 크고 품행이 바르고 우아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器量雅偉) 효렴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오군태수에 이르렀으나 병이 있어 관직을 떠난 사람입니다. 나중에 이 지역을 손책(孫策)이 장악하고 난 뒤 성헌이 이 지역에서 워낙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그를 크게 꺼려한 것입니다(憲素有高名 策深忌之). 이런 사람을 손권이 죽였으니 규람과 대원이 그를 원수로 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대원과 규람은 기회만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침 오주(吳主) 손권이 출정한데다(因吳主出征), 관할 군내의 모든 현령이나 장수들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온 것이죠. 원래 손익은 항상 출입할 때마다 칼을 소지하고 다녔는데 하필 이 날만은 연회가 있는데다 손님을 전송해야 하기 때문에 칼을 소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틈을 노려 변홍은 손익을 살상용 도끼로 찍었고 손익은 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손익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죠[(吳歷曰) 翊出入常持刀, 爾時有酒色, 空手送客, 洪從後斫翊, 郡中擾亂, 無救翊者(오서 손소전 주석)].
손익을 죽인 변홍은 산으로 내달려 도망갔지만 손익의 아내 서씨는 침착하게 병사들을 모아 이를 추적하게 하여 변홍을 잡았는데, 규람과 대원은 손익을 살해한 죄를 물어서 변홍을 죽입니다[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에는 없지만 서씨 부인이 침착하고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이 상당하며 뛰어난 수습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정사에도 서씨는 점술에 능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서씨의 성격의 일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장수들은 이 사건이 규람과 대원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이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吳歷曰) 遂爲洪所殺 迸走入山 徐氏購募追捕 中宿乃得 覽員歸罪殺洪 諸將皆知覽員所爲, 而力不能討]. 그런데 이들이 손익의 가산과 시첩은 물론 서씨까지 노리자 서씨는 드디어 미인계를 이용하여 남편의 복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정사(‘삼국지’)를 통하여 자기 스스로 미인계를 자청하여 남편의 복수를 한 경우는 서씨가 유일합니다. 여인이 미인계를 이용하여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시련과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서씨가 스스로 미인계를 자청한 것은 서씨가 두뇌 회전이 빠를 뿐만 아니라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고 대담한 여장부의 속성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서씨가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당당한 여성 정치가로서 그 소임을 다했을 것도 같은데요.
여기서 나관중 ‘삼국지’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손하(孫河 : 손소의 백부)도 손익의 복수극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손하는 손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지요. 아무래도 상황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에 손하는 대원과 규람을 힐책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당황한 대원과 규람은 손하까지 살해하게 됩니다. 즉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원과 규람이 손익을 살해했다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물증(物證)이 없었는데 손하가 그들에게 피살됨으로써 그들의 범죄가 간접적으로 입증이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들은 즉각 (조조 휘하의) 양주 자사 유복(劉馥)에게 투항하려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이 둘은 서씨의 미인계(美人計)에 넘어가고 손고와 부영에 의해 살해당합니다(오서 : 손소전).
이상이 손익 암살 사건의 전모였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정사(오서)의 ‘오주전’· ‘손익전(孫翊傳)’· ‘손소전(孫昭傳)’· ‘손유전(孫瑜傳)’ 등에 흩어져 실려 있죠. 특히 손소전의 주석에 이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와 정사를 비교해보면 약간의 정황이나 사건의 전개과정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나관중 ‘삼국지’에 보면 수많은 여인들이 남편이 죽으면 적장(敵將)의 아내나 첩으로 들어가는데 만약 당시 모든 여인이 서씨같이 행동을 했더라면 ‘삼국지’의 그 수많은 주인공들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지 않았을까요?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거의 순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씨의 경우가 오히려 특이해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서씨의 복수극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규람과 대원이 손익을 죽인 문제입니다. 규람과 대원은 손익에 의해 중용(重用)되었지만 손씨 집안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왜 그럴까요? 위에서 본 것처럼 단순히 과거의 주군이었던 성헌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이 사건은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대원과 규람이 손익을 암살한 이유를 살펴봅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원과 규람이 명망가(名望家)였던 성헌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을 수가 있습니다(이 점은 앞에서 충분히 분석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손익이 어린데다가 능력에 비해 지나친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 대원과 규람이 손익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을 수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손익은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사람들을 참모로 데리고 있었던 것이죠. 손익은 규람과 대원을 강태공이나 장량을 생각하면서 초빙을 하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그 정도의 능력은 없었고, 처음에 산을 나올 때 규람과 대원은 손익이 마치 한고조(漢高祖)같은 도량을 가졌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손익은 그저 어리고 성질 급하고 욕심만 많은 사람에 불과했을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쌍방이 실망한 경우라고나 할까요.
정사(손소전의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오나라의 역사책에서 말하기를 규람과 대원은 변홍 등과 가까이 지냈는데 수차례 손익으로부터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자 늘 모반할 뜻을 품고 있었다. 마침 손권이 출정하게 되자 간사스런 계획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吳歷曰 嬀覽戴員親近邊洪等 數爲翊所困, 常欲叛逆, 因吳主出征, 遂其姦計)”
즉 손익은 규람과 대원을 영입할 때와는 달리 이들을 다소 핍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손익은 이들의 업무 능력에 실망했을 수 있고, 이들은 손익의 닦달에 피곤했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저러나 둘 다 서로 실망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대개 젊은 날에 지나친 꿈에 부풀어 일을 추진하다 보면 낭패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마흔 살까지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이 마흔 살을 흔히 ‘불혹(不惑)’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세상살이에 도(道)가 통했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죠. 즉 감상적이지 않으면서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해낸다는 것이죠. 젊은 날에는 이상을 통해 현실을 보지만 불혹의 나이가 되면 현실을 통해 이상(理想)을 보죠. 나쁘게 이야기하면 ‘보수화’의 출발점일 수도 있고 일종의 ‘제2의 사춘기’라고나 할까요?[제가 이데올로기 공부를 하면서 본 글 가운데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heart)’이 없고, 40대가 넘어서도 아직도 공산주의자라면 ‘머리(brain)’가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영웅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와 그 차이를 명쾌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알면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합니다. 어린 손익의 경우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분명히 알지 못했다는 것이죠. 같은 경우라도 조조나 유비라면 상당히 달랐을 것입니다(대원과 규람이 만약 조조나 유비 휘하에 갔더라면 자신의 능력을 1백 퍼센트 발휘했을지도 모르죠). 영웅들은 이상(理想)을 크게 가지면서도 현실(現實)에 대한 분석은 냉철하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영웅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듯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결과를 보면, 철저히 실리적으로 움직였다는 애기죠.
세상에는 수많은 영웅(英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웅의 자질을 가진 수많은 젊은이들이 손익의 경우처럼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라져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영웅의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좌절(挫折)을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꼭 가져야할 것 같습니다.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저는 이 점에서 쥴리어스 시저와 유방의 위대함에 새삼 경탄하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사십대까지 인생의 파탄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시저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을 보면서 신세를 한탄하고, 유방은 시황제(始皇帝)의 행렬을 보면서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러나 그 한탄을 통해서 이들은 굳건히 일어서 세상의 영웅이 되고야 맙니다.
[그림 ④] 쥴리어스 시저
***(2) 원소의 아내 유씨: ‘삼국지’의 메데이아**
그리스 신화에 메데이아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 악녀(惡女)지요.
신화에 따르면 그리이스 최초의 해외 원정대인 ‘아르고 원정대’에는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멜레아그로스·네스트로 등 그리스의 영웅들은 모두 모였습니다. 이 원정대는 콜키스의 황금 양털을 빼앗아 오기 위한 원정대였지요. 그들은 콜키스 왕의 딸인 메데이아를 유혹하여 그녀의 도움으로 황금양털 모피를 훔쳤고 메데이아와 함께 콜키스를 탈출합니다.
이 여인, 메데이아는 이들을 따라올 때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 인질로 자기 동생을 데려왔다가 난도질하여 죽이고 정적의 딸들을 사주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자신의 연적인 여인을 독 묻은 옷으로 죽이고, 바람난 남편을 증오하여 자기의 아이들도 찔러 죽이고, 궁전도 불태우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만행이란 만행은 다 저지른 여인입니다. 이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 전체를 통하여 가장 표독스럽고 잔인하며 용서할 수 없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이런 여인이 없을까요? 제가 보기엔 원소의 아내인 유씨(劉氏) 부인이 그런 여인입니다. [그림 ⑤] 분노하여 자기 아들을 죽이는 메데이아(드라클로와 그림)
정사(‘삼국지’)나 나관중 ‘삼국지’ 모두에 나오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잔인한 여인을 들으라고 하면 단연 원소의 아내였던 유씨 부인, 즉 유부인(劉夫人)을 들 수 있습니다. 유씨는 남편인 원소가 죽자 매우 잔인하게 원소의 애첩들을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원소가 관도대전의 패배 후 실의에 잠겨 많은 피를 토하고 실신하자, 유부인(劉夫人)은 이것을 기화로 자기의 아들인 원상(袁尙)이 원소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시 심배가 병상 앞에서 원소의 유언(遺言)을 받아썼고 장례를 주관하게 되었지요.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먼저 대사마장군(大司馬將軍)에 올리고 기주ㆍ청주ㆍ유주ㆍ병주의 4주목을 거느리게 한 다음 사방에 원소의 부고를 띄웁니다(나관중 ‘삼국지’ 32회).
[그림 ⑥] 원소의 근거지인 업도 인근의 한단의 현재 모습(업도는 현재 모두 농지로 변화됨)
한편 원소의 맏아들이자 원상의 배다른 형인 원담(袁譚)은 전선에서 조조군과 대치하다가 원소가 죽고 원상이 계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원담은 심배와 봉기 두 사람이 이미 계획된 수순(手順)으로 원상(袁尙)을 주공 자리에 앉혔을 것이니 지금 그 곳으로 가면 화(禍)를 입을 것이 두려워 일단 전선에서 군대를 되돌려 업도 성 밖에 주둔하면서 원상의 동정을 살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제간의 끝없이 이어지는 불화로 인하여 서로 싸우게 되었고, 결국 조조군에게 이들 모두는 궤멸당하고 비극적인 죽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미 관도대전이나 조조편을 통하여 해설이 된 부분입니다.
어떤 여인이든지 자기의 소생으로 남편의 뒤를 잇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에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지요. 여인들이 단순히 자신밖에 없다면 그만큼 잔인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자식들이 있는 여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과 자기의 아이들의 생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원소의 아내인 유부인(유씨 부인)은 원소의 장례를 치른 후 원소가 평소에 총애하던 다섯 명의 첩(妾)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동안 가슴에 쌓여있던 분노를 풀려고 한 것이죠. 그러고 난 뒤에도 유씨는 죽은 애첩들의 혼백(魂魄)이 다시 원소 주위를 맴돌 것을 염려하여 첩들 시체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을 짓이겨서 죽은 원소가 얼굴을 못 알아보도록 합니다. 그녀의 아들 원상은 그 어미보다 한술 더 떠서 그 애첩들의 가족까지 자기들 모자(母子)를 해칠까 두려워 모두 붙잡아 죽입니다.
이 내용은 정사(위서 : 원소전)나 나관중 ‘삼국지’(32회)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 사건은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시앗싸움의 결과 가운데는 아마 가장 처참한 복수극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원소의 부인 유씨가 한 행동은 매우 잔인하여 여태후(呂太后)에 비유할 수도 있죠.
유씨의 이야기는 여태후와 더불어 여인의 증오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제의 원인은 여러 여인을 거느린 원소(袁紹)에 있겠지만, 가부장(家父長) 사회에서 원소에 대해서는 반항하기 힘드니 그에 대한 분노가 라이벌로 옮겨가게 된 데서 오는 비극이지요.
원소의 아내 유씨는 지나친 행동으로 남편의 명예에 먹칠을 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결혼도 잘 해야 되겠습니다. 유씨 부인으로 인하여 원소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3) 적과의 동침**
언젠가 어머니가 “그래, 전생(前生)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여자로 태어난단다.”라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일생을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오신 신여성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의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오늘날에도 가부장적 구조에서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삼국지’ 시대의 여인들은 어떻게 살아갔을지 정말이지 짐작이 갑니다.
오늘날에도 아랍의 여러 나라나 인도 등 여인들의 삶이 고통스러운 곳은 매우 많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인들의 지위와 권리가 높은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라는 사실이지요. 세계 일부의 비문명화된 지역에서는 모계사회(母系社會)가 있어 외부적으로 볼 때는 여인들이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류학 저서들을 보면 실제의 권력관계는 그렇지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흔히 여인의 정절(情節)을 강요하는 유교적 가부장 사회는 남성적 자아(自我)가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허상(虛像)이 많은 법이죠. 유교적 가부장 사회의 주체인 남성은 이런 사회가 가장 행복하고 편리한 사회로 착각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들이 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오히려 허상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최근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세계 2위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통계청에 따르면 1970년대 2만 건에 달하던 이혼 건수가 2만9천여 건(1983), 5만 9천여 건(1993)에 이르더니 2003년에는 16만 7천여 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건수는 36만 9천여 쌍(1983), 40만 2천5백여 쌍(1993)이다가 2003년에는 30여 만 쌍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유교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한편으로는 답답한 일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에 관심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유교 국가는 다른 말로 하면 ‘남성들의 천국’이 아닌가요? 여성들이 살기엔 다소 부적합한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여성들에게는 온갖 정절(貞節)을 다 요구하면서도 남성들은 그 어떤 종류의 외도(外道)도 허용되는 환경이죠. 한국이나 일본 등 과거 유교가 강건하게 사회적 이데올로기 구실을 했던 국가일수록 음성적인 섹스 산업이 고도화되어 있습니다(과거 모택동 이전의 중국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나라는 아마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섹스 산업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면 상당히 도덕적인 듯이 보입니다. 한국에 오래 살아 본 외국인들은 한국의 다양한 매춘실태에 경악합니다[2004년 5월 한국의 사이버 수사대는 “한국이 미국에 이어 인터넷 포르노 세계 2위이며, 음란사이트가 6만 8천 개에 달하는 등 ‘음란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각종 음란물이 범람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유교란 인간관계(人間關係)를 극심히 왜곡(歪曲)하는 사고체계(思考體系)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실체(entity)가 가려지고 허상(虛像) 속의 인간관계만 보여주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여성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손찌검을 하고 바람을 피워도 그저 순종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죠. 송관재 박사(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는 이혼율이 급증하는 현상에 대하여 “여성 의식은 토끼가 뜀박질하듯 변하는데, 남성 의식은 거북이처럼 느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원소의 아내 유씨 부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유교적 가부장 사회가 가지는 극심한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교적 가부장사회를 포함하여 그 어떤 가부장 사회라도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인 어머니를 포함한 여성 집단에 대해 극심한 고통을 강요합니다. 여러 아내를 두고 있는 남자의 경우,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그 아내들은 정신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stress)를 받게 됩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는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남편이 죽으면 스트레스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가장 사랑해야 할 남편의 죽음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가부장 사회라는 것입니다[현대의 유력한 종교들은 물론이고 철학과 학문 등의 상당 부분도 아직까지 가부장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있지를 못합니다].
현대의 의학자들은 스트레스는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스트레스는 인체의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암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또 이혼과 같은 스트레스는 심장병 위험을 2, 3배 증가시키고, 각종 소화 장애·성기능장애·배변장애·불임·원형탈모증·호흡 곤란증, 심지어 피부 질환 등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여인들의 얼굴이나 건강은 결국은 그 남편이 만드는 작품과 같은 것이죠.
가부장 사회 하에서 아내를 여러 명을 둔 귀족 남편의 정실부인은 여러 시앗 때문에 더욱 스트레스를 받고 그 때문에 피부도 더 거칠어지고 기미와 주름이 생깁니다. 그러면 또 남편은 더욱 멀리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실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악순환 고리를 끊는 길이라고는 남편의 죽음밖에는 없는 것이죠. 물론 정실부인의 입장에서는 이 말을 남에게 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결말을 보면 명백합니다. 남편이 죽음으로써 자기의 아들이 남편을 계승하고, 그 권력을 기반으로 시앗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떤 분은 아마 저의 분석이 지나치다고 말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지’ 시대의 예만 들어본다면, 손권이 총애했던 비빈들 가운데 왕부인(王夫人)의 죽음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이 같은 단면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왕부인은 손화(孫和)의 생모(生母)입니다. 손권이 병들었을 때 “왕부인이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전공주(全公主 : 손권의 보부인의 딸)가 모함하자, 이로 인하여 손권이 왕부인을 크게 꾸짖습니다. 그러자 왕부인은 이를 근심하다 죽었다고 합니다(오서 : 비빈전).
왕부인은 실제로는 손권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당시 상황이 그랬거든요. 이미 총기를 잃은 손권은 장성하고 총명한 손화를 태자로 둔 상태에서 강보에 쌓인 아이(손량 : 손권의 반부인의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하는 움직임이 있으니 왕부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왕부인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그 같은 생각을 꿈에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아가야 하는 황실에서 어떻게 감히 그 같은 말이나 행동을 밖으로 표현하겠습니까? 특히 황제의 죽음을 운운하거나 황제의 병환을 기뻐하는 일은 가장 무거운 대역죄(大逆罪)에 해당하는 일이니까요. 단지 전공주는 자신의 계모인 왕부인을 죽이기 위해 악랄한 모함을 한 것이겠지만요.
문제는 손권의 판단입니다. 손권은 왕부인이 충분히 그럴만한 정황적 조건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아내가 언제든지 적(敵)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성들의 욕망의 천국인 가부장적 유교사회라는 것은 그 내부에 엄청난 비수(匕首)가 숨겨져 있는 것이죠. 외부적으로 보기에 남자들은 많은 여자를 거느려 자신의 욕망도 충족하면서 동시에 씨앗도 번성하는 구조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 내부에 숨겨진 비수는 그 씨앗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군주들의 자손들이 배다른 형제나 계모의 손에 죽어갔습니까?
제 분석을 듣고서 힘을 얻은 유씨는 아마 이렇게 강변할지도 모릅니다.
“김 교수 말이 맞아요. 이 보시오. 당신들은 날보고 가장 포악하고 모진 여자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저 여자들 때문에 날마다 괴로움과 질투로 밤을 지새운 사람이오. 나도 물론 저 여인들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소. 사실 다 따지고 보면, 죽은 영감(원소)이 내게 준 고통이지만 어쨌든 내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소.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그러면 사람들이 다시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산 사람이 당신뿐이오? 왜 유독 당신은 인격(人格)을 포기하고 그렇게 잔인한 짓을 했소? 당신 혹시 원래부터 ‘싸이코’ 아니야?”
다시 유씨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 마소. 나도 처녀 때부터 이렇지는 않았지요. 처녀 때 여태후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끔찍했소. 그런데 내가 여태후의 처지가 되어보니 생각이 달라집디다. 나는 나이가 들어 영감(원소)은 더 이상 나를 여자로 대하지 않고 저 어린 여인들을 희롱하며 밤을 보냈소. 1년에 두세 번도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이미 수십 번 죽이고 또 죽였소. 나이 칠십이 되든 팔십이 되든 여자(女子)는 여자(女子)요 ! 정말 사내들은 이것을 몰라요. 아마 당신들도 나의 처지라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요.”
저는 이 유씨 부인의 말이나 행위를 공감한다거나 동정한다거나 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유씨 부인이나 그 손에 죽은 수많은 여인들과 그 가족들은 가부장제도가 가진 이 극심한 모순의 피해자였다는 것이지요. 유씨는 원소가 살았을 때 극심한 피해를 받았고, 젊은 여인들은 원소 사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 뿐입니까? 시앗싸움으로 원소 진영이 패망하고 멸족 당했으니 원소 또한 피해자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잘못된 제도라는 것은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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