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처하는 방의 한쪽 벽엔 ‘常樂我淨(상락아정)’이라는 글이 한 폭 걸려있다. 연전에 내 집을 찾아왔던 한 젊은 스님이 건네준 글이다. 낙관을 보니 그 스님의 사형(師兄)뻘 되는 노(老)스님이 손수 쓴 글이었다. 글 뜻이야 보는 사람이 편할 대로 새겨 읽으면 되는 것이지만, 나는 이 글을 그림처럼 보고 있다. 필체에선 힘이 넘쳐났다. 나는 그 경이로운 힘의 동선(動線)과 기세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찾아온 스님이 말했었다.
“노스님께서 처사님의 몸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그 노스님은 침술에 매우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몸을 보여 달라’는 것은 우선 ‘진맥(診脈)’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나는 몸을 좀 앓고 있었다. 그러나 ‘진맥’이라고 하는 한의학적인 수사를, ‘몸을 보여 달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자 돌연 내가 긴장했다. ‘몸을 보여 달라’는 말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대좌(對坐)’의 의미를 읽었다. 물론 노스님의 뜻과 관계없이 내 입장에서 그렇게 독해를 했다는 얘기다. ‘대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심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한 수행자와의 그 ‘대좌’ 문제 때문에 나는 몹시 긴장했다. 몸과 몸만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몸을 보여 달라’는 말은 ‘마음을 보여 달라’는 말처럼도 들렸다.
몸을 보여주기로 약속했던 날, 나는 그분의 처소를 찾지 못했다. 약속을 정할 때부터 상황이 유동적이라는 말씀을 미리 드렸지만, 실제로 그 무렵 발생했던 몇몇 일들이 그날과 겹쳐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설령 그날 별일이 없었을지라도 나는 핑계거리를 대고 그 노스님을 찾지 않았으리라.
그 젊은 스님이 찾아와 노스님의 뜻을 전하고 돌아간 뒤, 나는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내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눈빛은, 허물어져 내리고, 피폐하고, 탁했다. (이 눈빛으로 어떻게 그 노(老)수행자의 눈빛을 받아낼 수가 있을까!) 그 눈빛은 곧 내 마음이기도 했다. 낯빛도 형편없었다. 명색이 선원(禪院) 출입을 해왔다는 작자가, 그런 눈빛과 낯빛을 가지고 한 노수행자를 만나러 간다는 건 스스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보여주는 거야 별것이겠는가. 문제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병마(病魔)에 좀 당하더라도 그 노스님의 시침(施鍼)의 자비는 피해가고 싶었다. (세월이 지나 다시 그때의 일을 돌아보니, 노스님에게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그 마음이야말로 우스웠다. 실소(失笑)!)
어찌됐든 그 무렵은 깊은 산골로 거처를 옮긴 직후여서 집과 이삿짐을 채 정리하지 못한 처지였는데, 그러다 보니 먹는 것부터 부실했다. 술과 담배도 지나쳤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이었다. 어떤 작가는 ‘시대와의 불화’를 얘기하기도 하지만, 나 같은 인간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과의 불화’ 때문에 힘들어 할 때도 많다. 그 무렵엔 그 ‘불화’ 때문에 몸살을 앓고, 수렁에 빠져 있었다.
수렁은 깊었다. 어떻게 하면 그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렁이 늪으로 진전되면 더 힘들어진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단식이었다. 기간은 사흘이었다. 곡기(穀氣)를 아예 끊는 것, 나 같은 경우엔 그런 단식이 내면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유력한 방편이다. 단식과 더불어 명상도 함께 했다.
얼마 전 천성산 내원사의 지율스님이 58일간 단식을 했었다. 경부고속철도의 천성산 관통터널공사 때문이었다. 그 단식은 터널공사를 떠나 궁극적으론 생명이랄지 또는 생태적 가치의 소중함에 대한 인문적 호소였다. 단식도 그 동기나 목적이 참 다양하다. 정치투쟁이나 대(對)사회적인 시위의 수단으로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런 경우 자기헌신과 그 헌신의 비폭력성 때문에 호소력이 크다. 참회나 기도, 신과의 합일 같은 종교의식이나 영적(靈的) 교류, 정신 수련, 건강, 질병 치료 등 여러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인도의 명상적 전통에 비추어 보면 단식은 때론 대단히 형이상학적이다.
우선은 음식물만 해도 유형의 음식물과 무형의 음식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우리의 오감(五感) 곧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따위로 인식할 수 있는 음식물이다. 내가 오늘 먹거나 마신 - 밥과 콩나물국, 고들빼기김치, 열무 물김치, 풋고추, 오이, 가지, 포도주 한 잔 따위가 바로 그렇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이런 음식은 먹으면 몸에 저장된다. 그런가 하면 무형의 음식물도 있다. 느낌이나 감정, 생각 따위로 이루어진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眼耳鼻舌身意)와 같은 육근(六根)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色聲香味觸法)과 같은 육진(六塵)을 일으킨다. 이 육진도 음식이다. 이런 음식은 먹으면 마음에 저장된다. 현재의식으로 다가왔다가 곧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묻힌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므로 그 음식물들은 또 서로 교류한다.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면 사실, 눈에 보이는 음식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식이 더 문제일 때가 많다. 내가 자신의 눈빛을 들여다보며 노(老)스님과의 ‘대좌’를 두려워했던 것도 달리 표현하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음식을 잘못 먹었기 때문이었다.
간디(Gandhi)의 단식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밥 먹듯이’, 그렇게 단식을 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 때, 그는 정치투쟁의 한 방법으로 곧잘 단식을 했다. 비폭력성의 극치인 '아힘사(Ahimsa)'의 실천이 바로 단식으로 나타났다. 간디는 또 육신의 건강과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그래서 ‘내면의 목소리’가 요구할 때면 항상 단식을 했다. 변비와 빈혈, 발열, 소화불량, 신경통, 중풍기가 있을 때도 단식을 하고, 분노에 휩싸이거나 마음이 불안하여 안절부절 못할 때, 절망감에 빠졌을 때도 단식을 했다. 간디의 단식이 깊은 감명을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마음속에 희망이 넘치거나 지나치게 기쁠 때,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이 끝없이 넘칠 때도 단식을 했다는 점이다. 희망이나 기쁨, 사랑은 우리가 지향하는 긍정적인 가치들이다. 그는 이 가치들이 지나치다 싶을 때도 단식을 했다. 내면의 조화와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불가나 명상에서 말하는 번뇌, 망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탐욕이나 분노, 어리석음 따위의 부정적인 가치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간디의 그 희망이나, 기쁨, 사랑도 모두 번뇌, 망상이다. 인간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이 무명(無明)에 덮인 자아(自我)로부터 비롯된 것들이었을 때 바로 그렇다. 모두 상대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간디는 “내가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상대적인 진리라도 붙잡고 가야 한다. 그 상대적인 진리는 ‘당분간’이지만, 나의 횃불이고 방패이며 수호자이다.”라고 말했다. 작게는 가족과 마을 크게는 민족이나 국가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의한 ‘규범’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차피 최선이 아니고 차선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까닭이다.
지율스님의 단식도 생사(生死)를 건 단식이었지만, 아예 단식을 통해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때의 단식은, 자기 정화와 완성을 추구하는 단식이다. 그 정화와 완성이 곧 죽음이었다.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인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한때 자이나교의 승려였다. 그를 자이나교의 승려로 입교하도록 이끌어준 스승, 쿤단은 ‘산타라’라고 하는 금식(禁食)수행을 통해 적극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자이나교에선 승려가 ‘산타라’수행을 하면 ‘모크샤’를 얻는다고 믿었다. 모크샤는 ‘완전한 구원’을 뜻했다. 일흔 살을 넘긴 쿤단은,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아 승려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도 힘들다며 좀 더 빨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 금식을 택하고, 그 금식을 통해 모크샤를 얻길 원했다. 죽음이란, 영혼이 단지 그 껍데기를 바꿔 입는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죽음이 찾아오면 영혼은 지금의 육체를 떠나 새로운 육체를 찾아간다는 게 자이나교의 세계관이었다. 그는 금식 2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사티쉬 쿠마르의 어머니도 금식을 통해 죽음을 받아들였다. 역시 자이나교도였던 그녀는 금식 25일 만에 생을 마쳤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과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부부. 미국사회의 반체제 지식인이기도 했던 스코트와 그의 아내 헬렌은 산업화한 문명세계를 떠나 5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자연 속에서 농장을 일구며 살았다. 그 ‘땅에 뿌리박은 삶’은 육체노동과 자급자족의 미덕, 높은 수준의 정신을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그들 부부의 표현을 따르자면 ‘좋은 삶(Good Life)’이었다. 소로우(Thoreau)가 월든(Walden)에서 보여준 삶과 맥을 같이한 삶이기도 했다. ‘유행’을 타서 때가 많이 묻어버린 말이 됐지만, ‘웰빙(Well-Being)’의 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 100세까지 살다가 떠난 그 스코트가 죽음을 받아들인 방식도 단식을 통해서였다. 헬렌이 말했다.
“나는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곧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 나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비록 헬렌이 스코트의 ‘위엄에 가득 찬’ 그 죽음을 다소 윤색해 전달함으로써 그 진정성에 얼마간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의 감동 자체가 크게 훼손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형(典型)은 창조된 인물이다. 그 전형으로부터도 우리는 늘 감동을 받지만, 어찌됐든 허구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관련해 스코트의 경우처럼 현실 속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전형은 참으로 귀하다. 그만큼 호소력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어떤 농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칠불식(七不食)’이라는 게 있었다. 첫째는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음으로 ‘지쳤을 때’도 먹지 않고, ‘다쳤을 때’ ‘병이 났을 때’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을 때’ ‘먹을 게 없을 때’도 먹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먹을 게 있어도’ 먹지 않았다. 먹지 않는 이유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 닿는다.
야생동물은 상처를 입거나 아플 땐 먹지 않는다. 굶는 게 자연치유의 방법이었다. 내가 산골로 들어왔던 첫 해 겨울, 그 빈집에는 발바리 한 마리가 홀로 살고 있었다. 먹이도 혼자 힘으로 해결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 작은 개가 이웃집에 ‘마실’을 갔다가 치명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 집에서 기르던 진돗개에게 몸통을 물린 것이다. 몸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내가 좀 살펴보려 하니 으르렁거리며 경계했다. 그 개는 곧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는데, 나중에 보니 소똥을 쌓아놓은 헛간의 두엄 위에 앉아 있었다. 두엄엔 부숙열(腐熟熱)이라는 게 있어서 맨땅 보다 온기가 있다. 그 개는 그 온기를 이용해 추위를 견뎠던 것 같다. 개에게 먹이를 주었으나 먹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 저녁 무렵, 마루 쪽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개였다. 밥을 달라는 뜻이었다. 그 개는 결국 이틀간의 단식을 통해 몸을 스스로 치유하는 어떤 길을 찾아낸 것처럼 보였다.
‘니시 의학’을 창안한 일본의 자연의학자 니시 가츠조(西勝造)는 단식을 단순한 건강법이나 의학적 차원을 넘어서서 철학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단식을 ‘천명(天命)을 아는 지름길’이라고 표현했다. 창자를 비워야 마음을 비울 수 있고, 마음을 비워야 ‘천명’을 알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옛 선사들도 구도자들에게 늘 말했다.
“입에는 말을 적게 하고, 창자에는 밥을 적게 하며, 마음엔 생각을 적게 하라.”
지율스님의 단식을 바라보며, 개인적으로도 단식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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