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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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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5>

제갈량 영웅만들기

***들어가는 글**

유명 외국 저술가가 쓴 책에서, 제갈량(諸葛亮 : 181~234)이 빈 성 위에서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사마의(司馬懿 : 179~251)의 수만 대군을 물리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과연 병법의 대가라고 하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이 사건은 있을 수도 없고 실제로 없었던 사건인데 마치 사실처럼 묘사되어 있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수만의 대군이 운집해 있는데 성 위에서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홀로 거문고를 타고, 더욱 가관인 것은 그 거문고의 음률을 듣고서 살기(殺氣)를 느끼고 사마의가 철수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마이크 시설도 없는데다 수만의 군사들이 모여 말울음 소리, 창검 소리로 소란한 벌판에서 성위에서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다? 참으로 우스운 얘기입니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지만 제갈량을 빼고 모두 바보만 살아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제갈량은 역사상 유례없이 중국을 빛낸 사람은 틀림없습니다. 중국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소설책 하나로 전세계에 중국을 알렸고 중국은 멋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죠.

그래도 짚으로 만든 고물 조각배로 화살 십만개를 주어오고, 말 한마디에 왕랑(王朗)이 말에서 떨어져 죽고 편지 한통으로 적장을 죽이고, 동남풍을 불어오고 하는 만화(漫畵)같은 사건들을 인용하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냉수 한 사발을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1) 제갈량은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어요**

정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제갈량이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습니다. 제갈량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한 것은 유비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 208)은 제갈량이 개전(開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투의 지휘관은 아니었죠. 이 때 제갈량의 공적은 외교관(外交官)으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이 부분은'적벽대전 - 세 줄의 기록으로 책 한 권 만들기'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제갈량이 군사 전략가로서 위대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위나라의 대군과 싸우면서 결정적인 패전(敗戰)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만큼 촉의 군사력이 열세였기 때문이죠. 제갈량은 정사'삼국지'의 편저자인 진수의 지적처럼, 군사전략가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정치가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단 실제로 제갈량이 한 전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갈량이 군대를 지휘하기 전 촉은 이미 형주(荊州)라는 전략상 요충지를 잃었습니다. 촉은 지형상으로는 천연요새이지만, 다른 지방을 공격하기도 매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항상 군수품 보급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 있어서 군수품 보급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갈량은 위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형주와 익주에서 북상하여 위를 서ㆍ남방에서 각각 협공하는 작전을 지론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 양동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죠. 어쨌든 제갈량은 유비의 뜻을 받들어 중원 정벌의 준비를 한 후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올립니다.

서기 227년, 제갈량은 성도(成都 : 촉의 수도)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벌의 길에 오릅니다. 제갈량은 먼저 원래 촉의 부장으로 있다가 위나라에 투항해 있던 신성(新城) 태수 맹달(孟達)을 포섭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를 알아차리고 완(宛)에서 신성을 급습하여 맹달을 침으로서 제갈량의 위나라 침공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림①] 제갈량의 북벌노선도

228년 사실상 시작된 북벌을 위해 제갈량은 한중(漢中)에 주둔합니다. 제갈량은 전격적으로 기산(祁山)을 공격하여 3군을 장악했으나 가정(街亭)으로 진출한 선봉장 마속(馬謖)이 군율을 어기고 위의 총공격에 대패하고 철수합니다. 그런데 [그림①]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가정은 설령 촉군이 장악했다 해도 위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 오히려 고립되는 지역입니다.

229년 제갈량은 진수의 아버지인 진식(陳式)을 파견하여 무도, 음평을 공격하여 평정합니다. [그림①]에서 보면 후방을 안정화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31년 서부 지구 전투가 지구전(持久戰)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한 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진격하여 사마의의 군과 대치하게 되었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의 의도와는 달리 수비 태세만을 견지하였고 결국 제갈량은 보급 문제로 철수합니다. 이 때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는 합니다.

234년 봄, 제갈량은 다시 북벌을 단행하여 오장원(五丈原)에 포진하여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과 대치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기도 했지만, 1백여 일 만에 제갈량은 진중에서 54세로 병으로 죽습니다.

제갈량을 아끼는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별 내용이 없는 듯합니다.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사마의(司馬懿) 부자(父子)를 몇 번씩 죽일 수도 있었고 위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기 직전까지 간 듯이 이야기하지만 실은 장안(長安)의 외곽 방어 기지인 미성도 함락한 바가 없습니다. 장안 공격을 위한 교두보 하나 확보하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당시 장안은 위나라 서부 지역 방위 사령부였는데 촉군은 장안 근방에도 못 갔다는 말입니다. 설령 장안을 점령한다 했더라도 위나라를 함락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안이 함락될 경우, 위나라는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촉군과 싸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제갈량의 북벌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기적으로 장안 주변의 지역을 서서히 잠식해서 위나라를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제갈량의 주공격로를 보더라도(오장원 진출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위나라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죠.

촉군이 위나라와 대전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와 지속적인 전쟁을 하게되면 새로운 딜레마에 빠집니다. 바로 경제(經濟) 문제입니다. 군사적 대치를 통해 국가 위기를 조성하여 국민적 단합을 유도해낼 수 있지만 이것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전쟁의 바탕이 되는 것은 결국은 경제력(經濟力)이기 때문입니다.

***(2) 제갈량은 왜 북벌에 집착했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제갈량은 북벌(北伐)을 고집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유비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추진했다는 것인데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북벌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결국은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서 멸망할 것이 자명할 것이라고 제갈량은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우상은 관중(管仲)이었습니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천하의 패자가 되게 한 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갈량 자신의 현실은 작은 주에 불과한 초라한 나라에 국무총리를 맡고 있었던 것이지요. 제갈량에게는 관중과 같이 촉을 훌륭한 나라로 만들어야 하고 나아가 위나라를 정벌하여야 하는 두 가지의 무거운 짐이 있었지요. 문제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북벌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벌의 수행은 촉 백성들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지요. 정사 기록에 의하면 촉의 총인구가 94만인데 갑옷입은 병사가 10만 2천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총인구 가운데 남자를 절반인 42만으로 보면 30% 정도가 청장년 남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14만이 되는데 이들 가운데 73%가 군인이었다는 말이죠. 즉 경제활동의 주체들의 절대 다수가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비생산적인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것이죠. 이러니 경제의 현상유지는 고사하고 경제 파탄에 이르는 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북벌이 초래한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사에 촉 정벌 당시 위 황제의 조서(詔書)에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촉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열세의 상태에서 지속적인 무력 증강과 전국민의 군사화전략이 불가피했을 수도 있겠습니다(어쩌면 지금의 북한도 똑같은 문제에 봉착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요즘 우리나라가 이라크에 3천명을 파견하는데도 얼마나 시끄럽고 반대가 많습니까?

위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나라의 총인구를 5천만, 군대를 70만으로 계산하면 우리의 군대는 청장년의 8%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보면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막강한 군사 대국입니다. 제가 보기에 군대를 청장년의 2%~3% 정도를 유지하는 것은 케인즈(John M. Keynes : 1883~1946)의 이론처럼 경제적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한 나라의 군사 규모는 국민총생산(GNP), 국방 예산, 국내의 실업율(失業率) 등을 고려하여 결정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이상이 되면 경제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촉나라와 같이 거의 73%라고 하면 경제 파탄을 지나 이미 경제를 왜곡(歪曲)하여 회생이 불가능한 수준이 됩니다(현재 북한을 보세요).

그래서 제갈량이 죽은 후 촉황제 유선(劉禪)은 즉각 북벌을 중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촉의 지도부였던 장완(蔣琬), 비의(費禕 : ?~253)도 수세(守勢)로 전환하면서 대규모 군대 동원을 중지시킵니다. 비의는 강유(姜維)가 아무리 졸라도 1만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게 하지요. 유선이나 비의는 경제(經濟)를 잘 아는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의가 의문의 사고로 죽은 후(253년) 강유는 북벌을 다시 시작하더니 결국 10년도 채 안되어 촉은 멸망하고 맙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제갈량 자신의 현실적인 위치는 익주(촉)의 종사(從事 : 주목의 속관)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정도였지요. 유비는 익주의 주목(州牧 : 현재의 도지사) 정도인데도 촉한의 황제를 칭하였습니다. 그 명분은 후한(後漢)의 광무제처럼 황권을 되찾아서 대한제국(大漢帝國)을 다시 건설하겠다는 것이었죠. 제갈량이 꿈꾸는 것은 바로 대한(大漢) 제국의 승상(丞相 : 국무총리)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갈량 자신이 북벌을 해야만 대한 제국의 승상으로써의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갈량이 다만 촉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촉의 건설에 매진했다면 그는 익주(益州 : 촉)의 이름없는 관리로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아마 여러분들은 그의 이름을 몰랐을 것입니다.

북벌이 유비의 명분을 계승한 것이라고는 해도 당시의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유비가 말하는 명분을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지요. 왜냐하면 유비에게로 간 인재들을 복룡(伏龍 : 제갈량)과 봉추(鳳雛 : 방통)가 있었지만 실제로 대부분 인재들은 조조 휘하로 모였고 유비가 거둔 인재들은 대부분 소외되었거나 이름없는 극소수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름이 없다고 하여 능력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죠. 저는 다만 그 시대 지식인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은 유비의 실리적인 대의명분과 제갈량 개인의 이상(理想)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한 승상(大漢 丞相) 제갈량이라면 위나라의 초등학교 어린이라도 배를 잡고 웃었을테지만 주자(朱子)에 의해 익주목 유비와 그의 참모 제갈량은 한 황제(漢 皇帝)와 한나라 승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죠.

그러면 주자는 왜 유비와 제갈량을 이토록 과장스럽게 미화(美化)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한족(漢族)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송나라는 금(金)나라ㆍ요(遼)나라에 줄곧 시달리다가 급기야 세계적인 대제국 몽골의 침입을 받아서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민족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여 가장 중국적인 것, 가장 문화적인 전통과 역사를 지켜야 하는데 주자는 우선 정신적으로 중국인들이 일체성을 회복해야한다고 믿었지요. 주자가 그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한 것이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었지요. 이것은 조조(曹操)의 위나라를 마치 북방유목민으로 비유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종의 역사 프로젝트 였지요. 쉽게 말하면'촉한공정(蜀漢工程)'인셈이죠.

***(3) 융중대책(隆中對策 : 천하삼분지계)**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삼국지'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제갈량의 천재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흔히 제갈량이 은거하였던 장소(융중)를 따서 융중대책(隆中對策)이라고 합니다. 융중대책은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할 때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관중'삼국지'에는 이것이 모든 문제를 풀어내는 '마스터 키'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이것은 과연 타당한 얘기일까요?

제갈량의 융중대책에 대한 분석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융중대책이 시의에 적절했는가 하는 점, 다른 하나는 융중대책이 과연 제갈량의 작품인가 하는 점입니다.

첫째, 융중대책은 당시 유비가 처한 상황, 즉 조조군(曹操軍)이 남하하려는 상황에서는 별로 적절한 대책이 아니었습니다. 융중대책은 거시적 안목에서 유비가 취할 수 있는 방도였지, 당시 조조군의 형주 침공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시의에 적절한 것은 아니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회사가 오늘 오후 4시면 부도나는 마당에 최고의 참모라는 사람이 아침에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한가로이 앉아서 강남에는 땅값이 비싸니 회사를 강원도의 소도시로 옮깁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일단은 무슨 짓을 하든지 단기 자금이라도 끌어들여 급한 불을 꺼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회사와 인수ㆍ합병을 해야지요.

둘째,'천하삼분지계(융중대책)'는 당시 제갈량의 생각이었다기보다는 지식인들에게 유행했던 생각이었지요. 예를 들면, 노숙(魯肅), 방통(龐統), 감녕(甘寧), 주유(周瑜), 법정(法正) 등이 모두 '천하삼분'을 거론하고 있지요. 따라서 이것을 명석했던 유비가 몰랐을 리도 없지요. 왜냐하면 융중대책은 당시의 상황을 따져보면 그리 놀랍거나 새로운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당시 대세력은 조조와 원소이고 나머지는 여포, 원술, 손권(강동), 유표(형주), 유장(익주) 등이었는데 이들은 상호간의 갈등과 대립을 이용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전략적 관행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당시에는 남아있는 세력이라고는 유표, 유장, 손권뿐이니 자연스럽게 '천하삼분지계'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정사의 기록으로만 봐도 '천하삼분지계'는 제갈량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천하삼분지계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오나라의 노숙(魯肅)입니다.

정사에 따르면 일찍이 노숙이 몸을 굽혀 손권을 찾아왔을 때, 손권이 장기적인 전략을 묻자 노숙은 손권에게"장군을 위한 계책은 오직 강동을 솥의 발의 하나로 삼아서 천하의 변화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將軍計, 惟有鼎足江東, 以觀天下之)"라고 하고 있죠(정사, 오서, 노숙전). 그런데 반하여 애당초 제갈량은 오나라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다기보다는 조조를 정벌하는 데 손권의 무력을 이용하려는 의도였지요. 제갈량이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손권을 적벽대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할 때입니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면서"만약 조조의 군대를 (유비와 연합하여) 격파하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형주와 오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솥발처럼 삼국이 정립하는 형태가 되게 됩니다(操軍破, 必北還, 如此則荊吳之勢彊, 鼎足之形成矣)"라고 하였지요(정사, 촉서 제갈량전)

나관중'삼국지'에는 노숙이 마음씨만 좋은 한심한 모사로 나오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숙은 천하를 보는 눈이 탁월하였다고 합니다. 노숙은 손권보다는 십년이나 나이가 많았으므로 손권에게 노숙은 마치 아버지이자 삼촌이며 형님의 역할도 동시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손책(孫策)의 죽음으로 근심으로 날을 지새우던 손권은 노숙을 보자 큰 시름을 덜었다고 합니다.

노숙은 일찍부터 국제 정세에 밝아 손권에게 강동(오나라)을 보전하는 길은 원소(袁紹)ㆍ조조(曹操)의 대립을 이용하여 강동을 보전하는 것 즉 천하가 원소ㆍ조조ㆍ강동(손권)으로 나눠지도록 만들어 조조가 함부로 강동을 넘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숙이 손권에게 권한 것은 이제 한나라는 다시 부흥시킬 수 없을 것이고 조조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으니 남은 것은 솥의 세 발처럼 오나라가 강동에 버티고 있으면서 조조와 원소의 싸움을 적절히 이용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조조에 의해 원소가 제거되자 이제는 유표(劉表)가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유표가 죽고 맙니다. 노숙은 조문 사절을 구실로 당시 정황을 파악하러 형주로 갔다가 조조군의 남하 소식을 접하고 유표를 대신할 사람으로 유비를 택한 것입니다. 유비가 새로운 파트너로 부상한 지금 노숙의 전략은 다소 수정이 불가피해졌지요. 일단 촉과 오가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위나라를 멸한 뒤에 위나라 의 8개 주를 양분하여 지형적으로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촉과 오의 영토에 귀속을 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말을 위나라 지식인들이 들었으면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오나라에서는 상당히 진지한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하삼분지계(융즁대책)라는 것은 제갈량이 가장 먼저 제시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주도한 세력도 촉이 아니라 오나라였던 것이지요. 나관중'삼국지'에서처럼 그것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무슨 비단 주머니식으로 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시 유비가 처한 상황을 당장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제갈량은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천하삼분'을 구상한 반면 오나라는 강동의 현상유지를 위해서만 '천하삼분'을 구상하지요. 정사를 보면 삼고초려(三顧草廬) 당시 제갈량은 유비에게'천하삼분'이라는 말보다는 형주와 익주에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양동작전을 제시합니다.

정사를 통해 분석해보면 제갈량이 유비 휘하에 든 것은 조조의 형주 정벌이 있기 전이었고 일단 서서(徐庶)와 함께 유비의 참모 역할을 해오면서 형주를 유비가 장악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지요. 이러는 가운데 노숙이 유비를 만나러오자 그를 따라 오나라로 가서 위나라와 오나라를 적벽 대전으로 끌어 들입니다. 이 적벽대전은 제갈량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결정적으로 유비의 신뢰를 받게 한 사건이었죠. 제갈량은 형주에서의 탈출과 적벽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게 되고 충분한 경험을 쌓게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천하삼분지계'란 제갈량이 처음으로 제기한 것도 아니요, 이 계책은 현상유지를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했으며 그것을 주도한 세력은 주로 오나라라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노숙과 손권이 천하삼분지계로 제갈량을 철저히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적벽대전에서는 제갈량에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그 뒤의 손권은 형주를 빼앗고 철저히 촉을 이용합니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때도 오나라는 대부분 침묵합니다. 오나라는 촉과 위의 전쟁에서 침묵함으로써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갈량의 책략이 오히려 오나라에 지속적으로 이용당했음을 의미하죠. 결국 촉은 일찍 멸망하고 오나라는 20년 뒤에 멸망합니다. 제갈량이 좀더 효과적으로 오나라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훨씬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제가 보기에 제갈량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달리 너무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아마 건강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죠.

***(4) 촉한공정(蜀漢工程) : 중국인들의 제갈량 영웅만들기**

제갈량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인 제갈현(諸葛玄) 슬하에서 자라 유년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습니다. 제갈량이 세살 되던 해가 바로 황건 농민군의 민중봉기가 일어난 해(184 : 황건적의 난)였죠. 이 때의 선비들은 여유있게 경전(經典)에만 집착하여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통일을 위해 보다 실질적인 학문을 하는 풍토가 많이 조성이 되었고 따라서 병법이나 법가가 이들 지식인들의 사고를 지배한 듯합니다.

[그림②] 제갈량(貫華堂三國志演義에서)

제갈량은 그 출신성분으로 봐서 중앙무대에 크게 알려진 사람은 아닌 듯하지만 전란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조용한 형주로 피란을 오자 차츰 알려진 듯합니다. 그래서 적벽대전 이전의 제갈량의 정치 이력은 기록할만한 것이 없고 유비와의 만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원래 대부분의 인재란 지조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지만 제갈량은 이 점에 있어서는 후세에 모범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뛰어난 인재들은 능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든지 등용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들 가운데 탁월한 자는 역심(逆心)을 품을 소지도 있죠. 그래서 제갈량이 유비를 선택하고 그의 아들 유선까지도 성실하게 보좌한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도 건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갈량은 요즘 우리나라 일부 공무원들이나 정치가들과는 달리 도덕적인 청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이 점만으로도 제갈량은 훌륭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위나라에 있었어도 그처럼 청렴한 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촉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주(州)에 불과하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쉽게 통제가 되지만 위나라와 같이 큰 나라에서는 워낙 많은 호족들이 있고 사상도 복잡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도 복잡하여 제갈량처럼 행동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나라가 클 경우에는 청렴성이나 정치적 이상만으로 통치하기가 어렵지요. 수많은 정치세력과 이익단체(利益團體)들이 산재해 있고 그들과 대화나 타협을 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음성적인 불법 정치 자금이 들어가겠습니까?

사실 사마의도 제갈량에 못지않은 우국지사(憂國之士)에 충신이었지만 몇 번씩 반대파들에 의해 숙청 당하고 죽음의 문턱에 몰려 자신을 방어하려다가 결국은 정권을 장악하고 그의 손자가 새 왕조를 엽니다. 물론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것이 반역이라면 이 책임의 일부는 사마의에게도 있겠지요.

우리 입장에서 제갈량을 보면 어떻게 될까요? 제갈량의 경우는 좀 지나친'중화영웅 만들기'는 아닐까요? 우리 나라에도 밀우와 유유, 박제상, 계백장군, 성충과 흥수, 강감찬 장군, 최영 장군, 정몽주 선생, 황희 정승, 이순신 장군, 녹두 장군, 김구 선생 등(여기에 빠진 다른 많은 충의지사 분들께 죄송합니다) 능력이 탁월하면서도 나라에 충성하는 걸로 치면 제갈량 못지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원숭환(袁崇煥: ?~1630), 악비(岳飛 : 1103~ 1141) 같은 이는 구국의 영웅으로 탁월한 무장이자 군사 전략가였지만 모함을 받아서 극형에 처해집니다. 이들의 애족 애족하는 정신은 중국인에게는 만대의 모범이기도 하였고 그 죽음 또한 중국인들은 두고두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제갈량이 중화 영웅만들기의 혜택을 누렸을까요?

악비에 대해서는 잘 아실테니 원숭환에 대해서만 간략히 말해봅시다. 원숭환은 중국 명(明)나라 때 무장으로 광동(廣東)에서 출생하여 병부직방주사(兵部職方主事)·안찰사(按察使)를 지냈습니다. 1626년 청(淸)나라 군대가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했을 때 그는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총포를 가지고 이를 격퇴시켰고 병부상서가 되었습니다. 원숭환이 있음으로 하여 명나라 정벌이 어려워진 청나라 태종은 원숭환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뜬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러자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인데도 원숭환을 시기하던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서 원숭환은 극형을 당하게 됩니다. 원숭환이 죽은 후 명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지요. 원숭환의 모함은 아마도 그의 출신지가 과거 남만 지역이었던 광동 지역이었던 것도 원인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 어느 나라나 지역 차별 이것이 문제입니다.

중국은 유달리 영웅(英雄) 숭상 신드롬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즉 미국이나 중국과 같이 다민족으로 구성된 큰 나라에서는 국가적인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영웅만들기에 주력합니다. 왜냐하면 다소 과장스럽게 영웅을 만들어야 민족적 일체감을 조정할 수 있고, 분열되기 쉬운 민족적인 배경들을 하나의 영웅을 통하여 동질성을 만들어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죠(이제부터는 미국이나 중국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또는 어떤 사건을 통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나를 한번 관찰해보세요. 재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의 영웅을 만드는 데 희생양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이 점들은 유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이미 많이 지적되었습니다.

사실 능력만으로 보면, 제갈량을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만 유독 제갈량만이 이 혜택을 누렸는가를 따져보면 제갈량의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명나라 태조가 한족의 명예로운 부흥과 국가적인 일체성[아이덴터티(identity)]을 위하여 한(漢)나라를 모델국가(model state)로 선정해버리니 그 한나라의 전통을 어슬프게나마 계승한 유비와 그의 추종자들이 도매급으로 미화될 수 있는 혜택을 받은 것이죠. 쉽게 말해서 명나라 촉한공정(蜀漢工程)의 수혜자(受惠者)들인셈이죠.

제갈량 영웅만들기를 통하여 중국은 두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국내적인 효과로 제갈량을 통하여 국민적 통합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죠. 다른 하나는 국제적 효과로 중화주의를 주변국가에 전파하고 결국 제갈량의 중국은 위대한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대부분이 제갈량을 오매불망 존경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제갈량 영웅만들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제갈량은 자신의 저서에서"동이(東夷 : 과거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낮추어 부르던 명칭)는 상하가 화목하여 감히 건드릴 수가 없으니 먼저 임금과 신하, 백성들 사이를 이간하여 그들이 화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 백성 들 사이에 틈이 생긴 후에도 친선을 도모하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사신을 빈번히 왕래시켜 안심시키다가 강력한 군대로 불의에 침공해야만 이들을 정벌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바로 이 사람이 여러분들이 그 동안 눈물겹도록 존경했던 제갈량이라는 사람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촉한공정(蜀漢工程)을 통하여 제갈량이 얼마나 위대하게 거듭났는지를 보아왔습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요, 만화같은 이야기였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는 이번 기회에 우리도 제갈량과 같은 세계적인 대배우를 하나 만들어 세계 문화시장에 내어 놓기를 제안합니다. 찾아보면 우리의 역사에서도 세계적인 대배우의 자질을 갖춘 위인들이 무궁 무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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