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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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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5>

삼국지와 고구려(하): 밀우와 유유

***들어가는 말**

1636년 3월, 심양(瀋陽)에서는 몽골의 대칸(大汗)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부족장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때 심양에서 소집된 쿠릴타이에서는 몽골인·만주인·요하의 한족 들이 모여 번잡했습니다. 몽골인의 경우에는 16부의 49명에 이르는 영주들이 모두 심양에 모였습니다.

이 날 심양에서는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愛新覺羅皇太極)를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합니다. 이때 몽골인들은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에게 징기즈칸(成吉思汗)의 천명(天命)이 내린 것을 인정하고 '복드세첸칸(Bogda-Sechen Khagan : 성스럽고 현명한 황제)'이라는 존호(尊號)를 바칩니다.

이로써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는 전체 쥬신을 아우르는 대칸(大汗)이 되었고 대칸의 자격으로 국호를 청(淸)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그는 대칸이라는 칭호 대신에 황제(皇帝)로 바꾸어 중국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보면 칸, 대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군주라는 의미이죠. 신라시대에 사용된 거서간(居西干)·마립간(麻立干)에서 사용된 간(干)과도 다르지 않죠. 단군왕검(檀君王儉)도 같은 종류의 말입니다. 한족들은 무슨 연유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쥬신의 군주를 선우(單于)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① '단간(單干)'을 잘못 읽었거나 ② 흉노 말로는 타르귀(Targü), 또는 ③ 몽골어로 천신(天神)을 의미하는 텡그리(Tenggeri)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왕검(王儉)이라는 말은 성스러운 인물이나 물체, 또는 장소를 의미하는 몽골의 샤먼 용어인 '옹군(Onggun)'과 음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산꼭대기나 큰나무를 통해 내려온다는 몽골 - 만주의 샤머니즘 세계관들은 한반도에서도 여러 군데서 나타납니다.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석탈해(昔脫解)·김알지(金閼智)는 대표적인 예입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 314쪽).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한'이란 순 우리말이며 ① 하나라는 의미, ② 크다는 의미로 몽고어나 만주어에서 사용하는 한[汗, 王] 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서울의 한강도 '한가람'으로 바꿔 부르기를 제안합니다. 한강(漢江)이라니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지요. 우리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한족화(漢族化)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몽골의 대칸 즉위식으로 돌아갑시다.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가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하기 30여년 전, 1604년 릭단(Ligdan : 林丹)이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합니다. 릭단칸은 분열된 몽골 지역을 대체로 통일하였는데 이 때 동부에서는 누루하치도 동부 쥬신족들을 통일하게 됩니다. 릭단칸과 누루하치의 대결은 불가피한 일이었죠.

후금군은 중원정벌에 앞서 몽골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청 태조 : 1559~1626)와 그를 이은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청 태종 : 1592~1643)는 릭단칸을 고립시키고 1629년 릭단칸의 직할령인 치하르부 공격하여 약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릭단칸은 1631년 칭하이(靑海)로 도주하였고 그 곳에서 재건을 노리며 티베트정벌에 나섰으나 병사하였습니다. 이로써 누루하치ㆍ홍타이치와 릭단칸의 전쟁은 끝이 납니다.

이에 릭단칸의 어머니(수타이 태후)와 어린 아들(에제이)은 원나라 역대 황제가 사용하던 옥새를 홍타이치에 바칩니다. 홍타이치는 칭기즈칸의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합니다(홍타이치는 5명의 황후를 모두 몽골인으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릭단칸의 아들 에제이는 홍타이치의 사위가 됩니다[참 재미있는 일이죠. 릭단칸과 홍타이치는 서로 원수(怨讐)일 수 있는데 쉽게 하나의 가족으로 통합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홍타이치는 원수의 아들인 에제이를 사위로 받아들이고 에제이는 아버지의 원수를 장인으로 모십니다. 이 같은 현상은 중국인 한족(漢族)에서는 나타나기 힘든 일입니다. 중국인(한족)의 경우라면, 홍타이치가 릭단칸의 구족(九族)을 모두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릭단칸과 홍타이치의 싸움이 서로 다른 부족이나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한 부족 안에서 하나의 지도자를 뽑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쥬신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1635년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는 여진(女眞 : 중국발음 [뉴신] 또는 [류신])이라는 말 대신 만주(만슈)를 사용할 것임을 선포합니다[즉 16세기 경부터 한반도의 북방의 쥬신족들은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불교에서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신앙에서 나온 말로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岸本美緖 '東アジアの世界'(山川出版社. 1998)]. 그리고 누루하치의 근거지였던 허투알라를 흥경(興京)으로 개칭합니다. 홍타이치는 귀순한 한족들을 왕으로 봉하여(淸史稿 : 卷2 太宗本紀 2) 쥬신과 한족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중원통치를 본격화합니다.

1636년 드디어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는 몽골-만주 전체의 쥬신의 추대로 몽골의 대칸(즉 단군왕검)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죠.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는 전체 쥬신을 아우르는 대칸(大汗)의 자격으로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군주명을 대칸에서 황제(皇帝)로 바꾸게 됩니다. 이로써 부족사회(또는 만주ㆍ몽골 귀족연합체)에 불과했던 쥬신이 불과 20~30년 만에 세계적인 대제국(大帝國)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마치 지난 강의에서 말씀드린 볼복스(Volvox)처럼 말이죠.

***(1) 전쟁 전야**

고구려와 위나라 연합군이 공손연의 연나라를 정벌(238)한 이후 한동안 이들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듯하더니 이내 위나라와 고구려는 긴장 상태에 들어갑니다. 동북지역의 세력균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요동으로 진출을 모색하려 하고 위나라는 요동의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245년경에 이르면 요동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고구려와 위나라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연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와 위나라의 완충지대(緩衝地帶)였던 요동에 위군이 주둔하면서부터 고구려와 위나라는 직접적으로 세력이 부딪치게 되고 이로써 두 세력간에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난 것이죠.

당시 고구려의 동천왕은 태백산(太白山 : 현재의 백두산) 주변에 있었던 많은 부족국가(部族國家)들을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북으로는 부여뿐만 아니라 남동으로는 동옥저(東沃沮)까지 병합합니다.

고구려가 초기에 환도성에 도읍한 것은 넓은 강과 높은 산을 이용하여 수도(首都)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장기적으로는 국가발전에는 방해요소이기도 합니다. 동천왕은 이 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먼저 요동의 넓은 벌판을 장악하여 한반도(韓半島)에서 중국으로 오가는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국가수입원을 증대시키고 요동 땅의 곡창지대를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하게 된 것이죠.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고구려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안평[(西安平) : 현재의 단동(丹東)으로 추정)]을 장악해야 했습니다. 동천왕은 즉위 후 적극적으로 강병책(强兵策)을 채택하여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을 대거 모집하였는데 이 당시 발탁된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동부(東部) 고원지대의 유유(紐由)였습니다.

242년 이후 고구려는 서안평까지 나아가 위나라를 공격합니다. 위나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하게 됩니다. 당시 관구검은 사마의와 함께 요동에서 공손연을 정벌한 후 안읍후(安邑侯)에 봉해졌으며 식읍으로는 3천 9백호를 받았지요.

삼국사기에 "242년 (동천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王遣將, 襲破 遼東 西安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위나라는 오나라와 많은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던 것이죠. 당시의 위나라 상황을 보시죠.
[그림 ①] 전략적 요충지인 서안평(현재의 단둥)의 현대 모습

"241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고,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六安)을 공격하였다. 거기장군 주연(朱然)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사중(柤中)을 점령하였다. 이에 사마의는 번성을 구원하였다(오서 : 오주전)"

즉 위나라는 요동의 변화에 대해 손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대로 계속 방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가고 양국의 전운(戰雲)은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245년 동천왕은 신라의 북쪽 변경 지방을 공격합니다(冬十月, 出師侵 新羅北邊). 당시 신라에서는 장군 우로를 보내 고구려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합니다.

동천왕은 서진과 남진으로 고무되었고 고구려는 점차적으로 중국[위나라]에게 위협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고구려의 장군 득래(得來)는 동천왕이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번 중지할 것을 간하였으나 동천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득래는 "이 땅은 장차 쑥대밭이 되고 말겠구나.(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라고 탄식하고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이것은 위나라와 고구려의 극심한 국력 차이를 보지 못하고 동천왕이 서안평을 지나치게 공격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246년 2월 결국 위나라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을 시켜서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에 나서게 됩니다.

[그림 ②] 245년경의 서안평 부근지도

그러면 이 당시 위나라가 보는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무엇보다도 위나라의 최고실세인 당대 최고 군사전략가 사마의가 직접 요동정벌을 지휘한 것이나 관구검이라는 당대의 명장이 이 지역을 방어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위나라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매우 성가시고 신경 쓰이는 나라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전투력이 강성한 국가이고 지형적으로 항상 식량이 부족하여 다른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구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상무적(尙武的)이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결혼과 더불어 수의(壽衣)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족(漢族)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것은 언제라도 국가적 대의(大義)를 위하여서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당시 고구려인들은 명예롭게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태자였던 해명(解明)은 인접한 나라와의 국제관계 속에서 강경책을 고수하다 부왕(父王)에게 오해를 사서 자결할 것을 명령받자 땅에 창을 꽂아놓고 말을 달려와 창에 찔려 장렬하게 죽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유리왕기)고 합니다.[그림 ③]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고구려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천손사상(天孫思想), 즉 하늘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상인데 이 사상 역시 유목민의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비에 주몽은 하늘의 자손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고구려의 벽화에는 이 같은 천손사상을 대변하는 해[해신]와 달[달신]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이 주변국에 위험한 이유는 주변의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한족(漢族)의 중화사상에 대한 정면 도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2) 제2차 요동전쟁(245) : 고구려-위의 대결**

246년 2월 위나라의 관구검은 각 군대의 보병과 기병 1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위서 : 관구검전)[그런데 이 수치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과 고구려군의 1차 교전에서 6천여 명이 사살되는데, 그러면 4천여 명으로 2만 이상의 고구려군을 대파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제가 보기에 이 때 위나라군은 유주지역에서 차출된 병력(관구검의 직할부대)이 1만여 명이었던 것 같고, 요동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4~5만 이상의 위나라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 동천왕의 말 가운데는 "위나라의 대군이 고구려의 소군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지요. 즉 위나라의 군세가 고구려에 비하여 매우 컸음을 의미합니다. 정사(진수의 '삼국지')에 나타나는 위나라 관구검의 병력의 수는 그 규모가 매우 축소 왜곡된 것으로 이것은 고구려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도 보입니다] 관구검이 현도(玄菟 : 현재의 撫順) - 비류수(沸流水 : 현재의 渾江 상류)로 진격하자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저지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한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172) 고구려의 노장(老將)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좌원에서 견벽청야(堅壁淸野 : 성벽을 굳게 하고 백성들을 모조리 성안으로 이주시키고 곡식을 모조리 거둬들여 적의 군량미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의 지구전(持久戰)으로 한군(漢軍)을 궤멸시켰고 고국천왕은 한군(漢軍)을 포위하여 섬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명림답부의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갑시다.

고구려 신대왕 8년 한나라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172) 고구려 조정에서는 대부분의 중신들이 곧장 맞서 싸우자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 때 명림답부는 "군사가 많을 때는 공격하고 적을 때는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이치이다. 지금 적들은 천리 길에 식량을 운반해오므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곡식 한 톨 없이 들판을 비워두고 기다리다가 그들이 지쳐 돌아갈 때 날랜 군사들을 출동시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전략을 채택한 고구려군은 대승합니다.

246년 동천왕은 비류수에서 위군을 대파하여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비류수에서 위군은 3천여 명이 사살되었고, 양맥(梁貊)의 골짜기 전투에서도 3천여 명의 위군이 전사합니다. 그러자 동천왕이 의기양양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나라의 대군(大軍)이 오히려 우리나라의 소군(小軍)만 같지 못하다"라고 합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초전의 승리에 자만한 동천왕은 철기군(鐵騎兵)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위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구려가 서기 240년을 전후로 서안평을 공격했는데도 불구하고 위나라는 소극적으로 이에 대처하였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맞이한 위나라의 군사가 의외로 쉽게 격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된 동천왕의 조급한 공격은 큰 실패로 나타납니다.

관구검은 진법(陣法)과 매복(埋伏)의 대가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관구검의 전략이 제대로 적용이 되려면 넓은 평원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환도성 가까이에서는 산악지형이 많아서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관구검은 고구려군으로 하여금 자만심에 빠지게 하여 넓은 평원으로 유인한 듯 합니다.

관구검은 고구려군이 평원으로 몰려나오자 자신의 주특기인 진법을 이용하여 고구려군을 섬멸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에 사용된 진법은 방형진법(方形陣法)인데 병력을 네 군데의 모서리에 배치하고, 그 내부에 들어온 고구려군을 포위 섬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유인당한 고구려군은 관구검과 왕기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여 당시 2만여 명의 병력 가운데 죽은 자가 1만 8천에 이른다고 합니다(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동천왕은 겨우 살아남은 1천여 명의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綠園)으로 피신합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같은 해 10월에는 관구검이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을 쳐들어갔고 왕기에게 명하여 동천왕을 추격하게 합니다. 고구려는 왕족들을 포함하여 모두 산맥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옥저(沃沮)까지 피신합니다.

관구검은 환도산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파괴하였는데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수천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동천왕은 겨우 가족들만 데리고 피신하였습니다.(위서 : 관구검전) 겨울이 깊어지자 관구검은 환도성을 평정한 후 군사들을 몰아 일단 요동의 양평(襄平)으로 돌아갑니다.

다음 해 봄이 되자 관구검(毌丘儉)은 현도태수 왕기(王頎)에게 명하여 고구려군의 동향을 세세히 파악한 후 고구려군을 재차 섬멸합니다(위서 : 관구검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고구려는 물밀 듯 밀려오는 위나라의 대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습니다. 동천왕은 매구(買溝 : 이병도의 고증에 따르면 매구루, 또는 미구루는 현재의 문천)로 피신하였고 왕기는 끝까지 추격합니다. 왕기는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고 돌에다가 자신의 공적을 기록합니다. 당시 살해되거나 항복한 고구려인은 8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위서 : 관구검전).

그러던 가운데 고구려 지도부가 후퇴하는 길목을 고구려군은 최후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응합니다. 이 때 고구려의 결사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밀우(密友)와 유옥구(劉屋句)로 그들은 유격전으로 위군의 침공을 저지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위군은 집요하게 동천왕을 추격합니다.

[그림 ④] 제 2차 요동전쟁(죽령은 현재의 황초령, 미구루는 현재의 문천)

이에 유유(紐由)는 "일이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지만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에게 대접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적장을 찔러 죽이겠습니다. 왕께서는 그 시기를 놓치지 마시고 즉각 공격하여 적을 무찌르십시오.(臣有愚計 請以飮食往 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기)"라고 하니 동천왕이 허락하였습니다. 유유는 위나라 군중(軍中)에 들어가서 거짓 항복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희 임금이 대국(大國)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피신하였나이다. 이제 임금께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합니다. 다만 그 전에 임금께서 저를 먼저 보내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도록 하셨습니다(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합니다. 이 때 유유가 기회를 보고 있다가 가지고 온 식기(食器) 속에 감추어 둔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지휘관이 갑자기 죽자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고 동천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습니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퇴각합니다. 고구려군은 환도성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요.

동천왕은 환도성으로 돌아와 밀우와 유유를 제1등 공신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전사한 유유를 구사자(九使者)에 추증하였고, 동부에 살고 있던 유유(紐由)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의 벼슬에 임명합니다. 이로써 제2차 요동전쟁(고구려와 위나라)은 무승부로 막을 내립니다.[그림 ⑤] 환도성(국내성)에 현재 남아있는 주요 유적지들(광개토왕비와 장군총 및 관련 유적)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 유유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먹으려다가 음식 그릇에 숨겨진 칼로 적을 죽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적군의 장수가 가져온 음식을 먹을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장이 가져온 음식에는 독(毒)이 들어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특히 한족(漢族 : 중국인)의 장수들이 이간계(離間計)나 반간계(反間計) 등 각종 술수에 능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음식으로 그들을 유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항복하러 간 장수가 음식 그릇 속에 숨긴 칼을 뽑아든다? 이것도 말이 안 됩니다. 음식물이나 음식 그릇에 숨길 수 있는 칼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은장도(銀粧刀 : 여인들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손바닥 크기의 칼) 정도로 야전군 사령관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겠죠? 사실 식기(食器)나 음식물에 칼을 감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르죠, 아예 멧돼지 고기를 통째로 구웠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요.

셋째, 항복하러 간 장수가 적장을 찔러 죽인다? 이것도 말이 안 됩니다. 항복을 하러 갔으면 적진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적장을 호위하고 있는데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적장의 주변에는 많은 경호원들이 호위하고 있을 테고 또 그 적장도 무공(武功)이 만만치 않을 사람인데 쉽게 죽일 수가 있을까요? (상대는 야전군 사령관이 아닙니까?)

바로 이 같은 점 때문에 일부에서는 밀우와 유유의 이야기가 후기 고구려인이 창작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중국 측의 사서에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아마도 자신의 부끄러운 일을 감추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이제 이 점을 한번 분석해 봅시다.

첫째, 제가 보기에 유유가 적진에 가져간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이재(理財)에 밝은 한족(漢族) 적장을 유혹하기 위해 옥저나 동예 등에서 생산된 반어피(바다표범가죽), 또는 명주로 만든 방직물 등의 부피가 작으면서 큰 돈이 될 수 있는 특산물이 아니었나 추정됩니다.(중국인들의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돈입니다) 당시 옥저와 동예는 이 같은 재화들을 고구려에 공납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다표범의 가죽이나 명주로 만든 옷감을 가져갔을 경우에는 칼을 감추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건들에 칼이나 칼보다 더 큰 것을 감추더라도 금방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유유는 아마도 큰돈이 될 만한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적장을 유혹한 뒤 적장의 막사로 따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말씀드린 반어피나 명주옷감 같은 것으로 말이죠. 왜냐하면 한족의 장수들도 많은 병사들 앞에서 자신이 적장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따라서 밀우와 유유의 이야기는 중국 측의 입장과 같이 아예 취급을 안 하거나 없었던 사건이 아니라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여러 가지 의문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병도 박사의 지적('삼국사기' 역주)처럼 위군의 퇴로와 동천왕의 행방을 알려주는 고구려 측의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적인 투사들의 이름이 고구려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죠. 더구나 '삼국사기'에 있는 내용이니 믿어야겠죠. 중국 측 사서를 믿으면서 우리의 정사를 믿지 않을 수 있나요?

고대에 있어서 전쟁이란 사실 경제적인 동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효과는 매우 크기 때문이죠. 노예의 획득은 물론이고 그 지역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각종 재산들을 그대로 차지하기 때문이죠. 당시의 위나라 장수들은 크게 두 가지의 실책을 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째, 이들은 승리를 과신하여 고구려군의 패잔병들의 공격에 대하여 소홀히 생각했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장수들이나 장교들 사이에서는 원정을 마치고 낙양으로 돌아갔을 경우 큰 돈이 될 수 있는 이재(理財) 문제에 관심이 쏠렸을 수가 있습니다. 바둑도 '끝내기'가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점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서 죽은 위나라 장수는 누구였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물론 이 사람의 이름이나 군적(軍籍)은 전혀 알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일반인들이 알고 있듯이 관구검(毌丘儉)이나 현도태수 왕기(王頎)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왕기 휘하의 정예 야전군을 지휘하던 장수(요즘으로 치면 사단장급 또는 연대장급 장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사('삼국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왕기는 따로 군대를 보내어 위궁(동천왕)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끝까지 추격하여 멀리 동쪽 경계의 끝까지 다다랐다(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 위서, 동옥저전)"

즉, 동천왕을 추격한 군대는 왕기 휘하의 별도로 파견된 야전군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유에게 살해된 위나라의 장수의 이름이나 군적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짐작이 가시리라 봅니다.

제2차 요동전쟁이 위나라와 고구려에 준 영향은 실로 매우 컸습니다. 제2차 요동전쟁 이후 위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자제하게 되어 고구려는 요동지역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확대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 측에서도 피해가 막심하여 고구려의 대외팽창 정책은 크게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2차 요동전쟁은 다른 의미에서 우리 민족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전쟁은 만주 지방의 쥬신족의 사정들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한족(漢族)에게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이 시대의 동북아시아 쥬신족의 사정을 알려주는 기록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불과한데 그것도 바로 이 제2차 요동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범엽(氾曄)의 '후한서(後漢書)'에도 동이(東夷)에 대한 부분이 있지만 '후한서'는 남조 시대에 씌어진 저작물로 '삼국지'보다는 훨씬 뒤에 씌어진 것입니다.

***(3) 고구려와 중국**

고구려가 중원을 지배했던 위나라와 결전을 벌인 사건을 몇 가지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구려가 위나라의 대군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맞섰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당시에는 고구려가 위나라와는 맞서기가 어려웠을 텐데 말이죠.

두 번째는 아무리 용감한 고구려병사들이라 해도 전쟁이란 장비를 무시할 수는 없는데, 고구려가 궁극적으로 위군을 물리친 것은 장비전에서도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촉이 위나라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진 것을 본다면 고구려는 상당한 정도의 전투력을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동천왕의 리더십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해야 한다는 점이죠. 유능한 인재들을 일찌감치 초빙하여 전쟁에 대비한 점이나, 초기의 전략적인 실패를 유연하게 극복한 점 등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유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신속하게 위군을 공격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동천왕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나옵니다.

동천왕은 온갖 고초를 겪고 등극하였고 재위 기간 중에 국가적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왕입니다. 동천왕이 죽자 근신 중에 따라 죽으려 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새 왕이 이에 대하여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하여 금지시켰으나 장례 당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에서 한족들과 패권을 겨룰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이 가진 강인한 숭무정신(崇武精神)과 발달된 군사기술의 덕분이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마치 현대의 자가용처럼 수레가 집집마다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수레는 얇고 가벼운데 이것은 수레 주위를 쇠[철(鐵)]테를 둘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수레는 강하면서도 가벼운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전쟁에 사용될 경우에는 가공할 전투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 기구들이 위나라와의 전쟁에 그대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고구려군의 전투력을 짐작할 수는 있겠지요.

제2차 요동전쟁 즉 위군과 고구려군의 전쟁 당시 고구려군의 구체적인 모습을 현재로서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보다는 후의 자료들이지만, 제2차 요동전쟁 당시 고구려군의 모습을 한번 추정해보도록 합시다.

안악(安岳) 3호 고분을 보면 고구려 군대의 모습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고분은 고구려-위 전쟁보다는 130여년 후인 대략 37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철갑기병(鐵甲騎兵 : 중무장 기병)ㆍ경기병(輕騎兵)ㆍ창수(槍手 : 보병)ㆍ환도수(還刀手 : 보병)ㆍ부월수(斧鉞手 : 보병) 등의 모습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안악고분과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의 초급 교육기관인 경당(扃堂)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활쏘기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특히 고구려는 말 위에서 쏘는 각궁이 있었는데 이것은 활 길이가 짧아 다루기가 쉽고 화살도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⑥] 안악 3호 고분의 벽화들

나아가 고구려인들이 남긴 수많은 벽화(壁畵)를 통해서 보면, 고구려에는 현대의 태껸(태권도의 전신)과 유사한 각종 신체단련 무술들이 발달하여 있었으며 쌀과 조가 주식(主食)이었고 육식(肉食)을 좋아한 흔적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전형적인 고대적 '병영국가(兵營國家 : garrison state)'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족들에게 고구려는 매우 위험한 국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삼국지'의 시대에도 이와 똑같은 형태의 강인한 병영국가는 아닐 수도 있지만 이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병영국가였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위의 제2차 요동전쟁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고구려가 강대국인 위나라를 맞이하여 대등하게 전쟁을 수행했으며 수도가 함락되고 왕은 동쪽국경의 끝 부분까지 후퇴하는 국가적인 시련 속에서도 밀우와 유유와 같은 투사들이 나타나 영웅적인 투쟁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위나라군대를 몰아내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상은 나관중 '삼국지'에는 전혀 없는 이야기이지만 정사에서는 여러 부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고구려와 관련된 세 편의 강의를 통하여 고구려-위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교류했고 투쟁했는지를 상세히 아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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