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2>

나 홀로 전쟁

***들어가는 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보면, 전쟁 장면이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전투에 임한 병사들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보여주지요.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고 화살은 사정없이 내리꽂힙니다.

논산에서 신병 훈련을 받을 때, M16 소총 소리가 제게는 마치 대포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사회에서 만나면 공연히 겁이 납니다. 특히 과거의 전쟁은 칼과 창으로 하니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장수들이란 마치 인간백정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전쟁을 한다고 하면서 뛰어난 장수들이 창과 칼을 들고 일대일의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대부분입니다. 대결을 벌이는 장수가 칼에 맞아 죽으면 적의 대오는 바로 흩어지면서 전투가 끝이 나고 맙니다.

글쎄요.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그 많은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싸움만 잘 하는 장수만 한두 명 확보하면 될 일이죠.

***(1) 여포가 강한 것은 여포 개인의 무예 때문일까요?**

나관중 '삼국지'에 보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제후 연합군에서 화웅(華雄)이 동맹군의 여러 장수들을 죽이자 관우가 나섭니다. 관우가 "만일 나가서 이기지 못하면 제 목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자 조조는 관우에게 일단 따뜻한 술이라도 한잔 하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관우는 "제가 곧 돌아올 테니 그 때 마시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청룡도를 손에 들고 날 듯이 말에 올라 술도 식기 전에 화웅의 머리를 칼끝에 메달아 옵니다(나관중 '삼국지' 5회). 관우의 데뷔전인 셈이죠.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인 유비ㆍ관우ㆍ장비가 천하의 무용을 자랑하는 여포와 맞붙는 장면을 보시죠.

"이윽고 투구와 갑옷에 화려한 무늬의 장식과 휘장이 햇빛에 번쩍이며 한 손에는 활을 메고 손에는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창을 들고 적토마를 타고 여포가 나타났다. 여포는 폭풍처럼 달려가 하내의 장수 방열을 죽이고 질풍처럼 쇄도하여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두르니 모두가 짚단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상당 태수 장양이 여포와 맞서 싸웠으나 여포의 단칼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다시 북해의 장수 무안국이 달려들었으나 이내 팔이 떨어졌다. 그러자 장비가 달려가서 여포와 불꽃 튀는 접전을 펼쳤으나 승부가 나지 않자, 관우는 82근짜리 청룡도를 휘두르며 협공했으나 역시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제 유비까지 합세하여 여포와 싸우자 여포가 말을 달려 자기 진지로 돌아갔다(나관중 '삼국지' 5회) "

[그림①] 유비 삼형제와 여포의 싸움(중국 우표 그림)

이런 종류의 내용들이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전쟁 모습입니다. 어떻습니까?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쟁은 벌어지는데 화면은 싸우는 장수들에게 고정이 된 듯 카메라가 돌아갑니다. 요즘의 무협 영화와 다를 바 없지요. 과거에는 영화는 없었지만 연극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원나라 때 연극이 고도로 발달했으며 나관중 '삼국지'가 성립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금방 의문이 생깁니다. 만약 그럴 것 같으면 무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을 하나만 확보하면 모든 전쟁은 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나머지 병력들은 별로 필요도 없으니 돈도 들지 않습니다. 애꿎은 젊은 병사들을 죽일 일도 없으니 그만큼 다행한 일도 없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나는 장수들의 싸움은 그 장수들이 잘 할 때는 정사에서 보면 그 전투를 이긴 경우이고 잘 못할 때를 보면 그 장수가 그 전투에서 진 경우라는 것이죠. 쉽게 말씀드리면 장수가 전체적인 전쟁의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실제적인 전투 모습이 장수들을 중심으로 형상화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거나 말거나 이것은 전투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의 실제적인 전쟁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말이죠. 다만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무협지에 빠져드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2) '삼국지' 시대의 전쟁 모습은 어땠을까요?**

'사기(史記)'의 주(周)나라 본기(本紀)에 따르면 B.C 1028년 주나라의 무왕(武王)은 은(殷)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백대, 용사 3천명, 갑사 4만5천명을 친히 거느리고 위수를 따라 동쪽으로 출발하여 12월 여러 부락과 맹진(孟津)에서 회합하였고 은나라 주왕(紂王)을 향해 돌격을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천년 전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나라 당시에도 군사제도가 상당히 발달하여 군사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대신을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라고 불렀고 태사 외에도 사도(司徒 : 군사행정 전문가)라는 벼슬을 설치하여 군사정책과 군사명령기구를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과거와 과거의 실제모습은 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당시의 군사제도를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지만 '주례'(周禮ㆍ地官ㆍ司徒篇)에 따르면 병사 5명을 오(伍)라고 하고 5伍를 1 량(兩), 4량을 1 졸(卒), 5졸을 1려(旅)라고 하였고 5려를 1사(師)이라고 하고 5개의 사를 군(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1량(兩) = 25명, 1졸(卒) = 100명, 1려(旅) = 500명, 1師 = 2500명, 1군 = 1만2500명이 되지요. '주례'(周禮ㆍ夏官ㆍ司馬篇) 에는 천자(天子)는 6군을 거느리고 큰나라는 3군, 중간 정도 나라는 2군, 작은 나라는 1군을 거느릴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지요. 따라서 군의 수량의 과다에 따라서 나라의 강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즘 사용하고 있는 여단(旅團)이나 사단(師團)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주나라 후기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 B.C. 770~403)에는 청동제 무기를 가진 귀족(貴族)들이 평원(平原)으로 나와서 전차(戰車)를 몰고 싸우는 전차전(戰車戰)이 중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통상적으로 전차 1대에 보병이 30명씩 호위하였고 이들 보병에게는 청동제 무기가 비쌌기 때문에 공급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춘추 시대에는 전쟁의 승패(勝敗)가 이전과는 달리 매우 빨리 결정되었지요.

이 때 사용된 전차(戰車, 또는 兵車)는 크게 공격용 전차인 치차(馳車)와 수비용 전차인 혁차(革車 : 가죽전차)로 나눠집니다. 치차는 공차(攻車) 또는 경차(輕車)라고 하는데 대개 경차 1대에서는 말이 4필, 갑사 3명, 병졸 72명이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혁차는 수차(守車), 또는 중차(重車)라고 하는데 혁차 1대에는 4마리의 소[牛]와 25인의 병졸이 따랐지요. 이 시대에는 나라의 크기는 이 병차의 수로 파악할 수 있었죠. 예를 들면 전차를 1천대 가진 나라는 천승지국(千乘之國)이 되지요.

[그림②] 기와에 그려진 한나라 때 전차(쓰촨성 출토)

춘추시대의 전쟁들은 모두 전차를 위주로 한 작전이었으며 활동이 편리한 지역을 전쟁터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주로 양국 사이의 변경에 위치한 넓은 평원(平原)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전쟁을 '국경의 일[강장지사(疆場之事)]'이라고 불렀지요.

전국시대(戰國時代 : B.C. 403~221)에 들어서자 철의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긴 자루가 달린 방패나 철로 만든 창들이 보병들에게도 지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보병(步兵)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으며, 전쟁터의 범위가 매우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무기만 가지고 있다면, 보병은 산간이나 들판 어느 곳에 있든지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고, 이들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끝난 것은 아니죠. 보병 개인 장비의 면에서도 본격적으로 갑옷과 투구가 보급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을 좀 구체적으로 봅시다.

[그림③] 위에서부터 모(矛 : 찌르는 병기)와 괘(戈 : 창 - 아래 왼쪽), 극(戟 : 모와 괘를 합친 것 - 아래 오른쪽)

전국시대에 들면서 제철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센 활과 쇠뇌[弩]의 제조로 활의 사격거리를 크게 하여,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하던 전차 진영(車陣)은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B.C. 405년, 단구 (亶丘) 전쟁에서 "전차 2천대를 노획하고 3만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지요. 이렇게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각 나라들은 전차(戰車)를 포기하고 보병(步兵)으로 고쳐서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병의 지위가 이전과는 달리 크게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쇠뇌는 원거리 사격에 특히 우수하여 1백보 거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알 수 없지요. 韓나라의 경우 6백보까지 쏠 수 있는 노(弩)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노(弩)라는 것은 방아쇠가 달린 활을 말하는데 시위를 당겨두면 언제든지 발사될 수 있는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기관총(machine gun) 같은 것이지요. 이 노로 인하여 개인적인 무예실력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대개의 경우 노를 이용한 대규모의 공습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시기는 '삼국지' 시대보다도 5백~7백 년 전입니다.

즉 '삼국지' 시대보다 5백~7백 년 전에 이미 개인적인 무예 실력은 전쟁의 승패에 별로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무용(武勇)은 전쟁의 승패와는 무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초패왕 항우(項羽)가 "검술이란 단지 한 사람을 적으로 하는 데 그친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림④] 원융노(왼쪽)와 노로 공격하는 한나라 병사들 모습

[그림⑤] 개인장비를 갖추고 진나라 병사가 활을 쏘기 위해 앉은 모습(진시황릉)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의하면 위나라(조조의 위나라가 아님)에서는 보병을 선택할 때 규정은 ① 세 가지 물건으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했고, ② 12석(石)의 힘을 가진 쇠뇌를 쏘는 것은 물론 쇠뇌살 50가치를 등에 져야 했으며, ③ 무기를 휴대한 외에도 사흘 식량을 짊어지고 한나절 1백리 길을 달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정규 무졸(武卒)에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인데 대단히 조직적이어서 마치 현대의 군대를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춘추전국 시대까지는 기병(騎兵)이 단독 병종으로 편성되지는 않았고 전차병과 혼합작전을 주로 하였지만, 점차적으로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자 기병이 독립 병종으로 발전합니다. 전국시대를 기준으로 각국의 군대 총수가 수십만에 달했지만 기병은 겨우 5천 필~1만 필에 불과했습니다.

춘추시대 각국 군대는 임금과 그의 가까운 대신들이 통수(사령관)나 중요한 장령(將領)이 되었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각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관료기구도 발전하였고, 여기에 초모제도(招募制度)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문무 관원으로 크게 구별하여 전문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병력이 십만을 초과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어떤 전쟁은 수십만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리고 '묵자' 공수편(墨子 公輸篇)이나 '한비자' 팔설편(韓非子 八說篇)에 보면 춘추전국 시대에는 성(城)의 공격과 방어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관도대전에서 나타나는 공성전(攻城戰)이 이미 이 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국경에는 관문을 만들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대병력을 파견하지 않고 전쟁이 발생하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다가 전국시대에 들면서 군대가 상주하고 정(亭 : 변경의 토담위에 설립된 감시용 건축물)이나 장애물(障) 등도 건립하고 봉화 설비도 갖추면서 성이나 요새를 서로 연결하여 장성(長城)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리고 군사학(軍事學)이 발전하여 '좌전(左傳)'에 따르면 춘추 초기에 이미 군지(軍志)라는 책이 있어 군사 일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전문가들이 전국시대에 이르면 전문화되기 시작하여 병권모가[兵權謀家(책략가)], 병형세가[兵形勢家(전략의 운용전문가)], 병음양가[兵陰陽家(정보 및 감찰)], 兵技巧家[병기교가(전술전문가 : 매복, 요충지 설치, 진공, 방어, 기습 등)] 등으로 분화되었지요.

B.C. 273년, 화양(華陽)의 싸움에서 진(秦)나라 군대는 위나라를 격파하고 15만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고 B.C. 260년 장평대전(長平大戰)에서 진(秦)나라 군대는 조나라를 격파하고 40만 명을 생매장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들을 다 믿을 수야 있겠습니까만, 전국시대에 들면서 전쟁의 규모가 대단히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한(漢)나라 시대의 전쟁은 대부분은 이전의 전국시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전략 전술 면에서 상당한 발전이 나타납니다. 특히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한 초한전(楚漢戰)을 보면 조직과 지휘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고 보급문제도 전국시대보다도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지요. 즉 한번의 패전(敗戰)으로 전쟁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치와 수비, 공격 등에 대한 다양한 전술이 구사되고 전쟁터도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어서 여러 방향에서 하나의 전략적 목표를 중심으로 작전이 수행되었다는 것이죠. 사실상 현대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림⑥] 한나라 때의 전쟁(산동성 무량사의 화상석)

그리고 전쟁 공간이 유례없는 확장되어 전면전(全面戰)의 성격이 나타나 현대전(現代戰)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면 초한 전쟁은 동쪽으로는 동부해안, 서쪽으로는 관중지구(關中地區), 남쪽으로는 장강(長江), 회하(淮水), 구강 일대로 확장되고, 북쪽으로는 연산(燕山)까지 전장이 확대됩니다. 유방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한중(漢中)에서 출발하여 삼진(三秦) 지방을 점령하고 함곡관 부관을 거쳐 동진(東進)하여 팽성으로 진군하였는데 이 때 걸린 시간이 8~9개월 걸렸고 이동 거리는 무려 3~4천리에 달합니다.

이상이 논의로 보면 '삼국지' 시대에는 개인적 무용의 중요성은 전쟁에 있어서는 크게 고려할 사항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무용은 아마도 군인으로서 출세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승패에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대규모의 전쟁이 일상적으로 나타났으므로 각 군단은 팔진법(八陣法)이라는 전투대형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64개의 소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적과 교전을 할 때는 정면과 측면을 지키는 부대로 나머지는 예비 병력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대규모 보병전을 알기 위해서 먼저 가장 작은 단위 부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대(小隊)의 경우에는 앞줄에는 궁병(弓兵) - 창병(槍兵) - 칼과 방패를 가진 보병(步兵) 등으로 순서로 정렬하였다고 합니다.

[그림⑦] 소대의 전투대형(기수 포함 55명)

[그림⑦]을 보면 당시의 전쟁이 어떤 순서대로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화살로 적을 공격하고 다음에는 적들이 공격하면 창으로 막고 창병들 간의 교전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엔 결국 창과 칼로 무장한 병사들 간의 대접전이 일어납니다.

대규모 보병전에서는 주로 진법(陣法)이 사용됩니다. 이 진법이란 전쟁시 병력 배치의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법 가운데는 팔진법(八陣法)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우선 이 팔진법을 간단하게 알아보고 넘어갑시다.

전쟁이 발발하면 대규모 보병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은 군대의 한 가운데에서 중군(中軍)을 두어 전체 병력을 지휘하게 되는데 이 중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개의 방향과 북동ㆍ북서ㆍ남동ㆍ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두는 병력 배치의 방법이 팔진법입니다. 먼저 [그림⑧]을 보시죠.

[그림⑧] 화기(火器) 출현 이전에 유행한 팔진법(八陣法)

[그림 ⑧]은 흔히 알려진 대로 제갈량이 고안했다는 팔진도 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제갈량이 고안한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제갈량 이전에도 팔진법에 대한 용어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팔진법은 화기(火器) 출현 이전의 완벽한 전투대형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상세한 상황은 알 수가 없지요. 더구나 위의 팔진법에 대한 내용에 대한 정확한 기록(실제 전투에서의 운영)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나라ㆍ송나라 이후 엉뚱한 이야기나 신화, 설화들이 여기에 첨가되면서 더욱 허황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군사 전략가들이 이 진법에 대한 연구를 매우 많이 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진법이란 병사를 훈련시키거나 행군(行軍)ㆍ숙영(宿營)ㆍ전투(戰鬪) 등의 여러 상황에 대비한 병력의 배치와 작전 방안입니다. 팔진법은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실전팀과 지원팀이 매우 조화롭고 다이내믹하게 짜여져 있어 최적의 공격 및 방위 진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팔진법은 전투 지휘 사령부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전투대형은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군사 배치법입니다(사실 실제 전장에서 보병들은 흩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총사령관은 중앙[중군(中軍)]에 위치하여 어떤 소대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전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될 수 있고 통일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형태의 진법은 북방유목민(대쥬신?)의 전술에는 취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족(漢族)들 간의 전쟁에서는 매우 유용했습니다. 이 진법이나 팔진도는 다른 항목을 통하여 다시 상세히 분석해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팔진도에 나타난 하늘이니 땅이니 바람이니 구름이니 하는 말도 그 때 생각하기로 합시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보면 '삼국지' 시대에서는 대규모의 보병전(步兵戰)이 수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의 전쟁에서는 개인의 무용은 중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만의 대군이 동원되는 전쟁에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장수 한 명이 죽었다고 이내 패전(敗戰)이 되겠습니까? 군대에서 1천 명 정도의 병력이 잘 보이는 연병장에 집결해도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만의 대군이 운집해 있는데 한 두 사람이 전열 맨 앞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보이겠습니까? 더구나 그 한 두 사람의 싸움이 승패로 전쟁의 결말이 나겠습니까?

***(3) 장수 하나가 일종의 소형 장갑차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앞서 본대로 대규모 보병전이 벌어지면 장수 개개인의 무예 실력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무예가 뛰어난 장수들이 전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대전은 사실상 장비전ㆍ기술전ㆍ과학전ㆍ경제전입니다. 전쟁 기술과 경제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지요. 그런데 전쟁 과학이나 장비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철갑으로 투구를 쓰고 보호 장비를 찬 말을 탄 장수들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작은 전차나 소형 장갑차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역사상 실제로 유럽에서는 15인~20인의 기병(騎兵)이 수백 명의 보병(步兵)을 격파한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잘 무장된 기병은 전쟁 기술이 미약했던 고대에서는 일종의 작은 탱크 구실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개인적인 무용이라기보다는 전쟁이 벌어진 장소와 전투 장비가 주요한 변수이지요.

[그림⑨] 구리로 제작된 한나라 때의 기병의 모습(감숙성 출토)

요즘 시중에 떠도는 '삼국지' 관련 책들을 보면 마치 이 시대에는 일대일의 싸움이 일반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그들 가운데 누구의 무예가 가장 뛰어났는지를 분석한 책들도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도 아니고 그에 대한 기록도 없는데 말이죠. 더구나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전국시대에 이르면 이미 전쟁은 고도로 전략적이고 전술적으로 발전해 있기 때문에 한 두 명의 장수와의 싸움으로 대세가 결정된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이 같은 묘사는 비판력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고대 전쟁의 실제 모습을 크게 왜곡시키는 것이지요.

[그림⑩] 한나라와 흉노(대쥬신?)의 전쟁

장수들은 칼이나 창이 쉽게 뚫지 못하는 갑옷으로 무장해 있고 전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하나의 전차나 장갑차 구실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 사람이 수십 명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삼국지' 시대에는 이미 쇠뇌가 매우 발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국 시대의 중국은 유목민들의 기병전을 제외하고는 이미 세계 최강의 보병전(步兵戰)을 구사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유비ㆍ관우ㆍ장비 모두가 여포를 이기기에 급급한 것은 그들 개인의 무용(武勇)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력의 차이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덧붙여 말씀드리면 동양 사회는 서양과는 달리 이미 오래 전에 고도의 행정 관료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고대의 전쟁들도 이미 현대의 국민전(國民戰)이나 총력전(總力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양상을 보면 보병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의 보병전을 수행하였고 기병이 전쟁의 흐름을 장악하고 리드하는 형태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때 동원된 무기들은 철기(鐵器)였으며 병사들에게는 개인 장비가 지급되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삼국지' 시대의 전쟁이란 나관중 '삼국지'에서 묘사하듯이 전쟁을 장수 한 사람씩 나와서 수행하는 식이 아니라 대규모의 보병전(步兵戰)의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장수 개인의 무용(武勇)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수많은 개인 장수의 무용담은 사실이 아니고 당시의 전쟁의 실상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를 통하여 고대의 전쟁에 대한 이해를 좀더 깊이 하셨기를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