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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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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1>

예형, 슬픈 북치기

***들어가는 글**

천안문 사태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1989년 중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었죠. 저는 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평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천안문 사태에 대한 학생들이나 민주인사의 입장과 중국 정부의 입장은 다를 수가 있고, 어느 편이 중국의 장래에 대해 더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진이 있습니다.

[그림①] 천안문 사태

흰색 상의를 입은 청년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돌진하는 탱크를 홀로 몸으로 막아 세우고 있습니다. 탱크가 오른 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서 막고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서 막았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청년의 행동은 자신의 혈기(血氣)를 감당하지 못해 객기(客氣)를 부린 듯도 하고 아니면 이미 죽음을 각오한 숭고한 지사(志士)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이 청년의 행동이야말로 중국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5천년의 기나긴 역사와 높은 중국 문화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역시 중국은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청년의 행동은 총알 한 방이면 끝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죽음을 초개같이 생각하고 자기가 바라는 이상적인 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고귀한 신념이 표상화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청년이 있는 한 중국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이 청년의 행위는 중국 지성(知性)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1) '삼국지'의 기인(奇人), 예형(禰衡)**

나관중 '삼국지'를 읽다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기인(奇人)의 대명사인 예형(禰衡)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예형의 기행(奇行)을 간략히 요약합시다.

유표를 항복시키려고 하는 조조에게 순유는 유표가 명사(名士)들을 좋아하니 공융(孔融)을 보내어 설득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조조가 공융에게 사람을 보내자 공융은 예형이라는 젊은 선비를 추천합니다. 공융이 천자에게 상소를 올려서 구구절절이 예형이 얼마나 천재적인지를 설명하자 천자는 그 표문을 조조에게 보내고 조조는 예형을 승상부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조조는 예형을 박대합니다(帝覽表 以付曹操 操遂使人召衡至禮畢 操不命坐). 예형도 조조 휘하의 사람들에게 악담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형은 순욱은 초상문에 문상꾼(吊喪問疾)으로 보내면 적합하고 허저는 말먹이꾼(牧牛放馬)으로, 장요는 고수꾼(擊鼓鳴金)으로, 서황은 개백정(屠殺狗)이나 하면 좋겠다고 떠들어 댑니다. 화가 난 장요가 칼을 뽑아 예형의 목을 치려고 하자 조조가 만류하면서 조만간 연회가 있는데 고수(鼓手 : 북치기)가 필요하니 내버려 두어라고 합니다(23회)

대연회날 남들은 다 복장을 갖추고 나왔는데 예형은 평상복으로 들어가 어양삼과(漁陽三過)의 곡조를 치니 그 소리가 절묘하고 깊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좌우에서 조조에게 아부하기 위해 왜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느냐고 하자 예형은 옷을 홀랑 벗고 알몸이 됩니다. 모두가 질겁하고 얼굴은 가렸지만 예형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천천히 옷을 입습니다. 조조가 분개하여 예형을 나무라자 예형은 오히려 조조가 대역무도하다고 꾸짖습니다. 조조는 노하여 그를 형주에 사신으로 보내 유표의 손을 빌려 예형을 죽이려 하지요. 예형이 유표를 만난 후에도 말을 함부로 하자 유표는 예형을 다시 강하태수 황조에게 보냈는데 그 자리에서도 예형은 황조를 욕하여 마침내 죽음을 당합니다(23회).

이상이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예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나관중 '삼국지'를 읽으시는 여러분 대부분이 북치기 사건을 기억하시리라고 봅니다. 사실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예형처럼 행동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이런 인물들을 가끔 볼 수도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도 소설이므로 예형의 북치기 사건을 지어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연히 '후한서(後漢書)'를 보게 되었는데 예형이 북치기를 하면서 '알몸쇼'를 한 사건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기록에 나타난 사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제 생각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끝없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지요.

도대체 예형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 사람은 정신 이상자는 아닐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사람의 행동의 진위(眞僞)는 과연 무엇일까?

나관중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은 예형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제위를 노리는 권력자를 통쾌하게 꾸짖는 것을 보고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겠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자기주장이 옳은지는 몰라도 행동이 너무 막가는 식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행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예형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요?

***(2) 슬픈 북치기**

우리가 예형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형은 26세에 요절했으며 그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만 자극하고 있을 뿐이지요. 예형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後漢書)' 예형전(禰衡傳)에 나타난 기록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사(후한서)의 기록과 나관중 '삼국지'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몇 가지의 중요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예형이 조조 휘하의 모든 참모와 장수들을 모독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실제로는 예형이 직접적으로 그들을 비난한 적은 없습니다. 예형의 표적은 오직 조조에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예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고리가 됩니다. 예형이라는 사람을 정사를 통해 알아봅시다.

예형은 자는 정평(正平), 평원(平原)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재주와 말솜씨가 있었지만(少有才辯) 기질이 강하고 오만한 데가 있었다(尙氣剛傲)고 합니다. 그렇지만 예형은 잘못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好矯)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점 또한 예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림②] 예형의 고향인 평원의 현대 모습(현재의 산동성 평원)

예형은 형주로 피난을 갔다가 건안(建安) 초에 허도(許都)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는 허도가 새로이 건설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사대부(賢士大夫)들이 나름대로 큰 꿈을 가지고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예형에게 묻기를 진군(陳羣)이나 사마랑(司馬朗 : 사마의의 형)을 찾아가서 한 자리라도 얻으면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예형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푸줏간에서 고기나 파는 이들을 따르겠습니까?(吾焉能從 屠沽兒耶)"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순욱(荀彧)은 어떻소? 하니 "예형은 순욱은 초상집 문상이나 보낼 사람이오(文若可借面弔喪)이라고 합니다(후한서 : 예형전)."

따라서 나관중 '삼국지'와 같이 예형이 수많은 조조의 참모와 장수들의 면전에서 그들을 모독한 것은 아니지요. 나관중 '삼국지'는 예형이 조조의 수많은 장수와 참모들의 면전에서 그들을 모독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예형이 성격적으로 지나치게 오만하게 보이도록 합니다(아니면 예형이 조조를 꾸짖는 장면을 더 재미있게 연출해서 독자들이 통쾌감을 느끼게 하려 한 것이겠죠).

예형의 능력을 가장 알아준 사람은 공융(孔融)입니다. 예형과 공융은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무 살이나 났지만(공융이 연장자)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인정하였습니다(衡始弱冠 而融年作四十 遂與交友 : 후한서 예형전).

예형의 능력은 나관중 '삼국지'에 공융이 천자에게 올린 표문에 상세히 나타나있으니 생략합니다. 이 표문은 후한서에 있는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이 표문에 따르면 확실히 예형은 대단한 천재였음이 분명합니다. 공융은 건안칠자(建安七子 : 건안시대의 탁월한 문사들) 중의 한 사람인데 학식이나 문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공융이 자기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어린 예형을 "성품이 곧고 밝으며 눈으로 한번 보면 따라서 외고 귀로 잠깐 들어도 잊지 않으며 성품과 도가 합치되는 사람(性與道合 : 후한서 예형전)"으로 극찬합니다.

뿐만 아니라 표문을 토대로 보면 예형은 무너져 가는 한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공융이 예형을 황제에게 추천한 것은 자기와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천자를 도와서 기회를 엿보아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유표(劉表)를 투항시키기 위해 예형을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그런 내용은 정사에 없고 공융이 원래부터 아끼던 예형의 재능에 대하여 수차례 조조에게 말했기 때문에 조조가 그를 보고 싶어 합니다(融旣愛衡才數稱述學於曹操 : 후한서 예형전).

문제는 조조가 예형을 보고 싶어 하는 데서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즉 조조는 예형을 보고 싶어 하는데 예형은 조조를 대단히 증오한 듯하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비극(悲劇)의 시작이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예형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바람에 예형이 기분이 나빠 조조의 장수와 참모들을 비난한 데서 조조와 예형의 갈등이 커진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는 좀 다릅니다. 인재를 중시하는 조조는 예형을 꼭 보고 싶어 하고 예형은 조조를 싫어해서 만나려 하지 않으니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먼저 나관중 '삼국지'를 보시죠.

황제는 공융의 표를 보자 그 표문을 조조에게 넘겼다. 조조는 곧 사람을 보내어 예형을 승상부로 불렀다. 예형이 도착하여 조조에게 예를 올렸으나 조조는 예형에게 앉으라는 말 한 마디가 없었다. 그러자 예형이 하늘을 바라보며 "천지가 넓 다하지만 사람이 없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그러자 조조가 화가 나서 "내 휘하에 있는 장수와 참모는 당세의 영웅들인데 사람이 없다니!"라고 말했다.(衡仰天嘆曰 天地雖闊 何無一人也 操曰 吾手下有數十人 皆當世英雄,何謂無人 : 23회)

이때부터 조조와의 입씨름이 시작되고 조조 휘하의 장수와 참모들을 대장장이, 개백정, 초상집 문상꾼 등에 비유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정사(후한서)에서는 어떻게 되어있을까요?

정사(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예형을 보고 싶어 하자 예형은 스스로 자기는 정신병이 있어서 만날 수가 없노라(自稱狂病 不肯往)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가치 관념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생각해보세요. 최고의 권력자가 황제의 명을 받아서 초빙을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서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요즘 같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 시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마의의 경우를 기억하시죠? 조조가 사마의를 부르니 중풍이 들었다고 사양하면서 중풍든 것처럼 흉내 내다가 하녀에게 들키자 바로 그의 아내가 하녀를 죽인 일을 말입니다.

조조는 화가 났지만 예형을 죽이려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조가 인재를 워낙 중시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예형의 탁월한 재능과 명성도 조조가 예형을 쉽게 죽일 수 없는 원인이었겠죠. 그러나 조조는 이 일로 인하여 예형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는 생각한 듯합니다. 만약 사마의가 예형처럼 행동했으면 바로 죽음을 당했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형의 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③] 조조

어린 선비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조조는 예형을 혼내어 굴복시키려합니다. '문사전(文士傳)'에 인용된 말에 따르면 이 일로 인하여 "조조는 예형에게 모욕을 주려고 작정(魏太祖欲辱衡)"합니다. 그래서 예형이 북을 잘 두드린다는 소리를 듣고서 불러서 북치기(고수)를 시킵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당대 최고의 작가를 '서울 올림픽 유치 기념 만찬회'에서 음식을 나르게 한 것이나 같은 상황이죠.

조조는 예형에게 심하게 모욕을 줌으로써 자기가 당한 일에 보복을 하고 예형이 이로 인하여 자기에게 굴복하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조조가 예형의 성품을 잘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권력이나 무력 앞에 굴복할 사람에게는 조조의 처방이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지요.

조조가 예형에게 고수를 시킨 것은 예형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를 바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형이 이것에 굴복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예형은 당대의 일류 문사(文士)인 사람인데 고수(鼓手)를 시킨다니 말이 안 되지요.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고수(북치기)로서 예형이 한 행동들은 대부분 정사(후한서)의 기록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다른 점은 옷을 벗고 소동을 부린 뒤 조조를 바로 꾸짖은 것은 아닙니다. 정사를 한번 보시죠.

예형은 조조 앞에 이르자 연주를 멈추었다. 그러자 관리가 조조에게 아부하여 말하기를 "고수라는 자가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어찌하여 가볍게 공(승상 조조) 앞에 나서느냐?"라고 하니 예형이 "그러지요", 하더니 먼저 윗옷을 벗고 이어 나머지 옷도 벗어서 알몸으로 조조 앞에 섰다. 그리고 난 뒤 예형은 천천히 옷을 주어 입고 돌아가면서도 부끄럼이 전혀 없었다. 조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본래 내가 저 녀석을 창피하게 해주려고 했다가 내가 오히려 당했네그려(本欲辱衡 衡反辱孤)"라고 하였다(후한서 : 예형전).

정사에 따르면 예형이 이 연회에서 직접적으로 조조에게 대역무도하다고 꾸짖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예형의 '알몸쇼'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죠.

예형의 이 같은 행동을 나관중 '삼국지'는 비교적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의 몇 안 되는 예리한 분석이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한번 볼까요?

(알몸의 예형이 천천히 옷을 입자) 조조가 소리쳤다.
"이 곳은 묘당인데 왜 이리 무례하게 구느냐?(廟堂之上 何太無禮)"

예형은 태연히 대답했다.
"천자와 윗사람을 속이는 것이 무례한 일이지요(欺君罔上 乃謂無禮)."(23회)

그러면서 예형은 조조를 크게 꾸짖으며 "네 놈은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놈을 구별하지 못하니 눈이 더럽고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니 마음도 더럽다"고 하더니 자기(예형)와 같은 천하의 명사를 북치기를 시킨 것은 장창(臧倉 : 노나라 평공의 대신)과 같은 소인배가 맹자(孟子)를 우롱한 격(臧倉毁孟子耳)이라고 조조를 꾸짖습니다.

물론 이 부분(예형이 조조를 꾸짖는 것)은 정사(후한서)의 기록에는 없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자면 예형의 '알몸쇼'는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리고 그것은 굳이 조조를 꾸짖지 않아도 조조를 모욕하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습니다.

예형의 행위는 학자이자 지성인이 행할 수 있는 정신적 테러이죠. 테러를 반드시 총칼이나 폭탄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예형은 보여줍니다.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 독재정권이 광고주를 협박하여 광고를 못 내게 하자 동아일보가 이에 항거하여 백지에 가까운 신문을 낸 경우와도 다를 바 없지요. 그런 행위들이 국민들에게 파급효과가 훨씬 큰 법입니다.

사실 총칼로 하는 물리적 테러는 어쩌면 가장 저급한 테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강대국이 물리적 테러를 당하더라도 그에 대한 보복에는 한계가 있지만 불과 수십 년에서 1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보복테러는 상상을 초월하죠. 총칼로 하는 테러는 이내 엄청난 보복테러를 불러와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삼국지' 시대 조조(曹操)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기 아버지와 가족의 죽음으로 서주(徐州) 전체가 피로 물들지 않았습니까? 사실 과거의 경우 총칼로 하는 테러는 동지에게 알려지면 맹동주의(盲動主義)로 몰려 적이 아니라 동지들에 의해 제지당하게 되지요.

제가 보기엔 예형은 도저히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 방법으로 이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예형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3) 절망의 늪을 지나 죽음의 언덕으로**

예형의 북치기 사건에 대해 가장 당황한 사람은 공융이었습니다. 공융은 예형의 행동을 나무라고 다시 조조에게로 가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공융은 조조에게 예형이 원래 정신질환이 있어 그런 행동을 했으니 용서를 빌고 예형이 와서 스스로 사과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기뻐합니다(融復見操 說衡狂疾 今求得自謝 操喜 : 후한서 예형전). 바로 이 시점까지도 조조는 예형의 재능을 아껴 자기를 위해 봉사하기를 바란 듯합니다.

참 이것을 보면, 조조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조조의 도량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 같으면 예형의 꼴도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제가 조조의 권력을 가졌다면 단번에 요절을 내고 말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인물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조의 마음과는 달리 예형의 행동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조조는 예형을 기다리는데 하루해가 저물도록 오지 않습니다(待之極晏). 한참을 지나서 나타난 예형의 몰골이 가관입니다.

예형은 허름한 옷을 걸치고 머리엔 두건을 쓰고(著布單衣 疎巾), 손에는 3척 길이의 지팡이를 든 채로(手持三尺梲杖) 대장군의 영내로 들어와서 주저앉더니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조조를 크게 꾸짖기 시작합니다(坐大營門 以仗捶地大罵). 이에 놀란 관리들이 이 사실을 조조에게 알리자 조조가 화를 냅니다(후한서 : 예형전). 조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합니다.

조조는 이제 예형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렇지만 조조는 예형을 바로 죽이기보다는 유표에게 보내어 죽이려 합니다. 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그대로 입니다.

예형이 유표에게로 가는 길은 죽기 위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조가 예형을 홀로 유표에게 보냈을 리는 없을 것이고 예형을 데리고 간 조조의 자객(刺客)들이 언젠가는 예형을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예형이 유표에게 그저 죽으러 갔다기보다는 나관중 '삼국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투항을 권고하러 갔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죠.

만약 예형이 유표에게 투항을 권고하러 가는 길이었다면 이것은 예형이나 유표 모두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형은 유표에게 결코 투항을 권할 사람도 아니고 조조와 사이가 나빴던 유표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도 없었겠지요. 그러면 유표와 예형은 왜 사이가 틀어졌을까요?

정사에 따르면 예형이 유표를 무시하고 오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유표가 예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유표가 여러 문인들과 함께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지었는데 예형은 이를 ('이것도 글이냐'는 식으로) 바닥에 내던져 훼손시키고(因毁以抵地) 맙니다. 그리고 난 뒤 예형은 붓을 달라더니 금세 뛰어난 글을 지어(衡乃從求筆 須臾立成 辭義可觀 : 후한서 예형전) 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유표가 기분이 나빴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겠지요. 다시 유표를 모욕하자 유표는 예형을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어(後復侮慢於表 表恥不能容 : 후한서 예형전) 성질이 급한 황조(黃祖 : ?-208)에게 보내어 죽게 합니다. 이후에는 나관중 '삼국지'의 내용과 대체로 비슷합니다.

[그림④] 예형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강하의 현재 모습(현재 호북성 무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예형이 무엇 때문에 유표를 모욕했을까'에 대한 문제입니다. 정사의 내용으로 보면 예형이 오만한 성격을 가진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형은 천자가 고립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유표가 분연히 일어서서 천자를 구하러 나서지 않고 그저 천하의 헛된 명성만을 추구하려는 데 분개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예형은 특유의 비꼼과 독설로 유표가 받아들이기 힘든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이들이 천자에게 올려 보내는 상소문을 땅에 내던져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사에 예형에게는 모만(侮慢 : 남을 업신여기고 깔봄)이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이 오만함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렵고 자기가 서 있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했을 때 가장 짧은 시간에 자기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 오만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그 내면에는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더욱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역으로 성공한 다른 사람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요.

공자(孔子)는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근신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이 군자의 덕목(人不知而 不慍 不亦君子乎)"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남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말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일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재능을 남들이 제대로 평가ㆍ인정해주지 않자 흔들리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잡기 위해서 한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숨겨진 천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대학을 나왔다거나 대단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거나 세상에 자기의 이름을 날리고 출세했다고 해서 무작정 "자기가 잘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간판들이 오히려 허명(虛名)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형의 일생은 중국 지성인의 하나의 표상을 보여줍니다. 최고의 문사(文士)가 항거할 수 있는 마지막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형은 우리가 앞으로 볼 순욱과 같이 방황하지 않고 바로 조조에게 대항하면서 항거하는 지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왜 예형은 이렇게 일찍 죽을 결심을 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본 대로 죽을 각오도 없이 조조 앞에서 알몸쇼를 연출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예형은 이미 한실(漢室)은 그 운(運)이 다했는데도 자신은 그 한(漢)나라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한 듯합니다. 그런데 이미 한 황실은 운이 다하여 이름뿐이고 자신의 가진 천재적인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조조의 휘하밖에 없는데 예형은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죠. 예형에게 조조는 황위(皇位)를 노리는 도적에 불과했을 뿐이니까요. 예형이 죽음을 택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형은 한나라가 더 이상 부흥할 수 없는 데에 절망한 듯합니다.

예형은 차라리 조조에게 장렬하게 죽어서 그 영예로운 이름을 만고(萬古)에 날리기를 원했겠지만 그 일도 예형의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형의 죽기 위한 몸부림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정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형은 마치 못 죽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조조라는 독재권력 앞에 굴복했을 때 예형은 아직도 한나라의 충신이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꺼지기 전의 불꽃이 가장 강렬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형은 조조를 모욕함으로써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고자 했으나 이를 간파한 조조는 그를 이리저리 돌려서 예형을 욕보입니다.

비록 예형의 죽음은 돌로 바위치기를 한 하나의 치기(稚氣)나 객기(客氣)에 불과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같은 지성인들이 가끔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지성(知性)이야말로 중국 문명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조조와 예형의 대결은 조조의 참패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관중 '삼국지'는 예형은 지나치게 희화화(戱畵化)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형의 본 모습을 우리가 알지 못하게 된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예형이라는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형은 어떤 의미에서 난세를 살아간 대쪽같은 중국 지성(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승이나 길평[吉平 : 원래 이름은 길본(吉本)]과 같이 물리적으로 조조를 암살하려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도 한나라에 대한 높은 충절(忠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번에 해설해 드린 예형은 그들과는 성격을 약간 달리 하면서도 한실을 지키려고 처절히 몸부림친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 방법론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그들 삶의 토대였던 한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중국 지식인(知識人)들의 고뇌는 큽니다. 개혁과 개방의 선도자였던 등소평이 천안문 사태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것을 바라보는 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고뇌와 예형의 죽음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젊은이들의 자유민주주의적 요구를 다 들어준다면 중국 공산당의 붕괴 나아가서는 중국의 몰락까지 초래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고 젊은 지식인들의 눈에는 중국 정부가 새로운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또 다른 형태의 독재 권력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였을 수가 있는 것이죠. 저는 이 두 가지 입장에 대해서는 어느 한 쪽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고 싶은 생각도 없을 뿐더러 이 두 입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였는지를 판단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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