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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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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9>

적벽대전, 허와 실

***들어가는 글**

어느 초가을 저녁 나는 친구와 함께 적벽(赤壁)에 배를 띄웠다. 맑은 바람이 가만히 불고 물결 또한 잠잠해 술잔을 기울이며 노래하는데 동산으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친구가 구성지게 퉁소를 부는데 그 소리가 너무 서럽고 슬픔에 겨워 내가 물었다.

“자네, 그 퉁소의 곡조가 참으로 슬프네 그려.”

친구가 대답하였다.

“달이 밝아 별은 드문데(月明星稀), 까치는 남으로 나네(烏鵲南飛)라는 노래가 있지. 조조의 시(詩)였지?”

라고 하면서 장강(長江)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서쪽으로 하구(夏口)가 있고, 동으로는 무창(武昌)이 있고, 산천이 장강과 어우러져 절경(絶景)일세. 자네 여기가 바로 적벽(赤壁)인 줄을 모르나? 조조가 주유(周瑜)에게 혼쭐이 났었지. 조조가 말이야, 형주를 점령하고 천리(千里)에 이르는 선단(船團)을 묶고 이 시(詩)를 노래하였지. 그들은 참으로 영웅이었네 그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또 자네와 난 어떤가? 장강에서 물고기나 잡고 나무꾼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하루살이 같은 인생살이 참으로 덧없네 그려. 조조는 그래도 이름이나 날렸지 않나? 장강의 물은 저처럼 끝없이 흐르는데 … ”

나는 친구를 위로하여 말했다.

“자네, 저 물과 달을 아는가? 장강의 물은 밤낮없이 흘러도 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네. 그래도 장강의 물은 계속 흐르고 있지. 달도 찼다가 기울다가 하지만 그래도 달의 본모습은 그대로일세. 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변하는 것이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결국 무한한 생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라네. 천지는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이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 나는 그저 이 맑은 바람과 저 밝은 달을 보면서 즐거울 수만 있어도 충분한 일이네.”

친구가 과연 “그렇군”하면서 기뻐하여 우리는 다시 질펀히 술을 마셨다. 멀리 동쪽 하늘에 새벽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소동파(蘇東坡 : 1036~1101)의 적벽부(赤壁賦)>

***(1) 동남풍을 부르고 화살 10만개를 주워오고**

나관중 ‘삼국지’를 처음 읽으면 가장 신나는 부분이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 : 208) 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악한 조조를 납작하게 만드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통쾌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적벽대전은 수많은 전쟁들 가운데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전쟁입니다. 인기 있는 전쟁이지요. 수많은 노래와 시가 만들어지고 수도 없이 연극ㆍ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이 적벽대전에 주목하는 까닭은 제갈량의 온갖 재주들이 적벽대전에서 대부분 발휘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드넓은 양자강변에 붉은 흙으로 3m 높이의 단을 쌓아 오색 깃발을 날리고, 네 명의 사내가 저승사자처럼 검은 도포를 입고 그 가운데 도포를 입은 제갈량이 겨울바람에 산발한 머리가 휘날리며 하늘을 향해 팔 벌려 축원을 하는 모습(나관중 ‘삼국지’ 49회)을 보면서 기이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마치 무당이 굿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이비 교주가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같기도 합니다.

[그림 ①]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었다는 배풍대(拜風臺)

어릴 때는 신기하게 보이던 이 광경들이 나이가 들어서 세상을 분별하는 능력이 조금씩 생기게 되자 의문이 끝없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사흘만에 화살 십만 개를 짚으로 만든 고물 배로 주워오고, 동남풍을 부르는 광경은 아무래도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이 같이 기이하고 신출귀몰한 제갈량의 전술들이 이후에는 잘 나타나지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기를 염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이’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신화도 만들어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부터 100년 전에는 녹두장군(전봉준 선생)은 불사신이라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소문이 나곤 했습니다. 하물며 1800년 전의 이야기야 무슨 신화인들 못 만들겠습니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그래도 제갈량의 기이한 행동들은 점잖은 편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적벽대전의 원인과 전쟁의 진행과정이 매우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국내에 출판된 어떤 소설 ‘삼국지’에는 무려 200쪽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상 한권의 책에 해당됩니다. 나관중 ‘삼국지’의 경우 적벽대전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43회] 제갈량 설전군유(舌戰群儒)편 : 동오로 간 제갈량은 손권의 참모들과 설전을 벌리는데 이 과정에서 제갈량은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이들을 굴복시킨다는 내용.

[그림 ②] 제갈량이 오나라의 중신들과 설전하는 그림(중국우표그림)

② [44회] 손권결계파조조(孫權決計破曹操)편 : 손권은 참모들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노숙과 주유의 의견을 좇아 조조군을 격파하기로 결정한다는 내용.

③ [45회] 군영회장간중계(群英會蔣幹中計) : 조조가 삼강(三江) 어귀에서 수군에게 패하자 여러 참모들을 모아 대책을 묻는데, 장간이 친구인 주유를 설득하여 굴복시킨다고 찾아 가지만 오히려 주유의 계략에 빠져 조조는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을 처형한다는 내용.

④ [46회] 공명차전(孔明借箭)편 : 주유가 공명을 죽이려고 화살 십만 개를 얻어오라고 하자 제갈량은 유유히 조조로부터 화살을 얻어오고 주유는 더욱 제갈량을 경계한다는 내용.

[그림 ③] 장간과 주유 및 화살을 주워오는 제갈량(중국우표 그림)

⑤ [47회] 감택항서(闞澤降書)ㆍ방통교수연환계(龐統巧授連環計)편 : 오나라의 감택은 거짓밀서(황개가 투항한다는 내용)를 조조에게 보내어 조조를 속이고 방통은 연환계로 조조를 속인다는 내용.

⑥ [48회] 조조횡삭부시(曹操橫槊賦詩)편 : 조조는 방통의 계책에 따라 배를 묶어두었으며 적벽대전을 앞두고 의기양양하게 노래를 부른다는 내용.

[그림 ④] 노래하는 조조와 탈출하는 조조(중국 우표그림)

⑦ [49회] 제갈제풍(諸葛祭風)편 : 제갈량이 동남풍을 부른다는 내용.

⑧ [50회] 관운장의석조조(關雲長義釋曹操)편 : 관운장이 조조를 사로잡지만 의로써 조조를 살려 보낸다는 내용.

⑨ [51회] 공명일기주유(孔明一氣周瑜)편 / [55회] 공명이기주유(孔明二氣周瑜)편 / [56회] 공명삼기주유(孔明三氣周瑜)편 : 제갈량은 주유를 세 번 기절시킨다는 내용. 결국 주유는 제갈량으로 인하여 죽으면서 “왜 하늘은 주유를 세상에 나게 하고 또 공명을 세상에 나게 했습니까?”라고 탄식한다는 내용.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적벽대전은 거의 10회 이상에 걸쳐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권의 소설책 이상의 분량이지요. 나관중 ‘삼국지’의 전체 회수가 120회이니 거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적벽대전을 분석하기 전에 우선 위의 내용들의 사실 여부를 잠시 보고 넘어갑시다.

① [43회] 제갈량 설전군유(舌戰群儒)편 : 동오로 간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하긴 했지만 손권의 참모들과 설전을 벌인 일은 없지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입니다.

② [44회] 손권결계파조조(孫權決計破曹)편 : 이것은 확인된 사실입니다.

③ [45회] 군영회장간중계(群英會蔣幹中計) : 장간이 주유에게 가서 항복을 권유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적벽대전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사실이 아니지요. 더구나 채모와 장윤이 죽은 일은 없었죠.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조조는 청년기에 채모와 친하였고, 조조가 형주로 들어간 뒤 채모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④ [46회] 공명차전(孔明借箭)편 : 역사적 사실이 아니지요. 이와 유사한 얘기로는 ‘위략(魏略)’에 “손권이 배를 타고 정찰을 나가니 조조군이 활을 마구 쏘아 화살 무게로 인해 배가 기우뚱하자 배를 반대로 돌려 화살을 맞으니 배가 안정되어 물러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갈량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죠.

⑤ [47회] 감택항서(闞澤降書)ㆍ방통교수연환계(龐統巧授連環計)편 : 황개가 투항의사를 밝힌 사자를 보낸 일은 있지만 그 사자가 감택인지는 기록이 없지요. 더구나 방통과 적벽대전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⑥ [48회] 조조횡삭부시(曹操橫槊賦詩)편 : 조조편 강의에서 보셨다시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 내용입니다.

⑦ [49회] 제갈제풍(諸葛祭風)편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 내용입니다.

⑧ [50회] 관운장의석조조(關雲長義釋曹操)편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 내용입니다.

⑨ [51회] 공명일기주유(孔明一氣周瑜)편 / [55회] 공명이기주유(孔明二氣周瑜)편 / [56회] 공명삼기주유(孔明三氣周瑜)편 :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 내용입니다.

이상을 보면 적벽대전과 관련된 나관중 ‘삼국지’의 내용의 90% 이상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창작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점들을 알기 위해서 우선 제갈량과 적벽대전과의 관계를 봐야 합니다.

***(2) 제갈량의 적벽대전**

적벽대전에서 우리의 주인공인 제갈량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제갈량은 적벽대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손권을 성공적으로 설득한 사람입니다. 제갈량은 손권의 개인적인 성향과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천하의 형세를 조리 있게 분석함으로써 대조조 연합군을 편성하는 것이 손권을 살리는 길이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지요. 이로써 유비는 손권과 조조를 싸움 붙이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근거지를 얻었고 그 근거지를 통하여 익주를 점령하여 촉(蜀)을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적벽대전의 개전은 전형적인 이간계(離間計)의 성공입니다(제 28강의 참고). 제갈량은 유비의 세력이 약하고 조조는 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조조의 예봉(銳鋒)을 꺾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간계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계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갑니다. 바로 대의명분(大義名分)이지요. 유비는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전술인 차계생단(借鷄生蛋 : 다른 사람의 닭을 빌려서 알을 낳게 하는 전술)의 명수였는데, 이것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한실부흥(漢室復興 : 한나라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이었습니다. 제갈량도 이 명분을 100% 활용하여 적벽대전을 개전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중국인들은 대외거래나 사업을 할 때 화비삼가(貨比三家 : 거래를 할 때에는 반드시 세 군데 이상의 가격을 비교하여 결정한다)하여 신중하게 전체적인 대세를 보고 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小異 : 거래하려는 사람이 나와는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큰 사안에서부터 합의해 들어간다)로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작은 차이는 내버려 둔다는 것이죠.

다음에는 화기생재(和氣生財), 즉 거래하는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고서 이익을 취합니다. 이로써 상대방의 마음이 움직이면 끈기 있게 대의명분(大義名分), 즉 거래하는 상대방을 설득할 때는 개인적인 이해보다는 보다 큰 명분으로 설득하여 상대방이 스스로 어떤 일을 추진하도록 유도합니다.

그 다음은 바로 차계생단(借鷄生蛋), 혹은 차도살인(借刀殺人 : 남의 칼을 빌려 다른 사람을 죽인다. 즉 남의 힘으로 나의 적을 죽인다)하는 것이죠. 이 점에서 보면 적벽대전은 가장 전형적인 이간계의 성공사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실제 상황 적벽대전**

중원을 통일한 조조는 마지막으로 정벌할 곳을 형주(荊州)로 보았습니다. 강동 지역과 익주(益州 : 촉 땅)도 남아있기는 했지만, 이 지역은 조조에 대하여 대항할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익주를 관장하는 유장(劉璋)은 조조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언제든지 투항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손권은 조조나 원소와 같이 중앙 권력층도 아니었고, 유비처럼 한 황실의 피도 물려받지 않았던 강동의 일개 토착 중소호족(中小豪族)에 불과한 상태에서 조조에게 조직적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운 상태였죠.

조조는 관도대전의 승세를 몰아 호남(湖南)ㆍ호북(湖北)에 연하여 있는 형주(荊州)를 정벌하고 난 뒤 손권을 제후로 봉하여 회유함으로써 천하통일을 완수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형주는 중국 남북의 교통요지로 양자강(洋子江 : 장강) 중류에 걸쳐 있기 때문에 조조의 입장에서는 형주를 장악하면 양자강을 이용하여 동으로 내려가 강동을 평정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오지(奧地)인 익주도 쉽게 공격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조조의 형주 정벌은 시시하게 끝이 났습니다. 208년 8월, 형주의 유표(劉表 : 142-208)가 조조의 남하를 눈앞에 두고 병사하자 유표를 계승한 유종(劉琮)은 이내 조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유표가 죽은 후 당시 형주의 권력자였던 채모는 조조의 친구였습니다). 이 때 유비는 생애 최대의 시련을 맞아 하구(夏口 : 현재 호북성의 무한[武漢])로 피신합니다.

[그림 ⑤] 형주의 유적들(왼쪽부터 형주성, 관우의 점장대)

유표가 죽자 손권은 형주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하여 노숙(魯肅 : 172-217)을 조문(弔問)의 사자로 파견하였는데, 노숙은 형주로 가는 길에 하구(夏口)에서 조조의 형주 침공 정보를 듣고 당양에서 만난 유비에게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조조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원래 노숙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평소 지론으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조조 - 원소 - 강동의 형태로 상호 견제하도록 하려했으나 원소가 멸망하자 형주의 유표를 설득하려 했는데, 유표가 죽었으니 그 대타(代打)로 유비를 설득한 것이지요. 이것은 노숙이 유비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비의 군대는 거의 궤멸된 상태인데 이것을 노숙이 제대로 보지 못했지요. 노숙의 제의는 유비에게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복음(福音)이었겠지요. 그래서 당장 제갈량이 노숙을 따라가 손권을 설득하여 적벽대전에 나서게 합니다. 물론 강동(오나라)의 입장에서는 천하의 대부분 영웅들이 몰락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겠지요.

조조의 남하로 오나라 조야(朝野)는 혼란에 휩싸입니다. 손권도 갈팡질팡하는 사이 주유는 손권의 마음을 확실히 잡아줍니다. 주유는 조조가 이길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중국(中國)이 기병(騎兵)을 버리고 수군(水軍)에 의지하여 오나라나 월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은 날이 추워 마른 풀(말먹이 풀)도 없고, 중국의 병사들이 멀리 강호를 건너와 물과 땅에 익숙하지 못하여 질병에 걸릴 것입니다(且舍鞍馬, 仗舟楫, 與吳越爭衡 本非中國所長 又今盛寒 馬無藁草, 驅中國士衆遠涉江湖之閒, 不習水土, 必生疾病 : 오서 주유전)”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위(魏)나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림 ⑥] 적벽대전(208) 지도

적벽대전의 구체적인 상황은 이미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실 테니 생략하도록 하고 [그림 ⑥]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사실 중요한 부분은 적벽대전에서 막강한 조조의 대군(大軍)이 소수의 손권ㆍ유비 연합군에 왜 패배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화공(火攻)에 의한 공격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전(水戰)에 익숙지 못한 조조군의 군선(軍船)은 선수(船首)와 선미(船尾)를 서로 연결하여 정박해 있었다고 합니다. 조조군의 주축은 북방인들로 장강의 출렁이는 물결 속에 배위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야 하니 뱃멀미에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그래서 배들을 묶어둔 듯합니다. 그러나 나무배들을 모두 묶어두면 화공(火攻)을 받게 되면 전멸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죠. 조조군의 수군 선단의 이 같은 모습을 포착한 사람은 주유의 부장인 황개(黃蓋)였습니다. 그래서 즉각 조조의 선단에 화공하여 배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배들이 묶여있는 상태에서는 동남풍(東南風)이 불든 북서풍(北西風)이 불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실제로 적벽대전이 진행된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적벽대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포기(蒲圻) 서북쪽 산 지역이나 오림(烏林) 연변 지역은 바다처럼 넓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척의 소형 배에 불을 질러 조조의 선단에 충돌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풍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죠. 정사에도 이 점은 확인됩니다.

정사에 황개는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퇴각시킬 수가 있습니다(然觀操軍船艦首尾相接, 可燒而走也 : 오서 주유전).”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개는 여러 배에 동시에 불을 질러 조조군에 다가가 조조군의 선단에 불을 붙입니다(오서 : 주유전). 적어도 화공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이 화공(火攻)이라는 것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동남풍을 끌어온 것이지요.

[그림 ⑦] 적벽대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포기적벽(蒲圻赤壁)과 멀리서 본 오림(烏林)

한 마디로 하여 적벽대전의 영웅은 황개입니다. 실제로 나관중 ‘삼국지’에 묘사된 제갈량의 역할의 대부분을 황개가 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황개는 뛰어난 관찰력과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화공을 제안했으며, 실제로 거짓 투항하여 여러 배를 풀고 동시에 불을 질러 조조군에 다가가 조조군의 선단에 불을 붙입니다. 당시에 “바람이 매우 사나워 불길을 거세게 치솟아 해안 위까지 불길이 치솟았다(오서 : 주유전)”고 합니다(제가 보기에 이 바람은 아마 북서풍 같습니다. 겨울 동남풍은 거세지가 않죠). 이 때 황개는 물에 빠졌다가 오나라 군사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황개인지를 알지 못하여 변소 속에 방치되기도 하였습니다. 다행히 한당(韓當)이 황개를 알아봐 겨우 목숨을 구합니다(오서 : 황개전 주석).

따라서 나관중 ‘삼국지’는 적벽대전을 오로지 제갈량이나 주유의 공으로만 돌리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적벽대전의 화공(火攻)에 대한 기록은 분명히 황개가 제안하고 주유의 결정에 따라 황개가 시행한 것입니다. 또한 황개는 거짓으로 투항하여 조조 진영을 흩으려 놓기도 했습니다(오서 : 주유전).

그리고 정사에 따르면 조조가 패전한 또 다른 큰 이유는 강남의 풍토에 익숙하지 못한 조조군의 진영에 퍼지고 있었던 전염병(傳染病) 때문이라고 합니다[위서(무제기) 및 오서(오주전)]. 즉 역병(疫病)과 이에 따른 전력의 저하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서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군은 패하여 장강의 북쪽에 주둔했다(오서 : 주유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사의 곳곳에 묘사되어 있는 이 전염병에 대해서 나관중 ‘삼국지’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겨우 “조조군은 먼 곳까지 와서 지쳐있거나 질병에 걸려있을 것입니다(나관중 ‘삼국지’ 44회).”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갈량의 업적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적벽대전에 대한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보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적벽대전이 정확히 어디에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사의 기록에 나타난 지명들, 예컨대 화용(華容 : 현재 후베이 감리[監利] 동북쪽), 남군(南郡 : 현재 후베이 강릉[江陵]), 오림(烏林 : 현재 후베이 홍호현 동북쪽 장강 북쪽 연안) 등을 토대로 대체로 추정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적벽대전의 상황을 묘사하면 [그림 ⑧]이 됩니다.

[그림 ⑧] 적벽대전 상황(조조군 진격로 후퇴로 / 유비군 후퇴로 / 손권군 진격로)과 총지휘관 주유의 상

***(4) 백만 대군, 적벽으로**

나관중 ‘삼국지’에는 적벽대전에서 동원된 조조군(曹操軍)은 1백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43회, 44회). 조조군이 1백만이라는 대목은 나관중 ‘삼국지’에 무수히 나오고 있습니다. 적벽대전이 개전되기 직전에 수많은 토론이 난무하는데 일관되게 나오는 것이 조조군의 군세는 1백만이라는 것이죠. 마치 독자들이 잊지 않도록 교육시키려고 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1백만이라는 수치는 어떨까요? 그 정도 되는 병력을 먹여 살릴 수나 있을까요?(이런 문제들은 ‘병력 인플레이션’에서 다시 심층적으로 다루겠습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를 유심히 보면 조조의 군세를 논하는 자리에서 주유가 손권에게 조조군과 전쟁을 결행하라고 촉구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전에 나왔던 말과는 달라서 주목됩니다.

“주군께서는 조조의 수륙 1백만 대군이라는 것을 들으시고 이들을 막아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조조군의 허와 실을 먼저 보셔야 합니다. 조조가 처음 이끌고 온 군사는 불과 15~16만이고, 그나마 먼 길을 오느라 지쳐있습니다. 그리고 원소에게서 얻은 군사가 7~8만이라고 하나 조조의 말을 잘 듣는 병사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두려워 할 일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강동의 5만 군사로 능히 조조를 격파할 자신이 있습니다(나관중 ‘삼국지’ 44회).”

이전에 계속 나왔던 1백만 조조의 대군이라는 말이 없어지고 좀더 사실적인 분석에 가까운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나오는 군사들을 모두 합해도 30만이 안 되니까요.

당시의 병력 동원에 대한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조조군의 성격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먼저 적벽대전에 동원된 조조군의 성격을 살펴보면 조조의 군대는 ① 조조의 본군 + ② 새로 편입된 형주의 군대 + ③ 유장의 군대로 연합군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정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유표의 대장 문빙을 강하 태수로 삼아 원래 병사를 통솔하도록 했으며, 형주의 명사 한숭과 등의 등을 기용했다. 익주목 유장은 처음으로 (조조의) 징병요구를 받아들여 (조조에게) 군대를 제공했다(위서 : 무제기).”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유장이 조조에게 투항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즉 익주를 다스리던 유장이 조조의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군대를 징집하고 그 군대를 파견했다는 것입니다(益州牧劉璋始受徵役,遣兵給軍). 그리고 적벽대전을 치른 병사들의 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적벽대전에 동원된 군대는 일종의 연합군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적벽대전의 패배가 조조군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제 실제로 적벽대전에 동원된 병력을 살펴봅시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1백만 대군을 손권이 5만을 동원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손권이 동원한 병력은 주유와 정보, 노숙이 이끈 3만 명의 병력(오서 오주전, 촉서 제갈량전)과 유비가 이끈 1만여 명의 병력(촉서 : 제갈량전)으로 대체로 정사와 일치합니다.

그러면 조조군의 병력은 어떻게 될까요? 정사에 “209년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이 투항하여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이 지역의 조조의 수군과 보병은 수십만에 달했다(其年九月 曹公入荊州 劉琮擧衆降 曹公得其水軍, 船步兵數十萬)”는 말이 있습니다(오서 : 주유전). 실제로 조조군의 정확한 규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수십만은 과장된 듯하고 제가 보기에 대체로 10~15만 정도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조조군의 병력 수가 표현된 유일한 대목이 이 부분인데 그나마도 오서에서 “수군과 보명이 수십만이 달해서 오나라의 장수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曹公得其水軍, 船步兵數十萬 將士聞之皆恐)”는 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 수십만은 정확한 병력을 표시한 말은 아니라 일종의 전문(傳聞 : 소문)이죠. 정사(진수 ‘삼국지’)를 통틀어 조사를 해봐도 20만 이상의 정규군(正規軍) 대병이 동원된 경우 구체적 수치를 제시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조가 처음 인솔한 병력은 대체로 5~7만 정도로 추정이 되고 유장이 파견한 군대가 2~3만, 유표의 군대에서 3~5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량의 말 가운데 “(유종의 형인) 유기가 가진 병력을 1만 이하”라고 한 대목에서 보듯이 유표의 군대에는 유비의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비와 유기가 군대를 빼내왔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적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대체로 유표는 조조의 침공 직전에 5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손권은 자신이 통솔하는 군 병력을 10만(촉서 : 제갈량전)으로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실제 병력으로 동원한 것은 3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적벽대전에 동원된 군대를 10~15만 정도로 추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관도대전 당시 조조의 최대의 정적(政敵) 원소가 동원한 병력은 10만으로 공식적인 정규군 병력으로는 거의 최대 수치에 가까운데(위서 : 원소전) 이 때에도 조조는 1~3만 이하의 병력을 동원합니다(물론 적벽대전 당시의 조조 군대는 매우 강했고 관도대전 당시의 조조의 군대는 상대적으로 약했을 것이기는 합니다). 이에 비하여 유표의 뒤를 이은 허약한 유종을 격파하기 위해서 조조가 5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죠. 조조는 실제로 대병(大兵)을 동원하는 군주가 아니죠. 조조는 뛰어난 군지휘관으로 기습전에 탁월한 사람이었으며 적은 병력으로도 능히 상대를 제압한 경험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적벽대전이 애초부터 계획된 전쟁이 아니라 형주를 정벌하러갔다가 돌발적으로 발생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즉 조조는 208년 7월 형주를 정벌하기 위해 가는데 9월에 유종이 항복했고, 조조는 유장에게 병력 지원을 명령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고 조조는 강릉(江陵)에서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합니다. 이로써 돌발적인 적벽대전이 시작되었고 전염병과 화공으로 어설프게 전쟁은 끝이 납니다.

둘째, 위나라가 후에 촉을 정벌할 때 동원한 병력 수를 참고로 해보면 적벽대전에 동원된 병력의 수는 대체로 비슷하거나 이 보다 적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정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263년 가을 황제는 촉 정벌을 위해 조서를 내려 등애(鄧艾 : 107-264)와 제갈서(諸葛緖)에게는 각각 3만여 명의 병사를 통솔하게 하고, 종회는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사곡(斜谷)과 낙곡(駱谷)으로 나누어 들어갔다(위서 : 종회전).”

위의 사실로 보면 촉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에 동원된 병력이 대체로 15~20만 정도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벽대전에 동원된 총병력은 많아도 15만 이하 라는 것이죠.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왜 이렇게 조조의 대군을 과장시켜서 묘사를 했을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유비 진영이 조조를 상대로 이긴 거의 유일한 전쟁이 적벽대전인데다 적벽대전의 총감독을 주유와 제갈량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려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들이 이 대목을 통하여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을 볼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듯이 소설적 성공을 위한 의도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군대를 무찌른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자에게 응원하듯이 드라마란 약자가 천신만고 끝에 성공하는 것을 그려야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나관중 ‘삼국지’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장면들이 적벽대전 부분을 중심으로 묘사되어있는 것이죠.

***(5) 과장된 전쟁**

여기서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사(正史) 가운데 적벽대전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8년 9월 조조는 … [중략] … 유표의 대장 문빙을 강하 태수로 삼아 원래의 병사를 통솔하게 하였고 … 익주목 유장은 처음으로 군대를 제공하였다. 208년 12월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자 조조는 장희를 파견해 합비를 구조하도록 하고 강릉에서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손권은 장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도주했다.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해졌다. 이 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위서 : 무제기)”

이와 같이 적벽대전은 매우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실제 전쟁은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해졌다. 이 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는 말 뿐입니다. 그리고 관도대전과는 달리 적벽대전은 불과 1~2 개월만에 전쟁이 끝이 납니다. 관도대전 - 화북정벌은 몇 년에 걸쳐 있어서 정사의 기록도 매우 방대하게 나타나 있는데 반해서 적벽대전은 위서(魏書)의 경우에는 겨우 세 줄에 불과합니다. 한글로 번역된 페이지 수로 계산하면, 관도대전-북방정벌이 10쪽 이상이 된다면 적벽대전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겨우 한 단락에 불과할 뿐입니다. 촉서(蜀書)에서도 그리 많은 내용이 아닙니다. 촉서를 보시죠.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연합하였다. 손권은 주유 등에게 수군 수만 명을 보내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대파하고 그의 군선을 불태웠다. 유비와 오의 군대는 육지와 장강에서 동시에 나아가 남군까지 추격하였다. 당시 역병이 발생하여 조조군의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先主遣諸葛亮自結於孫權 權遣周瑜 程普等水軍數萬, 與先主幷力 與曹公戰於赤壁 大破之 焚其舟船。先主與吳軍水陸竝進 追到南郡 時又疾疫 北軍多死 曹公引歸 : 촉서 선주전).”

오서(吳書)의 경우도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나관중 ‘삼국지’가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70 글자도 안 되는 한 단락의 기록을 가지고 책 한 권을 썼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조조가 배 위에서 의기양양하게 시(詩)도 짓고, 제갈량이 동남풍(東南風)을 불어옵니다. 그 뿐입니까? 황개의 고육지계에 제갈량의 화살 10만개 주워 오기, 관우의 조조 사로잡기, 방통의 연환계, 주유의 제갈량 암살기도 등등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삼국지’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적벽대전은 제대로 치러진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적벽대전은 돌발적으로 발생한 전쟁이었으며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병사들이 죽은 상태에서 물에 익숙하지 못한 병사들을 위해 배를 묶어 두었는데, 화공을 당하여 대파되어버린 전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갈량 - 방통 - 노숙 - 황개 - 주유 - 정보 - 유비와 그의 형제들 - 조조 - 수많은 위나라 장수들 - 오나라 장수들 등이 총출동합니다. 마치 나관중 ‘삼국지’는 적벽대전을 위해서 씌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유비 진영이 조조를 상대로 이긴 전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적벽대전이 과대 포장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당시 적벽대전은 손권 진영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갈량의 활약을 만들어 삽입한 것이죠.

그런 점들을 떠나서 보면, 적벽대전은 몇 가지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단 몇 가지만 뽑아 보겠습니다.

첫째, 적벽대전은 삼국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비가 이를 계기로 기사회생하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죠.

둘째, 유비와 손권이 손을 잡고 적벽대전을 통하여 강력한 조조군을 방어해냄으로서 조조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자신감은 삼국의 정립(鼎立)을 가져오게 되었죠.

셋째, 적벽대전은 수군(水軍)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전술적인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중국의 영역이 양자강 이남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육군(陸軍)만으로는 중국 전토(全土)를 장악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이상을 통하여 적벽대전이 과장된 것은 제갈량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하여 나관중 ‘삼국지’가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적벽대전을 통하여 제갈량은 온갖 재주를 다 부리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들어낸 이야기고 제갈량의 역할은 외교관으로서 손권을 설득하는 데 한정되어집니다. 적벽대전의 실제 주인공은 황개인데 황개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고 엉뚱하게도 제갈량만 부각되고 말았습니다. 황개에게는 너무 억울한 일이지요. 그러나 나관중 ‘삼국지’를 통하여 적벽대전은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전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보면 나관중 ‘삼국지’가 가진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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