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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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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2>

공융과 순욱, 해거름의 올빼미들

***들어가는 글**

1887년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황제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사에 가담했던 대학생 하나가 겁에 질린 채 말했습니다.

"저는 황제를 죽이려고 계획한 일이 없었어요. 모든 일은 다른 친구가 계획했던 일입니다."

다른 대학생 하나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맞아요, 이 일은 모두 체브레프(Chevreev)가 꾸민 일이예요. 그리고 그 자식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죠."

거사에 참가했던 대학생들 가운데는 이미 비밀경찰에 배반한 사람도 있었고 사형선고가 예상되자 대학생들은 울먹이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크고 살결이 유난히 희며 생각이 깊은 눈을 가진 알렉산더 일리치 율리아노프(Alexander Ilyich Ulyanov)의 차례가 되었지요. 그는 이전까지 공부밖에 모르던 학생이었으니 더욱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거사에 가담했던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말합니다.

"친구들, 필요하다면 자네들은 모든 책임을 내게 돌려도 좋네"

그리고 난 뒤 그는 다시 법관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조국을 위한 죽음보다도 더 훌륭한 죽음은 없습니다. 그런 죽음은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오직 하나의 목표, 이 불행한 러시아 인민들을 돕겠다는 목표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진술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법정기록을 읽은 황제도 감동합니다. 그러나 그 해 5월 알렉산더 일리치 율리아노프는 스물 한 살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1) 난세와 지식인**

난세(亂世)가 되면 지식인들의 고뇌(苦惱)가 깊어집니다. 난세는 칼의 시대입니다. 칼 앞에서 지식인들이 항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주민중항쟁(1980년)이 났던 그 해 오월, 대학 새내기였던 저는 학교 교문 앞에서 계엄령으로 진입해 있던 특전사(特戰師) 군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총칼을 실제로 보게 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이리 밀고 저리 밀고 하니 혼이 나갈 지경이었지요. 그 때 같이 붙들린 친구가 말했습니다. "운회야, 세상에 저런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데모를 할 수 있겠니?" 우리는 가급적 얌전히 행동하여 그 날 아무 탈 없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정을 빠져 나온 바로 그 때 장발의 머리에 야윈 학생 하나가 교문 앞에 늘어선 장갑차 앞을 지나서 총을 들고 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던 특전사 군인 앞에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총을 비껴든 채로 "이제부터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 학생은 "여기는 우리 학교이니 들어가고 오는 것은 나의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자 군인은 총을 그대로 든 채 자세를 흩트리지도 않고 한 손으로 그 학생을 구타하기 시작합니다. 맞으면 다시 일어나 들어가려다 또 맞고 그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그 학생은 결국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속으로는 저렇게 나약해 보이는 사람이 왜 저리도 위험을 자초하는가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 학생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처음 본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사람은 더욱 아니었죠.

[그림 ①] 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 모습

저는 이 글을 통해 오늘날 국토방위에 온몸을 바치고 있는 우리 국군(國軍)을 비방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민의 군대'가 독재자나 특정한 군벌(軍閥)에 의해 장악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세월은 흘러서 1981년 이후로 더 이상 군인들이 학생들을 진압하는 사태는 없어졌습니다. 전투 경찰은 그래도 군인들에 비하면 신사(Gentleman)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폭력과 공포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더 과격해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살면서 대의(大義)를 위하여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이름이 나면 죽을 일도 없겠죠). 학생운동 한 것을 무슨 정치경력으로 이용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사실 저는 그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충의지사(忠義志士)들은 세상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공한 정치가들이 스스로를 '386 세대의 리더'이니 '학생운동의 지도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때로는 그들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림 ②] 황혼(난세)에 둥지를 떠나는 올빼미(지식인을 상징)의 모습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상에 이름이 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즉 지도자나 이름난 사람일수록 그 시대의 자기 역할을 찾아서 행해야 할 의무가 있죠. 최근 친일파 인사들을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높고 이 일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우리가 친일(親日) 행각을 한 사람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일본군 육군 소위니, 일제 시대 면장이니 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최남선이나, 이광수, 김동환, 김활란, 박흥식, 33인의 소위 민족대표(물론 이 가운데서 극소수 친일행각을 하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등 그 시대를 주도했던 소위 '선각자'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친일 행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동아 전쟁 소모품(消耗品)에 불과한 일본군(日本軍) 육군소위(陸軍少尉) 정도가 친일행각을 하면 얼마나 한단 말입니까? (당시 일본군은 1천만 명이었습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미꾸라지 몇 마리를 잡으려다 고래를 놓치는 격입니다.

그러면 '삼국지' 시대에는 어떨까요? 한나라 4백년의 유구한 역사가 황혼에 접어들고 수많은 군웅들이 나타나 천하를 가지려고 할 때 한나라를 지키려고 온몸을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승(董乘)이나 길평(吉平)과 같이 실제로 조조를 암살하여 직접적으로 한나라를 회복하려 했던 사람들도 있고 예형(禰衡)과 같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조조의 대역무도함을 온 천하에 알림으로써 반조조(反曹操) 운동을 격화시키려 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지성(知性)으로 이름 높은 당대의 사회적 명사들 가운데서 몇 사람만 뽑아서 그들의 삶을 조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뽑은 사람은 순욱(荀彧)과 공융(孔融) 그리고 진림(陳琳)입니다. 이제 이들의 삶을 통하여 난세를 살아간 지식인들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2) 공융(孔融), 지성의 항거**

'삼국지'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융(孔融 : 153-208)이 있습니다. 공융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당대 최고의 문인(文人) 중의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안칠자'란 건안 시대(196-219 : 한나라 헌제 때의 연호를 딴 이름)의 뛰어난 7인의 문인을 의미하는데 조비(曹丕)의 '전론(典論)'에 따르면, 노국(魯國)의 공융(孔融 : 153-208), 광릉(廣陵)의 진림(陳琳 : ?-217), 산양(山陽)의 왕찬(王粲 : 177-217), 북해의 서간(徐幹 : 170-217), 진류(陳留)의 완우(阮瑀 : ?-212), 여남(汝南)의 응창(應瑒 : ?-217), 동평(東平)의 유정(劉楨 : ?-217) 등 7명이라고 합니다.

공융은 조조보다 두 살 많은 사람으로 자는 문거(文挙)로 북해태수(北海太守)를 지냈으며 공자(孔子)의 직계 자손이라고 합니다. 공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였고 매우 총명하였습니다. 10세 때 아버지를 따라서 하남윤(河南尹) 이응(李膺)을 찾아간 일화는 나관중 '삼국지'에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11회). 공융은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고 지식이 널리 이르러 그 본 것이 많았다(博涉多該覽 : 후한서 공융전)"고 합니다.

후한서에 따르면, 공융이 유명하게 된 것은 당시의 권력자인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의 미움을 받은 형의 친구 장검(張儉)을 숨겨주었다가 체포되었지만 이에 대해 당당하게 맞선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행위가 의로운 일로 조야의 찬사를 받은 것이죠.

[그림 ③] 공융의 고향 곡부(曲阜)의 현대 모습

그 후 동탁(董卓)이 정권을 장악한 후 조정에서 호분중랑(虎賁中郞)의 일을 보면서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한 헌제)을 세우려 하자 공융은 사사건건 입바른 말로 따지고 들어서 동탁의 심기를 건드려 의랑(議郞)으로 전보됩니다(會董卓廢立 融每因對答 輒有匡之言 以忤卓旨 轉爲議郞 : 후한서 공융전).

세월이 흘러 원소와 조조의 세력이 극성하자 공융은 이들에 대한 협조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공융은 이들이 궁극적으로 한실을 무너뜨리려고 기도한다고 보고 이들을 죽이려 합니다(融知紹操終圖漢室 不欲與同 故怒殺之 : 후한서 공융전). 그러나 공융의 세력이 미약하여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못하고 이후 사사건건 공융은 조조를 조롱하거나 비판합니다.

조비(曹丕 : 조조의 아들)가 원소(袁紹)의 며느리였던 견씨(甄氏)를 아내로 맞이하자 공융은 "승상, 그렇지요. 과거에 무왕이 주왕(紂王)을 토벌했을 때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준 일이 있지요."라고 조롱합니다. 나중에 허도로 돌아온 조조가 "그런 말이 도대체 어느 책에 있었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공융이 대답하기를 "(특별히 어떤 책에는 없었지만) 지금의 일로서 생각해보니 (당신이 하는 짓거리를 보니) 당연히 그랬을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지요(以今度之 想當然耳)"라고 대답합니다(후한서 : 공융전).

달기(妲己)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애첩으로 주나라 유왕(幽王)의 애비(愛妃)인 포사(褒姒)와 함께 중국 역사상 음란하고 잔인한 대표적인 독부(毒婦)로 알려진 여자지요. 주왕과 달기는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에게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는 것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겼다고 합니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주왕을 토벌하였을 때 달기도 같이 살해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공융은 엉뚱하게 무왕이 달기를 죽이지를 않고 자기 동생에게 주었다고 하니 조조가 이상하게 들었겠지요. 그래서 후에 공융에게 그것이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은근히 달기를 견씨에 비유하여 조조의 심사를 뒤틀게 만든 것이죠. 이와 같이 공융은 조조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을 계속 가합니다. 오히려 조조가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조조가 힘겹게 오환(烏桓)의 정벌에 나서는데 공융은 "대장군(조조)께서 원정을 하신다? 옛날에는 숙신(肅愼)이 조공(朝貢)을 태만하더니 그나마 보내던 싸리나무 화살도 보내지 않고 정령족(丁零族)은 소무장군(蘇武將軍)의 소나 양을 훔쳤으니 그것도 이번 기회에 규명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大將軍遠征 蕭條海外 昔肅愼不貢楛矢丁零盜蘇武牛羊 可幷案也 : 후한서 공융전)" 라고 하여 조조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즉 공융이 눈에는 조조가 정신도 없이 오환을 치러 가는 것으로 보였지요. 숙신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쥬신족인데 이들의 영역까지 갈 수도 없거니와 쉽게 조공을 바칠 사람들도 아니며 정령족은 북해지방(北海 : 현재의 산뚱반도)에 사는 부족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조조는 정벌하지도 못할 곳을 함부로 나설 정도로 정신없는 사람이거나, 내부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정 그렇게 밖으로 돌 테면 아예 온갖 시시콜콜한 일을 다 처리하고 오라는 식의 말이었죠. 조조는 힘겹게 북벌을 하고 있는데 허도에 편하게 있는 작자가 이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병사들이 굶주리자 조조는 주조(酒造)를 금하는 표를 올립니다. 그러자 또 공융은 온갖 오만한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이에 대해 비난합니다.

조조는 이미 공융에 대한 미움이 쌓여서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조조는 공융이 자기를 모욕한다고 죽이자니 세상의 이목이 두렵고 공융이 조조보다 나이가 두 살이 많은 문단 선배이기도 하여 모른 체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공융은 조조 치하에서는 더 이상 살아날 길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조조의 부하 치려(郗慮)는 공융의 죄를 꾸밉니다. 이미 승상 군모제주(軍謀祭酒)인 노수(路粹)에게 명하여 공융의 죄상을 상주하게 합니다. 그 상주문이 내용에는 공융이 자기는 대성인의 후예인데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어찌 묘금도(卯金刀)란 말인가?(有天下者何卯金刀 : 후한서 공융전)."라고 날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묘(卯)ㆍ금(金)ㆍ도(刀)란 한 황실인 유(劉)씨를 나눈 글자지요[조선의 역사에서 조광조 선생을 죽이기 위해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이라고 날조한 것과 유사한 이야기죠]. 즉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것은 한나라 유씨인데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얘깁니다(즉 예형과 같은 성인이 후손들이 다스려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죠?). 목이 달아날 말이지요.

또한 치려는 "일전에 예형과 더불어 지나치게 대역무도하고 방자한 말[(질탕방언(跌蕩放言)]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둘 (공융과 예형)은 서로에 대해 (방자하게도) "예형이 공융을 일컬어 '공자는 죽지 않는다(仲尼不死)' 즉 '살아있는 공자'라고 하면 공융은 예형에게 '다시 살아난 안회(顔回復生)'라고 추켜세웠다."라고 합니다. 이로써 공융은 처자(妻子)와 함께 처형당하고 맙니다(후한서 : 공융전).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공융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유표를 정벌하러 가려고 하는데 대중대부(大中大夫) 공융이 조조의 출정을 막으면서 '왜 명분이 없는 군사를 일으키느냐'고 말린다. 그러자 조조는 불끈 화를 내면서 "유비나 손권은 천자의 명을 거역하는 역적 놈들인데 왜 그들을 토벌하면 안 된다는 것이요?"라고 꾸짖어 쫓아내자 공융은 승상부를 물러나면서 "어질지 못한 자가 어진 자를 치니 어찌 패하지 않으리오!(以至不仁伐至仁 安得不敗乎)"라고 탄식하는데 이 말을 치려가 듣고서 조조에게 달려가서 공융은 '살아있는 공자'니 하는 말과 예형이 조조를 욕한 것도 그 책임은 결국 공융에게 있다고 고하자 조조는 크게 노하여 공융을 처형하였다(40회 요약).

나관중 '삼국지'에는 공융이 조조를 어떤 식으로 괴롭히고 난처하게 만들었는지가 상세히 나와 있지는 않고 다만 공융의 지사적(志士的)인 풍모(風貌)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공융의 행위를 언론을 통한 정부에 대한 저항과 정부 내에서의 투쟁 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무너져 가는 한실(漢室)을 살리려 한 사람들은 많지만 공융은 특이하게 조조에게 저항합니다. 다른 충신들과는 달리 철저히 조정(朝廷)에 남아서 조조를 비판하거나 또는 조조가 한 행동에 비난을 가하여 무안하게 만듦으로써 조조의 업적들을 오히려 평가 절하시킵니다. 참으로 긴 세월을 끈질기게 조조를 비난하고 온갖 모욕을 가한 사람이 공융입니다.

공융은 아마도 조정에 남아서 한실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항거한 듯합니다. 공융이 예형을 굳이 천거하려 한 것도 무너져 가는 한실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는데 예형은 이미 한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본 듯하고 공융은 그래도 끝까지 조조에 항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④] 한 문화(시계방향으로 양잠, 도자기, 귀족의 수의, 교통수단)

공융은 중국 지성인들의 대의(大義)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표상을 보여줍니다. 예형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하여 무모하리만큼 직접적으로 공격하면서 죽어간 데 반하여 공융은 죽을 때까지 한실을 지키기 위한 각종 언론 플레이로 조조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공융의 행위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물론 의문입니다. 그러나 한나라 충신이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3) 진림, 카멜레온의 시(詩)**

공융과 더불어 '건안칠자'의 한 사람으로 진림(陳琳 : ?-217)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림은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죠. 여러분들은 아마 관도대전 당시의 조조 토벌 격문을 지은 사람으로 기억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죠. 진림은 공융과는 다른 행로를 걸어갑니다.

진림의 자(字)는 공장(孔璋)으로 광릉(廣陵 : 현재의 양주) 사람입니다. 진림은 대장군 하진(何進)의 주부였는데 189년 하진이 하태후를 협박하여 환관을 주살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려다 하진의 미움을 받아 기주에 있는 원소에 의탁합니다. 진림은 원소의 휘하에서 문장을 담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조조토벌의 격문을 지은 것이죠. 이 문장은 조조의 가문을 3대에 걸쳐서 사정없이 모욕을 가한 문장입니다. 아마 인신공격성 문장으로는 대표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림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현대 한국의 정치판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을 텐데요.

관도대전이 끝나고 업도도 함락되어 진림은 조조에게 포로가 됩니다. 당시 조조는 큰 책망을 하지 않고 "나에게 욕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욕할 일까지 있었느냐(但可罪狀孤而已,惡惡止其身 何乃上及父祖邪 琳謝罪 : 위서 왕찬전)"고 하자 진림은 "화살촉이 시위에 있으면 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라고 말합니다. 화살촉에 장전된 화살처럼 문인이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지요. 조조의 주변에서는 진림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조조는 진림의 재주를 아껴 그를 죽이지 않고 중용합니다(太祖愛其才而不咎 : 위서 왕찬전).

'전략(典略)'에 따르면, 진림은 자신의 글이 완성되면 조조에게 먼저 보여주었는데 그 문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조조가 병석에 누워있다가도 진림의 글을 보고 "공의 글을 보니 두통이 사라지오."라고 기뻐했다고 합니다曰(琳作諸書及檄 草成呈太祖 太祖先苦頭風 是日疾發 臥讀琳所作,翕然而起曰 此愈我病). 조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진림의 글이 얼마나 명문장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림의 대표작으로는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이 있습니다.

진림의 일생은 어떨까요 ? 앞서 본 예형과도 다르고 공융과도 많이 다릅니다. 남조의 양(梁)나라 때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진림을 보면 원소 휘하에서 글을 쓸 때는 조조를 승냥이(豺)와 이리(狼)라고 하고 하더니 조조의 밑에서 일할 때는 원소를 뱀(蛇)과 살모사(虺)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진림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문인(文人)의 고민일 것이다.

안지추가 이런 말을 쓴 이유는 '아무리 난세라도 진림처럼 부끄럽게 살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진림의 예를 거울삼아서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하지 마라'는 의미겠지요. 아무리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권력의 덫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세상의 지식인 모두가 진림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예형이나 공융처럼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지식을 갖춘 사람이 단지 호구지책(糊口之策) 또는 생명의 연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진림처럼 살아가는 것도 경계하라는 것이죠.

***(4) 순욱(荀彧), 방황하는 조조의 장량

순욱(163~212)은 위나라의 대신으로 자는 문약(文若)이고 영천(潁川) 사람입니다. 순유(荀攸)와는 사촌간이죠. 이 순욱의 경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여러분들이 워낙 잘 아는 사람일 테니까요). 순욱은 명문가에 출생하여 가후에 비견될 수 있는 대단한 전략가이자 지성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관중 '삼국지'에는 없지만) 순욱은 항상 마음을 치우침이 없이 바르고 엄정한 태도를 견지하였고 겸허하고 검소하여 봉록을 친지와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집에는 남아있는 재산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순욱과 관련해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순욱이 가진 고뇌(苦惱) 부분입니다.

212년 동소(董昭) 등이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승진시키고 구석(九錫)의 예물를 갖추어 조조의 공로를 치하해야 한다고 하자 순욱은 이에 반대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순욱이 상당히 방황하고 있는 지성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아마 나관중 '삼국지'를 읽는 여러분들도 이 대목에서 의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순욱이 조조를 도운 정도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도 없을 터인데 조조가 구석을 받는데 거부하다니요?

신하가 구석을 받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즉 구석을 받는다는 것은 황제 위를 넘보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다는 의미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순욱은 조조가 하는 모든 일은 다 도울 수 있지만 한왕조를 무너뜨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조조는 순욱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조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보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빈 그릇이어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기도 하고 근심 속에 마음의 병이 깊어 죽었다고도 합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그림 ⑤] 전략을 짜는 순욱(드라마의 한 장면)

일단 제가 보기에는 조조의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반대한 순욱의 행위는 순욱의 정신적 방황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순욱은 조조가 서주(徐州)를 평정하고 관도대전(官渡大戰)을 치르고 하는 것들이 한나라 황실을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욱이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거부한 것은 조조가 주공의 도를 발휘하여 모든 권력을 다시 한황실에 넘기기를 바랐다는 말이 되는데요. 이것은 순욱이 자기모순에 빠져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는 이미 조조가 자신을 암살하려던 동승과 그 무리들을 모두 죽였고, 사사건건 자기를 비꼬고 간섭했던 공융과 예형을 죽였습니다. 이들은 한황실(漢皇室)을 보호하려던 마지막 보루(堡壘)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욱은 그들이 그만큼 한황실을 보호하려고 하는 데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이제와서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반대합니다.

조조는 평생을 거의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조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조카와 아들 그리고 아끼는 장수들이 전사하기도 합니다. 조조는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그 같은 고통을 감내한 사람은 아니지요. 조조는 천하통일을 하여 천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순욱은 왜 마지막에 조조를 반대했을까요? 이것은 나관중 '삼국지'는 물론이고 정사에서도 미스터리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죠. 이제 그 점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봅시다.

첫째, 생각보다 천하 통일이 늦어져서 국토는 분열되어있는데 조조가 제위(帝位 : 황제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순욱은 의식 깊은 곳에 조조가 천자(天子)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사마의, 공융, 예형이 조조를 업신여겼듯이 순욱도 잠재적으로 조조가 천자가 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조는 환관의 가문이었기 때문이죠. 즉 순욱이 태어난 영천지역은 낙양에 매우 가까운 곳이었고 순욱은 명문가의 자손이었지요. 그의 할아버지인 순숙(荀淑)은 순제와 환제 때 이름을 떨친 인물이고 순욱의 아버지인 순곤(荀緄)은 제남(濟南)의 상(相)이었고 숙부인 순상(荀爽)은 사공이었습니다. 따라서 순욱은 대표적인 청류가문에 속하며 세련된 문화를 항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정사의 내용 그대로 순욱은 조조가 주공의 도를 발휘해주기를 최종적으로 기대했을 수가 있습니다. 즉 동소의 권유에 대하여 순욱은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위서 : 순욱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주공(周公)은 중국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로 주(周) 무왕(武王)의 아우였던 주공(周公) 단(旦)을 말합니다. 주공은 무왕의 동생으로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고 동방정벌과 주나라의 기틀을 잡으면서도 권력을 탐하지 않고 왕의 지위를 그대로 조카에게 물려준 사람이었지요. 주공은 천하를 안정시킨 후 호경(鎬京)에 수도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조카인 성왕을 맞아 전국의 제후를 모으고 대조회를 열고 스스로 여러 신하의 자리에 앉아서 성왕의 충실한 신하임을 표명합니다.

넷째, 순욱은 조조가 새로운 왕조를 열어가는 것을 심리적으로 꺼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욱은 조조가 개창할 새 왕조가 유구한 한나라를 과연 제대로 계승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회의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죠. 이것은 순욱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린 당시의 지식인들은 조조가 중원을 통일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는 것보다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여 다시 한나라 번영기였던 문제(文帝)ㆍ경제(景帝)[전한], 또는 명제(明帝)ㆍ장제(章帝)[후한]의 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조조가 주공의 도를 발휘해주기를 원했을지는 모르지만 조조는 동승 등과 같은 반조조 세력을 지속적으로 척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입니다. 설령 조조가 권력을 다시 한실로 돌린다 해도 조조는 살아남기 어렵지요. 뿐만 아니라 조조 휘하에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수많은 장수와 참모들이 이것을 원할 리가 없습니다.

순욱의 죽음은 중국 지식인들의 현실과 이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욱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이상은 주공의 도가 구현되는 한실의 부흥이었다는 얘기죠.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상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번의 예형의 경우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난세를 살아간 '삼국지' 시대 중국 지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되었는가를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토대와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려 합니다. 순욱과 같이 그 성격이 모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오히려 순욱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닐까요? 대세를 따르지만 너무 지나친 것은 경계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제가 자라면서 늘 듣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일제시대(1905~1945) 때는 친일파(親日派) 아닌 사람이 없었고 인민군(人民軍) 치하(1950)에서는 빨갱이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남북한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수십만 양민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순수한 인사들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제 역할을 다하여 다시는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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