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1997년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동양인 아줌마 한 분을 보게 되었는데, 한국인은 아닌 듯 하였습니다. 중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Oh, You are Chinese, ma'am.”(오, 부인은 중국인이시군요.)이라고 했더니 그 아줌마는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I'm not a Chinese, I am a Taiwanese.”(저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저는 타이완 사람이에요.)
그게 그거지 뭐. 중국인(中國人)이나 타이완인(臺灣人)이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Any differences ?(무슨 차이가 있나요?)”라고 지나가는 말로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은 제가 중국인이 아니듯이 자기도 중국인이 아니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많이 놀랐지요. 아하, 내가 우리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타이완(臺灣)에 대해서 너무 몰랐구나. 이러니 수많은 미국인들도 한국이 중국의 일부이거나 과거 중국의 속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미국인 친구와 함께 영화 ‘목격자’(해리슨 포드 주연)의 무대였던 아미쉬(Amish) 마을에 갔을 때, 그 곳에서 만난 아미쉬의 농부에게 제가 한국(Korea)에서 왔다고 하니 그 농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같이 간 미국인 친구가 “그거, 있잖아. 중국 변방의 작은 나라. 버지니아 주(州)보다도 작은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야. 다만 지리적 영역이 작을 뿐. 현대 국가의 크기를 단순히 지리적 영역으로 보는 것은 무식의 소치지. 현대적 개념에서 보면 국가의 크기는 인구의 규모·경제 규모·GNP·교역 규모·국가 방위 능력·국제기구에서의 영향력(외교능력)·사회 안전망(사회복지) 구축 정도·국민교육 수준·과학발전 정도·R & D(연구개발비) 투자규모·국가브랜드의 인식정도·국제사회 기여도·인권보장과 민주화 정도·IT 산업 발전정도·국가정보화 정도·국가시스템의 안정성·사회적 균형 발전 정도 등을 두루 보면서 평가해야지. 그러면 한국은 미국의 10~15개 주 정도를 합한 크기는 될 거야. 한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야. 현대적 국가 개념으로 보면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 중국)보다는 큰 나라지.”
그런데 저는 이 말을 단지 그 미국인 친구에게만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만난 많은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도 이 말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 주눅이 든 한국인 유학생들은 “한국은 작은 나라여서(As Korea is a small country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과장스럽게 우리의 실체를 포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최소한 “있는 그대로”는 당당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대부분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그나마 아는 사람들은 한국(Korea)을 중국(China)의 한 지역처럼 이해하거나 중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1) 제갈량의 남만 정벌**
고교 국어 시간에 칠종칠금(七縱七擒)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갈량이 베트남으로 내려가 베트남의 왕을 일곱 번이나 잡았다가 놓아주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재미있게 들으면서 “야, 제갈량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 대학생이 되었지만 신군부 독재로 세상은 암울했습니다. 멋진 대학생활을 기대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저는 세상도 배울 겸 여러 차례 전국을 걸어서 유랑하였습니다(요즘 같으면 해외 배낭 여행을 갔겠죠? 당시에는 외국 가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요). 가볍게 최소한의 짐을 메고 하루 꼬박 걸어보니 많이 걷는 날은 30Km 정도가 됩디다. 해가 지면 빈집이나 마을 어귀에 있는 평상(平床), 때로는 밭두렁에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이 짓을 4, 5일 정도 계속하면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습니다. 다니다 보니 정말 팔을 달고 다니는 것도 무거울 지경이었습니다. ‘한양 천리 길에 눈썹도 떼어놓고 간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거지가 따로 없었습니다. 길거리 주막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얻어먹는 재미에 그럭저럭 다닐 수가 있었지요.
걷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무거운 군장(軍裝)을 메고 군인들은 어떻게 전쟁을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갈량이 베트남을 정벌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成都)에서 하노이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만도 대략 1천km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들은 온통 산악지대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산악지대에선 하루 5km가는 것도 어렵지요.
물론 국어 선생님이 잘못 아시고 말한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리저리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맹획은 베트남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제갈량은 겨우 현재의 성도에서 쿤밍(昆明 : 현재의 꾸이저우 쿤밍) 정도를 다녀온 것이죠. 그런데 이 길도 성도에서 직선거리로만 거의 3백km나 되는데다 험준한 산악지대라서 그 사실도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더구나 장강(양쯔강) 건너편을 두고서 남만(南蠻), 즉 남쪽 야만인(野蠻人)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심합니다.
쉽게 말해서 촉나라의 국경에 가까운 양자강 남안(南岸) 정도를 정벌한 것을 가지고 무슨 남만 정벌이라고 하여 중국 남쪽에 있는 각 나라들을 정벌한 듯이 떠든다는 것이 우습지요. 확실히 중국인들은 풍이 셉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제갈량의 남만 정벌을 여기서 모두 살펴볼 필요는 없겠지요.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건흥 3년(225년) 만왕(蠻王) 맹획(孟獲)이 만병(蠻兵) 10만을 거느리고 경계를 침범합니다. 건녕태수 옹개(雍闓)는 한나라 십방후인 옹치(雍闓)의 후예인데도 만왕과 결탁합니다. 장가군 태수 주포(朱褒), 월수군 태수 고정(高定) 등이 성을 바쳐 이들에게 투항했습니다. 이에 제갈량은 남정에 나서게 됩니다(86회). 여러 중신들이 제갈량의 친정(親征 : 직접 나서서 정벌함)을 반대했지만, 제갈량은 남만이 충분히 왕화(王化)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히 장완·비위·조운·위연 등을 데리고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제갈량은 반간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이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한편, 옹개· 고정은 서로 의심케 하여 고정이 부하들과 함께 옹개를 죽이고 투항, 익주태수에 임명되어 건녕·장가·월수 등의 삼군을 총괄토록 합니다(87회).
[그림 ①] 남만정벌을 떠나는 제갈량(드라마의 한 장면)
이어 제갈량은 남만 깊이 진격해 들어가는데 마속(馬謖)이 “남만은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고 산세가 험한 곳이니 항상 반란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합니다”라고 권고하자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제갈량이 맹획을 7번 사로잡아도 다시 놓아주자, 맹획은 감격하여 제갈량에 투항하고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남정(南征)은 끝이 나고 제갈량은 성도로 돌아옵니다(87-90회). [그림 ②] 제갈량이 맹획을 잡았다가 풀어주는 장면(드라마의 한 장면)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군대는 급류가 흐르는 노수(瀘水 : 현재의 금사강)를 건너다가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여 죽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이하(西洱河)라는 곳에서는 뗏목이 뜨지 않아서 대나무를 수십만 그루를 쪄서 물에 떠내려 보내기도 하고, 독룡동(禿龍洞)이라는 곳에서는 아천(啞泉)·멸천(滅泉)·흑천(黑泉)·유천(柔泉) 등의 독 있는 샘을 만나서 많은 장졸들이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팔납동주(八納洞主)인 목록대왕(木鹿大王)이 주문을 외우자 광풍이 불고, 모래와 바람이 일어나고, 짐승들이 떼 지어 공격하기도 합니다(87~90회).
여러분들 가운데 위에서 서술한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마치 모험영화인 ‘인디아나 존스’를 보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의 남만 정벌은 무려 87회에서 91회까지 5회에 걸쳐 있다는 것이지요. 번역된 나관중 ‘삼국지’로는 무려 1백 쪽 정도가 됩니다. 작은 소설 한 권이지요.
다만 위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다른 책들에도 나오고 있으니 참고로 살펴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옹개(雍闓)는 익주군 대성(益州郡大姓 : 익주군 유력호족)이지 건녕 태수는 아닙니다(촉서 : 후주전). 제갈량은 반란을 평정하고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바꿉니다. 고정(高定)은 월수의 이왕(夷王)인데(촉서 : 후주전), 원래의 이름은 고정원(高定元)이고 제갈량이 남정했을 때 그를 죽였다고 되어있습니다(華陽國志, 蜀志, 南中志). 맹획은 후에 촉에서 벼슬하여 어사중승(御使中丞)이 되었다고 합니다(華陽國志, 南中志)[화양국지(華陽國志)는 동진 시대의 저작물이라 정사보다는 최소 50년 이후의 기록입니다].
물론 제갈량의 남만정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는 이 대목을 너무 엽기적으로 묘사했고, 야만족들의 어리석고 염치없는 특성에 대조하여 중화민족(中華民族)을 대표하는 제갈량의 어진 품성과 도덕적 감화를 그리려고 무던히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나마도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하려다보니 거의 헐리우드식 모험영화나 와호장룡식 ‘무협지’ 또는 ‘서유기’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2) 제갈량의 남만 정벌 실제 모습**
그러면 정사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제갈량의 남만정벌에 관한 기록은 길지도 않으니 모두 인용해 보겠습니다.
① “225년 3월 제갈량은 남쪽의 네 군을 - 익주(益州 : 한나라의 9주 가운데 익주가 아니라 여기서는 군의 명칭임)·영창(永昌)·장가(牂牁)·월수(越嶲) - 정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익주군을 건영군으로 바꾸고, 건영군·영창군의 일부를 나누어 운남군(雲南郡)을 만들었고, 건영군·장가군의 일부를 나누어 흥고군(興古郡)을 만들었다. 12월 제갈량은 성도로 돌아왔다(촉서 : 후주전)”.
② “225년 봄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 정벌에 나서 같은 해 가을 전부 평정하였다. 군수물자가 새로 평정한 여러 군에서 나왔으므로 국가는 풍요해졌다(촉서 : 제갈량전).”
③ 선제(유비)의 명철함이 손상될까 두려워 (225년)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황무지 깊숙이 들어갔습니다(제갈량 출사표).
실제로 제갈량이 다녀온 기간은 불과 8, 9개월 정도입니다. 그리고 정사에는 맹획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몇 줄의 기록으로 나관중 ‘삼국지’는 맹획이라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인물로 거의 책 한 권을 만들고 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먼저 위의 지명들의 위치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익주(益州)는 현재의 운남성(雲南省) 진령(晋寧) 동쪽
영창(永昌)은 현재의 운남성(雲南省) 보산(保山) 북쪽
장가(牂牁)는 현재의 귀주(貴州) 황평(黃平) 서남쪽
월수(越嶲)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서창(西昌)
노수(瀘水)는 현재의 금사강(金沙江) : ‘후한서’ 이현(李賢)의 주에 의함
이 위치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③] 제갈량의 남정 위치
전체적으로 제갈량이 어느 곳을 원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입니다. 지도 오른 쪽 위에 있는 한반도 지도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대체적인 거리를 짐작할 수 있지요.
제갈량은 봄에 성도를 출발하여 월수를 지나 여름 (음력) 5월에 노수(瀘水)를 지나고, 영창을 거쳐 익주를 지나 장가를 정벌하고, 군대를 이끌고 성도로 돌아온 것이지요. 그림에서 보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바퀴 돈 셈입니다.
이제 이들 지역을 보다 상세하게 살펴봅시다. [그림 ④] 제갈량의 남정 노선도의 직선거리
[그림 ④]는 제갈량이 남정한 곳을 표시한 것입니다. 거리는 직선으로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20~30km 정도의 오차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성도를 출발하여 ㉠ 월수 → ㉡ 영창 → ㉢ 익주 → ㉣ 장가 → 성도의 순서로 돌아옵니다. 3월에 출발하여 성도로 돌아온 것은 12월이니 8, 9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5월에 노수를 건넜다는 것으로 보아 영창에는 7월경에 도착했을 것이니 정사의 기록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수는 월수와 영창의 중간 지대에 흐르고 있는 강입니다(모택동이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9개월 동안 제갈량이 간 거리를 모두 합산해보면 직선거리만 해도 2,110km가 됩니다. 오차를 인정하여 대략 2천km 정도의 거리를 다녀온 셈입니다(서울에서 하얼빈까지의 거리가 대략 1천km가 되니 이 거리를 왕복한 셈이 되겠군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이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대입니다. 평지의 경우 1일에 30~ 40km 정도를 걸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중간 중간에 상당한 휴식이 있어야만 8개월 이상의 원정을 갈 수 있습니다. 만약 남정로가 모두 평지였을 경우에 전투도 안하고 걷기만 걸어도 50~67일 정도가 소요됩니다. 즉 두 달이 소요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산악지대의 경우에는 하루 5~10km도 걷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400일~200일 정도가 걸립니다. 즉 하루 10km를 걷는다고 해도 제갈량의 남정로를 따라 전투 한번 없이 걷기만 하여도 최소 6~7개월이 소요됩니다. 정사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면 전투는 1개월 또는 1개월 반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분석은 병사들의 휴식기간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사람이 전혀 휴식도 없이 걷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죠). 그리고 위의 거리는 순전히 직선거리입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매우 험준하고 길도 제대로 없는 지역입니다. 그러면 제갈량의 군대는 최대로 잡아도 1개월 이상의 전투를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4개의 지역이므로 각 지구별로 전쟁을 했다고 하면 각 지구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 주일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갈량이 모든 군대를 인솔하지 않고 나누어서 공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한제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 : 위진남북조시대사 전공)는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제갈량의 남정 군사노선을 3로로 정리하였습니다.
㉠ 제갈량(諸葛亮)군 : 성도 - 월수 - 영창 - 익주 - 성도
㉡ 마충(馬忠)군 : 성도 - 장가
㉢ 이회(李恢)군 : 성도 - 익주
이 경우에도 위의 그림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죠. 즉 제갈량은 단지 장가 쪽을 지나지 않고 성도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익주 - 성도의 직선거리는 대체로 650km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제갈량군의 전체 남정 거리는 1,780km가 되어 이전의 분석(대략 2천km)과 대략 2백km 정도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20일~40일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생깁니다. 그럴 경우에는 대략 1개월 반 정도를 전투를 할 수 있겠죠. 서울에서 하얼삔(哈爾浜)까지 직선거리가 대략 1천Km가 되니 8~9개월 동안 하얼삔까지 전쟁을 하면서 왕복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림 ⑤] 수정된 제갈량의 남정도
어떤 경우라도 제갈량이 맹획을 7번씩이나 잡았다가 놓아주기는 불가능한 시간입니다. 당시에는 군용 트럭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각 진영의 병사들이 이동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보면 5~10 km 정도를 걸어서 싸우는 판에 7번씩 대전을 치를만한 시간이 없는 것이죠. 그리고 그 1개월 반의 시간 동안에 옹개와 고정을 죽여야 하는데 그 시간이 한 사람당 보름이 걸렸다면 맹획과 만날 시간조차도 없어지는 것이죠.
만약 옹개`고정과의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하면, 제갈량은 가장 길게 잡아서 1개월 반 즉 6주 정도를 맹획과 전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제갈량의 군대는 매주 한번 전쟁을 하고 맹획을 잡았다가 놓아주었다는 애기가 됩니다. 이 가운데 만일 휴식이라도 있으면 사나흘에 한번씩 전쟁을 한 셈입니다. 전쟁이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축구경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축구 선수들도 일주일에 한번씩 6주 동안에 A매치(국제) 경기를 하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낼 겁니다.
***(3) 맹획에 대한 입씨름**
저는 앞에서 맹획에 대해 존재여부가 불명확한 인물로 말씀드렸는데, 중국에서는 맹획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맹획에 대해 중국에서는 크게 ① 맹획이 있었고 칠종칠금도 있었다는 견해, ② 맹획도 없었고 칠종칠금도 없었다는 견해, ③ 맹획은 있었지만 칠종칠금은 과장이라는 견해 등으로 나뉩니다.
나관중 ‘삼국지’의 맹획에 대한 이야기는 ‘한진춘추(漢晋春秋)’에서 비롯됩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정사(삼국지)에 대하여 2백여 년이 지난 후 배송지가 달아 놓은 주석에 보면 맹획과 칠종칠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주석은 ‘한진춘추’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한진춘추’라는 책 자체가 이 시대(동진)에 나온 책치고는 특이하게도 촉을 정통으로 보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제촉구위론(帝蜀寇魏論 : 촉이 정통이고, 위나라는 정권을 찬탈한 도적으로 보는 설)’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는데, 주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은 이 설을 계승한 것이죠. 그런데 이 책은 오래 전에 망실되어 일부만 겨우 전하고 있습니다.
한진춘추의 내용 가운데 맹획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갈량이 남만정벌을 갔을 때 가는 곳마다 승전을 하였다. 맹획이 오랑캐와 한인 (漢人)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현상금을 걸어 사로잡았다. 그런데 맹획이 자신은 허실(虛實)을 몰랐으니 한 번 더 하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맹획을 7번 사로잡고 7번 풀어주었다. 그러자 맹획은 돌아가지 않고 “그대는 하늘의 위공을 가졌습니다. 우리 남인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七縱七禽 而亮猶遣獲 獲止不去 曰公天威也 南人不復反矣)”라고 하였다.
제가 보기에 이 ‘한진춘추’에 나타나는 맹획의 항목을 신뢰하기 어려운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족(漢族)의 지방 정권에 불과했던 촉한을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 중원의 대부분을 통일했던 위나라를 찬역(簒逆 왕위찬탈, 반역)했다고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한진춘추’는 후한(後漢) - 촉한(蜀漢) - 진(晋)을 정통으로 보았는데 사실 진(晋)나라야 말로 우리가 앞서 본대로 황위를 찬탈한 나라로 건국 명분은 위나라보다 훨씬 더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진(晋)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를 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의식이 대단히 강한 책이라서 이 책의 기록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둘째, 정사에도 없는 맹획(孟獲)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점입니다. 당시 촉에서 살았던 진수(陳壽 : 233~297)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을 터인데 맹획에 대한 일체의 기록이 없으며, 정사 이후 1백년도 더 지나서 등장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 그 지역에 살았던 진수는 맹획을 모르고 있고 1백년도 더 지난 동진(東晋 : 317~420) 사람은 맹획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죠. 설령 맹획이 분명히 실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진수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맹획이라는 인물이 기록 할 만큼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거나 그 역사적 역할도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한진춘추’가 주장하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것이 앞서 본대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맹획에 관한 기록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정세는 상당히 절박한 상태였는데 북벌에 바쁜 제갈량이 그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거니와 전쟁터에서 적을 섬멸해야할 주전략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동화(童話)와 다를 바 없지요.
그리고 이 지역들은 제갈량의 남정 이후에도 반란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월수군의 경우에는 태수가 부임을 못하고 8백여 리가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다고 합니다(촉서 : 장의전). 그래서 제갈량이 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잡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위군이 침공해왔을 때 일부 중신들은 남만 쪽으로 촉황제 유선(劉禪)이 피신할 것을 주청하자 초주(譙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만은 거리도 멀거니와 오랑캐들이 살고 있는 땅이라 평상시 조정에 세금을 바친 일도 없고 오히려 여러 번 모반하였습니다. 그들은 승상 제갈량이 군대로 핍박하여 어쩔 수 없이 귀순하였습니다. 이후 남만은 세금을 납부했으며 이것이 군대유지비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남만인들은 우리 조정을 원수(怨讐)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조정이 남만 땅에 의지한다면 이들은 다시 모반을 일으킬 것입니다.(臣愚以爲不安 何者 南方遠夷之地 平常無所供爲 猶數反叛 自丞相亮南征 兵勢偪之, 窮乃幸從 是後供出官賦 取以給兵 以爲愁怨 此患國之人也 今以窮迫 欲往依恃, 恐必復反叛 : 촉서 초주전)”
어째 내용이 우리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제갈량이 이 지역들을 군대로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핍박하였고, “(남만인들이) 촉한에 대해 원수처럼 보고 있다”는 말은 당시 이 지역의 민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정사를 보면 이 지역이 정정이 불안했으며 모반 사건도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나타납니다(촉서 : 후주전 참고).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맹획에 대한 이야기로 거의 한 권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가 실제 사건을 극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바꾸어 제가 소설가이거나 직업적인 이야기꾼이라면 상황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찬스지요. 오히려 사실이라고는 두 세 줄 밖에 없으니 제 마음대로 글을 써도 걸릴 게 없지요.
그러니 적어도 이 부분만은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기록이 많은 다른 부분을 쓰면 여기 걸리고 저기 걸리니 어디 불편하여 제대로 묘사가 되나요? 그러나 없는 내용을 쓰게 되면 성가시게 걸리는 것이 없으니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오직 작가의 상상력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죠. 그래서 책 한권을 써 내려간 것이지요.
저는 맹획의 존재 여부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학술적’ 입씨름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해설해드리고 싶은 것은 칠종칠금이라는 허황된 주장이나, 장강 넘어 있는 사람들을 야만족으로 취급하여 왕화(王化)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나친 중화민족의 사명의식입니다. 이것이 중화민족이 가진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 논리라는 것이지요. 마치 중화주의에 귀속되는 것이 선하고 도덕적인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4) 남중국과 중국의 확장 - 타이완 문제와 동북공정**
그렇습니다. 칠종칠금이나 남만정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중국 역사상 촉과 오가 중요한 것은 한족(漢族)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지속적으로 한족의 영역이 확장되었겠지만 삼국 시대만큼은 안 되지요. 왜냐하면 촉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중국의 서남부 지역을 집중적으로 통치하고 개발하였고 오나라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남(江南)의 비옥한 땅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여 중국의 영역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잠시 무서운 생각을 합니다. 만약 유비가 한반도로 도망쳐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촉나라가 우리나라의 평안도쯤, 또는 경기도쯤에 세워졌더라면 나중에 위나라는 조선 반도를 정벌하고 중국의 영역이 되었을 지도 모르죠. 설령 촉이 쫓겨나갔다고 한들 한번이라도 그 지역을 통치했다면 욕심 많은 중국인들이 그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요.
지나친 생각이라고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타이완(臺灣)의 경우를 봅시다. 원래 타이완은 중국의 영토가 아닙니다. 타이완은 일부 네덜란드와 스페인에서 지배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도차이나나 중국 남부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중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지역입니다. 중국인들이 말하던 그 남만인(南蠻人)들입니다[현재의 푸젠성(福建省)이나 광둥성(廣東省)에 살던 사람들도 남만이라고 불렀는데 하물며 타이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언어도 완전히 다르지요].
[그림 ⑥] 중국과 타이완
그런데 청나라 당시 청에 반대하던 명나라의 장군 정성공(鄭成功)과 그의 무리들이 청나라에 대항하다가 도망쳐 간 곳이 바로 타이완입니다. 정성공은 당시까지 타이완을 지배하던 네덜란드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마치 제갈량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대륙수복(大陸修復)’의 원대한 꿈을 키웁니다. 이 정성공은 제갈량만큼이나 중국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정성공은 영명왕(永明王 : 1625-1662)을 받들고 명나라 부흥운동을 한 한족(漢族)의 영웅입니다.
이 때문에 청나라는 이들을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타이완을 복속시켜버립니다. 이 때부터 타이완인들의 고난은 시작된 것입니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입니다.
그리고 그 후 모택동에 패배한 장개석이 대만을 점거하여 또 제갈량의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장개석은 타이완을 대륙 수복의 근거지를 삼고 대륙을 통일할 경우를 예상하여 모든 정치제도를 구성하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20%도 안 되는 한족들이 들어와서 토지도 몰수하였습니다[이 때 본토에서 유입된 한족들을 타이완에 이미 거주하던 사람(본성인 : 本省人)들과 구별하여 내성인(來省人)이라고 부릅니다].
이러다 보니 타이완인들의 저항이 없을 리 있습니까? 그러나 장개석은 이들 수많은 반체제 지식인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몇 백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5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일설에는 이들 반장개석, 반대륙(反大陸)을 표방하는 수 천 명의 지식인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합니다.
최근 중국 정부는 2008 베이징 올림픽을 포기하더라도 타이완의 독립은 불가함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중국 동남해안이 초토화되고 외국 투자가 감소하며, 경제가 후퇴하고, 인민해방군이 희생되더라도 타이완의 독립은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여기에 동북아의 복잡한 상황을 원치 않는 미국도 ‘대만독립 반대’를 밝혔습니다. 정말 우리는 타이완인들의 절망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갈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허황된 칠종칠금의 이야기나 그 칠종칠금의 대상이 된 맹획의 존재 여부보다는 그 맹획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중국인들의 의식구조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자국중심(自國中心), 한족중심주의(漢族中心主義)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고 있으며 이것을 주변국에 끊임없이 노골적으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또는 일본이 만약 그렇게 했다면 난리법석을 떨었을 사람들이 동북공정이 마무리 단계에 진입하는데도 점잖게 있는 이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지요.
사실 근본적으로 따져 본다면 ‘국사(國史)’라는 것은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고구려 역사는 그저 고구려 역사일 뿐이고, 국사의 굴레를 벗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이 말은 가치중립적이고 학문적 진실에 입각한 듯이 보이지만 학문적 진실이니 진리(眞理)라고 말하는 그 기준이나 방법론도 실은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가치나 진리의 개관적 기준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지요[자연과학조차도 진리에 대하여 즉자(卽自 : an sich)적이면서 가치중립적일 수는 없지요. 가설(hypothesis)을 세우는 순간, 그 시대의 가치 관념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특히 역사는 더욱 그렇지요. 하물며 국사는 말할 것도 없지요.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변증법적일 수가 있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요].
고대사 논쟁이 치열한 것은 한·중·일의 당대의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사가 고대사일 뿐이라면, 왜 소련(Soviet Russia)의 독재자 스탈린은 거의 9백년이 지난 징기즈칸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현재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왜 동북아 고대사 조작 프로젝트(동북공정)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무엇 하러 1천5백년도 더 지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해 내었겠습니까? 저는 또 왜 나관중 ‘삼국지’같은 삼류 소설을 핏대를 올리며 바로 읽자고 목청을 높입니까?
역사학이나 역사 프로젝트는 그 자체가 정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증적으로 특정 사실들을 규명한다고 해도 고대사를 둘러싼 각국의 대립은 종식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한국·북한·중국·타이완·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연대와 평화체제가 가능하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 같은 이상적인 ‘학술적 상황’은 이 나라들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거의 동등하고 고도로 발달된 수많은 가치중립적 시민사회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간에 갈등이 발생할 경우 이것을 중재해줄만한 국제적인 기구나 NGO(비정부기관)가 있고 그것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만약 시민사회 간에 갈등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기본적으로 국제사회는 아나키(anarchy : 무정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대라는 말이죠. 현실적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또는 타이완이 동등하게 역사를 민주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동화(童話)지요.
제가 보기에 설령 그 같은 상황이 되어도 역사학이 민주화될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정치적 통합을 앞 둔 유럽연합(EU)이 존재하는 현재 서유럽에서나 일부 적용 가능한 논리입니다[유럽의 통합은 철저히 서유럽이라는 지역적인 특성과 그에 따른 정치경제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서유럽의 국가들이 50여 년 이상 추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변경사(Border History)라는 것도 사실은 도이취(K. Deutsch)·미트라니(D. Mitrany)·하스(E. Haas)·나이(J. Nye) 등의 이론과 같이 유럽연합(EU)의 정치경제 통합에 대한 이론적인 기반의 하나일 뿐이죠].
동아시아는, 국경과 민족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많은 인구가 유사한 비율로 분포되어있고 지리적 문화적 경계도 불분명한 유럽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유조변(柳條邊)과 같이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경계가 있고, 바다 건너 일본이 단일한 속성들을 견고히 고수하고 있으며, 징기즈칸의 후예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몽골이 있고, 최소한 2천년 이상 “자신은 주변과는 다른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실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한반도에는 배달민족이라고 부르는 민족들이 견고하게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중국·일본 등을 제외한 만주 지역은 중국과는 확연히 다르고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인구수는 극히 적지만(중국대륙과 비교하자면 거의 1%도 안 되는 인구지요) 상당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의 문제를 ‘학술적으로’ 해결해야한다고 강변합니다. 정말 순수하게 학술적으로만 접근한다면야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마는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면 우려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정부나 학계가 과연 학술적 동반자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학계의 논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이 점을 살펴봅시다.
첫째, 중국 정부나 학계는 학술적 동반자로서 자질이 의심스럽습니다. 애초에 동북공정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중국 정부나 학계는 일관되게 한국인에게는 학술적으로 해결하자고 운운하고 있죠. 그러는 중국 정부는 왜 학술 조사차 방문한 한국인들을 억류하고 사진도 못 찍게 합니까? 그리고 중국 정부가 순수한 의미에서 학술적으로 해결할 의도가 있다면, 만주지역의 고분 발굴이나 유적 탐사에 남북한 학자들이 동시에 참가하는 것이 옳지요.
현재 진행되는 발굴 작업은 과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하던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유적이라면서 그들 의도대로 그 내부에서 한족에 유리한 유물들을 섞어 넣어 증거로 제시한다면 그 때는 학술적으로 이길 수가 없는 것이죠. 분명한 것은 중국 정부가 칼자루를 확실히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술적으로 증명하고 싶어도 현지 유적이나 유물에 접근 자체가 안 되고 있으며 그 유적이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훼손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탁본(拓本)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비석에도 손을 대었을 지도 모를 일이죠.
이런 점들을 보면, 역시 중국이 우리보다는 한 수 위입니다. 우리가 나관중 ‘삼국지’를 통해서 배울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만 중국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움직인다는 사실이었죠. 근본적인 자존심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웬만한 것은 다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중국인입니다[학술 대회를 해도 실질적인 사료나 논문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다 발표해 놓고 토론은 쟁점을 회피하고 얼버무려서 적당히 마무리하지요. 이들에게 염치나 예의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인은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맨(Businessman)이라는 사실을 다시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우리 사학계의 논리는 동북공정의 먹이사슬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중국 정부나 학계의 역사인식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한 사회경제사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사학계가 동북공정을 학술적으로 해결하려면 할수록 만주(滿洲)는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제외됩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①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체가 소중화주의적 인식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사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중국 측에 유리한 증거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고구려의 역사를 봅시다. 우리가 이미 우리의 형제들인 쥬신족들을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만주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한 들 누가 그것을 받아들입니까? 지금 사학계에서 추진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역사만 우리 역사이고 발해(일부 사학자들은 발해도 우리 민족사의 일부라고 보겠지요. 그러나 요즘 거론되는 것은 온통 고구려뿐이죠), 금, 후금의 역사는 당연히 우리 역사에서 제외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학계는 그로부터 거의 1천4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만주 지역은 우리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고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중국이 만주의 역사가 중국 역사라고 하니 이것을 어떤 논리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 사학계는 이 같은 중국의 논리를 도와주고 있는 셈이죠.
지금 우리 사학계는 자가당착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학계의 논리는 마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은 2천년 전에 자신의 땅이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차지해야한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고구려 역사만 방어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입니까? 지금 사학계의 논리는 고구려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역사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단절된 역사의 영역은 더 이상 우리의 역사 영역으로 간주하기 어렵죠. 우리가 쥬신의 역사를 연구해야하는 이유는 만주 전역의 역사의 영속성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게 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족(漢族)과 쥬신과의 투쟁과 갈등 속에서 파악해낼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쥬신족이라는 말을 하니 쥬신족끼리 통합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자는 식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지요. 동일한 종족이라도 국가로 구성되어 소속된 사람들도 있고 그 영역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민족 = 하나의 국가라는 등식은 항상 성립하는 것이 아니지요. 마치 영국 국민이 호주·영국·미국을 구성하듯이 여러 개의 나라를 만들 수도 있고, 현재의 쥬신족처럼 일부 국가(한국·일본·몽골)에 소속된 사람들도 있고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있는 집단도 있는 것이지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찾으면서 영속성을 추구하여 동질성을 회복하여 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가자는 말이지요.
역사는 물론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그 역사의 해석은 거의 정치적인 놀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만주가 현재 중국 땅이니 그 이전의 만주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는 중국의 논리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반박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스페인이 과거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는데, 그러면 스페인 지역에 있었던 로마제국의 역사가 스페인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까? 세계 사학계도 그 정도를 판별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현재 논리는 누구라도 반박할 수 있습니다. 몽골이 한족(漢族)이 아니듯 청나라가 명확히 한족(漢族)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인데, 그것을 주장하는 중국의 논리가 용인될 수는 없는 것이죠.
현재 중국은 징기즈칸도 중국인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리고 쥬신의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 오히려 중국의 이 같은 논리를 부채질하여 동북공정만 유리하게 할 뿐이라는 분이 가끔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징기즈칸과 원(元)나라는 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미 충분히 검토하고 논의한 사항이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중화민족이라는 논리는 오히려 중국 학계를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뿐이지요.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바보입니까?
제가 우리 민족과 몽골과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중국과는 분명히 다르지요. 몽골인들의 민족사인 ‘몽골비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몽골인들 자체가 고구려와의 연계성과 계승의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지요. 뿐만 아니라 현대의 유전학이 보여주는 두 민족들 간의 민족적 동질성을 보여준 것이죠. 민족 계승의식은 민족적 동질성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우리는 몽골과의 연계성을 부정하는데 몽골이 우리와의 연계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주족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이들을 오랑캐니 야만족이니 하고 배척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요). 몽골인들이 고주몽의 후예라는 것은 티무르가 징기즈칸을 계승했다거나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짜르가 로마의 시이저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분명히 종류가 다르지요
[참고로 일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과도한 민족주의로 흐르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탄생케 했다는 듯이 말하는 분도 많은데 그것은 아니지요. 동북공정은 이미 1990년대 중국 베이징대의 한 역사학자가 주장한 ‘화이질서’(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을 모두 결합해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는 게 중국의 국익에 가장 부합된다는 주장)를 발표한 이후 동아시아 전체를 중국의 질서 속에 편입하려고 한 것이고,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기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온 프로젝트라는 것이지요. 이 같은 책략은 모택동 시절에도 있었던 종류입니다. 모택동이나 주은래의 비동맹 외교는 극좌적인 이데올로기 하에서 마치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듯이(以農村包圍都市)”,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이라는 순수한 측면이 있었지만 현재의 동북공정은 패권주의(覇權主義)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그 공격성이 우려되는 것이지요. 역사를 통해 보면 중국은 처음에는 논리로 억압하고 그래서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시위합니다. 그래서 또 말을 안 들으면 정치경제적으로 고립시킨 후 물리력으로 응징하지요].
② 다음으로 보다 심각한 문제로 동북공정에 직면한 우리 사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진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 성격을 봅시다.
중국 역사해석의 기조는 사회경제사적 이데올로기로 변증법적 유물사관(唯物史觀)에 기초한 민중사관(民衆史觀)입니다. 즉 역사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민중(people)의 힘에서 오는 것이며 여기에는 생산력(production force) - 생산관계(production relation)의 갈등에서 상부구조를 변화시킬 힘이 파생된다는 복합적인 이데올로기이지요(말이 어려워져 죄송합니다. 더 이상 쉽게 말하자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즉 사회는 끊임없이 생산기술(production technology)이 발전하고 그 기술의 변화가 민중의 힘과 자신의 노동가치(labor value) 실현을 통하여 한층 더 나은 상부구조(upper structure)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입니다(더 나은 사상과 경제구조를 토대로 한 사회로 바꾸어 간다는 것이죠)[마르크스적인 역사해석에 관해서는 제 사이트에 미발표된 논문(초고)을 실어두겠습니다. www.ebiz114.net → 자료실 → 신자료실 → 『마르크스주의 제이론의 비판과 전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동안 한국의 사학계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사학계는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라고 한다고 쳐도 발해의 경우에는 그 지배층만 고구려인”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 온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발해(渤海)의 기층 민중의 소속은 어떻게 됩니까? 이들이 때로는 숙신 때로는 읍루, 때로는 여진, 때로는 만주족이었던 민족입니다. 중국 주변의 소수민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국 사학의 토대인 사회경제사적인 이데올로기 하에서는 한 국가의 지배 민족이 누구인가 하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그러니 발해도 중국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사학계가 이러한 사회경제사적인 논리를 반박할 만큼의 역량을 과연 갖추고 있을까요?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역사의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한국 사학계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전체 동아시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한족(漢族)이 흥기(興起)할 때 이 같은 역사 왜곡이나 역사 프로젝트가 나타나는 것은 항상 있어왔던 것입니다. 촉한공정(제1강의에서 제5강의 참고)도 그런 것 아닙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이 같은 책략은 1백년 이상 진행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동북공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계기를 심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국사 교육 전반을 수정하여 일국사(一國史) 중심의 사관을 탈피하고 쥬신족들의 관계사를 중심으로 역사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찾아갈 수 있고, 앞으로 1백년은 계속될 쥬신 역사 말살 정책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쥬신 관계사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본다면 동북공정을 이기는 해답은 간단합니다. 쥬신인(경우에 따라서 동북공정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만주 지역의 쥬신족으로 더욱 축소해도 좋습니다)들은 중국인[한족(漢族) 또는 화하족(華夏族)]이 아니며, 만주-몽골-한반도 지역은 애초에 한족들의 역사의 무대(영역)가 아니었다는 것만 밝히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입니다.
이런 전제만 있으면 쥬신말살정책(동북공정)은 지난 강의에서 말씀드린 유조변(柳條邊)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통박해낼 수 있습니다(제28강의 참고). 그 유조변은 한족과 쥬신족의 물리적인 경계선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 문화적 경계선인 것입니다. 엉뚱한 자가당착적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나 “자기만이 고결(高潔)한 듯 하는” 이상한 ‘선비정신’에 빠지지 말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현상에 대처해 가야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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