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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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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4>

삼국지와 고구려(중):제1차 요동전쟁

□ 들어가는 말

제가 말하는 ‘쥬신’이 모호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몽골과 만주족·한국인·일본인 등이 동일한 계열의 민족이라는 것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사용하는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나타나는 민족이나 국가 개념과는 다릅니다(이 점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 드립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민족이나 인종 개념은 일반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아직도 논쟁중인 개념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족 형성의 요소들은 ① 객관적 요소로는 언어의 공통·지역의 공통·혈연의 공통·문화의 공통·정치 경제의 공통·역사의 공통, ② 주관적 요소로는 민족의식 등을 들고 있습니다(신용하 : 민족형성이론). 저는 이들 가운데 대쥬신은 이들 요소들을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해설해드렸습니다. 이 점을 고구려를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할 점은 한국․일본은 일찌감치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정주사회(定住社會)를 형성하여 지속적인 국가체제를 갖춘데 반하여 몽골-만주는 통일된 국가 체제를 갖추기에 매우 어려운 자연 및 경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몽골과 만주 지역은 지역적으로는 매우 광대하나 인구는 극히 적은 지역입니다.

역사의 여명기를 바람처럼 살아간 쥬신족에 대한 분석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고대 역사의 주체인 고구려를 구성한 부족들을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고조선이나 고구려를 구성한 우리 민족을 예맥족(濊貊族)이라고 합니다. 이옥의 연구(1984)에 따르면 맥족(貊族)이 중국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B. C 7세기 경인데, 이 때 이들의 거주지는 섬서(陝西)·하북(河北)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들은 B. C 5세기 경에 산서(山西), B. C 3세기 경에는 송화강 유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남하했다고 합니다(이옥, 고구려민족형성과 사회).

맥족의 등장에 관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맥족이 B. C 3세기 경 만주 중부의 송화강(흑룡강 최대지류) 유역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맥족은 고대 중국사서의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리준영의 견해)이고,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리지린의 견해)].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추정합니다. 즉 ‘위략(魏略)’이나[위략에는 고리(槀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몽골은 ‘몽골비사’에서 몽골의 기원이 이 코리족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흑룡강 중상류 일대는 고대 부여의 북쪽 지역이기도 합니다. 아래의 [그림 ①]을 보시죠.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중국 사서의 기록들을 모두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림 ①]을 보시면 대체로 맥족은 알타이에서 남진한 흉노의 일족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북으로 이동해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왕국유(王國維)는 융(戎)·적(狄)·호(胡)는 흉노의 의역(意譯)이거나 음역(音譯)이라고 고증하였습니다(왕국유, 鬼方昆夷獫狁考). 대체로 사마천의 ‘사기’를 기준으로 보면 B. C 4세기 경에 흉노에 대해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의 기록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B. C 3세기 경에 흑룡강(黑龍江) 중류(송화강) 지역에서 ‘고리’ 족이 등장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가들이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몽골은 고리 족에서 분리되어간 종족의 일부인데 이점은 일본의 역사학자 시라토리(白鳥)의 연구와 일치합니다. 즉 시라토리는 몽골-고구려-탁발선비의 원주지가 흑룡강(黑龍江) 중상류 일대인데다가 그들의 언어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고증하였습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언어적으로만 말한다면 한국어-몽골어-만주어를 알타이계와 분리시켜 ‘동북아시아어족’으로 봐야한다는 학설이 최근에 대두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몽골비사’의 기록을 보면 고리족의 이동과 고리족의 일파인 몽골의 이동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몽골은 이후 11~12 세기 경 흑룡강(黑龍江) 상류(오논강 : Onan)까지 진출하였고 13세기에 크게 발흥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 55쪽).
그런데 우리가 고리 족들이 이동한 경로를 유심히 보면 전설속의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탁록대전(꟔鹿大戰 : 연대 미상)의 결과 이들이 산서지방 쪽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기록들의 연대를 신뢰하기 어렵고 치우천황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죠[참고로 탁록(꟔鹿)은 현재의 베이징(北京) 서쪽 산 지역입니다. 물론 전설상으로는 탁록대전이 B. C 2000~3000년대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믿기는 어렵겠죠. 물론 과거의 시간 개념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대쥬신은 만주지역과 몽골지역의 여러 부족들과 지속적으로 섞이고 예맥(濊貊)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타이에서 남진한 흉노의 일파 가운데 맥족은 한족(漢族)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 동북지방으로 밀려가면서 동북지방에 산재하고 있던 부족들과 융합하면서 국가체제를 갖추어 갔을 것이라는 말이죠. [참고로 아사달(阿斯達)은 몽골어나 거란어로 ‘확 트인 밝은 벌판이나 장소(나라)’를 뜻하는 ‘아사다라(Asa-tala)’와 일치합니다. 그리고 후에 한반도의 국가 이름이 된 조선(朝鮮)은 여진이나 만주족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쥬선(Jusen)’ 또는 ‘쥬신(Jüsin)’의 발음과도 일치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조선이 건국될 당시, 명나라가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가운데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택하여 준 것은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거주하는 민족이나 만주의 민족이나 동일시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들 동북지역에 산재했던 대쥬신들은 일정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부족 형태로 살다가 영걸(英傑)이 나타나거나 통합의 여건이 성숙되면, 고구려·몽골·금·후금 등의 형태로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가게 됩니다. 그 경우 이들은 신속하게 통합하여 동질의 집단화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 동북 지방의 대쥬신을 접근할 때 오늘날의 민족이나 국가 개념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약간의 문제가 있죠. 왜냐하면 유목민들은 농경민과는 달리 일정한 거주지역이 없이 상당히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유목민들은 마치 “새떼처럼 모여들었다가 구름처럼 흩어지는 것”이죠(鳥集雲散 : 사기).

예를 들면 1557년에 조차도 만주족의 총인구가 10만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죠[놀랐죠? 이 정도의 인구를 기반으로 중국을 지배했다는 것이 말이죠. 후금(청나라)을 건국한 것은 1616년 입니다]. 이들은 인근 부족을 점령하면서 40만~50만에 달하게 되었고 이로써 중원정벌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임계순, 청사 : 25쪽). 몽골의 징기즈칸의 경우는 이보다 더욱 열악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볼 수도 없지만 다른 민족으로 보기는 더욱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일부에서는 마치 몽골을 현대적인 민족 개념으로 접근하여 우리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보는데 그것은 아니죠. 이들은 정상적인 국가형태를 갖출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몽골 - 만주 지역에서 대쥬신족들이 모돈(冒頓)·단석괴(檀石槐)·구력거(丘力居)·광개토대왕(고구려)·징기즈칸(원)이나 아골타(금)·누루하치(후금)가 위대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이들이 넓은 세계를 정복했다는 것보다는 산재한 부족을 통합하여 하나의 동질성(同質性)을 회복했다는데 있습니다(실제 최대 영역을 이룬 황제는 이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흩어져 있으므로 한족(漢族)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부족간의 갈등을 중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금나라의 역사를 보면, 부족간의 갈등의 해결이 매우 중요한 사회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의 시조가 금을 건국하는 바탕이 된 것도 부족간의 갈등을 해소했기 때문이죠). 이 점은 대쥬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리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말씀을 듣더라도 대쥬신의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쥬신의 민족적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자연계에 볼복스(Volvox)가 이와 유사한 형태를 띱니다.

볼복스는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의 이행 단계에 있는 생물입니다. 볼복스는 환경에 따라서 단세포생물들이 서로 떨어져 살기도 하고 함께 모여서 살기도 하는 특이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죠. 볼복스는 단세포생물이 5백~5천 개가 모여서 공 모양의 군체를 이루는데, 군체(群體)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운동·먹이섭취·생식 등의 역할을 분담하도록 특수화되며 분화된 세포는 환경에 따라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볼복스는 모여 살 때는 역할 분담을 하여 살아가지만 환경에 따라서는 따로 따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기도 하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가을이 되서 물이 차가워지면 그 중 하나가 생식 세포가 되어 스스로 분열을 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들고 남은 몸체들은 스스로 죽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개체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자신이 죽음(자살)으로써 자손이 먹고 살수 있는 유기물질로 전환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볼복스는 여러 세포로 구성되어있어도 필요에 의해 합쳐져 있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세포 생물의 이름을 따로 부르지 않고 그저 군체를 나타내는 볼복스라고 부르죠. 왜냐하면 이 생물의 개체적인 특성보다는 군체의 특성을 중시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흔히 알듯이 국가 체제(system)를 갖추어져야만 ‘일체감(identity)’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목민들은 보여줍니다. 유태인들의 경우에도 국가가 없이도 종교적·민족적 신념이 일체감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국가가 일체감을 형성시키는 것인지, 또는 일체감이 국가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마치 볼복스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하나의 군체(群體)를 만들 수 있는 일체감이 있기 때문에 볼복스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볼복스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체감이 생긴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족이라는 것도 일체감이 중요한 원동력일 수가 있습니다. 몽골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는 애정 어린 표현을 쓰는 것이나, 그들이 자기의 역사를 기록할 때 몽골의 궁극적 시조가 고주몽(고구려의 시조)이라고 하는 것은 이 같은 일체감의 표현이지요.

만주-몽골의 유목민의 경우는 볼복스와 같이 부족에서 국가의 생성 중간 단계 상태에서 삶을 수천 년간 이어왔습니다. 그것은 유목민들의 환경 때문에 생겨난 독특한 생활양식으로 보입니다(유목민들은 볼복스처럼 개별적인 부족으로 살기도 하고, 환경이 되면 국가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해체되기도 합니다). 즉 개별 부족들이 너무 넓은 땅을 사용해야하므로 특정 지역에 모여 살기가 어려워 국가를 구성하려는 의식이 강해지면 중원, 또는 한반도 쪽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다시 물을 것입니다. “당신 말이 옳다고 하자.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대쥬신이 가진 그 일체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실례가 있나? 이런 저런 민속적인 얘기는 안 돼. 왜냐하면 민속(民俗)이 일치한다고 같은 민족이니 종족이니 부족이니 할 수 없잖아? 우리와 한족(漢族)과도 비슷한 민속은 있잖아.”

그렇다면 민속 문제를 빼고 몽골-만주의 유목민들이 일체감을 가졌다는 증거들을 찾아봅시다. 가장 근원적인 민족간의 혼례(婚禮) 문제를 보면 이들은 상당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들은 이렇게 합쳐진 주변의 유목민 부족들을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하였습니다(마치 볼복스처럼 말이죠). 그러나 이들은 한족(漢族)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분리합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만주족 여인이 한족(漢族)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만약 이를 어기고 결혼한다면 족보(族譜)에서 삭제하였습니다. 즉 만한통혼(滿漢通婚)을 금지한 것이죠. 그러나 몽골에 대해서는 철저히 혼인을 장려하는 연혼정책(聯婚政策)을 사용했습니다. 청나라 황제마다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로 삼고 청황제의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의 왕공의 자제와 결혼을 합니다(임계순, 청사). 이것은 만주족과 몽골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쥬신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의식(민족형성의 주관적 요소)’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민족의식이 오늘날 ‘일본인’·‘한국인’과 같이 강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 주축이 된 민족(만주족)은 순수한 의미의 극소수 만주족(10만여 명 : 1557년 기준)이라기보다는 몽골-만주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민족들이며 이들을 사실상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중국을 경영한 것이죠.

[그림 ②] 최근 한국을 방문한 청나라의 마지막 공주 아이신자오뤄 위즈워이(愛新覺羅 毓紫微·43).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자오뤄 푸이(愛新覺羅 溥儀 : 1906~1967)의 5촌 조카.

그런데 청나라 이후 대쥬신족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중원을 지배하던 만주족이 급속히 한족화(漢族化) 되어버리자 만주족의 자제와 결혼한 몽골인들 조차도 다시 한족화(漢族化)되어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청나라는 대쥬신의 영광과 비애를 동시에 지닌 국가였습니다. 여기에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朝鮮) 왕조는 철저히 중국화(中國化)를 자청하면서 형제들을 오랑캐로 부르고 천시합니다. 이 같은 요인들은 근대에 들어서 대쥬신족들이 약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대쥬신은 몽골과 만주에서 급격히 쇠퇴․사멸하고 있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여기에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는 한족(漢族)들을 내몽골과 북만주 일대에 대대적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이제 대쥬신의 미래는 기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족(漢族)들의 고유 영역과 대쥬신의 영역(알타이 동부 - 몽골 - 만주), 티벳 등 청나라가 확장했던 영역들이 모두 현대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동북공정(東北工程 : 대쥬신 역사 말살)’이라는 프로젝트가 필요하게 된 배경이 되었지요.

현대 중국 정부는 청나라가 이룩한 영토와 유산을 모두 이어받았으면서도 과거나 지금이나 늘 만주족을 천시했습니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후수오(胡說)’라는 말이 있죠. 오랑캐, 특히 만주족들의 말이라는 얘기인데 그 말뜻은 ‘허튼 소리’라는 뜻입니다. 요즘 동북공정으로 우리는 시끄러운데 중국인들은 마이동풍(馬耳東風)입니다. 동북공정에 대한 항의가 중국인들에게는 ‘허튼 소리’로 들리는 것은 아닐까요?

(1) 나관중 ‘삼국지’와 고구려

나관중 ‘삼국지’에는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고구려는 ‘삼국지’ 후반부의 주요 인물인 사마의와 관구검(貫丘儉 : ? ~255)의 업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다만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위나라 황제 조방(曹芳)을 폐위시키자 사마사에 반기를 든 사람으로 나옵니다. 사마사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관구검은 패한 후 십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신현(愼縣)으로 몸을 피하였으나 현령 송백(宋白)이 그를 술에 취하게 한 뒤 죽인 것으로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성품이 강직한 사람으로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 중의 한 사람입니다. 관구검은 하동(河東 : 현재의 山西) 사람으로 유주자사(幽州刺史)․양주도독(揚州都督)․진동장군(鎭東將軍) 등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의 내용 속에 가려진 고구려(高句麗)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중국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게 됩니다. 하나는 관구검이 사마의(司馬懿)를 도와서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이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요동(遼東) 지역을 정벌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천왕(위궁 : 位宮)이 통치하는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사이에 두고 관구검과 왕기가 이끄는 위나라와 결전(決戰)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공손연의 토벌 부분만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나관중 ‘삼국지’의 어떤 부분에서 고구려가 개입되었는지를 보겠습니다. 나관중 ‘삼국지’ 106회를 보면 ‘공손연은 사마의에게 양평에서 토벌 당한다(公孫淵兵敗死襄平)’이라는 제목이 나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동의 실질적인 주인인 공손연은 조예에게 요동태수의 직위를 받고 후에 손권이 보낸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황제(조예)에 보내자, 위황제는 공손연을 대사마 낙랑공에 봉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고 칭하고 연호를 바꿔 소한(紹漢) 원년이라고 하였다. 공손연은 일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15만 대군을 일으켜 중원으로 향했다. 위황제 조예는 당황하여 사마의를 부르자, 사마의는 자기의 휘하에 있는 기병과 보병 4만으로 능히 적을 무찌를 수 있다고 했다. 사마의는 기동전과 복병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전쟁이 다소 길어지자 병력이 많았던 연나라는 군량미가 떨어져서 소와 말을 모조리 잡아먹었고 군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공손연은 밤을 도와 도망치다가 위군에게 잡혀서 참수되었다(106회).

이상을 보면 고구려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전쟁의 성공에는 실질적인 토벌업무를 맡았던 관구검과 연나라군을 교란했던 고구려군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한족 장군인 관구검조차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고구려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랑캐 따위가 감히 중원의 역사 소설에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 문제를 나관중 ‘삼국지’의 편찬자들에게 따진다고 한들 ‘후수오(胡說)’라고 제 입을 막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관구검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지면이 모자라서 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관중 ‘삼국지’는 수천페이지에 달하는데 한 페이지 정도 추가한다고 해서 큰 변화가 있겠습니까? 관구검이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서 일까요? 그것도 아닌 듯 합니다. 왜냐하면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관구검이 사마사에 대항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해답은 엉뚱한데 있습니다.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죠. 이해가 안 되신다고요? 그러면 이 문제를 좀더 분석해봅시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사마의가 요동의 공손연을 정벌하는 과정의 전후를 유심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나타납니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정벌하는 바로 직전에 제갈량․사마의의 힘 겨루기․지혜 겨루기 하는 장면이 집중적으로 묘사되어있다는 것이죠. 대체로 사마의가 밀리는 형국입니다. 사람들은 사마의가 원래부터 제갈량보다는 모자라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갈량도 별로 대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긴 들 무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래서 나관중 ‘삼국지’는 사마의가 먼저 탁월한 사람임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야만 제갈량도 더욱 위대하게 된다는 얘기죠.

따라서 나관중 ‘삼국지’에서 사마의는 다른 적에게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마의의 멋진 활약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위나라가 그 동안 토벌하기 힘들었던 공손연의 공격에 사마의가 등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공적을 모두 제거한 것이죠. 즉 “사마의가 제갈량에 밀릴 뿐이지, 실제로는 대단한 사람이다. 봐라, 사마의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무찌르는지 ! ” 하는 얘기죠. 따지고 보면 이것은 결국 제갈량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자기에게 패한 상대에 대하여 “최고의 선수다. 다른 어떤 복서도 그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떠벌리는 것과 다르지 않죠.

(2) 전쟁 전야의 요동

정사(正史) ‘삼국지’를 분석해보면 부여-고구려 등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부족들은 자연환경이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야는 적어 만성적인 식량부족 상태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절식(節食)하는 풍습이 있었고 부족한 식량을 약탈해야 하는데 서쪽으로는 연나라가 강성하여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호전적(好戰的)이고 전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 ③] 1-3세기의 동북아

고구려는 주변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2대 유리왕 때에는 도읍을 국내성(國內城 : 현재 만주의 퉁꼬우)으로 옮겼고 3대 대무신왕 때에는 동부여를 멸망시켰습니다. 고구려는 영제 광화 2년(179)부터 건안 원년(197)까지는 고국천황(故國川王)의 재위기간으로 황건적의 민중봉기가 나던 해에 요동 태수의 침공을 격퇴하기도 합니다.

공손씨는 지금의 요동반도를 통치한 가문으로 사실상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멀리 떨어진 요동반도를 위나라가 공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을 것입니다.

당시 요동반도의 주인은 공손연(公孫淵)입니다. 공손연은 공손강(公孫康)의 아들이죠. 서기 207년 조조가 원상(袁尙)과 원희(袁熙)를 정벌하기 위해 요동으로 향할 때 공손강은 미리 원상과 원희를 죽여 그들의 수급(首級)을 조조에게 바칩니다. 이에 조조(曹操)는 공손강에게 양평후(襄平侯)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228년 공손연이 요동의 주인이 되자 위황제 조예(曹叡)는 공손연을 요동태수(遼東太守)에 봉합니다.

당시 위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공손씨가 다스리는 요동 지역은 포기할 수도 없지만 통제하기도 대단히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낙양과 요동의 거리가 너무 멀고 요동 땅은 공손씨(公孫氏)가 이미 삼대(三代)째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요동은 ‘사실상’(de facto) 위나라 황제의 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지요.

만약 삼국이 대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요동 땅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지요. 왜냐하면 요동 땅은 많은 쥬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대평원(동북대평원)이나 한반도 지역과 중국과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곳으로 공손연이 이들을 충동질하여 중원을 유린할 수도 있었고 한반도나 만주대평원(동북대평원)에서 오는 많은 교역물들을 공손씨가 중간에서 임의로 가로채거나 농간을 부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죠.

[그림 ④] 238년의 요동

서기 236년 위황제 조예(曹睿 : 명제)는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을 요동 남부 지역에 주둔시켜 요동지방에 있는 공손연의 세력과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합니다. 고구려는 새로운 강자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은 남으로는 위․오․촉이 대립하고 있는 상태에서 요동반도는 공손연의 연나라 - 위나라 - 고구려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연나라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요동 지역은 전략 요충지로서 고구려가 정복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큰 장애가 되어 중원으로 진출하거나 남(한반도)․북(만주) 방향으로 공략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만약 고구려가 연나라만 정벌하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서안평(西安平 : 현재의 딴뚱 북동쪽 압록강 연안)을 점령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챙기게 됩니다.

당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고구려는 만성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농경지의 확보 및 중개무역의 이권을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국가적 과제였던 것이죠. 고구려의 입장에서만 보면 만약 요동을 정벌할 수만 있다면 고구려는 유목과 농경은 물론 중개 무역의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거대 국가를 만들 수도 있다는 애기죠.

이상을 보면,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가간의 관계가 복잡하고 미묘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던 가운데 연나라는 위나라를 지속적으로 자극하게 됩니다. 즉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왕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궁성을 다시 짓고 군대를 크게 일으킵니다. 이 사실은 당시 유주(幽州) 자사였던 관구검(毌丘儉)이 즉각 위나라 조정에 알립니다. 위나라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으로 판단하고 관구검으로 하여금 공손연의 토벌을 명하게 됩니다.

(3) 위나라와 고구려의 연합군 공손씨를 토벌하다(238)

237년 관구검(毌丘儉)은 요동의 입구인 요수(遼水)로 출병(出兵)하였으나 가을장마로 인하여 부득이 철군하게 됩니다. 그러자 공손연은 위나라 대군이 물러간 사실에만 고무되어 더욱 맹렬히 위나라에 대항하고 연호를 소한원년(紹漢元年)이라고 합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청주․유주․연주․기주 등 네 주에 명을 내려 많은 군선(軍船)들을 만들어 공손연의 토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연나라 정벌군의 총사령관으로 바로 사마의(司馬懿)를 임명합니다. 당시 위나라는 연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238년 봄 고구려의 동천왕은 자신의 군대를 위나라의 요동 정벌군에 합류시킵니다. 당시 고구려가 파견한 군대는 1~2천여 명의 기병(騎兵)으로 추정됩니다. 사마의와 고구려 연합군은 공손연(公孫淵) 군대를 격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직에 있던 장수와 관리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70여 명을 참형에 처하고 위나라의 요동 정벌은 끝이 납니다.

이 부분을 ‘삼국사기’를 통하여 다시 점검해보도록 합시다. 당시 고구려의 왕은 동천왕(東川王)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동천왕은 신분이 미천한 여인과 산상왕(山上王) 사이에 난 아들로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보냈지만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였습니다. 동천왕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산상왕비 우씨에 대해서도 항상 사랑으로 대하였습니다[참고로 중국 측의 사서인 정사 ‘삼국지’에서는 고구려의 동천왕을 위궁(位宮)이라고 하고 있습니다(위서). ‘삼국사기’에는 동천왕의 휘(諱 : 왕의 이름)가 우위거(憂位居)로 되어있고 산상왕(山上王)의 휘는 연우(延憂) 또는 위궁(位宮)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병도 박사는 동천왕의 휘가 위궁이라고 합니다. 정사에 의거하자면 위궁이 동천왕이 맞다는 것이죠(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위서 관구검전)].

동천왕은 등극하고 난 뒤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습니다. 당시 동천왕은 오나라에서 손권의 사신이 화친을 하기 위해 왔을 때도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목을 베어 그 수급을 위나라 황제에 보냄으로써 위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東川王]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 삼국사기). 이 내용은 정사(위서 : 명제기)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37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가 개정된 것을 축하하기도 합니다([東川王]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 삼국사기).

이 같이 양국 관계가 매우 우호적으로 되어가자 위나라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을 공격하게 됩니다. 결국 238년 정월 위황제 조예는 위나라 태부 사마의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공손연을 토벌합니다. 이 때 동천왕이 주부 대가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돕게 하였습니다([東川王] 十二年 魏太傅 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 삼국사기). 이상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위나라가 고구려를 요동정벌에 끌어들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 한족(漢族)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그 주변의 오랑캐를 이용하는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정책의 일환으로 고구려를 끌어들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물론 공손연이 쥬신족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즉 한나라 문제(文帝) 때 조착(鼂錯)은 흉노문제에 관하여 상주하면서 오랑캐를 막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사는 오랑캐들을 동원하여야만 이들을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한서 : 조착전). 실제로 서기 12년, 왕망은 고구려(高句麗)를 동원하여 흉노를 정벌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고구려군이 지역 사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좌우에서 협공하는 형세이므로 연나라의 주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위나라에서 요청했을 수가 있습니다. 먼저 당시의 사정을 그림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그림 ⑤] 3세기 경의 동북아의 정세

위나라는 북으로는 흉노, 서남방으로는 촉의 공격, 동남방으로는 오나라의 공격을 방어해야만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공손연이 강성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따로 병력을 차출하여 공격하기란 쉽지가 않았다는 말이죠. 이때 동원된 고구려군은 기병(騎兵)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수만 명이 동원되는 전쟁에서 보병 1천명은 큰 효과가 없는 것이니 기병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기병이 동원되었을 경우에는 이 지역의 지리에 밝았던 고구려군은 공손연의 군대를 크게 뒤흔들어놓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는 전쟁비용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의 위나라는 촉과 오의 전선에 주력군이 배치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군대를 많이 동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사에 보면, 위황제는 사마의에게 군사 4만 명을 주어서 요동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나 대부분의 중신들은 4만 명이 너무 많으며 전쟁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합니다(위서 : 명제기). 그러나 이 4만 명도 충분한 병력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명제의 말대로 낙양에서 4천리나 떨어져 있는 요동을 공격하러 가는데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기본적인 군사력이 없이는 사실상의 국가인 연나라의 공손연을 정벌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제1차 요동전쟁은 세 가지 점에서 고구려의 발전과 대외적인 팽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① 요동 지역에서 공손연을 몰아냄으로써 이 지역 사정에 밝은 1차적인 주적(主敵)을 섬멸하였다는 점, ② 위나라의 사정을 일부라도 알게 되었다는 점(여기에는 위군의 군사작전 능력이나 군사적 역량을 파악하는 것도 포함), ③ 공손연의 몰락으로 요동지역에는 힘(세력)의 진공상태가 나타나 이것을 유리하게만 만들면 고구려의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점 등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고구려에 대해 철저히 침묵한 점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성가신 오랑캐에 불과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공손씨를 토벌하는데 고구려가 합세하였다는 것은 한족(漢族)으로서는 분명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겠지요.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단치도 않았던 제갈량의 남만 정벌은 있지도 않았던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스토리까지 곁들여 가면서 반 권의 소설책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나관중 ‘삼국지’의 국수주의적 특성을 다시 한번 알게 됩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고구려와 위나라의 연합군이 공손연을 정벌한 과정 즉 제1차 요동전쟁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위나라와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지만 항상 사이가 좋을 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는 법입니다. 다음 강의에서는 위나라와 고구려가 일전을 벌이는 제2차 요동전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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