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빨래를 하던 날 밤이었다. 달빛이 밝았다. 그러나 빨래를 하기엔 아무래도 샘이 어두웠다. 구옥의 처마 밑에 달린 외등을 켰다. 전구가 밝다보니 곧 곤충들이 몰려들었다. 나방 따위를 유인하는 유아등(誘蛾燈)이라는 게 있다. 이 외등이 그 유아등 노릇을 한 셈이었다. 무수한 곤충들이 외등을 에워싸고 군무(群舞)를 추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켠 불빛 하나 때문에 밤의 생태계에 큰 파문이 일고 말았다. 인드라망(Indra網)의 그물코 하나를 건드리면 망 전체가 움직인다. 그러고 보면 기실, 밤에 불을 하나 밝히는 일도 ‘우주적(宇宙的)’인 행위이다.
어찌됐든 그런 불빛 때문에 결과적으로 산이나 숲에 사는 야행성 곤충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나기도 했다. 속리산 자락에 있는 한 암자에서 하룻밤 묵다가 겪은 일도 그랬다. 그 암자에선 요사채 앞에 서있던 가로등이 유아등 노릇을 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 가로등을 살펴보니 그 기둥과 주변의 활엽관목 따위에 달라붙어 있는 곤충들이 무려 100여 종이 넘었다. 밤새 켜둔 가로등의 불빛을 보고 찾아왔다가, 어두운 수풀 속으로 미처 ‘귀향’을 하지 못한 ‘밤의 생명’들이었다. 가중나무고치나방, 참나무산누에나방, 사슴벌레 중 가장 작은 종에 속하는 홍다리사슴벌레, 애매미, 쌍줄푸른자나방, 의태 솜씨가 뛰어나 영락없이 낙엽처럼 보이는 우묵밤나방, 참나무재주나방, 콩박각시, 넉점박이불나방, 곱추재주나방 등 평상시엔 보기 힘든 곤충들이었다.
빨래를 마치고 외등 주변을 살폈다. 이곳 곤충들도 그 암자 못지않게 다양했다. 구옥 모서리의 낡은 나무기둥과 흙벽에 달라붙은 곤충들을 보니 밤나방류와 불나방류를 비롯해 부지기수였다. 그 가운데는 이제는 추억 같은,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과 겨울 숲의 앙상한 나무에 그 연두 빛의 고운 고치를 쓸쓸하게 달고 있던 유리산누에나방, 처음 보았을 때 명주잠자리로 오인했던 뱀잠자리 같은 친구들도 눈에 띄었다. 대체로 밤에 활동하는 나방류는 날개색이나 무늬가 단조로운 게 일반적이다. 굳이 밤길에 값비싼 비단옷을 차려입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이 바로 그 친구였다. 길이가 100여㎜에 달하는 그 날개를 보면, 옥색 바탕에 푸른 물이 살짝 든 듯한 태깔이 참 곱다. 날개의 생김새나 무늬도 매우 우아한 편이다. 이 친구야말로 통념을 깨고 늘 ‘금의야행(錦衣夜行)’을 하던 별난 나방이었다. 그 곤충들 틈새에서 마침내 오늘 이 글에서 ‘손님’으로 모신, 그 풀잠자리도 보였다. 현재의 거처로 옮기기 전, 예전에 살던 곳에서 홍화농사를 지을 때, 깊고도 기이한 인연을 맺었던 바로 그 잠자리였다.
그 풀잠자리 떼와 조우한 게 게 7월 초순쯤 됐던 것 같다. 그 무렵 밭을 둘러보니 홍화가 다소 핼쑥해지기 시작했다. 꽃봉오리가 여물고 있었던 것이다. 잎과 줄기에 축적된 영양소가 개화와 결실을 위해 꽃과 배젖(胚-)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꽃을 막 단 홍화도 몇 그루 눈에 띄었다.
그런데 큰 사단이 벌어졌다. 진딧물 때문이었다. 우엉이나 홍화와 같은 국화과 식물에 기생하는 이 녀석들은, ‘우엉수염진딧물’이란 독특한 이름을 가진 진딧물이었다. 그 진딧물은 잎채소 등 일반적인 밭작물에 기생하는 진딧물 - 나이 든 분들이 흔히 ‘뜨물’이라고 부르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몸의 크기는 그 ‘뜨물’보다 두 배 남짓 컸고, 몸빛은 검었다.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큰 배는 또 매우 볼록했다. 몸의 자세도 별났다. 머리 방향은 모두 땅 쪽을 향한 채 거꾸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땅을 향해 돌진하듯 떼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마치 ‘독일병정’처럼 일사분란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들은 그렇게 줄기와 잎에 달라붙어 홍화의 수액을 빨아 먹었다.
그 녀석들은 번식력도 무척 강해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밭을 둘러보면 어떤 경우엔 그 진초록의 홍화들이 순간적으로 ‘검게’ 보일 때도 있었다. 그 진딧물 무리의 검은 몸빛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작황이 무척 좋아 낙관하고 있었던 만큼 낭패감도 컸다. 수액을 빨린 홍화 중 증상이 심한 그루는 색깔이 누렇게 변색되고, 꽃봉오리도 실하지 못했다. 일부는 합병증이 발생해 탄저병 따위의 증세도 보였다.
농약을 쓴다면 그 진딧물 무리는 사실 별 걱정거리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농약을 아예 쓰지 않는 처지에선 그 방제가 만만찮은 일이었다. 당시 내가 썼던 방법은, 독초인 가래나무 열매와 할미꽃 뿌리, 애기똥풀의 전초(全草)를 소주에 우려낸 액과 가루비누로 만든 비눗물, 목초액, 현미식초, 몸소 만든 칼슘제 등의 약제를 혼합한 다음, 이를 적정 비율로 희석해 3, 4일 간격으로 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뜨물’에겐 먹혀들기도 했던 이 방법도, ‘우엉수염진딧물’에겐 별 효과가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진딧물의 충해와 탄저병 증세가 심한 이병주(罹病株)들을 뽑아내 땅에 묻었다. 병충해의 전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천여 평의 밭 속에서 어떤 날은 퇴비포대로 서너 포대씩, 또 어떤 날은 일여덟 포대씩 뽑아냈다. 이런 유형의 가슴 아픈 노동은 참으로 언짢다. 수심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다보면 심신도 곧 지쳐버렸다.
결국 유기농업을 표방하는 단체들로부터 진딧물 방제를 위한 약제를 구입했다. 화학적 독성이 없는 살충비누와 마늘유(油)가 그것들이었다. 이른바 농약으로 분류되지 않는, 자연농자재였다. 병충해의 증상이 심각했으므로 권장기준보다도 고농도로 살포했다. 한 며칠 지났을까. 밭을 둘러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우엉수염진딧물들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남아 있는 무리들도 그 세력이 매우 약해 보였다. 어찌 된 일일까. 살충비누와 마늘유의 약효가 그렇게 컸던 것일까.
홍화를 주의 깊게 다시 살폈다. 진딧물이 무성한 한 홍화의 잎 뒷면을 들춰 볼 때였다. 그곳에 기이한 물체들이 눈에 띄었다. 잎에는 실낱처럼 가느다란 백색의 알자루(卵柄)가 십여 개도 넘게 붙어 있었다. 알자루마다 그 끝에는 또 매우 작은 백색의 알이 하나씩 달린 게 보였다. 언젠가 책과 신문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다름 아닌 풀잠자리 알이 아닌가.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놀랍기도 하고, 한편 귀한 인연에 고맙기도 했다. 풀잠자리 알을 실물로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른 그루도 여럿 살펴보니 어찌 된 셈인지 풀잠자리 알의 천지였다. 왜 그 홍화 밭이 그렇게 풀잠자리 알의 세상이었는지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우선은 그 풀잠자리 알에 얽힌 불편한 기억 하나부터 떠올랐다.
몇 해 전 한 사찰에서 “3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Udumbara, 優曇波羅)꽃이 관세음보살상에 나투었다”고 주장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전각 안의 불상에 우담바라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그 사찰에선 그 이후 ‘우담바라 친견 108일 무차대법회’까지 열었다. 그러나 우담바라라고 주장한 그 ‘꽃’(?)의 사진 등 영상자료를 검토한 곤충학자들은 그게 꽃이 아니라 풀잠자리 알이라고 지적했다. 어떤 대학의 곤충학 교수는 “교수직을 걸고 말하겠다”며, “이건 풀잠자리 알이 100% 확실하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풀잠자리 알은 부화를 해 애벌레가 알을 빠져나갈 때 알 껍질이 벌어지는데, 그 모양이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결국 우담바라꽃에 대한 진위논쟁이 소모적으로 벌어졌다.
우담바라에 대해, 한 불교학사전에선 “풀에 청령(蜻蛉ㆍ잠자리)의 난자(알)가 붙은 것”으로 정의하고, 동아한한대사전(동아출판사)에선 “초부유(草蜉蝣ㆍ풀잠자리)의 알”로 정의했다. 이들 사전의 정의를 보면, 풀잠자리의 알을 우담바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해석한 종교적 관행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찰 측에선 우담바라를 ‘상징’이 아닌, ‘사실’로 주장했다. 풀잠자리의 알임을 부정했다. 학계에선 물론 우담바라를 부정했다.
지난봄부터 ‘생명평화 탁발순례’에 나선 도법(道法)스님(당시 남원 실상사 주지)은 그때 불교계의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불교계의 ‘조고각하(照顧脚下)’와 같은 자성을 촉구해 큰 호응을 받았다. ‘(자신의) 발 아래를 살펴보라’는 얘기였다.
“우담바라꽃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불교계의 현재 모습은 너무 남루하다”는 말로 시작된 그의 글은 우담바라꽃 파동을 ‘비불교적 행위’로 규정하고, “팥죽 솥에 나타난 문수보살을 주걱으로 후려친 무착선사처럼 우담바라꽃(?)을 뽑아 아궁이에 내던지는 서릿발 같은 선(禪) 정신과 도덕성이 살아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우담바라꽃 진위논쟁에 대한 기억은 그렇다 치고, 우습게도 나는 홍화 밭에서 풀잠자리의 알은 곧바로 알아보았지만, 풀잠자리는 분명하게 알아보질 못했다. 당시의 일기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몸 빛깔이 푸른색인, 그 작고 가느다란 잠자리가 풀잠자리일까. 아니면 진딧물의 성충일까. 연한 초록색의 몸빛(몸길이 15㎜), 주홍색의 깜찍한 눈,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망사 같은 날개 두 쌍(길이 18-20㎜), 진딧물의 성충이라면 참으로 아름답다. 애벌레는 끔찍한데….
진딧물이 많은 곳에 그 곤충이 많다. 날아갈 때는 직선이든 곡선이든 매끄럽게 날지 못하고 매우 힘겨운 듯한 날갯짓으로 부자연스럽게 난다. 두서없이 오르락내리락, 좌우로 오락가락하며 매우 느린 속도로 이동한다. 잠자리 중 빨리 나는 친구는 시속 60㎞의 속도로 난다는데….”
얼핏 잠자리를 닮은 그 곤충은 결국 풀잠자리로 밝혀졌다. 내가 풀잠자리를 두고 진딧물의 성충일 가능성을 생각한 것은 무지 때문이었다. 진딧물 중에도 날개가 있는 유시충(有翅蟲)과 날개가 없는 무시충(無翅蟲)이 있는데 혹 유시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진딧물 유시충은 일기에 적힌 것처럼 결코 그렇게 크지 않다. 사실 풀잠자리도 외견상 잠자리와 닮은 부분도 있지만, 잠자리류와는 그 유연(類緣)관계가 먼 곤충으로 분류되고 있다.
나는 풀잠자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면서 내 나름대로 ‘조고각하’를 깊이 했다. 홍화 밭에서 진딧물이 사라져버린 이유에 대해 사색했다. 어쩌면 그 진딧물 방제엔 살충비누와 마늘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는 많은 이유들도 있었다.
우선 풀잠자리의 역할부터 다시 살폈다. 풀잠자리는 본래 진딧물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장소에 산란하는 습성이 있다. 왜냐하면 유충이 그 먹이로 진딧물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풀잠자리 유충은 한 마리당 진딧물 5-6백 마리를 잡아먹는 걸로 보고됐다. 풀잠자리의 이런 습성 때문에 일본에선 오래 전부터 진딧물의 천적생물로 풀잠자리를 사육하는 실험을 해왔다. 홍화 밭이 풀잠자리의 세상이 된 까닭이 분명해졌다. 다음으로 고추좀잠자리 무리도 있었다. 이 잠자리 무리는 대체로 6월 초순에 출현해 더운 여름을 산 중턱과 같은 서늘한 곳에서 지내다가 가을이 되면 평지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홍화 밭은 해발 5백m를 조금 넘는 중고랭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딧물이 극성을 부리던 6월 하순과 7월 초순 무렵, 이 고추좀잠자리 무리가 홍화 밭에서 진을 치고 살았다. 역시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진딧물은 과밀상태가 되면 자연히 날개가 나와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이때 잠자리들이 모여들어 그 진딧물을 잡아먹는다. 고추좀자리 무리도 그걸 노렸던 것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칠성무당벌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알려진 대로 칠성무당벌레는 진딧물의 대표적인 천적이다. 당시 홍화 밭에도 그 개체수가 매우 적긴 했지만, 칠성무당벌레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홍화 밭의 진딧물이 퇴치된 이면에는, 이처럼 자연생태계의 여러 구성원들 사이에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상호간의 견제와 균형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뿐만 아니라 홍화랄지 이런 초목들은 꽃을 피우며 생식생장기로 접어들면, 대체로 잎과 줄기가 거칠어지고 억세어진다. 잎과 줄기에 저장돼 있던 풍부한 영양소도 꽃과 열매 쪽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진딧물의 서식 환경을 악화시킬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우리 홍화 밭에 진딧물이 번성했다가 사라진 시기는 개화 초기였다. 또 숲의 나무들에 대한 학계의 보고서를 보면, 예를 들어 나무의 잎을 해치는 애벌레가 출현했을 때 나뭇잎 속에 타닌이나 페놀화합물 같은 화학물질이 생성된다고 한다. 그 해충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홍화 같은 풀도 자기 나름의 방어기제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 아는가. 당시 홍화 밭에는 진딧물이 과밀상태가 될 만큼 번식했었는데, 그 진딧물 집단 내에 무슨 역병이라도 돌았는지….
자연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손’ 앞에서 자꾸 무언가를 보겠다는 욕심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엉수염진딧물’이 사라져버린 이유를 속단하는 어리석음을 다소라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홍화 밭에서 만난 풀잠자리는 이런 지혜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풀잠자리의 알은 한 송이의 ‘법화(法花)’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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