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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눌한 생명 하나가 다시 생명을 말하네!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21>

인도의 전통 종교 중에 자이나교(Jaina敎)라는 종교가 있다. ‘아힘사(Ahimsa)’를 제1의 계율로 삼고 있는 종교다. ‘아힘사’의 계(戒)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는 ‘불살생(不殺生)’의 계를 말한다. 지난 4월 하순,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로 잘 알려진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가 한국을 다녀갔다. 녹색평론사 등이 주최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연사로 초청됐었다. 심층생태학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그는 녹색운동의 영성적 지도자로도 명망이 높다. 그 사티쉬 쿠마르가 한때 자이나교의 승려였다. 아홉 살 때 입교했다가 열여덟 살 때 자이나교를 떠났다.

그가 쓴 자전기 중 자이나교에서 보낸 시절의 이야기를 보니 ‘생명’이란 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자이나교의 승려들은 명상시간엔 입을 여덟 겹으로 접은 천으로 막아 둔다.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입김 때문에 공기 중의 생명체가 해를 입을까 염려해서다. 길을 갈 때도 벌레와 같은 생명체, 심지어는 식물도 밟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며 움직였다. 곡식과 채소를 키워 그걸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일종의 ‘폭력’으로 보았기 때문에, 음식 역시 탁발을 해서 먹었다.

어린 사티쉬 쿠마르가 하루는, 구루(Guru) - 인도 종교에서의 성자 혹은 종교적 스승 - 의 곁에 앉아 있다가 머리를 긁었는데 이가 몇 마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구루가 말했다.

“이가 생겼구나. 하지만 신경 쓰지 말아라. 생명이 있는 존재는 무엇이든, 심지어 이 한 마리도 해치지 않겠다던 맹세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 이들을 다시 네 머리 속에 놓아 두거라. 그래야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불살생의 계율 속에 담긴 아름다운 가치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힘사에 대한 자이나교의 이런 극단적인 접근은 계율 근본주의적 경향이 다분하다.

이와는 반대로 초등학교 무렵의 내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생명에 대해 참 무지했었다. 별 죄의식도 없이 무고한 생명들을 죽인 기억들이 참으로 많다. 지금과 같은 여름철이 되면 자주 찾던 나무가 있었다.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 같은 참나무류가 바로 그것이다. 참나무엔 그 수액을 먹으러 오는 곤충들로 붐볐다. 그 중엔 노리갯감이 될 만한 곤충들이 많았다. 사슴벌레와 하늘소도 보였고, 무엇보다도 풍이가 있었다. 특히 풍이에게 가한 폭력은 극악한 사형(私刑)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무릎관절에 해당하는, 풍이의 그 다리마디부분을 꺾어 떼어내고, 다음으로 풍이의 머리를 두 세 바퀴 돌려놓은 채 땅바닥이나 마루 위에 놓아두곤 했다. 그러면 풍이는 그 자리에서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외피 같은 딱딱한 겉날개 밑으로 반투명의 속날개를 펼쳐내 매우 빠른 속도로 날개를 떨며 맴돌이를 했다. 풍이에겐 단말마적인 몸부림이었을 그 날개 짓과 맴돌이를 구경하는 게 그 시절의 유희였다. 풍이가 겪었을 고통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들녘의 길을 오다가다 만난 개구리나 뱀에겐 또 얼마나 많은 수난을 안겼던가. 강아지풀의 꽃이삭에 침을 묻혀 개구리의 눈앞에서 흔들어대면, 움직이는 물체만 사냥하는 개구리가 덥석 그 이삭을 문다. 그러면 냅다 잡아채 딸려온 개구리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죽였다. 누룩뱀이나 유혈목이 같은 뱀도 만날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끼며 돌팔매질을 해댔다. 뱀은 복수심도 강하고, 또 죽었다가도 비를 맞거나 땅기운을 쐬면 살아난다는 그런 속설을 철썩 같이 믿던 시절이어서 죽여도 잔인하게 죽였다. 돌로 머리를 짓이겨 놓다시피 했던 것이다. 호박꽃이나 참깨꽃 속에 꿀을 빨러 들어간 벌들도 잡고, 잠자리, 방아깨비, 메뚜기, 귀뚜라미, 땅강아지 등속의 무수한 생명들도 잡아서 가지고 놀다가 결국 죽게 했다. 내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살생 가운데 하나론 아마 ‘싸이나’라 부르던 청산가리(Cyanide)로 꿩을 사냥했던 일을 들어야 할 듯싶다.

그 시절의 열등감이란 미묘해서 이를테면 어떤 친구가 싸이나로 꿩을 잡았다든지, 아니면 눈이 내린 날 토끼몰이에 나갔다가 산토끼나 노루 따위를 잡았다 하면 듣는 쪽은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들이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는 장끼의 그 예쁜 꽁지 털을 보라. 결국 그런 열등감을 느끼던 내게도 기회가 왔다.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청산가리를 손에 넣게 됐던 것이다. 어느 해 겨울, 이웃집 뽕밭에 자주 놀러오는 꿩들을 표적으로 삼게 됐다. 물에 불린 콩을 살짝 벌려 청산가리를 그 틈새에 넣었다. 그리고 그 콩을 그 뽕밭에 뿌려놓았다. 콩은 꿩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가운데 하나였다. 다음 날 가서 보니 너댓 마리의 장끼와 까투리가 죽어 있었다. 청산가리가 얼마나 무도한 독극물이었던지 꿩은 콩을 먹은 곳으로부터 멀리 가지도 못하고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이런 ‘살생의 추억’들이 지금에 와선 마음에 ‘부하(負荷)’로 남을 때가 많다. 바로 죄의식이다. 옛날 어느 선사는 ‘죄자성공종심기(罪自性空從心起)’라고 말했다. 죄의 자성, 곧 죄의 본성은 (본래) 공(空)하지만, (다만 죄의식이) 마음을 따라 일어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래 공한 죄의 본성을 보게 되면, 죄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空)한 것이 어찌 죄 뿐이겠는가. 불가의 연기론적(緣起論的) 세계관이나 공관적(空觀的) 존재론에서 보면, 이 세상 만유(萬有)가 모두 공하다. 그러나 죄의식을 못 느꼈던 유년시절의 그 마음은, 세월을 돌고 돌아서 지금은 곧잘 죄의식을 느끼는 범부의 마음이 되었다. 딸아이인 선재가 네 살 때의 일이었다. 어느 백화점 입구에 함께 들어서는데 선재가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빠, 여기 개미 있어요.” 선재가 큰 흥미를 보이며 소리쳤다. 계단을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가 보였다. 선재에게 개미를 죽이지 말라고 말했다. 개미를 죽이면 얼마나 아프겠느냐, 그러면 개미가 선재를 미워한다고. “그래요?”라고 말한 선재는 그러나 갑자기 분홍빛의 예쁜 신발을 신은 발을 허공으로 들더니 그대로 개미를 밟아 버렸다. 그러고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깔깔대며 웃었다. 선재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아이다. 곤충들과 같은 자연의 친구들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또 좋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참으로 경악스러웠다. 선악이란 무엇일까. 선재의 마음은 동심이었을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폭력성이 내재된 인간의 일반적인 심성이었을까. 선재의 마음과 그걸 경악스러워 하는 나의 마음 중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참깨밭에서 며칠째 김을 맸다. 쑥과 여뀌, 닭의장풀, 며느리배꼽 등 봄풀들이 무성했다. 언제 ‘깨 쏟아질’ 날이 있을까 싶었다. ‘김’의 사전적 정의는 ‘논밭에 난 잡풀’이다. ‘잡풀’이라니 맘에 걸린다. 바로 그 ‘김’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호미질을 하는 내 삶이 이렇게 존재하는 걸 생각하면, 한편으론 마음이 젖는다.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몸을 기대고 서있는 것처럼, 김과 내 삶은 이렇게 서로 빈 틈 없이 의지해 있는 것이다.

호미질을 하다가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그 녀석이었다. 외톨이로 사는 장끼 한 마리. 어린 시절 청산가리로 떼죽음을 시켰던 그 꿩의 후손이었다. 길 건너편엔 고로쇠 묘목을 심은 밭이 있다. 그 밭에서 그 장끼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발을 다쳤는지 조금씩 이동할 때마다 몹시 절뚝였다. 발은 꿩이 그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먹이를 찾아다니거나 적을 만나 몸을 피할 때 이 발을 사용한다. 발톱은 또 닭처럼 땅을 헤집고 먹이를 찾을 때 결정적인 몫을 한다. 조류이지만 날개보다 발을 더 긴요하게 쓰는 게 바로 이 꿩이었다. 그런 발을 다쳤으니, 치명적인 상처라 할 만했다. 그 장끼를 만난 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됐다. 처음엔 나를 보고 도망가더니, 요즘은 경계심을 풀었는지 내가 웬만큼 다가가도 도망가질 않는다. 어떤 때는 도망가기는커녕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 경고음을 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꿩은 다시 고로쇠밭의 바로 위쪽, 솔숲과 떨기나무숲 속에 있는 무덤 쪽으로 절뚝이며 걸어갔다. 그는 곧 뒤뚱거리며 무덤 위로 올라갔다. 닭이 홰를 치듯 날개를 두어 번 퍼덕이더니 “꿩! 꿩!”하고 울었다. 그러더니 그 무덤 위에서 미동도 않은 채 서서, 오랫동안 저 아래쪽의 들녘과 강 건너 산을 응시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도 넘게 했다. 저 녀석은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얼 생각하나. 사실 난 조류의 생태에 대해 다소 공부를 한 게 있어서 그 장끼의 삶과 발을 다치게 된 내력에 대해 몇몇 추론을 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장끼의 모습을 넋을 잃고 보고 있노라니 꿩에 대한 지식들이 나도 모르게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그 꿩이 달리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꿩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아는 게 없는 상태로 ‘존재’하니 문득 꿩이 새롭게 보인 것이다. 사물이나 대상은 그들에 대해 ‘치열하게’ 몰랐을 때, 역설적으로 그 참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 그때부터 비로소 그들을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랜 친구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잘‘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지식과 선입견을 전면적으로 포기해보라. 그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새롭게 보일 수도 있다. 어느 현자는 “‘직관(直觀)’이란, 처음 보는 것을 익숙한 것처럼 보고, 익숙한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호미를 든 생명 하나가, 무덤 위에서 외발로 서있는 다른 생명 하나를 보고 있구나. 이 생명은 누구이고 저 생명은 누구인가. 어느 한 쪽의 생명이 있어야 다른 쪽의 생명도 비로소 존재하는 게 아닐까. 망연하다. 세상도. 삶도.

불가에는 ‘생명의 무게’ 혹은 ‘생명의 저울’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현우경(賢愚經)>에 실린 이야기다.

보살행을 실천해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구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무 밑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갑자기 품 안으로 날아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곧 이어 매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매는 그 구도자에게 그 비둘기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말했다.

“내 본래의 서원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나는 이 비둘기를 결코 네게 줄 수가 없다.”

그러자 매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 모든 존재들을 구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그 비둘기를 내어 놓지 않으면 대신 내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물었다.

“만일 네게 다른 고기를 대신 주면 너는 그걸 먹겠느냐?”

매가 말했다.

“갓 죽인 더운 고기라야 먹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도자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 그러나 매는 저울에 달아 비둘기의 무게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의 주장에 동의했다. 저울의 한 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다른 한 쪽엔 자신의 살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저울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었다. 비둘기가 더 무거웠던 것이다. 자신의 살이 적었다고 생각한 구도자는 다시 두 팔의 살을 베어내 저울에 올렸다. 그러나 저울은 미동도 없었다. 다시 옆구리 살도 베어내 저울에 올렸다. 그러나 저울은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기운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구도자는 일어나서 온몸으로 저울 위로 올라섰다. 저울은 그제야 평형을 이루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꽃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 예화는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평등성, 생명들의 등가성을 설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초극한 그 은유와 상징이 아름답다. 언젠가 불교계에서 나무들을 위한 천도제(薦度祭)를 연 적이 있었다. 산과 숲을 개발할 때 베어진 나무들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제의(祭儀)가 내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리얼리즘(realism)’으로 다가왔다. 생명은 시나브로 ‘생명!’이라고 말하는 순간, 멀리 달아나버리는 테마 같다. 때론 사유의 영역이 아닌 영성적 체험을 통해 만나야 할 대상인 까닭이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무지개 빛깔보다 더 다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참깨밭의 김을 매다 보니 거세미가 종종 눈에 띄었다. 거세미는 도둑벌레(夜盜蟲)의 애벌레다. 야행성인 이 녀석은 밤에만 나와 활동한다. 참깨 농사를 몇 년 지으면서 겪은 일이지만, 이 녀석이 설치기 시작하면 참깨 농사는 그 뒤를 장담할 수가 없다. 밤에 나와 어린 참깨 줄기를 싹둑싹둑 잘라먹는 재주를 갖고 있는 녀석이다. 올 참깨 농사에서 이 ‘생명’과는 또 인연을 어찌 지어가야 할까. 그나저나 이렇게 김을 매고 나면 이 거세미는 무얼 먹고 사나? 먹을 것이라곤 참깨 줄기밖에 없는 형편 아닌가. 농리(農理)가 트일 날은 여전히 아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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