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5>

사마의(司馬懿),그 빛과 그늘 <상>

***들어가는 글**

이번 강의는 '사마의(司馬懿)'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사마의는 너무 잘 아는 사람이잖아. 그것은 재미가 없어."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대부분 다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사마의가 빠지면 안 되겠죠? 그래서 가장 일반적인 것들과 일부 누락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마의는 앞으로 2회에 걸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편은 사마의라는 인물 자체를 분석해보고, 하편에서는 사마의와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어떻게 중국을 이끌어갔으며 그에 따른 문제는 없었는가 하는 점들을 분석할 것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납니다.(나관중 '삼국지' 39회). 즉 조조가 삼공제도(三公制度)를 없애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면서 사마의를 문학연(文學掾)으로 삼는 장면부터 등장합니다. 그런데 제갈량이 박망파에서 화공으로 위군을 섬멸하고, 적벽대전에서 화살을 주워오고, 동남풍을 부르는 등 온갖 재주를 다 부릴 동안에도 사마의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마의는 가뭄에 콩 나듯 나오다가 제갈량이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북벌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 그 동안 사마의의 업적은 제대로 알 길이 없지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마의를 단순히 제갈량보다는 못하지만 탁월한 전략가로만 알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나관중 '삼국지'가 원인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사마의는 때로는 코믹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부분은 사마의가 상방곡(上方谷)에서 촉군의 군량미를 태우려할 때 지뢰를 이용한 화공(火攻)으로 사마의 부자를 공격합니다. 이때 사마의는 겁에 질린 채 말에서 내려 두 아들을 끌어안으며 통곡합니다. 사마의는 "우리 삼부자가 죽게 되었구나." 라고 탄식하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도망쳐 살아납니다(나관중 '삼국지 103회). 이것은 234년 경 제갈량의 북벌 가운데 묘사한 내용인데, 당시 위군과 촉군은 교전을 벌이지 않았고 오장원에서 대치 중 제갈량이 병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지요. 그리고 어떤 기록도 사마사와 사마소가 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지뢰와 같은 화약은 당시에 있지도 않았죠.

[그림①] 상방곡에서 갇힌 사마의(드라마의 한 장면)

나관중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오장원을 공격합니다. 이 때 중군(中軍)에서 수십 명의 장군들이 한 대의 사륜거를 몰고 나오는데, 그 위에는 제갈량이 윤건에 학창의를 입고 흰 부채를 부치면서 단정히 앉아있죠. 사마의는 놀라서 "아직 공명이 살았구나. 내가 경솔했다"고 하면서 50여리를 도망쳐 나오는데, 두 장수가 뒤를 따르다가 한 장수가 말고삐를 잡아 멈추게 하자 그 다음 사마의가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즉 사마의는 자기 머리를 만지면서 "내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느냐?"라고 합니다(나관중 '삼국지' 104회). 코미디도 이쯤 되면 유명코미디 프로인 개그콘서트에 내보내도 되겠지요. 그렇거나 말거나 이것이 유명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달아나게 하다(死諸葛走生仲達)"는 사건입니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목상(木像)을 본 일도 없거니와 그것을 보고 달아날 일이 있을 리도 없지요.

이와 같이 나관중 '삼국지'에서 나타나는 사마의의 모습은 제갈량의 근엄한 모습에 대비하여 코믹한 캐릭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가 사마의를 잘 모르게 되죠. 그러면 사마의의 참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1) 유학자 사마의(司馬懿)**

'삼국지'의 대표적인 주인공의 한 사람이자 제갈량의 영원한 숙적이었던 사마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나관중 '삼국지'에서 사마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체로 사실에 입각해서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제갈량을 미화(美化)하는 과정에서 다소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사마의의 약력을 중요한 사항만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사마의(179~251)는 위나라의 대신으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제(宣帝), 자는 중달(仲達)이고 하내(河內) 땅의 온(溫) 사람입니다. 그의 출신지는 중원에 가까운 지역이었고 명문가에서 출생한 사람입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조조의 신임을 받았고, 위나라의 문제가 그를 특히 신임하여 문제ㆍ명제ㆍ제왕(조방) 등 4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역임합니다. 위나라의 문제[文帝 : 조비(曹丕)]와 명제[明帝 : 조예(曹叡)] 때에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보정(輔政)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후 권력자인 조상(曹爽)과의 갈등이 깊어져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림 ②] 사마의의 고향의 현재 모습(하남성 무척)

사마의는 위나라의 대신이기도 하지만 진(晋)나라의 고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사마의(진나라의 선제)에 대하여 먼저 진나라 공식 역사서인 '진서(晋書)'의 기록(진서 : 선제기)을 대략 살펴보도록 합시다. 참고로 진서(晋書)는 서기 650년을 전후로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 등에 명하여 편찬하게 한 사서입니다. 종래의 정사가 개인의 저술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황제의 명령에 따라 여러 이름난 문인들이 나누어서 편찬한 역사서이죠. 재미있는 것은 당태종 자신도 여기에 참여하여 일부를 직접 저술합니다. 선제기(사마의), 무제기(사마염), 육기전(陸機傳 : 육손의 손자), 왕희지전(王羲之傳)은 당태종이 직접 편찬한 것입니다.

진서에 따르면, 초한(楚漢)의 시기에 사마앙(司馬仰)은 장수를 지냈는데 여러 제후들과 더불어 진나라를 멸하고 하내(河內) 땅에 정착하였고, 한나라 때는 이 지역이 군(郡)이 되어 그의 자손들은 하내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 사마앙으로부터 8세대가 지나 한나라 정서장군(征西將軍) 사마균(司馬鈞)이 태어났습니다. 사마균은 사마량(司馬量 : 예장태수)을 낳았으며, 사마량은 사마준(司馬儁 : 영천태수)을 낳았고 사마준은 사마방(司馬防 : 경조윤)을 낳았습니다. 사마의는 바로 이 사마방의 둘째 아들입니다.

사마의는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특이한 데가 있었고, 총명한데다 명랑하고 생각하는 바가 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었으며 유교(儒敎)를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았다[복응유교(服膺儒敎)]고 합니다. 즉 사마의는 유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늘 마음에 간직하고 체화되어 있다는 것이죠.

한(漢)나라 말기 대란이 일어나자 사마의는 천하를 근심하였습니다. 남양태수로 같은 군 사람이었던 양준(楊俊)은 사람의 인물 됨을 보기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사마의를 보자 "스무 살도 안 된 젊은이가 범상치 않은 그릇이군(未弱冠, 以爲非常之器)"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司馬朗)과 가까이 지낸 상서(尙書) 최염(崔炎)은 "자네 동생이 총명하고 결단력도 있어서 자네는 동생을 따라가기 어려운 듯 하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림 ③] 사마의

서기 201년 군(郡)에서 관리를 뽑아 올리기 위해 논의하였는데, 당시에는 조조(위무제)가 사공(司空 : 삼공의 하나로 주로 법형과 토목사업을 관장)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의는 가급적이면 관직에 나가지 않으려고 군에서 자신을 천거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사마의는 조조가 주도하는 조정에 참여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조조 가문이 사마의 가문에 비해 낮은 환관 가문이었다는 점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정사에는 한나라 운도 다 되었고, 조조에게 굽히기 싫었다는 말이 나옵니다(漢運方微 不欲屈節曹 : 진서 선제기). 그래서 사마의는 몸에 풍(風)이 들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이를 사양합니다. 조조가 이를 괘씸하게 여겨 자객을 보내어 확인해보고 사실이 아니면 죽이려 하였는데 사마의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어 죽음을 면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사마의는 임기응변에 대처하는 능력 또한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도 침착하게 상황을 모면하고 있지요.

다시 조조는 사마의에게 사람을 보내면서 "이번에도 오지 않고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대면 (사마의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너 편리한대로 끌고 오너라(若復盤桓 便收之)"고 하였는데 사마의는 두려워하여 그 직책을 받았고, 이후 태자인 조비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고 황문시랑(黃門侍郞)·의랑(議郞)·승상·동조·속관 등의 직책을 지냈습니다.

조조는 자신이 승상이 된 후 사마의를 문학연(文學掾)에 임명하였는데, 문학연이란 승상(丞相)의 속관(屬官)으로 학문을 담당하여 학교를 관리하고 경학(經學)의 전수(傳受)를 주관하는 관직이었지요. 이로 판단해 보면, 사마의가 학문적으로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충신 사마의**

사마의는 전략가로서도 대단한 식견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천하의 대세를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인 듯합니다.

사마의는 장로(張魯)를 토벌할 때 따라가 조조에게 말하기를 "유비는 기만된 힘으로 유장(劉璋)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촉나라 사람들은 아직까지 유비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멀리 강릉(江陵)을 치는 것이 좋습니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조조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지, 내가 이미 농서 땅을 얻었는데 또 다시 촉을 넘보겠는가(人若無足 旣得隴右 復欲得蜀)"라고 사마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정사(진서 : 선제기) 및 나관중 '삼국지' 67회]. 이렇듯 사마의는 유비 진영의 속사정을 꿰뚫고 있었던 듯합니다.

관우(關羽)가 조인(曹仁)을 포위하고 칠군(七軍)을 물에 빠뜨렸을 때 조조가 천도(遷都)를 단행하려 하자 사마의는 이를 간하여 저지합니다. 그러면서 사마의는 조조에게 손권으로 하여금 관우군(關羽軍)을 후방에서 협공하게 할 것을 진언합니다. 이 작전은 주효하여 관우는 손권에게 사로잡혀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됩니다[정사(진서 : 선제기) 및 나관중 '삼국지' 75회]. .

조조가 죽고 위문제가 막 즉위한 후의 일입니다. 손권(孫權)의 군대가 서쪽으로 침투해 오자 조야(朝野)에서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의논하였는데, 대부분 중신들이 "번성(樊城)이나 양양(襄陽) 지역은 군량미가 없어서 오나라 도적들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사('진서'를 말함)에 따르면 당시에 조인(曹仁)은 양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중신들은 조인으로 하여금 완성(宛城)으로 돌아오기를 주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쳐부수고 지금은 수습하려고 할 것입니다(즉, 관우가 다스리던 지역을 수습하기도 벅차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손권이 더 이상의 우환거리를 만들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했으나 문제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조인은 서둘러 번성의 두 성(城)들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손권은 더 이상 침공하지 않았고 두 성을 그저 주운 것이죠. 이 때문에 위문제는 이를 후회하였다고 합니다(진서 : 선제기).

이상을 보면 사마의의 성격은 치밀하고 침착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상당히 대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무제 조조(曹操)가 낙양(洛陽)에서 세상을 떠나 조야 전체가 허둥대고 있었는데, 사마의는 조조(위무제)의 초상을 주관하여 장례를 깔끔히 마무리하자 이에 조야는 숙연해졌다고 합니다(진서 : 선제기). 아마도 사마의가 오랫동안 갈고 닦은 유교의 전범(典範)들에 익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점에서 사마의가 가진 유능한 행정관으로서의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과 고래의 유교 예법(禮法)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나관중 '삼국지'는 일언반구도 없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마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조조에게 주청하여 실시한 일과 제갈량의 공격을 응징한 것을 비롯한 주변의 골치 아픈 군사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이전 강의에서 조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가 둔전제(屯田制)라고 했는데, 이 둔전제를 입안한 사람이 바로 사마의입니다(물론 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한마디도 없지요). 이 부분과 관련한 정사를 봅시다.

선제(사마의)는 자리를 옮겨 군사마(軍司馬)로 있었는데, 이 당시 선제가 위무제에게 아뢰기를 "옛날에 기자(箕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먹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두었습니다(以食爲首). 오늘날 천하는 농사를 짓지 않는 자가 무려 20여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今天下不耕者蓋二十餘萬).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가 없습니다(非經國遠籌). 아직까지 오랑캐들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스스로 지키면서 농사도 짓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雖戎甲未卷 自宜且耕且守)."라고 주청하자 위무제(조조)는 이를 허락하였다(진서 : 선제기).

저는'조조'에 대한 강의에서 둔전제의 성공이 삼국통일의 발판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성공의 발판을 놓은 사람이 바로 사마의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이 중국 천하를 통일합니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것입니다.

위무제(魏武帝 : 조조)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마의는 위문제(魏文帝 : 조비)와 위명제(魏明帝 : 조예)를 받들어 국방과 관련된 군사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합니다. 즉 제갈량(諸葛亮)이 수차례 위나라를 공격(230~234)하였으나 사마의는 이를 격퇴하였고, 관구검과 함께 동북지방의 골칫거리인 공손연을 정벌하여 위나라의 영역을 동북지방까지 확대하는 데 크게 공헌합니다. 그러나 이로써 위나라는 연나라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져 고구려까지 압박하였기 때문에 이후 위나라와 고구려의 갈등은 크게 고조되게 됩니다(그러나 나관중 '삼국지'에 고구려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상을 통해서 보면 사마의는 '삼국지'를 통틀어 문무겸전(文武兼全)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략가나 군사가로서는 가후보다는 못하고 정치가로서는 제갈량에 미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종합적으로 보아 유학 실력이나 천하를 보는 안목 등을 두루 합할 때는 사마의만한 인물을 '삼국지'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지요.

총명했던 위나라 황제인 문제(조비)와 명제(조예)가 사마의를 특히 신임한 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물론 사마의는 조비의 스승이기도 했고, 조비가 태자가 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요). 사마의의 가장 큰 강점은 무리하지 않고 신중하며, 어떤 일이든지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마의는 특별히 권력욕을 심하게 표출한 경우도 없으며 충성심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적절한 정책을 추천했습니다.

명제가 사마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정사(위서 : 명제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예(명제)는 즉시 사마의에게 낙양으로 오도록 명령하였다. 사마의가 급히 도착하여 조예의 침실로 들어가자 조예가 사마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의 병세가 심해서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그대는 어린 자식을 잘 보살펴주구려. 짐이 그대를 보았으니 이젠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소."라고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위서 : 명제기).

명제가 사마의를 얼마나 신임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명제는 아버지(또는 할아버지)같은 사마의가 돌아올 때까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예는 남은 힘을 다해 사마의가 돌아올 때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사마의가 돌아오자 안도하면서 후사를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죠.

위나라 문제ㆍ명제와 사마의의 관계는 마치 제갈량과 유선(劉禪)과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사마의는 명제의 아버지인 문제의 스승이었으며 신명을 바쳐 문제가 황제에 오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갈량이 유선에게는 엄한 양아버지였다고 하면 사마의는 부드러운 양아버지였던 차이는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제갈량은 황제인 유선을 친자식 다루듯이 가르치고 꾸짖고 했지만, 사마의는 그저 부드럽게 타이르고 책략을 제시해 준 사람입니다.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三顧草廬)한 태도와 조조가 사마의를 억지로 끌고 온 것은 분명 다르고 제갈량이 유비에게 바친 충성이 사마의가 바친 충성과 비교할 수는 없겠죠.

[그림 ④] 사마의 동상

그러나 명제가 죽고 후사가 없어 황태자로 임명된 조방(曹芳 : 제왕)이 즉위하자 조조의 일족인 조상(曹爽)과 함께 보정을 맡았지만, 사마의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사마의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권력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습니다. 결국 여러 가지 갈등이 빚어지다가 조상이 황제와 함께 능행(陵行)을 간 사이에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을 제거한 후에 전권을 장악합니다. 사마의가 죽은 지 14년 만에 그의 손자였던 사마염(司馬炎)이 진(晋 : 서진)을 건국하여 그를 고조(高祖)로 추존합니다.

***(3) 냉혹한 승부사 사마의**

우리는 앞서 사마의가 훌륭한 전략가이자 군사가,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마의의 자식들은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진(晋)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도대체 사마의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황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사마의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요?

물론 천하는 공물(公物)입니다. 천하 어디에 주인(主人)이 있겠으며, 영원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든지 다 힘이 있다고 천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면 천하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사실 역사를 보면, 왕조를 바꾸어서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마의의 손자가 건국했던 진(晋)나라가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사마의를 좀더 깊이 살펴볼까요? 사마의와 관련하여 '진서(晋書)'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시죠(진서 : 선제기).

"사마의는 마음속으로는 꺼리는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다. 시기심도 많고 임기응변에 능했다(內忌而外寬 猜忌多權變). 조조는 사마의가 '승냥이가 이리저리 살피는 관상'이라는 말을 듣고 이것을 실제로 실험하고 싶어 하였다 [(魏武)聞(帝有)狼顧相, 欲驗之]."

여기서 말하는 낭고상(狼顧相)' 이란 사마의의 얼굴이 의심 많은 이리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말이죠. 즉 이리는 의심이 많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주변을 자주 살핀다고 합니다. 상당수의 삼국지 전문가들은 위의 기록들을 들어서 사마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당태종(唐太宗 : 재위 626~649)이 직접 저술한 것이라 (이전의 자료들을 참고했더라도) 당태종 개인적인 관심이나 의견이 반영된 것일 수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위의 내용을 사실로 본다면, 사마의와 같이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사람들은 함부로 쿠데타를 일으킨다거나 역모를 도모할 만큼 모험적이지 않죠. 제가 보기에 위나라 조정에서 사마의를 지나치게 핍박하지 않고, 사마의에게 공신대접을 확실히 해주고 정부에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더라면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마의는 그저 위나라의 이름 높은 삼공의 가문으로 자자손손 영화롭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또 이것이 사마의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면 이후 한족(漢族)에게 불행의 역사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曹操)는 사마의가 웅지(雄志)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사마의에 대해서 감시하기도 했습니다(魏武帝察帝有雄豪志 : 진서, 선제기). 이를 보면 조조는 사마의의 능력을 매우 아끼면서도 항상 속으로는 두려워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조에게 사마의가 더욱 무서웠던 것은 사마의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철저히 비밀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마의는 대단히 신중하여 자신의 속내를 남에게 보이는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 합니다.

정사(진서)에 조조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세 마리의 말이 하나의 여물통에다 머리를 처박고서 여물을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三馬同食一槽). 꿈자리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조조는 아들인 조비를 불러서 "아들아, 사마의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신하[人臣]가 될 사람은 아닌 듯하다. 반드시 너의 일에 간섭하게 될 듯하다.(司馬懿非人臣 必預汝之家事 : 진서, 선제기)"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조조는 사마의를 경계하라고 아들인 조비(曹丕)에게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에 대한 조비의 신임은 매우 깊고 두터웠습니다. 영특했던 조비가 사마의의 모습 속에서 실오라기만한 역모(逆謀)의 싹이 있었다면 놓쳤을 리가 없는데,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사마의의 모습은 한마디로 충신 그 자체였다는 얘기지요.

사실 조조는 전 생애를 걸쳐서 목숨을 걸고서 대업을 이룩한 사람입니다. 조조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예지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항상 목숨을 담보로 한 상태에서 세상을 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종류의 육감(六感)같은 것이겠죠. 실제로 비슷한 환경에 사는 무사(武士)들은 특정한 지점에 가면 살기(殺氣)를 몸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아마도 같은 종류의 감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위나라의 문제나 명제가 사마의를 깊이 신뢰한 이유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마의는 한 마디로 탁월한 '해결사'였기 때문입니다. 가후(賈詡)의 뒤를 이어 사실상 대부분의 정책에 사마의는 관여합니다. 당시 위나라의 골칫거리는 크게는 ① 촉병의 성가신 공격, ② 요동문제 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마의는 이 두 가지의 현안을 해결합니다. 촉병의 공격은 별 무리 없이 격퇴해내고 요동은 관구검과 함께 정벌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근심을 덜어준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 황제들의 신임이 워낙 두터웠던 관계로 사마의는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사마의는 개인적인 야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마의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림 ⑤] 위나라 문제 조비

만약 사마의가 역심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사마의를 지지했겠습니까? 사마의는 조상이 황제와 함께 능행을 간 사이에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사마의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사마의를 지지했을 리가 있나요? 그 만큼 사마의에 대한 조야의 신임과 명망이 높았다는 증거이지요. 따라서 사마의만 떼어 놓고서 본다면 크게 잘못을 지적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명제(조예)가 죽고서 발생합니다. 명제가 죽자 권력은 조상(曹爽 : ?-249)이 장악합니다. 조상은 조진(曹眞 : ?-231)의 아들입니다. 조진은 조조의 조카로 그 업적이 대단히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의 4차 북벌 당시에 패배하여 화병이 들자 제갈량이 조진을 조롱하는 편지를 보내니 조진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정사에 따르면 조진은 사재(私財)를 털어서 병사들의 사기(士氣)를 올리는 등 위나라의 가장 훌륭한 군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진이 죽고 명제도 죽자 위나라의 정권은 조상과 사마의가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황실의 종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중앙으로, 야전으로 종횡무진 온갖 시련을 거친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시기에 조상이 사마의를 내쫓으려 하지 않았다면 이후 위나라의 역사도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사마의는 "복응유교(服膺儒敎)"라는 말에서 보듯이 유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어서 특별히 역모를 도모할만한 사람으로 보긴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상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력의 중앙부에 진입하였으나 천하를 경영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조상은 권력을 장악하자 사마의를 제거할 궁리를 합니다. 정밀(丁謐)의 계략으로 사마의를 태부에 임명합니다. 이 태부는 매우 영예로운 자리이기는 하지만 실권은 없는 자리였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동생들이나 친족들을 요직에 앉힙니다.

친족들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같으므로 정권의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족이 로버트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으로 당시 미국 법무장관)처럼 탁월하다면야 몰라도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국을 안정시킨다거나 정부의 관리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이너스가 될 요인이 많지요. 특히 조상은 명제가 무능하다고 쫓아낸 인물들까지 단순히 자기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중용(重用)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동안 사마의는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248년 겨울 조상의 심복 이승이 형주자사로 부임하러 가면서 정탐하기 위해 방문하자, 사마의는 질병이 심한 척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위서 : 조상전). 이 대목은 나관중 '삼국지'에 극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나관중 '삼국지' 106회). 이 때가 쿠데타 직전이었습니다. 정사의 내용도 거의 일치합니다.

결국 10여 년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숨을 죽이고 있던 사마의는 조상이 천자를 모시고 고평릉(高平陵)에 참배간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 때가 249년입니다. 즉 조상형제 모두가 황제와 함께 수도를 비운 사이에 사마의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격적으로 무기고를 탈취하고 낙수의 부교(浮橋)에 주둔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것이지요. 이 당시의 사정을 정사를 통해서 직접 살펴봅시다.

"선제(宣帝 : 사마의)가 조상(曹爽)을 주살할 것을 계획(249)하면서 경제(景帝 : 사마사)와 단둘이 논의하였는데, 사마사는 이 사실을 문제(文帝 : 사마소)에게는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추진하였다. 사마소는 이 쿠데타 계획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출발할 때가 되자 듣게 되었다. 사마의가 사마사에게 사람을 보내니 사마사는 평상시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고 있었지만, 사마소는 불안하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사마사는 새벽에 사마문(司馬門)에 군사를 모아 성을 안팎으로 정돈하고 진정시켜 매우 정연하게 군진을 구성하였다. 사마의는 '아들아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했다. 사마사는 원래 비밀리에 죽음을 각오한 장사 3천 명 정도를 기르고 있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사태가 발생하면 즉각 모였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몰랐다고 한다(진서 : 경제기)."

[그림 ⑥] 사마의의 두 아들. 왼쪽부터 사마소, 사마사(드라마의 한 장면)

어떻습니까? 사마의ㆍ사마소 부자의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긴박했는지가 짐작됩니다. 사마의ㆍ사마소의 쿠데타를 어떻게 보는가는 이것을 보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제가 보기엔 사마의는 일단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체적인 기록으로 보면, 조상은 사마의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결정적인 증거를 잡으려고 한 듯합니다. 물론 조상이 사마의를 굳이 죽이려 했다면 사마의를 10년 이상 살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도 없이 천하의 신망의 두터운 사람을 죽였을 경우 조상의 정권도 위태롭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감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상과 사마의가 처음부터 이 같은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한 듯하지는 않습니다. 초기의 조상과 사마의를 관계를 정사로 한번 보시죠.

"처음에 조상은 사마의가 나이도 많고 덕망도 두터웠으므로 사마의를 받들었으며 어떤 일이든지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안 등이 등용되면서 이들은 모두 조상을 추대하였고, 중요한 권위들을 (사마의에게) 양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당시 하안·동양·정밀 등은 상서가 되었고, 하안은 관리를 천거하는 일을 맡아 보았고, 이승은 하남윤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상의 정권은 여러 가지 정치적 사안들을 사마의에게 자문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위서 : 조상전)"

즉 조상과 사마의는 관계는 처음에는 상당히 공손하고 유화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의 주변으로 권력을 쫓는 무리들이 몰리자 조상은 사마의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죠. 그렇지만 이것 또한 역사의 법칙입니다. 세상에 권력을 두고 원만한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경우를 보기 힘듭니다. 이상하게도 환관들은 연합정권을 구성할 수 있는 데 반하여(제 2강의, 윈스턴 처칠의 보모 참고), 일반 권력자들은 권력을 나눠 가지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사마의가 10여년을 숨을 죽이고 살아간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의는 위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공신이자 영웅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조상은 너무 고립시켜서 오히려 쿠데타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영특하기로 이름 높은 조비(曹丕)가 사마의를 깊이 신뢰한 것도 사마의가 역심(逆心)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마의는 외형적으로 볼 때 완벽한 충신이었고 실제로 사마의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사마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마의 개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미화(美化)에 도우미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사마의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무를 겸비한 '삼국지'의 대표적인 인물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마의는 유능한 행정가요, 정치가였으며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천하의 대세를 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훌륭한 군지휘관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 후손들이 왕조를 찬탈한 문제는 정치적 논쟁거리로 남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독자 여러분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