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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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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6>

사마의(司馬懿), 그 빛과 그늘 <하>

***들어가는 글**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여러분들께 문제를 한번 드려보지요. 아래의 글에서 고귀향공(高貴鄕公)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그리고 이 글은 누가 쓴 글일까요?

“죽은 고귀향공(高貴鄕公)은 성정이 악하고 무도하여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였습니다. … <중략> … 저희들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이 같은 혼란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사악한 반란을 제압하지도 못했습니다. … <중략> … 지금 고귀향공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인륜을 저버렸으며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하였으며 스스로 망하여 사람과 신을 저버렸습니다. 평민의 의식으로 안장한 것은 과거의 선례로 보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서기 259년 5월 8일).”

위의 글로만 보면 고귀향공은 아마도 대역무도한 죄를 저지른 역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다시 다음의 글을 보시죠.

“고귀향공은 시종과 병사들을 이끌고 칼을 뽑고 제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저는 병사들이 서로 다치는 것이 두려워 응전을 못하게 하였고 이것을 어기면 군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제(成濟)가 병사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고귀향공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성제를 잡아서 처형하였습니다. 제가 듣기로 신하는 사람은 죽어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군주를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고귀향공에게 몸을 버려 죽을 각오로 그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귀향공의 음모는 위로는 황태후를 위험하게 하고 종묘사직을 전복시키려는 책동이었습니다. 저는 국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제가 죽는 것보다는 황태후를 보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서기 259년 5월 26일)”

어떻습니까? 고귀향공이 이제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그는 바로 위나라 황제였습니다. 고귀향공(조모 : 曹髦)은 위황제로서 제왕이 사마소에 의해 쫓겨난 뒤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글들을 쓴 사람은 바로 사마소(司馬昭)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글은 위서 고귀향공기(高貴鄕公紀)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황태후를 보호하기 위해 황제를 죽인다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희한한 충신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조모가 언제 황태후를 죽이려 한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위나라 말기에 궁중에서 도대체 어떤 참극(慘劇)이 벌어졌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사실은 조조의 위나라 - 사마의의 진(晋)나라의 정권 교체 과정은 이후 중국사에 있어서의 정권 교체의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진나라 이후 중국사에서 왕권의 교체과정은 조조나 사마의가 행하였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소위 ‘모방범죄’가 유행하였다는 것이지요.

***(1) 황제, 비명에 죽다**

진나라를 건국한 사마의 부자가 역사적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에 의해 황제가 피살되는 ‘삼국지’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서기 260년 스무 살이 된 위황제 조모(고귀향공)는 비록 얼떨결에 황제 지위에 올랐으나(254년) 위나라를 부흥해야 할 책무를 깊이 통감하게 된 것 같습니다. 조모는 학문적으로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건하여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열혈 청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모는 위황제인 자신이 사마소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조모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중 시종들과 호위 군사들을 이끌고 사마소를 공격하려다가 사전에 알려져 사마소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서 피살된 유일한 황제였습니다.

조모가 피살되는 과정이 나관중 ‘삼국지’에는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 대강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모가 3백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사마소를 죽이러 온다는 보고가 있자 가충은 즉각 1천여 명의 철갑 금군(禁軍) 군사들을 데리고 이에 맞섰다. 가충의 군사들이 조모가 이끌고 온 군사들을 포위하자 조모가 수레에서 나서며 ‘짐(朕)은 천자(天子)다. 너희들은 모두 짐이 신하이거늘 왜 나에게 칼을 겨눈단 말인가?’하자 군사들은 움찔하면서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 때 가충이 부하인 성제(成濟)를 불러 ‘이보게, 진공(晋公 : 사마소)께서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그대의 뒤를 돌봐준 것일세.’라고 하니 성제는 창을 들고 조모에게 가더니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조모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니 조모는 수레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나관중 ‘삼국지’ 114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신들은 주모자로 사마소의 충복 가충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합니다. 그러자 사마소는 엉뚱하게도 “성제는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렀으니 사지를 찢어죽이고 삼족을 멸하여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성제가 반항하자 사마소는 성제의 혀를 도려내고 성제 일족을 저자거리에 끌고 나와 목을 베어 죽입니다(나관중 ‘삼국지’ 114회).

위의 사건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잔인하고 대역무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정사(진서 : 문제기)와도 거의 일치합니다. 아마 당시 사람들 가운데 이 일이 사마소가 저질렀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요?

251년 권력을 장악한 사마의가 죽고 난 뒤 새로운 실권자가 된 사마사(司馬師)는 조상과 가까웠던 위황제 조방을 싫어한 듯합니다. 그러던 중 254년 봄 정월, 황제(조방)와 중서령 이풍, 장집 등이 사마사를 폐하고 태상 하후현을 보정으로 시키려고 계획했는데 사마사는 은밀하게 이것을 알아서 관련자들을 체포해, 각각 삼족을 멸합니다. 이 때문에 황제(조방)는 마음속으로는 매우 초조하게 생각하였는데 사마사는 이 같은 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황제를 폐위시키려고 계획합니다.

그리하여 위나라 황태후(곽황후)에게 “(조방은) 성인이 되었지만 주색잡기에 몰두하고 있다(위서 제왕기, 진서 경제기).”는 엉터리 이유를 들어서 폐위시킵니다. 그래서 시골구석에 있던 조모를 황제위에 앉힌 것입니다.

조방을 폐위시킨 후 사마사는 “천하는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아 촉·오의 오랑캐들과 패권을 다투고 있는 형국이라 천자는 덕행이 높고 현명해야 합니다. 팽성왕(彭城王) 조거(曹據)는, 태조(조조)의 아들이시며 그 현명함은 인덕이 높고 명철하고 성실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황실의 가장 연장자이십니다.”라고 하여 비교적 통제하기가 쉽고 늙은 조거를 추천했는데 황태후는 조거가 선제(조예)의 숙부이기 때문에 순서에 문제가 있으므로 난색을 표합니다. 그래서 황태후는 동해정왕(조림 : 曹霖)이 명제의 남동생이어서 그 아들인 고귀향공 조모(曹髦)를 황제로 세우려 합니다. 사마사는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어지지 못하고 황태후의 명령에 따라, 사자를 보내 조모를 원성(元城)으로 맞이해 황제로 세우게 됩니다(진서 : 경제기).

정사를 보면 조모가 얼마나 낙양의 궁중과 거리가 먼 곳에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조모는 자신을 맞으러 온 대신들에게 직접 내려서 인사를 하려 했는가 하면,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가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조모는 “나는 다만 황태후가 불러서 온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위서 : 고귀향공기). 그런데 이 시골 소년이 궁중 생활에 적응하면서 얼마나 사직이 위태로운지를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기회를 엿보다가 궁중쿠데타를 도모하다가 피살(259)당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에는 사마사의 책임도 큽니다.

애당초 조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마사는 사사건건 조모의 행동에 간섭합니다. 정사(진서 : 경제기)를 살펴보면 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사마사는 “형산의 구슬은 아름답지만, 닦지 않으면 보석은 되지 않는다(荊山之璞, 不琢不成其寶物 : 논어)”고 하면서 끊임없이 조모를 교육시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과외선생도 그 만큼 학생을 닥달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조모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업을 이루었던 사람이었습니다(少好學,夙成 : 위서 고귀향공기). 과외선생이 마땅히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지요. 다만 조모는 성질이 급한 것이 흠이었습니다.

255년 사마사가 허창에서 사망하자 사마소가 그의 권력을 계승합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맙니다. 위나라의 조정이 기울어 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한 열혈 청년 황제 조모(曹髦)는 무모하게도 몇 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사마소를 죽이러갔다가 사마소의 손에 죽게 됩니다. 조모(曹髦) 즉 고귀향공을 죽이고 나서 사마소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일이 꼬이고 말았구나. 시골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자연스럽게 선양(禪讓)을 받으려 했는데 그 시골 아이가 더 무서운 놈이군 그래. 그러나 저러나 중신들 보기도 그렇고 민심(民心)도 더욱 좋지 않겠어.”

정사를 보면 황제 암살사건은 거의 한달 가량 조정을 시끄럽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사마소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아무리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더라도 여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이 상태에서는 선양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이죠. 결국 사마소는 촉나라나 오나라를 정벌하여 선양의 명분을 삼으려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두 나라 가운데는 촉이 허약하니 촉을 선양의 먹이로 삼은 셈이죠. 황제 암살 사건 3년 만에 결국 촉은 멸망합니다. 촉이 멸망(263)한 후 2년 만에 위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265)됩니다.

[그림 ①]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는 사마염(드라마의 한 장면)

위에서 본 황제의 죽음은 당시 참담했던 위나라의 정치상황을 보여줍니다. 이 일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록으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사마의의 후손인 동진(東晋)의 명제(明帝)가 신하와 국사를 논하다가 자신이 선조인 사마소(司馬昭)가 위황제 조모를 살해한 대목에 이르자 부끄러워 얼굴을 책상에 묻고 맙니다(明帝以面覆床 : 진서, 선제기).

***(2) 사마의, 그 빛과 그늘**

사마의는 현실을 직시하고 때로는 다양한 전략도 구사하지만, 깊은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마의는 자체적으로는 크게 나무랄 것은 없지만 그의 가문에 의해서 권력이 찬탈되고 그 과정은 조조가 한나라를 없애는 과정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그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요. 조조가 대장군으로 임명된 이후 조조의 가문은 위공(조조)-위왕(조조)-위황제(조비)의 과정을 밟는데 이 과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마의의 가문에 의해 진공(사마소)-진왕(사마소)-진황제(사마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권력승계과정(육군소장으로 5.16 쿠데타 - 장도영육군대장 체포 - 육군대장 승진 - 혁명정부 수반 - 공화당 창당 - 대통령선거 - 대통령 취임)과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권력승계과정(육군소장으로 12.12 쿠데타 - 정승화 육군대장 체포 - 육군대장 승진 - 국보위원장 - 민주정의당 창당 - 대통령 간접선거 - 대통령 취임)이 거의 유사한 것과 같습니다. (이 두 분께는 송구스러운 말씀일진 모르지만) 이것을 보면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부터 독재를 했으니 그 다음 대통령도 독재하기가 수월했겠고 또 그 다음 대통령도 독재하기가 쉬웠겠죠. 이래서 만델라나 워싱턴이 위대한 것이죠.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난을 물리쳤으며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고 경제기적을 이룬 것들은 다시 평가할 문제겠죠. 그러나 그 같은 공적 때문에 10월유신(維新)과 같은 참담했던 독재까지 인정하자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다시 우리의 주인공, 사마의와 그 아들들에게로 돌아갑시다.

사마의는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 문무를 겸비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마의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승상의 임명도 거부하고 조용히 살아갔습니다.

사마의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장씨 소생의 맏아들인 사마사와 역시 장씨 소생의 아들인 사마소가 진나라 건국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정사에 따르면, 사마의의 부인 장씨는 후일 ‘선목장황후(宣穆張皇后)’로 추존되었는데 사마사(경제 세종), 사마소(문제 태조), 사마간(司馬幹 : 평원왕), 남양공주 등을 낳았습니다.

정사에는 이 장씨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조가 사마의를 부르자 멀쩡한 사마의는 풍질(風疾)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 출사(出仕)하기가 어렵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의의 집에서는 여러 권의 책을 습기를 없애려고 바람에 말리고 [폭서(曝書 또는 폭서(暴書)] 있던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집니다. 당황한 사마의는 걱정이 되어 후다닥 책을 거두어들이는데 이 광경을 하녀 하나가 보게 됩니다. 그러자 장씨는 비밀리에 이 하녀를 죽여 버립니다. 후에 조조는 실제로 사마의에게 풍질(風疾)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객을 보냅니다. 장씨가 사마의를 구한 셈이 되었지요. 이 일이 있은 후 사마의는 이 장씨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진서 : 후비상 선목장황후).

신중한 사마의와 예사롭지 않은 장씨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니 사마사ㆍ사마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마의보다 더 치밀하고 더 냉혹하지 않나 모르겠네요. 정사(진사)에 따라 사마사를 간단히 알아봅시다.

정사에 따르면, 사마사(司馬師)는 업적도 많습니다. 사마사는 사마의의 맏아들로 풍채는 우아한데다 침착하였고 주관이 뚜렷하고, 뛰어난 지략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는 하후현·하안과 어깨를 겨루어 명성을 날렸는데 하안은 평소에 사마사에 대해 말하기를 “(성인은) 변화의 가이없는 리(理)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천하의 사업을 성취할 수가 있다(周易 : 繫辭傳上)라고 하는데 사마사가 능히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마사는 인재 등용의 법을 정비해, 인재 등용의 각종 비리들을 없앴고 사마사는 어머니(선목장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거상(居喪)함으로써 그 효성을 천하에 떨치기도 했습니다(진서 : 경제기).

사마의의 아들과 손자에 의해 진나라가 건국한 사실을 봅시다. 사마의 가문이 위나라 정권을 장악하고 새 나라를 건국한 것은 조조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조조는 자신의 힘으로 대부분의 중국을 통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한나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조조가 새 왕조를 건국한 문제에 관해서 엄격하게 비판하기는 어려운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사(司馬師)ㆍ사마소(司馬昭)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고 한 것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소는 촉을 정벌한 것이고 사마염은 오나라를 정벌한 것이겠지요. 이것을 보면 천하를 얻으려면 힘뿐만 아니라 대의명분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 사마의의 아들들이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했던 원인을 먼저 살펴봅시다. 제가 보기에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사마의에 대한 위나라 조정의 지나친 견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나 사마소는 아버지(사마의)의 일로 인하여 위나라 조정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보기에 사마의는 일평생을 전쟁과 조정을 넘나들면서 국가 보위에 온 힘을 다한 사람인데도 끝없이 모함을 받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사마사는 비밀리에 3천명의 사병(私兵)을 기르고 있었는데(진서 : 경제기) 이것은 스스로 사마의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정도의 병력으로 위나라를 무너뜨릴 수준은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있는 병력입니다. 결국 이들은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결국 사마의의 손자(사마염) 세대에 이르자 진(晋 : 서진)이 건국됩니다. 이 진(晋 : 중국발음 [찐])나라는 진시황의 진(秦 : 중국발음 [치인])나라가 아니고 5호16국 시대 말기에 있었던 강남땅의 진(陳 : 중국발음 [처언])나라도 아닙니다.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림 ②] 서진시대

그러나 위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마씨 가문은 용서할 수 없는 역적들일 것이고 그럴 경우 진(晋) 나라의 건국에 대한 사마의의 책임을 면할 길이 없지요. 더구나 사마의 부자가 건국한 진(晋 : 265 -316) 나라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별로 자랑스러운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 진나라로 인하여 한족들이 중원(中原)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지요.

진(晋)나라는 사마씨 형제들 간의 전쟁으로 나라가 약해져서 중원 땅에서 쫓겨나 강남으로 이주하여 건국한 동진(東晋 : 317-420)으로 이어져 155년간 유지됩니다. 즉 진나라는 서진과 동진을 합한 나라이름으로 중원에 있었던 때를 통상 서진이라고 부르고 강남으로 쫓겨 가서 만든 나라를 동진으로 부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나라가 중원에서 쫓겨 간 시점을 전후로 하여 소위 ‘천하대혼란 시대’(속칭 5호16국 시대)가 나타납니다. 이 때는 유목민(쥬신족?)들의 중원 입성이 본격화된 시대입니다. 광개토대왕이 대고구려(大高句麗)를 확장하여 동북아의 패자가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그러나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는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이 천하대혼란의 시대를 발생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진나라라는 것이죠. 결국 한족(漢族)들을 위태롭게 한 것은 그들이 경멸하던 오랑캐가 아니라 한족 스스로였다는 말입니다.

[그림 ③] 동진시대(강남으로 쫓겨 간 진나라)

그런데도 재미있는 것은 강남으로 이주한 한족의 정권들의 부침 속에서도, 진나라는 중원의 정통성을 가진 정부로 당시 한족들에게는 각인이 되어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당(唐)나라가 중국을 통일(618)할 때까지는 진인(晋人)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나라는 실정(失政)을 거듭한 나라지만 강남으로 쫓겨 간 중국인들에게는 중원의 추억을 간직한 유일한 정통성을 가진 합법적 정부였다는 얘기지요.

사마의의 두 아들은 충의(忠義)를 버리고 군권(軍權)을 장악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권력을 찬탈하였으므로 비난과 책임을 면할 수 없겠지요. 만약 진나라가 그 후에라도 조선의 세종대왕이나 성종대왕, 또는 청나라의 강희제나 건륭제, 옹정제와 같은 분이 나타나 정치를 잘하여 중국을 안정시켰더라면 사람들은 사마의 가문을 비난하지 않았겠지만 진나라의 정치는 위나라의 정치보다도 더 한심했습니다.

[그림④] 진 무제 사마염(진나라 건국자)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진 무제)은 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이었던 팔왕(八王)의 난(291~306)의 원인을 제공해 중국을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만약 유비 같은 사람이 천하를 통일했으면 그 같은 혼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진 듯합니다. 그것도 ‘삼국지’가 만들어진 하나의 이유가 되겠습니다.

***(3) 중원은 다시 혼란 속으로**

그러면 사마염, 즉 진의 무제(武帝)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중국을 대혼란으로 몰아넣었을까요? 사마염 또한 도량이 넓고 과단성이 있으며 영특하기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요?

사마염은 전조(前朝) 즉 조조의 위(魏)나라는 지나친 인재 숭상으로 종실(宗室 : 황제의 친족)을 등한시하여 결국 신하들에 의해 나라가 망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마염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을 왕(王)으로 봉(封)하면서 그들에게 군사를 주도록 하면 최소한 다른 성씨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으리라고 보았습니다.

사마염은 즉위(265)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종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였습니다. 그 대강의 내용을 한번 봅시다. 진나라는 군(郡)을 국(國)으로 하고 식읍(食邑)이 1만호인 자를 차국(次國)이라 하여 2군(二軍)을 두어 3천명의 군대를 가졌고, 식읍(食邑)이 2만호인 자를 대국(大國)이라 하여 3군(二軍)을 두어 5천명의 군대를 가지게 했습니다. 이 때에 봉(封)을 받은 사람은 27왕으로 사마염의 숙조(叔祖)ㆍ숙부(叔父)ㆍ당숙(堂叔伯)ㆍ당형제(堂兄弟) 등 일가친척들이었습니다.

오나라를 평정한 사마염(무제)은 주(州)나 군(郡)의 군비(軍備)를 없애면서 자사(刺史 : 각주의 감찰관)가 군대를 가지지 못하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지방의 무력이 쇠약해져서 중앙에 대항할 수 없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각 주나 군에 왕으로 봉해진 무제의 종실(친척)들이 지방의 무력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던 점은 장기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형제와 친척 간에 사이가 계속 좋다면야 무엇이 문제겠습니까마는 사이가 틀어지거나 오해가 있다거나 하면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지요.

결국 상황은 형제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몰고 왔습니다. 즉 각 왕국이 군대를 가지게 되어 결국 종실제왕(宗室諸王)이 자기세력의 확대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또 이에 가담하면서 국력이 극도로 약화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팔왕(八王)의 난(亂)’입니다. 이 ‘팔왕의 난’은 형제들 숙질(叔姪)간의 싸움이 얼마나 무섭고 피비린내 나는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림 ⑤] 팔왕의 각 세력지역과 오호(五胡)의 분포

팔왕의 난 이후 중국은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대로 다시 들어가는데 이 시기를 바로 5호 16국 시대라고 합니다. 3~4백 년 동안에 무려 16개의 나라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쥬신천하가 개막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즉 이 때 동북방의 쥬신족(유목민)들이 대거 남진하여 중원을 점령하고 중국통치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위의 그림에서 선비 - 흉노 - 갈 - 예맥 등은 같은 계열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이들을 저는 쥬신 또는 알타이로 부르고 있습니다. 쥬신족에 대해서는 조만간에 상세히 해설해드리도록 약속드립니다. 제가 쥬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반발하시는 분들이 많은 듯한데 저는 흉노, 선비, 예맥 등의 욕설에 가까운 말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용어이니 이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림 ⑥] 쥬신천하의 개막 (5호16국시대)

일반적으로 말하면 중국의 지속적인 통일왕조는 한(漢) - 당(唐) - 송(宋)ㆍ금(金) - 원(元) - 명(明) - 청(淸) 이고 이 가운데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유목민계열(쥬신족 계열)의 이민족(異民族)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사이의 기간은 무려 400여 년에 걸친 대혼란기(大混亂期)였다는 것이죠.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사마염(진의 무제)의 통치철학과 정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ㆍ이세민의 모계도 사실은 유목민(쥬신) 계열이라는 것입니다.

[그림 ⑦] 5호16국 시대(쥬신천하) 말기(위 그림의 진은 晋이 아니라 陳)

따라서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마염은 중국을 사상 유례가 없는 혼란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이 진나라를 사랑하기가 어렵지요. 마찬가지로 사마의에 대해서도 유쾌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는 것이겠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나라 멸망 이후 3~5백년에 이를 동안 그래도 유일한 중원을 통치했던 유일한 왕조이기 때문에 포기하기도 어려운 나라였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진나라는 정말이지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나라입니다.

이번 강의를 통하여 사마의의 빛과 그늘을 살펴보았습니다. 전편에서는 사마의의 실체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후편에서는 사마의의 아들과 손자들이 이룩한 진나라의 어두운 측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전편이 사마의의 빛이었다면 후편은 사마의의 그늘이었던 셈입니다. 사마의의 후손들이 건국했던 진나라 때문에 오히려 사마의에 대한 평가가 나빠지는 원인이 되었음을 아셨으리라 봅니다. 즉 황위찬탈에 대한 책임의 일부가 사마의에게 있는데다가 후손들이 최악의 정치를 하는 바람에 사마의의 업적까지도 깎아 내리게 된 것이죠. 이번 강의를 통하여 사마의와 진(晋)나라의 삼국 통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보다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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