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술꽃이 피었다. 밭일을 며칠 하다 보니 봄볕에 낯이 익고 말았다. 봄볕엔 살갗이 쉬 탄다. “가을볕에는 딸을 데리고 나가 일하고, 봄볕에는 며느리를 데리고 나가 일한다”는 속담도 알고 보니 그만한 내력이 있었다.
가족농이 됐든, 두레농이 됐든 여럿이 함께 할 일을 홀로 하는 ‘호락질’ 농사는 쓸쓸할 때가 많다. 밭머리의 나무 그늘 밑에선 따라주는 사람이 없는 술잔을 받는다. 이름 모를 풀을 만났을 땐 “이뭐꼬(是甚麽)?”라고 묻고 싶지만 답할 사람도 없다. 하긴 화두(話頭)는 답해 줄 사람이 없을 때 더욱 화두답다. 마을사람들은 “(일한) 자리가 안 나지요?”라고 위로한다. 홀로 일을 하니 일이 더디어서 일을 한 표가 안 나고, 그래서 물리기도 쉽겠다는 뜻이다. 이번 홍화씨 파종은 어쩔 수 없이 마을 ‘아주머니’ - 다석(多夕)선생이, 여인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아주 먼 이’라 불렀던 - 두 분의 힘을 빌렸다. 그러나 기실 갈수록 텅 비어가는 마을에서 품이라도 팔아주는 이 분들이야말로 정말 귀한 분들이다.
우리 밭 위쪽의 산엔 꿩들이 참 많다. 장끼가 종일 온산이 들썩일 만큼 “꿩! 꿩!”소리를 내지르며 곧잘 울었다. 일을 하다가도 그 돌발적인 울음소리와 날개짓 소리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봄철의 꿩을 생각하니 옛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15년도 더 된 오래 전의 일이다.
어느 초겨울 공주 태화산의 한 암자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내 방에 그 암자 공양주보살의 외아들인 꼬마 녀석이 찾아왔다.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은 모습이 제법 의연했다. 무슨 얘기 끝에 “꿩도 자주 우니?”라고 물으니, 녀석은 잠시 나를 건너다 본 다음 “꿩은 봄이 되어야 울지요”라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춘치자명(春雉自鳴)’, ‘봄이 되면 꿩은 스스로 운다’고 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꼬마 녀석에게선 제법 절밥깨나 ‘묵은’ 티가 묻어났다. 녀석 눈빛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동자승이 따로 없었다.
홍화씨를 땅에 묻는 이 일도 해동갑을 했다. 하늘은 곧 노을빛으로 물들고 날이 저물 기색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에는 남기(嵐氣)가 끼기 시작한다. 바람도 그 방향을 바꿨다. 낮엔 산 위에서 내려왔던 산바람이, 이번엔 다시 그 산을 향해 치달아 오르는 골바람이 되었다.
이 시간이 되면 낮 동안 활발발(活發發)하니 뛰놀던 기운들이 잦아들고, 만상이 그저 적요하다. 저녁 무렵의 이 적요는 이른 새벽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도 아침의 그것과 다르고, 심지어 귀가하는 트랙터 소리도 이른 아침 일 나갈 때의 그것과는 또 달리 들린다. 산을 보면 산색(山色)도, 굴뚝을 보면 그 연기에 배인 은은한 모색(暮色)도 모두 시각적으로 와 닿지 않고 청각적으로 다가온다.
강 건너 산 속에서 누군가 숨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호랑지빠귀였다.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숲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였다.
허리와 어깨, 오금에 통증이 오고, 손목도 몹시 시다. 힘이 모두 빠져나가버린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몸은 참으로 귀한 몸이었다. 육질적인 힘이 모두 빠져나가서 매미 허물처럼 텅 빈 듯한 몸에는 대신 온갖 상념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침묵과 평화가 있었다. 늘 겪는 것이지만, 몸이 쉬면 대체로 마음이 쉬지 못한다. 반대로 몸이 쉬지 않으면 대신 마음이 쉴 때가 많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선생의 <몸의 기도>라는 글은 노동과 몸, 마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명상이 마음의 기도라면, 노동은 몸의 기도다. (중략) 하루 온날의 힘씀으로 술에 취한 듯 노곤한 몸으로 저녁의 노을을 등지고 저 높은 곳에 계신 영원한 님 앞에 머리 숙일 때, 하루의 삶이 온전한 큰님 앞에 바쳐진 듯 기쁨이 넘친다. (중략) 피곤할 때 드리는 기도에는 잡념이 일지 않는다. 가장 거룩한 기도다.”
농민화가라는 평을 들었던 밀레(Millet)의 작품, <만종(晩鐘)>을 연상시키는 글이다. 여기서 ‘영원한 님’이나 ‘큰님’은 특정 종교의 절대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우주적 차원의 영성적 존재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가리킨다. ‘기도’ 역시 특정 종교의 의식이 아니다. 다만 ‘큰님’에 대한 사무치는 마음일 뿐이다. 다석 선생이 말한 ‘술에 취한 듯 노곤한 몸’엔 정말 잡념이 일지 않는다. 그곳엔 참으로 깊은 침묵과 평화와 기쁨이 있다.
허균이 편찬한 <한정록(閑情錄)>을 보니, 송대(宋代)의 학자 나대경(羅大經)이 한 말이 보인다.
“농민은 낮에는 힘써 농사를 짓고 밤에는 나른한 몸으로 단잠을 자게 돼, 사특한 생각이 나올 여유가 없다. 이것이 ‘부지런하면 음사(陰邪)를 멀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시절이 하수상할 때 밤에 ‘단잠’을 자는 농민이 얼마나 있을까만, 그러나 나대경의 말이 노동에 내재된 그 본성의 일면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음사’란 드러나지 않은 사악스러움 따위를 말한다.
이 핍진한 현실 속에서 농사 노동의 형이상학적이거나 신비주의적 요소를 이야기 한다는 게 다소 사치스러운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깊이 만나는 것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육체노동, 특히 농사 노동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그 노동행위 자체만을 두고 보면 매우 단순하고, 가치중립적이라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대지 위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거나 호미질을 하는 행위는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 또는 무슨 규범에 따라 그 선악이나 시비 따위를 재단하고, 이런저런 가치판단을 한달지 하는 정신노동과는 사뭇 그 성격을 달리 한다. 농사 노동이 갖는 이런 특징 때문에 그 노동을 바르게 한다면, 몸은 지칠지라도 마음은 평화스러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겪어보면 농사 노동을 바르게 한다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다. 다석 선생이 말한 ‘술에 취한 듯 노곤한 몸’이 항상 내면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다. 내 경험으론 마음을 일에 집중하지 못할 때, 즉 마음을 하나의 행위에 모두 쏟아 마음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그런 일행삼매(一行三昧)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특히 그랬다. 이를테면 일을 하는 도중에 마음 속에 타인에 대한 분노나 미움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거나, 자신과의 불화에 시달릴 때, 혹은 절망감, 욕망, 의혹과 불안 등 온갖 상념이 극성을 부려 마음이 산란할 때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곧 지쳐버린다. 하루가 아닌 반나절만 일을 해도 몹시 힘들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 ‘온날’ 일을 하면, 다음 날엔 일병이 생길 정도였다. 이런 때는 결국 몸도 쉬지 못하고 마음도 쉬지 못한다.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 잔다(饑來喫飯 困來卽眠).”
수행이 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대들은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지 않고 백 가지의 분별을 따지며, 잠을 잘 때는 잠을 자지 않고 천 가지의 계교를 일으킨다(他喫飯時 不肯喫飯 百種須索, 睡時不肯睡 千般計校).”
밥 한 그릇을 비울 동안 자기 마음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길지도 않은 일상적인 시간에,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져가는 무수한 상념들을 보며 놀란 적이 있을 게다.
몇 해 전 호미로 풀을 매다가 체험한 걸 수첩에 남겼다. 다시 읽어보니 지금의 내 마음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마음이 거칠면 호미질이 거칠고, 호미질이 거칠면 마음이 거칠다. 마음이 곧 호미질이고 호미질이 곧 마음이다.
허리가 아픈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다리가 저려오는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손목이 시어오는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몸이 지쳐오는가? 역시 바라보기만 하라. 오직 호미질에 마음을 쏟고,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몸에서 육질적인 힘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다만 바라보기만 하고 기다려야 한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릴 때, 마침내 그대는 침묵과 만날지도 모른다.”
여기서 ‘침묵’이란 자아나 자의식이 빚어내는 온갖 상념들이 사라져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날은 일에 깊숙이 빠져들다 보니, 나중엔 ‘나(我)’는 사라지고 호미질 하는 손만 남았다. 대체로 오전엔 깊이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몸에서 육질적인 힘이 넘쳐났고, 삼라만상의 기운들도 수선스럽게 느껴졌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사위의 기운들도 잦아들고 몸도 지친다. 종일 망상을 피우던 마음도 그 지친 몸 속에서 종종 그 기운의 흐름을 따라 잦아들었다. 일과 마음이 일치되는 일행삼매가 이루어지는 시간은 대체로 이런 저녁 시간이다. 어쩌면 하루 일의 후반부, 특히 마지막 두세 시간 동안 자신의 노동에 집중할 수 있다면 내면의 침묵과 평화를 만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을 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자꾸 쉬거나 술과 담배를 하고, 비시(非時)에도 새참을 먹는 행위들은 일과 마음이 일치된 그런 ‘노곤노곤한’ 몸을 만나는 걸 방해한다. 한편 이 ‘노곤노곤한’ 몸 속에는 특유의 부드럽고 유장하게 느껴지는 힘이 숨어있다. 마음이 침묵할 때 비로소 나오는 힘이다. 이 힘은 노동을 처음 시작할 때의 그 팔팔한, 근육질적인 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힘이 빠져나가버린 몸에서 이런 독특한 성격의 새로운 힘을 만날 때면 몹시 경이롭다. 이 힘 때문에 몸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하루 일을 끝내고 산길을 내려오는 ‘귀가’의 행위도 기실 만만한 일은 아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 품꾼들의 새참으로 빵과 두유, 보리차를 준비하는 행위나 실제로 밭에 씨를 뿌리는 행위나 지금처럼 산길을 내려오거나 하는 행위는 모두 평등한 가치를 갖는다. “지금(Now), 여기(Here), 자기(Self)”가 실존적인 삶의 3대 테제라면, 이 세 부류의 행위들은 매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서의 ‘자기’의 치열한 표현이다. 밭에 씨를 묻는 일만이 시쳇말로 ‘메인 게임(Main Game)’인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모든 행위가 ‘메인 게임’이다. 그래서 귀가 길은 ‘푹 퍼져’ 돌아오는 그런 길이 될 수 없었다.
산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어둠은 일원론적인, 전일성(全一性)의 세계다. 모든 존재들은 마침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꽃을 달고 있던 수많은 나무들도 그 개체성을 잃고 ‘그냥’ 산이 되어갔다. 중턱의 계곡에서 눈부시게 설화(雪花)를 피워낸 산벚꽃나무도 산이 되고, 개살구나무와 산복숭아, ‘고야’나 ‘오야’라고 부르는 야생 자두나무, 진달래의 연분홍빛 꽃들도 산이 되고, 산자락에서 노란 꽃을 단 산수유, 산개나리도 모두 산이 되어갔다. 어느 시구에 “대지(大地)는 꽃을 통해 웃는다”고 했으니, 꽃을 단 나무들은 애초부터 산 그 자체였을까.
나는 밭일을 끝내고 ‘나’를 잃지 않고 산길을 내려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보면 나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산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마을에 내려와 홍화씨를 파종한 산밭을 보니, 그 밭도 이미 산이 되어 있었다.
먼 산에서 호랑지빠귀의 휘파람 부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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