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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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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3>

유선, 중국판 광해군 만들기

***들어가는 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을 들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한 수많은 일을 자행했으므로 폭군으로 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광해군은 석연치 못합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수습하고 전후처리에 심혈을 기울인 현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쿠데타로 실각한 군주였습니다. [그림①]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육리에 있는 광해군의 묘소입니다.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림①]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해군 묘소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지요.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광해군은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국난 극복에 중심역할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되고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합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유영경(柳永慶 : 소북파)이 이를 감추었다가 음모가 밝혀져 광해군은 유영경을 사사(賜死)합니다.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인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1613년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 역모 관련 사건이 발생하자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 안치하였다가 이듬해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습니다(참고로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전후 복구에 최선을 다합니다. 광해군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경덕궁(慶德宮:慶熙宮)·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이 같은 대내정책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를 도왔으나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등거리 외교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 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합니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동안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조를 옹립하자(인조반정)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ㆍ제주도 등지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때 권력을 장악한 서인(西人)들은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광해군을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 서인들이 내세운 논리라는 것이 ①의리와 명분에 위배되는 중립 외교를 한다는 것과 ②살제폐모(殺弟廢母)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군주를 폐하려면 살아남을 군주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인조반정 이후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서인(西人)들의 무모한 정책들로 국토는 외침(外侵)을 받아 초토화되고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왕조 교체가 안 된 것이 다행입니다.

광해군의 경우를 통해 한 사람의 현군(賢君)이 어떻게 패륜아에 폭군(暴君)이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광해군은 외교에 탁월했으며 대내외적으로 신속하고 과단성 있게 전후처리를 한 현군이었습니다.

***(1) 낙양(洛陽)에서의 연회**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나관중 '삼국지'에서 가장 비하되고 과소평가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유선(劉禪 : 207~271)을 들 수 있습니다. 유선은 중국판 광해군 만들기의 대표적인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물론 유선의 업적이 광해군에 미칠 수는 없겠지요).

나관중 '삼국지'에는 촉 황제 유선에 대하여 환관 황호(黃皓)만 총애하고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고 위나라에 항복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요. 그러면서도 줏대도 없는 한심한 군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주요한 부분들을 살펴봅시다.

"한편 성도에 있는 후주는 내시 황호의 말만 믿고 다시 주색에 빠져 조정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 아첨하는 소인배들만 나날이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당시 우장군 염우(閻宇)는 별 공적이 없으면서 내시 황호에게 아첨하여 높은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었는데, 황호는 '강유는 여러 번 나가 싸웠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염우에게 싸우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여 후주는 강유를 송환하였다. 기산에 있던 강유는 명을 받들어 성도로 들어갔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후주가 조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 강유가 이상하여 극정에게 물으니 극정이 말하기를 '내시 황호의 농간'이라고 말해주었다(115회)."

그리고 262년 유선은 내시 황호와 함께 매일 궁중에서 술과 여자에게 둘러싸여 연회를 즐기고 있다가 강유의 표문을 받자 유선은 황호의 말에 따라 엉뚱하게도 신이 내린 점쟁이 노파를 불러서 나라의 장래를 물어봅니다. 그러자 이 노파는 갑자기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수십 번을 뛰더니 상 주위를 맴돕니다. 그러다가 유선에게 "수년 후에 위나라가 다 폐하의 땅이 된다."고 하자 유선은 이 말만 철석같이 믿고 강유의 표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궁중에서 환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강유가 여러 차례 표문을 올렸으나 그 때마다 황호가 가로채서 대사를 그르치게 하였다고 합니다(116회).

위나라 대군이 성도를 포위하자 초주 등의 중신들이 항복을 권유합니다. 그러자 유선의 다섯째 아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이 분연히 나서서 "강유가 검각에 있어 구원하러 올 것이니 안과 밖에서 협공을 하면 위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하니 유선은 엉뚱하게도 유심을 "어린 놈이 어찌 시대의 흐름을 안단 말이냐"라고 꾸짖자 유심은 목을 놓아 울었고 유선은 유심을 궁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리고 난 뒤 성도의 성 위에는 항복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낍니다. 유심은 처자를 죽이고 유비의 사당에 가서 통곡한 다음 자결하고 맙니다(118회).

나관중 '삼국지'에서 유선에 대한 묘사가 가장 극적인 부분은 촉이 멸망한 이후 나타납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유선이 얼마나 못난 군주인가를 말하기 위해 다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마소(司馬昭)는 유선을 맞아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촉나라의 음악과 춤을 보여주었는데, 항복한 촉의 관리들은 모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유선만은 기뻐하면서 즐겼다. 사마소가 가충(賈充)에게 '사람이 어찌 저리 바보 같은가! 저러니 제갈량이 있어도 힘들었을 텐데 강유인들 할 도리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다시 사마소가 '촉 땅이 생각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유선은 '이렇게 즐거운데 촉 땅이 생각날 리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잠시 후 극정(郤正)이 유선을 뒤따라가 '폐하께서는 어찌 촉 땅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다음에 묻거든 눈물을 흘리시며 항상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사마소는 반드시 폐하를 촉 땅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 극정이 시킨 대로 더듬거리며 말하자 사마소가 짐작하여 말하기를 '왜 극정이 일러준 대로 하십니까?' 하니 유선은 화들짝 놀라며 '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라고 하였다(나관중 '삼국지' 119회)."

이 과정에서 유선은 극정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안 나와 우물쭈물하자 사마소와 위나라의 문무백관들이 껄껄 웃고 말았다는 것이죠. 코미디가 따로 없군요. 저런 군주가 40년을 통치했다니 말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유선의 허물들은 ①내시 황호의 농간으로 주색에 빠져 국사를 망쳤다는 점, ②몸을 버려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나라를 들어 위나라에 항복했다는 점, ③사람됨이 변변치 못하고 모자라 위나라에 가서도 촉과 선조들의 망신을 주었다는 점 등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석들은 과연 타당한 분석들일까요? 나관중 '삼국지'가 주장하는 것들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들일까요?

정사에 따르면 제갈량이 두미(杜微)에게 보낸 편지에서 "폐하(유선)께서는 올해로 겨우 18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천성적으로 인자하시고 총명하셔서 덕이 있는 사람을 아끼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공손히 대하십니다[朝廷今年始十八 天姿仁敏 愛德下士(촉서 : 두미전)]." 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갈량의 이 말은 두미를 조정에 참여시키기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과연 유선이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역사 속으로' 가봅시다.

***(2) 촉 황제 유선**

지난 강의들을 통하여 저는 나관중 '삼국지'의 인물 평가들의 기준이 바로 '촉한공정(蜀漢工程)'의 결과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제2강의~제5강의). 제가 보기에 유선에 대한 평가가 나빠진 것은 한족(漢族)의 부흥과 새로운 도약을 추진하던 명나라 정부의 입장에서는 한족의 정통성을 가진 촉이 끝까지 투쟁하여 옥쇄(玉碎 : 명예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침)라도 하지 않고 투항했기 때문입니다.

정사에서도 유선에 대해서는 곱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진수는 유선을 평하여 "유선은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 미혹되었을 때는 우매한 군주였다. 이것은 마치 흰색 실이 일정한 색이 없이 물감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같다(素糸無常 唯所染之)."고 하고 있습니다(촉서 : 후주전).

[그림②] 촉황제 유선

진수가 촉 출신이므로 촉의 사정에 밝았으니, 이 판단은 사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단 당시의 사정을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당시 위나라의 권력자는 사마소(司馬昭)였습니다. 사마소는 사실상 전권을 장악한 사람으로 황제가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명분이 없었지요. 그래서 사마소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촉이나 오나라 둘 가운데 하나를 정벌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정벌에 따르는 명분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다른 강의에서 지적하겠지만 정사는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손호(孫皓)에 대해서도 매우 가혹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보건대 이 부분은 다소 과장되거나 왜곡의 가능성이 있습니다(왜냐하면 제가 판단하건대 손호는 친정체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한 군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역사서의 경우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즉 하나의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그 마지막 군주의 악행을 부각시켜 그 왕조 교체의 큰 명분으로 삼는 것이죠.

그런데 263년 위나라가 촉나라를 정벌할 때 위나라 황제의 조서를 보시죠.

"촉은 작은 나라로 영토는 협소하고 백성의 수는 적은데도 강유(姜維)는 군대를 혹사하고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작년에 강유는 전쟁에서 진 이후 답중에서 둔전을 하며 수많은 강인(羌人)을 핍박하고 끊임없이 일을 시켜 백성들은 명령을 견디지 못하였다(위서 : 삼소제기)."

이것이 위나라가 촉을 정벌하는 이유라는 것이지요. 즉 강유는 무모하게 군대를 동원하여 백성을 괴롭히니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유선에 대해서 일체 침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즉 유선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말은 없고 강유가 백성을 핍박한다고만 하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강유에 의한 북벌 전쟁은 지속적으로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유선이 강유를 멀리한 이유도 아마도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쟁은 크게 정치전(政治戰)과 군사전(軍事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치전이란 이데올로기, 즉 명분의 싸움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치전의 성격이 분명하면 할수록 군사전에서 유리하게 전개됩니다(정치전의 승리가 군사전의 승리로 귀결된 대표적인 전쟁은 베트남 전쟁입니다). 즉 명분 없는 싸움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공할 때에는 반드시 명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촉의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림③] 정치전의 승리가 군사전의 승리를 가져온 베트남 전쟁(영화 '지옥의 묵시록'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주색에 빠져 실정을 거듭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다"는 말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나관중 '삼국지'에서 말하는 식으로 유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르쳤다는 말은 지나친 말인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알아 온 사실들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이 점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유선의 허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내시 황호의 농간으로 주색에 빠져 국사를 망쳤다는 점을 봅시다. 당시 촉에는 제갈량ㆍ장완ㆍ비의ㆍ동윤을 일러 사영(四英 : 네 명의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제갈량이 죽자 장완(蔣琬 : ?-246)은 승상(丞相)이 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습니다. 장완을 이어서 비의(費禕 : ?-253)가 승상이 되었습니다. 동윤(董允 : ?-246)은 대장군 비의(費禕)의 보좌관을 맡아서 촉의 조정을 이끌고 전쟁 후유증을 수습하였습니다.

비의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의는 ①불화가 심했던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을 조정하였으며, ②승상이 된 후에는 대규모 출병을 요구하는 강유를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국력의 약화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253년 비의는 위나라에서 투항해 온 곽순(郭循)의 칼에 암살(暗殺) 당합니다. 비의(費禕)의 죽음은 촉 불행의 시작이었지요.

이들 사영의 역할은 253년까지 지속됩니다. 이들은 청렴하고 강직하며 조정에서는 항상 엄정함을 견지하였는데 이것이 촉한(蜀漢)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지요. 즉 당시 촉나라의 조정은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촉나라의 건강성은 유지되었지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결국 유선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뛰어나도 황제가 모르고 안 쓰거나 일부러 멀리한다면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유선이 만약 국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하게 했다면 결국 250년대 중반부터 촉이 멸망하던 263년까지 7~8년 사이가 될 것입니다. 유선이 즉위한 해가 223년이므로 이 때 유선은 50대에 들어섰고 제위에 오른 지 이미 30년이 넘어서 정치에 대한 염증이 날 나이가 되기도 했겠지요. 그리고 강유의 무모한 북벌정책에 환멸이 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색에 빠지고 황호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해도 그 기간은 불과 5년도 채 안됩니다. 그런데 정사를 보면 비의가 죽고 난 뒤 황호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사실인 듯한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잘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습니다. 황호에 대한 정사(촉서)의 기록들을 보시지요.

①"강유가 몇 해 동안 전쟁을 하면서도 공적이 없자, 황호 등이 염우(閻宇)를 세우고자 하였다.(강유전)"

②"황호는 기민하고 아첨을 잘하였으며, 동윤은 바른 안색으로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황호를 꾸짖어 감히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동윤전)."

③"262년 환관 황호가 궁궐 안에서 권력을 휘두르자 궁중의 큰나무가 이유도 없이 부러졌다(두경전)."

④"극정은 황호와 함께 30여년을 보냈는데, 황호의 사랑을 받은 적도 없지만 미움 또한 받지 않았다(극정전)."

이 기록만으로는 황호나 유선이 어떤 큰 잘못을 했는지 찾아내기 힘듭니다. 황호의 가장 큰 잘못으로 보이는 부분은 촉이 멸망하던 해(263) 강유가 양안과 음평에 군대를 보내어 위군이 침공에 대비하라고 하자 황호는 귀신이나 미신의 말을 신용하고 위나라 군대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강유전). 이 말을 유선이 받아들인 것은 군주로서는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강유의 정책에 대한 원성도 높아서 그를 저지할 하나의 책략으로 유선은 무속인의 말을 이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선은 끝없이 북벌을 추진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강유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유와 같은 강경파와 황호와 같은 온건파들의 갈등으로 촉의 주력군인 강유가 성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답중으로 갈 정도로 국내 정치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던 점도 유선의 말년 정치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강유는 고지식하고 지나친 소명(召命) 의식에 젖어서 끊임없이 북벌정책을 강경하게 고수해왔는데, 이로 인하여 경제 사정이 점점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자 유선은 즉각 대규모 출병을 중단시킵니다. 이것은 그 간의 북별 정책이 얼마나 경제를 핍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유선은 일정한 정도로 강유에게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황호는 직업적 특성상 눈치가 빠르고 유선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유선이 일종의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고 싶은 속마음을 읽고서 강유를 고립시키려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말년의 유선이 단지 황호 등의 온건파를 이용하여 강경파였던 강유를 통제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비의가 세상을 떠난 후 강유를 통제할만한 강단을 지닌 사람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선택된 황호는 뜻밖으로 시류 영합적이고 유연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이 문제는 황호와 강유의 성격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더욱 국정을 악화시킵니다. 강유와 황호는 물과 불처럼 어울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황호는 강유에 의해 끊임없이 실각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강유는 끊임없이 황호에 의해 자신의 프로젝트가 방해를 받고 있었지요. 결국 이 과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유선의 책임이 되겠지요. 물론 황호라는 인물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촉을 정벌한 등애는 황호가 교활하고 음험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처형하려고 했으나, 황호는 등애의 측근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사면되었다고 합니다(동윤전). 이 점에서 보면 황호는 능란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지옥에 데려 놓아도 살아올 사람입니다.

[그림④] 제갈량과 유선(중국 우표)

나관중 '삼국지'의 입장에서 보면 황호의 가장 큰 허물은 제갈량의 계승자인 강유를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괴롭힌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본대로 당시 촉나라 조정은 강유의 입장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두둔할 상황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비의가 강유의 행동을 극도로 제한 한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강유의 입을 빌어 "황호를 지금 죽이지 않으면 머지않아 화를 면치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선은 계속 황호를 두둔하자 극정이 강유에게 "장군에게 화가 미칠 터이니 농서 지방의 답중(畓中)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다."라고 충고합니다. 즉 강유가 답중으로 간 것은 순전히 황호가 강유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강유가 답중으로 가는 이유가 토지가 비옥하여 과거에 제갈량이 둔전을 하는 것과 비슷한데다, 농우의 여러 고을을 장악할 수 있고 위군으로부터 한중을 지키고 외곽에서 병권을 쥐고 있으면 조정의 사람들이 역모를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나관중 '삼국지' 115회). 그런데 이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제갈량이 둔전을 한 곳은 위나라 대군이 촉으로 들어오는 관문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즉 제갈량은 한편으로는 주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나라 군대가 촉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전략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유가 주둔했던 지역은 오장원이나 한중과는 거리가 먼 지역입니다(지도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지도를 보시죠.

[그림⑤] 위군의 촉평정로(빨간색)와 강유군(답중)의 위치

당시 강유는 전략적 요충지는 한중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답중(畓中)을 근거지로 해서 유목민들을 포섭하여 전쟁에 나서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촉의 주력군이 분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전격적인 침공에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서울 방면으로 적의 군대가 내려오는데 강유는 강릉 쪽으로 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강유가 답중에 주둔한 이유는 나관중 '삼국지'에서 말하는 것이 정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262년 10월 강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양(洮陽)ㆍ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에게 대패하여 답중으로 돌아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촉서 강유전, 위서 삼소제기). 나관중 '삼국지'에서 말하는 식으로 극정으로부터 "황호가 노리고 있으니 몸을 피하라"는 충고를 받고 움직인 것은 아니지요. 262년 일단 답중에 주둔한 강유가 성도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도에서는 황호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강유 자신의 지론이 강족과 호족을 이용하여 합동작전으로 위나라를 격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때가 위나라의 대대적이고 전격적인 침공이 있기 바로 6개월 전이었다는 것이죠. 263년 5월 위나라는 대군을 보내 전격적으로 촉을 공격, 그해 11월 성도를 함락합니다(위서 삼소제기, 촉서 후주전). 군대 이동에 걸리는 기간을 3달 정도를 잡는다면 실제 전투는 두세 달도 없었을 것입니다. 즉 촉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못 해보고 항복하였습니다. 정사를 보면, 등애가 답중으로 침공해 들어간 후에 비로소 요화(촉장)를 답중으로 보내어 강유를 구원하게 했는데, 강유는 등애(위)에게 대파되어 다시 답중으로 돌아가 주둔합니다(촉서 : 강유전). 결국 촉의 주력 강유의 군대는 뒷북만 치다가 끝이 난 셈이 되었습니다.

[그림⑥] 촉의 충신 강유의 모습 (드라마의 한 장면)

제가 보기에 촉 멸망은 피할 수도 없는 시대적인 대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일조를 한 것은 황호의 농간이 아니라 오히려 강유의 전략적 실패입니다. 답중은 산세도 험한 오지(奧地)이기 때문에 군대 이동도 매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위황제의 촉정벌 조서에서도 "촉이 의지하는 것은 강유뿐인데, 그가 본거지에서 멀리 떠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위서 : 삼소제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강유는 자기의 출신이 천수(天水) 지방이었으므로 서역지방의 유목민들의 풍속에 익숙하여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위나라 정벌의 한 날개로 삼으려 했지만(촉서 : 강유전) 그것은 오히려 촉 멸망을 촉진한 것이지요.

[그림⑦] 답중의 풍경들

둘째 유선이 몸을 버려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위나라에 항복한 점을 봅시다. 패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국민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현명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 현명합니까? 엉터리 군주일수록 자기를 위해 모든 백성들이 희생되기를 강요합니다.

촉나라의 국력은 위나라의 10%~20%에 불과하고 촉나라가 위나라를 이길 가능성은 없는 상태에서는 수도가 포위되었는데도 결사 항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旣得權)이나 욕망을 보전하는데 불과합니다. 군주는 제일 먼저 천하의 안정과 백성의 안위를 근심해야 는 일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유선의 판단은 분명 옳았습니다. 물론 이민족의 침입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겠지요. 그러나 이 전쟁은 한족(漢族)들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다가 패배했으면 깨끗이 물러나면 될 일이지 무슨 명분으로 끝까지, 왜 항전한다는 것입니까?

셋째, 사람됨이 변변치 못하고 모자라 위나라에 가서도 촉과 선조들을 망신만 주고 안락공으로 봉해져서 평생을 안락하게 살았다는 점을 봅시다. 즉 사마소가 연회를 열고 촉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유선은 태연히 촉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하다가 극정이 시킨 대로 앵무새처럼 말하여 코미디가 되어버린 사건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유선의 처지가 되어서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사건을 한번 보세요. 유선의 행동이 이상합니까?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해야 훌륭한 군주일까요?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한 것은 263년 11월 겨울이었고, 위나라 수도인 낙양으로 간 것은 264년 3월입니다. 그런데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은 2월이었고, 이내 토벌되고 맙니다. 유선은 촉 회복 운동이 실패하자마자 바로 낙양에 압송된 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촉을 생각하면서 울고불고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용납이 되겠습니까? 아마 유선이 그렇게 행동했다면 즉각 독살(毒殺)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군주가 독살되는 것은 국민들에게는 더욱 더 큰 절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정사에는 없는 기록입니다. 유선이 다만 항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 놓은 대목입니다. 먼저 이 당시 상황을 봐야 니다. 촉은 항복한 후 종회(위군사령관)가 강유(촉의 대장군)의 꼬임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켜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촉이 멸망할 당시 촉의 대장군 강유는 위나라 총사령관 종회를 유혹해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의 대장군 등애를 죽이고 위나라에 반기(叛旗)를 들게 하였는데, 이 역모 사건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위나라 군대는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국가적 비상사태에 처한 위나라 조정은 가충을 보내어 이를 수습하고 방을 붙혀 백성들을 위무합니다. 가충은 위관으로 하여금 성도(成都)의 질서를 잡도록 하고 촉의 폐주(廢主) 유선을 데리고 낙양으로 떠났는데 이 때 유선을 수행하여 함께 낙양으로 간 사람은 상서령(尙書令) 번건(樊建)과 시중(侍中) 장소(張紹) 광록대부(光祿大夫) 초주(譙周) 비서랑(秘書郞) 극정(郤正) 등이었습니다.

이 당시 상황은 정사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264년 정월 종회가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유선은 낙양으로 가게 되었다(압송되었다는 의미). 촉의 안팎이 매우 혼란스러웠으므로 유선을 보호하고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오직 극정과 전중독(殿中督), 장통(張通) 만이 처자를 버리고 단신으로 따라왔다. 극정은 유선의 보좌에 충실하여 유선은 이를 감격해 하며 '내가 그대를 너무 늦게 알았구료'라고 하면서 후회했다(촉서 : 극정전)."

어떤가요? 실제 상황과 나관중 '삼국지'와는 상황이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당시 유선은 사실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위나라 장수 종회가 강유의 꼬임에 빠져 촉 부흥운동을 하는 상황이고 그 구심점에는 유선이 있기 때문이죠. 차라리 항복만 하고 가만히 낙양으로 갔다면 환대를 받았겠지만 이 상황에서 환대를 받기란 쉽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몇 명의 신하만 대동하고 낙양으로 압송되는 상황이었지요.

'낙양의 연회'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은 아닙니다만 이와 유사한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요. 한 나라의 황제를 지낸 사람이 왔으니 그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 상황에서 사마소는 가급적이면 유선으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연일 잔치를 베풀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유선도 일체의 정치적 발언이 없이 눈치만 보고 지냈을 것입니다. 당시 유선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촉의 부흥운동의 구심점에는 유선이 있기 때문에 유선이 이 책임에서 벗어나 있기 어렵죠. 유선은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나관중 '삼국지'와 같은 연회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유선이 "촉 땅의 일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면 사마소는 나관중 '삼국지'처럼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바보 같은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과연 유비(劉備)의 아들이다. 슬픈 표정이 전혀 없는 기색이군. 과거 무황제(조조)가 유비를 떠보기 위해 같이 술을 마시면서 용의 이야기를 했을 때 천둥이 치자 유비가 깜짝 놀란 흉내를 내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더니 이 사람은 정말 표정이 없군. 권좌를 무려 40여년 이상을 누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3) 촉한공정의 또 다른 피해자 - 중국판 광해군 만들기**

일반적으로 촉의 2세 황제 유선에 대해 지적되는 허물은 사람이 우둔하여 환관 황호(黃晧)를 총애하여 주색에 빠져 조정의 정치가 부패해졌으며, 위나라의 대장 등애(鄧艾)가 성도로 진격해왔을 때 결사항전을 하지 않고 위나라에 항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군주를 평가해도 되는 문제일까요 ?

우리가 황제가 우둔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오직 결과로 말해야 합니다. 아무리 황제가 총명하다고 해도 정치가 엉망이 되고 부정부패가 횡행하면 황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황제가 아무리 우둔해도 나라의 정변도 없고 대내외적으로 국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힘든 전란을 잘 수행했으면 그는 현군인 것이지요. 백제의 경우에도 의자왕은 실제로는 현군이었지만 나라를 망하게 했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3천 궁녀"니 뭐니 해서 오랫동안 매도당했습니다. 의자왕이 현명한 군주였다는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의자왕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무력 앞에 굴복한 것뿐이지요.

이제 유선을 봅시다. 유선은 무려 41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어도 촉에는 정변(政變)이 없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유선은 대체로 보면 진(晋)나라의 혜제(惠帝)와 유사한 성격으로 묘사되어있는데, 진나라 혜제 때는 대부분의 친족들이 그를 무시하고 황제 자리를 노렸던 관계로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명했던 그의 아내 가남풍이 이를 막으려다가 발발한 것이 바로 '팔왕(八王)의 난(亂)'이었습니다(이 부분도 다른 강의에서 다시 다루지요). 이 팔왕의 난은 중국을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몰고 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촉나라는 아무런 정변 한번 없이 유선이 41년을 통치합니다. 그 흔한 역모사건조차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촉의 정치 상황은 수많은 정쟁(政爭)과 황위 찬탈이 횡행했던 위나라 조정이나 오나라 조정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단순히 촉나라 사람들이 착해서일까요? 오히려 촉은 외부의 세력, 즉 중원의 세력 일부가 이주해서 건국한 나라이기 때문에 토착민과의 갈등이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눈에 띄는 사회적 갈등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 이 모든 일들은 유선에게 정세의 흐름을 읽는 노련함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유선 정치의 성공을 제갈량의 덕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입니다. 그러나 유선은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 무려 30여년을 통치하였습니다. 이것을 대부분 '삼국지'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식으로 제갈량 덕분이라고만 말한다면 그것은 제갈량에 대한 병적인 애정과 집착일 뿐입니다.

유선의 '홀로서기'가 성공한 것은 유선 자신의 능력이요, 타고난 영명함 때문입니다. 유독 촉나라의 고관들이나 서민들의 인품이 고상하여 황제를 존경하여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지요. 그리고 유선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주색잡기에 빠져있고 환관 황호(黃皓)가 정권을 좌우하였다고 하지만, 제갈량이나 강유가 유선의 재가없이 군대를 움직인 적은 없으며 군주들 가운데 유선만이 주색잡기에 몰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정사에 그것을 입증할 만한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유선 치하의 촉에는 이름난 인재들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제갈량을 비롯, 장완· 비의·동윤 등이 그들이었고 이를 일컬어 사상(四相), 또는 사영(四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도덕적이고 청렴하였으며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체 중국 역사상 유선만큼 현명한 신하와 재상들을 거느린 사람도 없었을 것인데, 그것이 우둔한 황제 아래서도 가능한 일일까요? 군주는 자신이 모든 일의 전문가일수 없으니 인재를 요소요소에만 잘 쓰면 성군(聖君)이요, 현군(賢君)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총명하고 도덕적이라 해도 자기의 의지대로만 다하려 하면 신(新)나라 왕망(王莽)같이 역사의 오명을 남기게 될 뿐입니다.

춘추시대의 다섯 명의 위대한 군주 가운데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천하의 주인[패자(覇者)]이 된 이유는 환공이 사람 보기와 쓰기를 제대로 한 때문이었습니다. 간신들이 제나라의 명재상인 관중을 모함하여 '제나라 사람들은 관중만 알고 환공을 모른다'라고 하자 환공은 "사람들의 말이 옳다. 나는 관중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응수하였다고 합니다. 유선은 바로 이 환공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즉 '진서(晋書)'에는 "유선은 제나라 환공 다음가는 현명한 군주(이밀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은(王隱)의 '촉기(蜀記)'에서도 "유선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왕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⑧] 촉의 수도 성도의 현재 모습들

그리고 나관중 '삼국지' 식으로 과연 유선이 안락한 여생을 보냈을까요? 사마소는 촉 황제 유선을 크게 환대하여 안락공(安樂公)에 봉하고 주택ㆍ일상용품ㆍ비단 1만 필ㆍ노비 1백 명을 하사하였다고 하는데, 한나라의 황제를 지낸 사람에게 노비가 1백 명이라면 환대라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물론 비단 1만 필이나 노비 1백 명이 일반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겠지만, 황제를 지낸 사람에게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사마소가 유선을 진정으로 환대했다면 그를 촉왕(蜀王)으로 지위를 격하시켜 촉을 그대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맞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사마소가 유선을 위나라의 수도로 압송한 것은 유선이라는 사람이 우둔한 사람이 아니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을 통해서 보면 유선은 자질이 영명한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대세를 보는 눈이 있었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현군이었다는 것이지요. 나관중 '삼국지'에서 말하는 식으로 얼간이 같은 바보 군주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유선 또한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촉한공정(제2강의~제5강의 참조)'의 희생양이었던 셈입니다. 이 강의를 통하여 군주의 참모습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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