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金兄), 제 마음이 유죄(有罪)입니다. 이번 장맛비에 사념이 많았습니다. 어느 고인(古人)은 빗소리를 듣다가 “계불미기(洎不迷己)!”라고 탄식하기도 했었지요. 사념에 빠져서 “하마터면 (본래의) 자기를 잃을 뻔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 고인은 ‘자기’를 잃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그 ‘자기’를 곧잘 잃습니다. 빗소리는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는 걸 어렵게 할 때가 많습니다. 곧잘 사념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 글은 그 사념 끝에 쓴 글입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요즘 제 심상(心象)엔 농무(濃霧)나 그믐날 밤의 칠흑 같은 어둠, 혹은 종착역에서 만난 막차의 내실 소등(消燈) 장면 따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심상에는 불안한 예후가 같은 게 있어서 다소 긴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긴장 때문에 다시 이 글을 쓰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江)에 대한 이야기를 몇 자 더 적습니다.
한 사흘 집을 비웠습니다. 대처에 나갔다가 엊그제 밤이 깊어갈 무렵 돌아왔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이제는 육친 같은 그 강을 만났습니다. 다리를 건너다 말고 중간쯤 서서 강을 바라보았지요. 뱀이 기어가듯 흐르는 강은 문자 그대로 ‘사행천(蛇行川)’이었습니다만, 오늘 밤의 이 강은 성깔 사나운 한 마리의 ‘이무기’가 됐습니다. 몇 날을 이어 내린 폭우 때문이었습니다. 강물은 엄청나게 불어나 뱀이 혀를 널름대듯 넘실넘실 둑을 넘봤습니다. 물살도 거칠었습니다. 강물 흐르는 소리도 굉음에 가까워, 마을의 개 짖는 소리 따위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귀가 곧 멍멍해졌습니다. 그 수면 위론 또 물안개가 뿌옇게 피어올랐지요. 마을 고샅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에 그 안개가 보였습니다. 제 심상의 그 농무를 닮았습니다. 밤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이 깔렸습니다. 별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平和)’라는 노랫말이 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강을 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은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비평비화(非平非和)’입니다.
집에 도착해 외등을 켜보니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방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와서 함께 지내던 전기가 이 ‘비평비화’의 밤에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누전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장마철이면 시골의 누옥에서 종종 겪는 일입니다. 덕분에 촛불을 켰습니다. 몸이 지쳐 바로 자리에 누웠습니다만, 쉬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어둠 속의 강이 기척을 내고 있었습니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만만찮았습니다. 드문 일입니다.
강에도 자아(自我) 같은 게 있는 것일까요? 김형, 저 물 흐르는 소리 좀…, 강이 뭐라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환(幻)인가요?
한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 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
아름다운 시입니다. 시인은 어느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河口)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은 강이 바다를 만나 그 생(生)을 마감하는 시ㆍ공간(時ㆍ空間)을 보았습니다. ‘나’가 ‘그대’를 상실한 슬픔을, 강이 그 생을 마치는 하구의 풍경에 가탁한 시인의 감성이 빛나고 있습니다. 강물은 ‘저’를 잃어버리고, 나는 ‘그대’를 잃어버려 슬픔에 우는데, 오직 시인만이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얻고 있군요. 제 글로 인해 이 시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강에 대한 또 다른 객담 좀 하지요.
‘강’이란 무엇일까 싶어 국어사전에서 ‘강’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넓고 길게 흐르는 물줄기’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크게 놀랐습니다. 이 대지 위의 어느 곳에 두 개의 둑이 있고, 그 둑 사이로 흐르는 큰 물줄기를 강이라고 하다니… . 절망적입니다.
지금 우리 마을 옆을 흐르는 강둑에는 원추리꽃이 피었습니다. 달맞이꽃과 둥근이질풀꽃도 한창입니다. 강변에서 아까시나무나 비수리, 흰전동싸리 따위의 꽃이 피면 강물 위에도 그 꽃들이 피어납니다. 강이 평화스럽게 흐를 땐 강안(江岸)의 모래톱에서 갈대 같은 수초와 갯버들 따위의 떨기나무수풀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비밀입니다만 수달도 살고요, 원앙이가족과 비오리떼, 왜가리, 흑로 같은 물새들도 살지요. 물속에서 햇살을 받고 사금파리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물살을 거슬러 오로는 물고기 떼를 아십니까? 등 양옆의 비늘에 ‘반사띠’를 갖고 있는 갈겨니나 긴몰개 친구들입니다. 하늘에 별이 뜨면 강물 위에도 별이 뜨고요, 달이 뜨면 역시 강물 위에도 달이 뜹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지요. 이른 새벽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저녁노을엔 붉게 물이 들기도 합니다. 물새들이 울면 강물은 또 보일 듯 말 듯한 파문으로 그 울음소리에 답합니다.
강은 이처럼 서정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대단히 서사적입니다. 인간들의 삶도 강과 뗄 수 없습니다. 농경사회나 문명의 시원은 대부분 강의 유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사는 이 마을도 예전엔 강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물은 농경용수이기도 했고요, 다슬기와 민물고기 같은 어패류는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습니다. 마을의 노인들 가운데는 이 물을 마시고 살거나, 홍수가 졌을 때 집을 강에 떠내려 보낸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강을 중심으로 아리랑 같은 민요도 나왔지요. 인생살이의 애환 같은 걸 강에 기대어 노래로 풀어냈습니다. 강은 이처럼 이 모든 사물과 이야기들의 총화(總和)입니다. 수많은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수많은 내력들이 얽혀서 ‘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이 강을 두고 ‘넓고 길게 흐르는 물줄기’라 하니, 갑자기 강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저도 강화도의 교동에 다녀오는 길에 강화만에서 한강이 서해를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인이 본 것처럼 강이 ‘자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제가 “강에도 ‘자아(自我)’ 같은 게 있는 것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만, 사실 이 ‘자아’를 달리 표현하면 독립된 존재로서의 ‘개체성’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강에도 개체성 같은 게 있는 것일까요?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주제입니다.
강의 길이를 뜻하는 유로연장(流路延長)이라는 게 있습니다. 높은 산속에 있는 발원지로부터 바다와 만나는 하구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생명 있는 존재들의 삶에 비유하자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그 ‘생(生)’이 발원지이며, 그 ‘사(死)’는 하구입니다.
물이 산골짜기의 자궁 같은 곳을 빠져나왔을 때 그 물은 천(川)이나 강(江)의 이름을 얻습니다. 득명(得名)입니다. 그 물이 바다를 만났을 땐 다시 그 이름을 잃습니다. 실명(失名)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잃는 것은 강뿐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바다도 강을 만나면 그 이름을 잃고 맙니다. 이를테면 서해는 한강하구에서, 남해는 낙동강하구에서 그 이름을 잃고 맙니다. 내동 무슨무슨 ‘바다’로 잘 불리던 그 큰물이 문득 ‘강’을 만나자 그 이름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보면 강과 바다는 하구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 근원적으로 ‘물 샐 틈 없이’ 이미 만나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본래 연결되어 있는 한 몸이었습니다. 강은 바다의 다른 표현이고, 바다는 강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본래 한 몸인데 강이 바다를 만나 잃어버릴 만한 ‘자기’가 있을까요? 또 바다가 강을 만나 잃어버릴 만한 ‘자기’가 있을까요?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산에서 발원한 물은 빅토리아호로 흘러들어 갑니다. 이 물은 다시 흘러 나일강의 한 지류를 이루다가 홍해로 들어갑니다. 홍해는 다시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을 거쳐 서태평양에 속하는 중국해와 연결되고요, 마침내 우리의 서해로 이어집니다. 서해는 한강과 연결되어 있고요, 제 마을을 흐르는 이 강은 또 남한강의 한 지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한강의 발원지는 오대산 서대(西臺)의 우통수(于筒水)입니다. 제가 만나는 이 강물이 그 우통수와 함께, 멀리는 킬리만자로산의 그 샘물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외경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처럼 서로 연결돼 본래 한 몸인 물의 어느 곳에, 이 ‘자기’와 저 ‘자기’가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도(道)라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는 말은 <노자(老子)>의 첫 구절입니다. 도나 사물의 근원은 말할 수도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대지 위에서 ‘넓고 길게 흐르는 물줄기’ 하나를 두고 무슨 ‘강’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 우리는 이미 그 물줄기의 참 모습과 근원적인 의미를 놓치고 맙니다. 우리가 종종 만나는 그 큰물을 두고 무슨 ‘바다’라고 이름 붙였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에 갇힌 선입견이란 참으로 무섭지요. 언어란 말하여지는 순간 배리(背理)에 부딪히고 맙니다.
우리가 강이나 바다라고 부르는 그 자연계와 만났을 때, 그 대상을 바로 보려면 자신의 가치체계나 지식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이는 달을 보더라도 “그냥 보라. 마치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보라.”고 말합니다. ‘그냥’ 보려면 다름 아닌, 자아(自我)나 자의식(自意識), 자기의 개체성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사실 인간이 자아나 개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픔이 아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이 모든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도(道)’와 닿아 있습니다. 동양의 현자들은 이 자아의 상실을 수행의 궁극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오상아(吾喪我)’도 바로 그렇지요. ‘나(我)’를 여읜다는 뜻은, 바로 자아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뜻입니다. 이 ‘오상아’는 ‘나비의 꿈’이라는 이야기로 형상화됐지요.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자는 꿈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자가 아닌가. 도대체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일까?”
언젠가 강둑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강둑의 모든 풀들이 저마다 몸을 흔들며 팔랑팔랑 춤을 추었지요. 그 와중에 한 순간 제 자신이 문득 보였습니다. 풀잎과 함께 팔랑팔랑 몸을 흔들지 못하는 한 인간이, 말뚝처럼 그렇게 서있었습니다. 말뚝은 제 자아를 드러내는 한 상징입니다. 이런 체험은 종종 치명적일 만큼 제 자신을 쓸쓸하게 합니다.
김형, 얘기가 길었습니다. 그만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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