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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자유에 대한 단상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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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자유에 대한 단상 (둘)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16>

"일년 중 가장 큰 행사는 '참' 춤 의식이다. 이 의식이 열리는 기간엔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연극의 형태로 상연하고, 모든 사람의 '적(敵)' - '자아(自我)' -의 형상을 죽이는 의식을 치른다. 승려들은 티베트 신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다채로운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수백, 수천의 마을사람들은 이를 보러 사원을 찾는다. (중략)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기도문을 외는 소리와 웃음소리에 뒤섞인다."

서부 히말라야 중턱의 황량한 고원지대. 그곳에 라다크가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의 무대다. ('반(反)세계화'운동의 대표적인 횃불잡이이기도 한 그녀는, 지난 해 12월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

라다크인들은 자신들의 불교적 세계관을 이처럼 춤과 노래, 종교적 독송 따위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자아'를 모든 사람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 형상을 죽인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눈 덮인 산과 반달 모양의 골짜기가 있는 라다크. 그곳엔 인간뿐만 아니라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었다. 자주개자리와 야생 붓꽃, 에델바이스들이 때가 되면 꽃을 피웠고, 푸른 양(羊)과 눈표범, '야크'라는 이름의 소도 살았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인간의 마음, 그 '자아'라는 게, 자연 속의 다른 생명들, 이를테면 에델바이스나 푸른 양의 마음과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교적 세계관에서 보면, 온갖 편견과 독선으로 가득 찬 인간의 자아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如實)' 바라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 자아는 초극되어야 될 대상이다. 라다크인들은 그런 세계관을 바로 '참' 춤 의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라다크인들에게서 '조금도 자의식(自意識)이 섞이지 않은' 태도를 본 헬레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은 사물이 '어떠해야 된다'는 생각에 매달리기보다는, 복되게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추수를 하는 도중에 눈이나 비가 와서 여러 달 동안 애써 잘 보살핀 밀이나 보리를 망치는 일이 있다. 그래도 그들은 흔히 자신들의 곤경에 대해 농담을 하며, 전혀 심란해 하지 않는다."

사물을 대할 때 그 선악이나 호오(好惡)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직관(直觀)이다. 라다크인들은 그런 맥락에서 직관적인 삶에 꽤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의 제목으로 '직관과 자유'라는 표현을 쓰다 보니 '직관'과 '자유'가 별개의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실, 이 둘은 이웃사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깝다. 직관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유다. 직관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자유인이다.

자유라는 게 뭘까. 때로는 시인의 펜을 통해, 때로는 철학자의 우수 어린 눈빛을 통해, 때로는 혁명가의 칼을 통해 자유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접근하기에 따라서는 이 자유도 무수한 뜻으로 읽힌다.

"모든 국민은 거주ㆍ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우리 나라 헌법 제14조다.

거주ㆍ이전의 자유! 당대(唐代)의 선사인 임제(臨濟)의 어록에도 거주의 자유는 나온다.

"약득진정견해 생사불염 거주자유(若得眞正見解 生死不染 去住自由)."
(만약 진정한 견해를 얻는다면, 태어남과 죽음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거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헌법상의 '거주의 자유'와 임제의 '거주자유'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물론 한자로는 전자는 '居住'이고, 후자는 '去住'이다. 문자야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 훈(訓)만을 갖고 보면 뜻이 별반 다를 것도 없다.

헌법상의 거주ㆍ이전의 자유는 공공 복지에 위반되지 않는 한, 자유로이 거주, 이전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기본적 인권의 하나다.

유신과 군사정권 시절, '우리의 전위와 후방'이라는 상찬을 받은, 한 노(老)지식인의 저서 제목으로 <自由人, 자유인>이란 게 있었다. 그 자유는 "우리 국가ㆍ사회의 안과 밖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경험하는 일들을 그 참(眞實)된 모습으로 보고 자유롭게 판단"하는 그런 자유였다. 이른바 우상(偶像)으로부터의 지적(知的)인 자유였다.

이런 유형의 자유는 모두 상대적인 자유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자유가 아니다. 추구하는 가치의 성격에 따라 인간들은 자유의 가치기준을 설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늘 가변적이다.

이런 자유는 모두 영어의 프리덤(freedom)이나 리버티(liberty)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임제가 말한 자유는 프리덤이나 리버티로 번역될 수 없는 자유다. 그가 말한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였다. 마치 노자의 '자연(自然)'이 '네이처(nature)'로 번역될 수 없는 것과 닮았다. 노자의 '자연'은 한 예로, '셀프-소우(self-so)'로 번역됐었다.

"자유라는 용어는 원래 당대 조사선(祖師禪)이 수립한 특유의 선어(禪語)이며, 선사들이 자신의 진정한 견해를 표현한 초기 선종(禪宗)의 대표적 구호였다."

세계적 선학자(禪學者)인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의 지적이다.

임제가 말한 '거주(去住)'란 인간의 삶과 행위의 총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그가 말한 자유는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그 가치를 스스로 결정해 가는 그런 자유를 말한다. '스스로 자(自)'와 '말미암을 유(由)'에서, '자'는 자아의 '자' - 흔히 소아(小我)나 가아(假我)라고도 부르는 그 '자'가 아니다. 이 '자'는 진아(眞我) 혹은 대아(大我)의 그 '자'이다. '진아'는 '무아(無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등장하는 '오상아(吾喪我)'의 '상아' 역시 무아와 다르지 않다.) 임제는 인간이 진아의 존재태(存在態)로 살고, 그 삶과 행위가 진아로부터 '말미암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걸 설파하고 있다. 편의상 진아를 'self'가 아닌, 'Self'로 표기한다면 임제의 자유에는 'from-Self'의 의미가 담겨 있다.

불교학사전류에서는 자유를 '무명(無明)에서 해탈된 이의 무애자재(無碍自在)함'으로 풀이한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불교논리학이라 할만한 인명학(因明學)에서는 자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일정한 인과계열(因果系列)에서, 그 원인이 다른 인과계열이나 조건에 의하여 방해됨이 없이 결과가 생기는 일."

어렵다. 아마 '다른 인과계열이나 조건에 의하여 방해됨이 없이'란, 결국 진아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태(存在態)라야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사실 건강한 자아, 건강한 자의식도 그 나름의 공리성은 물론 충분히 있다. 그러나 한편 그 자아나 자의식의 숙명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구도적(求道的) 지향도 있어 왔다. 자아의 초극, 곧 '무아'에 대한 지향이 그것이다. 그 방법론이 불교에선 명상이었다.

종로의 인사동에 가면 '의사(疑似)' 자유주의자들을 종종 만난다. 길게 자란 수염에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헝겊을 덧대어 기운,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들 -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들이다. 천상병과 중광(重光) 이래, 인사동에 기인다운 기인은 더 이상 없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기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의사' 자유주의자들을 판별해내는 기준은 '자유로운 자아'를 원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보면 된다. 전자가 바로 '의사'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제법, 걸림 없어 보이는 무애행(無碍行)을 흉내내지만, 눈주어 살펴보면 자아의 그 '아상(我相)'을 결코 숨기질 못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라다크인들의 '참' 춤 의식은 매년, 불탑이 있는 사원에서 열린다. 그 불탑의 꼭대기엔 매우 은유적인 장식품 하나가 달려 있다. 태양을 감싸고 있는 초생달 모양의 조형물이 바로 그것이다. 헬레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조형물은) 생명의 단일성, 즉 이원성(二元性)의 종식을 나타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태양과 달이,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원성의 종식' 즉, 비이원성(非二元性ㆍNon-Duality)은 태양과 달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나(我)와 나 이외의 모든 존재들간에도 존재한다. 나와 나 이외의 대상이 비이원적으로, 곧 하나 되어 존재하려면, 먼저 내가 나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바로 '무아'다. 직관과 자유는 본질적으로 이런 무아적인 존재태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한편 이들은 비이원성으로 종종 그 참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겨울산(山)을 보면 눈이 시리다. 능선에 갈잎나무가 자라는 그 산은,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에도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여윈 몸'을 뒤척인다.

산은, 나무들이 그 몸의 잎들을 모두 버렸을 때 두 개의 공제선(空際線)을 보여 주었다. 나무의 수관(樹冠)이 하늘과 만났을 때 생긴 공제선, 늘 보아오던 공제선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산의 속살의 선(線)이다. 나목(裸木)의 사이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나무의 뿌리께를 따라 드러난 산의 속살의 선, 또 하나의 공제선이다. 떨궈내고 비워야 드러난다. 겨울산은 그걸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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