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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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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0>

의문의 여인, 오나라 금공주

***들어가는 글**

한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자녀 사랑하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세상에 자기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욕망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당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표어가 "당신이 아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그 아이를 낳아 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좋은 사랑이라는 말이죠. 아이들에게 세계는 곧 엄마와 아빠가 지탱하는 세계지요. 그 세계만 튼튼하면 아이들은 씩씩하게 자란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죠. 엄마가 아빠의 사랑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자녀를 더욱 사랑으로 대하게 되겠죠. 자녀가 늘 보는 사람이 엄마가 아닙니까? 엄마가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거나 외롭고 힘들어지거나 우울증에 걸리거나 할 경우 자녀들은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아이들은 튼튼히 자랄 수가 없는 것이죠. 엄마의 얼굴은 아빠가 그리는 그림과 같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가부장적 질서 하의 봉건 왕조는 어떨까요? 왕에게는 수십~수백 명의 아내가 있으니 그 아내들 가운데 한 둘을 제외하고는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지금 사랑을 받고 있는 아내들도 언제 사랑을 잃을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가족 그 자체의 의미에서 본다면, 황실(또는 왕실)은 어떤 의미에서 전형적인 결손 가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황제의 수십 명의 아내들은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심각한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지요. 심리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환경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에게는 가장 좋지 않는 환경입니다.

물론 황실(皇室)이란 많은 자녀가 있어야 되는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사실 왕이나 황제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역사상 수많은 군주들이 자식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데 이것을 단지 충효(忠孝)라는 시각만으로 봐서는 안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황자나 왕자들이 그 아버지의 손에 죽은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들이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아버지를 죽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나 황제들의 자녀들이 다른 어머니나 배다른 형제들에 대해 가지는 적개심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입니다. 형제간의 싸움이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나는 경우가 너무 많지요. 따지고 보면 이들은 모두 형제인데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보다 자신의 배 다른 형제들에 대한 적개심이 더 큽니다. 인간의 마음, 복잡한 것이지요.

***(1) 의문의 여인, 금공주(金公主)**

나관중 '삼국지'에는 오나라에 대하여 서술이 비교적 간단합니다. 위나라와 촉나라의 경우에는 야사까지 시시콜콜 곁들여서 상세히 묘사하는 반면, 오나라의 경우에는 정사에 있는 기록조차도 축약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관중 '삼국지'에는 손권의 후반기 정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가 잘 묘사되어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나라의 전반적인 사정들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일반 독자 여러분들은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이 부분들을 보다 균형적으로 보기 위해서 앞으로도 오나라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항목에 따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강의에서 손권(孫權)의 정치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나관중 '삼국지'만 읽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의 해설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손권의 말년 실정(失政)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손권은 오나라 창업의 황제이자 오나라를 패망으로 몰고 간 혼군(昏君 : 암울하고 어리석은 군주)이었습니다.

지난 강의를 통하여 오나라의 후계 문제에 따른 극심한 갈등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후계 갈등의 내부에는 부자간, 형제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촉매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깊이 분석해보도록 합시다.

[그림①] 중국 미인의 고장 항저우 풍경

나관중 '삼국지'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여자들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여인들이 정권의 흥망에 깊이 관계합니다. 흔히 중국의 미인(美人)하면 소주(蘇州) - 항주(杭州)의 여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중국 미인을 흔히 소항형(蘇杭型) 미인이라고 하지요.

[그림②] 중국 미인의 고장 항저우 풍경

그런데 이 지역은 과거 오나라 수도인 건업(建業) 남쪽에 붙은 지역입니다. 이것도 조금은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먼저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을 보시죠.

"손권은 일찍이 서(徐)부인 소생의 손등(孫登)을 태자로 삼았으나 적오 4년(서기 214년)에 죽자 둘째 아들인 왕씨 부인 소생인 손화(孫和)를 태자로 삼았다. 손화는 금공주(金公主)와 사이가 나빠 금공주의 참소로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 당했다. 손화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고 손권은 손량(반씨 소생)을 태자로 삼았다.(나관중 '삼국지' 108회)"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이와 같이 매우 간단하지만 실제의 내용은 매우 복잡합니다. 위의 내용 가운데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 태자가 금공주의 참소로 폐위를 당하 다니오? 잘 일어나기 힘든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후 오나라의 황혼이 깊어지고 길 잃은 올빼미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오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 금공주(金公主)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2) 손권의 퍼스트레이디(?), 전공주**

오나라의 손권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습니다. 오나라의 손권은 일찍이 부춘 출신의 부인 서씨(徐氏)를 맏아들인 손등(孫登 : 209-241)의 양어머니로 하여 태자로 삼았습니다(손등의 생모는 신분이 미천하였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손등이 서씨의 소생이라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씨의 질투가 심해 손권은 서씨를 오군(吳郡)에 팽개쳐 두었지요.

손권이 황후로 삼고 싶어 했던 여자는 바로 보씨(步氏)였습니다. 보씨는 오나라 승상을 지낸 보즐(步騭)과 한 집안 사람입니다. 손권은 오랫동안 보씨를 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오서 : 서부인전). 왜냐하면 그때까지 중신들은 서씨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후에 서씨는 병으로 죽습니다.

손권이 보씨를 좋아한 이유는 보씨가 아름다운데다가 부덕(婦德)이 높고 질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정사에 따르면, 보씨는 때에 따라서 다른 많은 후궁을 손권에게 추천해 줄 정도로 질투심이 없었다고 합니다(오서 : 보부인전). 그러나 실제로 보씨는 마음 아픈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보씨도 견디기 어려운 마음고생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재미있는 일은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남편인 왕이 일찍 죽었을 경우에는 오래 살아있는 왕비나 후궁들이 많은데, 왕이 오래 살았을 경우 왕비들이 일찍 죽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이것은 아마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림③] 손권(드라마의 한 장면)

보씨는 여러 중신들의 반대로 인하여 황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보씨는 손권으로부터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고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 손권의 제1부인(황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당시 오나라의 궁정에서는 보씨를 사실상의 황후로 대우하였고 호칭도 황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오서 : 보부인전).

그런데 오나라는 보씨의 죽음으로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우게 됩니다. 보씨가 너무 아름다운 여자여서 그랬을까요? 흔히 너무 아름다운 여자가 왕을 희롱하여 국운이 쇠하는 경우를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씨는 아름다운 여인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세상의 일들이라는 것은 작고 단순해 보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지요. 특히 불행(不幸)이라는 것이 시작될 때 그렇습니다. 먼저 보씨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보씨는 손권의 부인으로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습니다. 보씨 큰딸의 이름이 노반(魯班)이었는데 보씨가 죽은 후 손권은 이 딸을 매우 귀여워하였습니다. 노반을 흔히 전공주(全公主)라고 부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금공주(金公主)'로 나오는데 전공주를 잘못 쓴 것이죠(나관중 '삼국지' 108회). 전공주는 원래 주유(周瑜 : 176-210)의 며느리였다가 나중에 전종(全琮)과 결혼합니다. 그래서 아마 전공주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종은 우대사마(右大司馬)를 지낸 사람으로 원만한 성품에 충성도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종은 오나라에서는 능력 있고 성격도 공순하고 봉사정신도 강한 사람으로 명성이 자자하였지요. 전종은 229년 위장군(衛將軍), 좌호군(左護軍), 서주목(徐州牧)으로 승진하면서 전공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이번 강의의 주인공인 전공주(全公主)로 돌아갑시다.

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손화는 금공주(金公主)와 사이가 나빠 금공주의 참소로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 당했다."라는 단 한 줄만 나오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사건들이 숨어있습니다. 그런데 정사에서도 이 사건들을 낱낱이 알아내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들이 오서 전체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오서(吳書)의 비빈전(妃嬪傳)과 오주전(吳主傳), 삼사주전(三嗣主傳), 오주오자전(吳主五子傳)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납니다.

서기 241년 어질고 총명했던 태자 손등이 사망하자(손권은 이 때 큰 충격에 사로잡힙니다), 손권은 셋째 아들 손화(孫和)를 태자로 삼았는데(둘째 아들 손려는 이미 죽었지요) 손화는 낭야(瑯琊) 출신의 부인 왕씨(王氏) 소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씨와 그의 아들 손화는 보씨(步氏)의 큰딸인 전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전공주는 자신의 어머니인 보부인(步夫人)과 연적(戀敵)이었던 왕부인(王夫人)의 소생인 손화가 태자가 되자 이를 특히 우려합니다('오서' 왕부인전에 따르면, 손권이 가장 사랑한 여인들은 보씨와 왕씨였습니다. 그래서 보씨와 왕씨의 보이지 않는 사랑싸움이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전공주는 이들 손화와 그의 어머니를 비난해왔기 때문이었지요. 만약 손화가 보위에 오르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전공주는 판단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손권은 자기의 손녀딸 같은 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이 부분은 다음 주 강의에서 다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께 생소한 이름들이 너무 많이 나와 혼동하시기 쉬우니 다룰 때 한꺼번에 다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으로부터 어린 아들이 태어나는데 손권이 이 아이를 특히 귀여워함을 알게 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손량(孫亮)입니다.

그래서 전공주는 이 손량을 밀기로 작정합니다. 전공주는 자기 시숙(남편 전종의 형제)의 증손녀를 손량의 비(妃)가 될 수 있도록 손권에게 적극 추천하여 손량의 비가 되도록 합니다. 이 여인이 바로 손량의 황비(皇妃)인 전부인(全夫人)입니다. 전부인은 전상(全尙)의 딸로 손량이 황제에 있을 때 오나라 최고의 명문가가 됩니다.

전공주는 손화와 손권 사이를 이간계를 써서 갈라놓으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도 죽은 마당에 전공주의 생각이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보씨는 질투심도 없기로 소문난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나 전공주가 손화를 크게 두려워한 것을 보면 보씨와 왕씨의 사랑싸움은 매우 치열했으며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적개심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사의 일부 내용에서는 '바둑'에 대한 입장 차이로 전공주와 손화의 사이가 갈라졌다는 말도 있습니다(오서 : 손화전). 손화는 '바둑 무용론(無用論)'의 입장에 있었고 전공주는 그 반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입장 차이를 전적으로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정사를 분석해 보면, 전공주는 이들 모자(母子) 즉 왕씨와 손화를 제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짠 것으로 보입니다. 전공주는 3단계 전략으로 먼저 ① 태자의 어머니가 된 왕씨의 황후 책봉을 막고 다음으로 ② 왕씨 부인을 제거하여 손화의 배경을 없애고 마지막 단계로 ③ 손화를 직접 제거하기로 한 듯합니다.

손화가 태자가 된 뒤 손권이 왕부인을 황후로 삼으려 하자 전공주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이야기로 손권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여 이를 저지시킵니다. 말년의 손권이 노환(老患)으로 자리에 눕자 전공주는 아버지 손권의 병문안을 핑계로 자주 들르게 되지요. 그러면서 지나가듯이 한 마디씩 왕씨 부인과 손화를 음해하는 말을 합니다. 병석에 있었던 손권은 처음에는 아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다가 차츰 전공주의 말을 서서히 믿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전공주의 1차 목표가 달성됩니다.

손권은 많은 후궁들 가운데서도 보씨(전공주의 어머니)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정사를 보면 손권이 보씨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글을 볼 수 있습니다. 말년의 손권은 전공주가 바로 부덕이 남달랐던 보씨의 소생인지라 전공주와 보씨를 거의 동일시한 듯합니다. 보씨가 죽은 후 전공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던 가운데 손권은 병석에 있고 태자인 손화가 종묘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당시 장휴(張休)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의 정확한 사정이야 알 수가 없겠지만 장휴의 집이 종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 발생합니다. 이 장휴는 오나라 창업 공신 장소(張昭)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는 손권이 매우 싫어한 인물입니다.

과거 손책(孫策 : 손권의 형)이 죽으면서 장소에게 "만약 내 동생 손권이 내가 그 동안 이룩하려 한 일을 할만한 인물이 못되면 그대가 스스로 권력을 취하시오(오서 : 장소전)"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지요? 장소는 손책에게는 제갈량과 같은 인물이었는데 손책이 죽은 후 오나라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손권을 탁월하게 보좌한 인물이 바로 장소입니다. 그런데 장소는 평소 성격이 강직하여 윗사람의 잘못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어린 손권에게는 매우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손권은 오나라를 대표하는 중신인 장소를 끝내 외면하고 한직(閑職)으로 돌려버립니다. 아마 장소가 손책으로부터 고명(顧命 : 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을 받았기 때문에 손권은 더욱 싫어한 듯합니다.

[그림④] 손책과 장소(드라마의 한 장면)

태자인 손화가 장휴를 방문했다는 소식에 심기가 불편한 병석의 손권에게 전공주는 손권의 화를 돋우는 참소를 합니다(오서 : 손화전). 즉 전공주는 태자(손화)가 장휴와 의논하여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왕씨 부인이 '이제 내 아들이 제위를 물러 받을 것'이라면서 기뻐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그 동안 계속된 전공주의 일종의 세뇌 공작에다가 기력이 쇠한 손권이 이 말을 듣자 격분하여 전후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왕씨 부인을 불러서 크게 꾸짖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손권에게 심한 꾸지람을 당한 왕씨 부인은 이 일로 말미암아 근심하다가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맙니다. 전공주의 2차 목표가 달성됩니다.

이로써 손화에 대한 손권의 사랑은 급속도로 냉각되고 맙니다. 이 일을 손화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전공주에 대한 손화의 적개심은 매우 커져 갑니다. 이 두 사람은 이제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죠.

왕씨 부인이 죽자 전공주는 최종 목표인 손화에 대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전공주는 손화를 뒷조사를 하고 다닌 듯합니다. 그리고 손화에게 발생한 문제들이 일일이 손권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손권입니다. 아무리 늙고 병이 들었어도 어떻게 국가의 대사가 걸린 문제들을 전공주의 말만 듣고 처리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첫째 손권은 노쇠하여 이미 냉철한 판단을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총애하던 전공주의 말을 더욱 믿게 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설령 전공주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할지라도 자신의 총애하는 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태자에 대해서 실망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랫동안 현군(賢君)의 자질을 보여 온 손권이 전공주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라할 지라도 전공주와의 불화는 손화가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쇠한 손권의 입장에서는 가까운 거리에서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병간호를 하는 전공주의 말에 더욱 귀가 솔깃했겠지요(어쨌든 이 부분은 손권의 전적인 책임으로 봐야합니다. 정치 지도자가 자기가 병들어 도저히 나라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손권이 태자를 폐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세상의 일이 그렇듯이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소문부터 돌기 시작하고 그 소문은 다시 일을 크게 만들고 당사자들이 준비할 시간도 없게 만들지요.

이제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져 나옵니다. 손화의 동생 노왕(魯王) 손패(孫覇)는 손화가 폐위된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태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론을 조성하고 지지자들을 모으려 다닌 것이죠. 여기서 해명되지 않은 사건이 있지요. 즉 손패가 태자위에 대한 야심을 가지도록 부추긴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입니다. 손화와 손패의 어머니인 왕씨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제3자가 이를 부추겼을 것이기 때문이죠.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제 생각에는 전공주가 손패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정치적 사건이 그렇지만 일단 시작된 정치적 소동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 폐위가 된다고 하니 온갖 정치적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몰려다니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제 오나라 조정은 손화 지지파와 손패 지지파로 양분되어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것이죠.

이에 격노한 손권은 손화를 폐위시키고 손패를 분란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처형하고 맙니다(252년). 이 과정에서 많은 중신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손화는 퇴위 당한 후 화병이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왕씨는 물론이고 왕씨 소생의 두 아들이 동시에 제거되는 사태가 벌어져 전공주의 3차 목표가 달성됩니다. 전공주의 3단계의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고요.

***(3) '빈계(牝鷄)의 화(禍)'인가?**

전공주의 사건은 오나라를 쇠약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손화가 죽은 후 아직 강보에 쌓인 손량이 태자로 책봉을 받습니다. 이로서 오나라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권력자들이 황권을 농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림⑤] 손권의 묘

역사상에 잘 거론되지는 않지만 오나라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게 된 것은 전공주의 책임이 큽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책임은 손권이 져야 하는 것이겠지만 전공주의 역할도 무시할 일은 아니죠.

그래서 흔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즉 '빈계(牝鷄)의 화(禍)'라는 말을 전공주의 경우에 쓰게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전공주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같은 책동을 부린 것이죠. 전체적인 결말을 살펴보면 전공주는 큰 정치적 야망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손화가 제거된 이후 전공주는 별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전공주는 오로지 왕씨 부인과 그의 아들인 손화에 대한 적개심만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왕씨 부인과 손화가 제거되자 정치 현장을 떠나게 됩니다.

손화가 폐위된 뒤 태자위에 오른 손량(孫亮 : 243-260)은 서기 250년 7세에 태자로 책봉이 됩니다. 그리고 2년 뒤 손권이 죽자 10세의 나이로 황제위에 오릅니다. 어린 손량이 등극하자 제갈각 - 손침 - 손준 등이 권력을 전횡하게 됩니다.

전공주의 사례에서 보면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면 결국은 가정이 튼튼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부인을 거느린 황제의 가정이 과연 화목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왕조는 건국한 이후 이내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지요. 어쨌든 권력자들의 도덕성과 절제력 그리고 판단력은 한 왕조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문제는 가부장적 왕조사회 자체가 가진 한계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전공주나 손화, 손패 등은 모두 한 가족이 아닌가요? 어머니만 다르지 아버지는 모두 같은 이복형제(異腹兄弟)들이죠. 만약 손화와 전공주가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처절하게 제거하려 했을까 ? 제가 볼 때는 아니지요. 자연계에서도 실질적인 경쟁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피비린 나는 투쟁이 발생합니다. 진(秦)의 2세 황제가 자기의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우리는 흔히 '피를 나눈 형제'라는 말을 씁니다. 역사를 냉정히 바라보면 형제간의 싸움이 더욱 처절하고 잔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해방 이후 얼마나 많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겪었습니까? 그래서 형제간의 싸움이 오래될수록 막연히 감정적으로 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형제간의 싸움은 감정의 앙금이 너무 오래 남게 됩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왕조 사회란 권력의 가장 남성적인 표현이며 이 같은 종류의 권력은 미래에서는 가장 피해야할 종류의 것입니다. 군주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러 부인을 취하는데 그 대가를 매번 비싸게 치러야하는 것이 왕조 사회가 가진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소의 패망도 결국은 시앗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가부장제 하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논리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한 집에 부인(夫人)을 여러 명을 두고서 무슨 방법으로 제가(齊家)를 하겠습니까? '시앗 싸움[처첩지전(妻妾之戰)]에 돌부처[石佛]도 돌아 앉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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