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나관중‘삼국지’와는 다르게 정사‘삼국지’를 보다 보면 김빠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촉나라와 오나라가 멸망하는 부분이죠. 어쩌면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이렇게 짧고 허무하게 끝나는가 하는 느낌말입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위나라 군대가 이동하는 기간을 빼면 거의 한, 두 달 만에 싱겁게 전쟁이 끝납니다. 먼저 촉 멸망의 실제 기록을 보시죠.
‘263년 여름, 위나라가 대대적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여러 갈래로 촉을 공격하였다. 촉은 장익·요화·동궐 등을 파견하여 막았다. 이 해 겨울 등애(위)는 제갈첨(촉)을 면죽에서 격파하였다. 유선은 항복하였다.”
즉 여름에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겨울에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위나라에서 촉나라까지 가는데도 여러 달이 걸리는 거리이고 도중에도 각종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 터인데도 이렇게 빨리 전쟁이 끝납니다. 오히려 위나라 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보다 짧지요(예를 들면 위나라 장수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거의 10개월이 걸립니다). 그런데 촉나라는 그래도 오나라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오나라를 보시죠.
‘279년 겨울 진나라는 사마주·왕혼·주준·두예·왕준 등에게 오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280년 3월 15일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손호의 결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태우고 나서 초청하여 만났다.’
오나라의 멸망도 실제적인 전투가 거의 없이 투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겨울에 진군하여 봄에 항복을 받았으니 이것이 과연 국가 간의 전쟁인가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마치 미국과 이라크, 또는 미국과 아프간의 전쟁을 보는 듯합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요? 촉나라와 오나라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그 동안 너무 과장되어 크게 묘사된 것은 아닐까요.
***(1) 위ㆍ오ㆍ촉의 실제 영역 : 위나라는 오나라의 10배(?)**
[그림①] 각종 서적에 나타난 삼국의 영역 ⓒ프레시안
[그림①]은 여러분이 흔히 보시는‘삼국지’시대의 지도입니다. 삼국의 영역이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나라는 마치 위나라보다도 더 크게 묘사가 되어 있고 심지어는 베트남 북부까지 점령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촉의 경우도 위나라의 70% 정도의 크기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정사를 인용하여 촉의 국력(263년)은 28만호에 총인구는 94만 정도로 보고 있고(촉서, 후주전), 오의 국력(280년)은 52만호에 인구 230만 명이라는 기록(오서, 손호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촉이나 오나라의 경우는 멸망 당시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행정력이 확실히 미친 영역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최대 영역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과장하기 위해서라도 적의 국력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나라의 경우에는 중앙집권화가 매우 느려 잦은 내분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중앙의 행정력이 오나라 전역에 제대로 미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위나라의 경우에는 국력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청나라 때 양신(楊晨)의 저서 ‘삼국회요’에 따르면, 위나라의 호구 수는 66만호에 443만이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삼국지’관련 서적들은 대부분 이 기록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이 기록은 삼국시대가 1600년 이상이 지난 기록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요.
왜냐하면 서기 157년 후한 환제(桓帝) 때 1,067만호에 인구가 5,648만 명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서기 280년경에 아무리 전란이 심했다고 하지만 인구가 (기록상의 삼국의 인구를 합쳐보면 146만호에 767만 명) 거의 7분의 1로 감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절반만 되어도 인구는 2,500만이 됩니다. 그러면 이 인구는 기록상에 나타나는 오나라의 10배이며 촉의 30배나 됩니다.
그런데 오나라나 촉나라의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인구 수가 줄어들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2500만을 당시 13주로 나누어 본다면 1주는 대략 150만-250만 정도의 편차를 보이게 됩니다. 대체로 촉나라나 오나라의 경우를 보면 기록을 최소치로 보면 94만(촉)에서 최대치는 230만(오)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삼국지’ 시대와 관련하여 인구문제가 이처럼 분석하기 어렵게 된 것은 광범위한 예속 농민 즉 예농(隸農)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예농은 인구 통계에 잡히지가 않죠. 당시 중국 인구가 감소한 원인들을 보면, ① 전쟁으로 인한 경작지의 파괴로 주민의 이탈, ② 광범위한 유민의 발생, ③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다수의 예농 발생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가에서 과세할 수 있는 국민들이 격감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농의 발생이나 유민의 발생, 경작지 파괴에 의한 유민 발생이 가장 심각했던 지역은 바로 위나라였습니다. 왜냐하면 황건 농민군의 봉기, 관도대전, 조조의 여포 유비 정벌전 등등은 모두 위나라의 영역에서 발생한 것이죠. 즉 위나라가 호적기피현상으로 인한 실제 인구수의 왜곡 피해가 가장 컸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위나라의 인구가 100이고 촉은 10, 오는 20일 경우 과세대상이 되는 국민들이 위나라에서는 인구의 50%, 촉은 20%, 오는 30%가 예농이 되었다고 가정해보면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인구는 위나라는 50인, 촉은 8인, 오는 14인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총인구 자체는 각각 100, 10, 20이므로 위에서 제시한대로 같은 비율로 증감시키게 되면 위나라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촉이나 오나라는 상대적으로 크게 보일 수가 있겠지요.
중국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인 미야자키 이찌사다(宮崎市定)는 호수와 인구로 판정한 국력을 6(위) : 2(오) : 1(촉)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위나라의 영역에서는 수많은 전란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민이 발생했던 점을 고려해도 실제의 국력 차이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국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① 경작지의 크기와, ② 인구 수 뿐만 아니라, ③ 그 국민들이 하나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확고한 의식 등이 있어야 하는데 오나라는 촉나라보다도 더 못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나라의 손권은 오랫동안 황제를 칭하지도 못했고 후에 오나라는 위나라의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도 잘 하지 못한 것이죠. 이에 비하여 조조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황위(皇位)에 오르지 않고 한 황제를 옹립하고 있었으므로 나관중‘삼국지’와는 달리 일반 민중들에게는 위나라의 대의명분은 훨씬 더 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나라 말 중국은 기본적으로 13주가 있었습니다. 유주·기주·병주·연주·서주·청주·예주·옹주·형주·량주·양주·익주·교주 등이지요(교주는 현재 베트남에 가까운 지역으로 실제적인 한나라의 영역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그림②] 한나라의 주요 주
위의 그림은 한나라의 13주 가운데 주요한 주들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삼국지 시대에서 후한의 주요한 아홉 주들을 보면 병주·기주·연주·청주·예주·익주·양주·량주·형주 등을 말합니다. [그림②]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주로 황하 이남 장강(양자강) 이북을 말하지요. 그리고 그림에서 보시듯이 중국은 황하 이남(황하 유역을 포함)과 양자강 이북을 제외하고는 주로 산악지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비는 이 가운데서 익주 하나를 겨우 장악하고 통치했고, 손권은 이 지역을 벗어난 강동 지역을 장악하여 통치했습니다. 후일에 이들이 온 힘을 모아서 장악한 것이 형주와 양주의 일부였지요. 이들을 위나라와 맞서는 국가로 봐야 할까요? 그 동안 여러분들이 보셨던 광활한 오나라나 촉나라의 영역은 당시에는 중국이라고 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당시의 생산력으로 볼 때 오나라의 영역은 습지가 많았고, 촉 땅의 남부와 서북부는 험준한 산악 지대이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없는 지역입니다. 특히 오나라 지역은 한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나라들로 나눠진 지역이었고, 지방 호족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국경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 넘어갑시다. 지리학자 랏젤(Ratzel)은 국가를 생명의 유기체로 간주하여 사람에 있어서 피부가 없으면 죽듯이 국경은 국가 존립의 한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국경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오늘날과는 달랐다는 것이죠. 즉 오늘날은 국경 통제력이 강하고 국제법과 국제기구가 있어서 국제적인 국경 분쟁을 어느 정도는 조정하고 있으므로 비교적 국경선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편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국제분쟁을 조정할만한 국제법이나 국제기구들이 없었고 위성사진이나 기타의 지리학의 발달이 미약했기 때문에 국경을 일반적인 역사 부도가 묘사하는 식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대부분 역사 지도는 최대 영역을 표시하고 있지요.
현대 국가에서 사용하는 국경(National Border)을 경계선이라는 의미로 ‘보더(Border)’라고 하는 반면, 과거의 국경에 대해서는‘프론티어(Frontier : 변경, 전선)’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프론티어’란 변경이기도 하지만 미개척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앙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 ‘프론티어’지역은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기 어려운 곳입니다. 따라서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 ‘프론티어’영역에 있는 사람들도 사실상 신뢰하기 어려운 백성들이라는 얘깁니다. 조선시대 서북지방(평안도) 사람들을 천대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론티어’를 오늘날의 국경 개념인‘보더’로 혼동하면 안 되죠.
요즘 사용하는 국경선(國境線)은 말 그대로 선(line)이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국가 권력이 강력하고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전문화되어 국민 모두에 대하여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넓은 국경을 선처럼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과거에도 오나라와 같이 장강(양자강)이 자연스러운 국경으로 역할을 하면서 선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출입국 관리를 오늘날처럼 했다는 말은 아니죠. 중국의 만리장성은 ‘보더’라기 보다는 ‘프론티어’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지요.
이런 의미에서‘통치한다(govern)’라는 개념이“자신의 영토라고 주장된 곳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춘 행정적인 지배”라고 본다면, 이 당시의 대부분 국가들은‘보더’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기가 어렵고 사실상‘통치한다’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지요. 여기에는 무기의 문제도 있습니다. 요즘은 탱크나 항공기 등으로 무장한 정부군의 장비와 일반 시민들의 무기가 비교할 수가 없지만, 이 당시에는 농기구가 무기로 전환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정한 지역을 통제하려면 많은 군대가 이동해야 하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관중‘삼국지’는 위나라·오나라·촉나라가 서로 대등하게 맞서 싸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나 역사책들이 그들의 영역을 과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프론티어’를 현대적인 국경 개념인 ‘보더’ 개념으로 혼동한 것이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가만히 따지고 보면 위ㆍ오ㆍ촉 삼국이 서로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위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려 한 것은 아닐까요?
***(2) 촉과 오는 그저 반란군 정도(?)**
촉나라는 익주, 오나라는 강동 지역을 장악하였는데 그 나머지는 대부분 위나라의 통치 구역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나라와 촉의 영역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셨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좀 다릅니다. [그림③]은 위성지도 위에 위ㆍ오ㆍ촉의 영역을 산악지대를 제외하고 당시 경제의 기반이었던 곡창 지대와 인구 밀집지역인 도시, 교통 요지 들을 중심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림③] 위ㆍ오ㆍ촉의 실제영역
[그림③]을 보시면 위나라는 당시 중국의 대곡창 지대를 모두 장악하고 있습니다. 앞서 본대로 한나라의 아홉 주(병주·기주·연주·청주·예주·익주·양주·량주·형주) 가운데서 익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나라의 영역이죠. 위에서 표기한 한나라 주들을 당시 중국의 중심영역이자 경제활동 무대라고 보시면 촉이나 오나라의 영역이라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중국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 수는 없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오나라는 전반적으로 곡창지대가 분산되어 있고 수도가 안보상의 이유로 한쪽(동쪽)에 치우쳐있으므로 영역에 비하여 국력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림③]을 보시면 오나라의 평야 지대가 분산된 반면 촉이 오히려 평야지대가 성도(成都)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함을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유비는 한나라 황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중앙 집중화가 비교적 용이했지요. 즉 경제적 기반의 집중성과 중앙의 강한 통제력으로 촉이 그래도 국력을 집중화할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촉나라가 위나라의 침공에 대하여 오나라보다는 좀더 조직적으로 저항한 원인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북벌이 가능했던 것도 통제가 가능한 경제적 기반이 성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림③]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당시에 촉의 영역이나 오나라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남지나해까지 진출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남지나해 주변 지역은 산악지대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통수단을 보더라도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력을 남지나해 방향으로 분산시킬 경우 위나라의 침공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삼국이 대치한 상황에서 남쪽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죠.
나관중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마치 위나라 전체를 위협한 듯 나오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는 가정전투, 가정전투 하는데 [그림③]에서 보면 가정은 장안에서도 북서쪽으로 많이 떨어진 곳이고 촉의 영역과도 거리가 멀지요. 설령 가정 전투에서 제갈량이 이겼다고 해서 전세가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공격하는 진출로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대치하다가 진중에서 사망합니다. 장안을 돌파해도 수도 낙양까지는 갈 길이 태산 같은데 장안 외곽의 미성(?懸)에 이르지도 못하고 한중 땅을 맴돌다가 끝이 납니다.
오나라도 위나라를 제대로 위협한 적이 없습니다. 제갈량의 친조카이자 오나라의 실권자였던 제갈각은 삼촌을 본받아서 작심하고 전 국력을 모아 대군을 이끌고 합비(合肥)까지 갔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옵니다. 이 합비는 [그림③]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자강에서 가까운 곳으로 오나라와 위나라의 경계 지역에 있는 지역에 불과해, 그것을 장악했다 해도 위나라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중국인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나관중‘삼국지’에서처럼 촉나라나 오나라가 위나라와 강력히 대치했다고 하면 위나라에서는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입니다. 다만 이 지역들은 위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적인 장애물로 인하여 진압을 하기가 어려웠을 뿐입니다.
***(3) 오나라에서 말하는 중국은 어디였죠?**
지금까지의 분석이 타당한지를 또 다른 각도에서 다시 살펴봅시다. 정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서소는 유수까지 가서 오(吳)로 불려 돌아와 살해되었고, 그의 가족은 건안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 서소가 중국(中國)을 칭찬했다고 황제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서소는 이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오서, 삼사주전).’
서소는 오나라의 수춘성을 지키다가 항복한 장수였는데, 사마소가 그를 시켜서 오나라의 손호에게 항복을 받아오라고 시킨 때에 벌어졌던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같은 중국인들인데‘중국’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내용으로 보면 오나라는 중국이 아닌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촉도 중국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 당시 이들이 사용한 언어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야기는 매우 복잡해지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바로 위(魏)나라입니다. 오나라는 후한 말 당시만 해도 개발이 미진한 지역이었고 한족의 영역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오나라는 양자강 남쪽으로 남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고 나관중‘삼국지’가 나온 원나라 말기 명나라 때에는 대규모 곡창이 형성되어 명나라는 수도를 현재의 난징(南京)에 두기도 했습니다. 아마 명나라 때 나관중‘삼국지’를 편집한 사람들이 당시에 많이 발달된 강남땅을 보고서 오나라의 영역을 과장한 듯합니다.
한나라 당시 중원(中原) 땅, 즉 중국의 중심지는 장안 - 낙양에 이르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낙양은 기원전 11세기에 처음으로 주(周)왕조가 세워진 후, 후한-북위-수-당-후당-후진 등 9개 왕조의 수도가 되어 온 도시죠.
중국인들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황하(黃河) 중류의 유역을 중원(中原)으로 부르며 그것을 중국의 원류로 보았습니다. 즉 전국 7개국의 예로 든다면, 위(魏)나라가 가장 중심지로 중원의 최고 문화국가였고 조(趙)나라의 남부지역, 한나라, 제나라, 노나라, 연나라의 남서부 지역, 초나라 북부지역 및 진나라 동부 일부 정도가 중원 땅이었죠. 만약 진(秦)나라가 통일을 못했더라면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장안(長安 : 현재의 시안)도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림④]전국시대의 중국(B. C 4~3세기)
‘삼국지’의 시기에는 중국의 중심 영역은 장안 - 낙양 - 연주 - 서주 - 예주 지방이라고 보면 됩니다. 즉 북쪽으로는 기주 지역과 황하 이남, 남쪽으로는 양자강 북부지역이라고 볼 수 있지요. 따라서 조조의 위나라가 차지한 영역이 바로 중국문화 및 역사의 중심무대였지요. 촉나라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지역이고, 오(吳)나라는 양자강 남부 지역이어서 당시의 군사기술로 보아서 정벌하기도 어렵고 중원과는 매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중국사 전체에 큰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현대 중국을 생각해봅시다. 대만(臺灣)이 과연 중국의 안전에 위협이 될까요? 또 위협이 안 된다고 해서 중국이 대만에 신경을 안 씁니까? 현대 중국의 건설자인 등소평(鄧少平)의 평생소원은 대만의 흡수통합이었지요. 위나라 - 촉나라ㆍ오나라의 관계는 현대의 중국과 대만의 관계라고 보면 가장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실 대만 원주민들은 피해자입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1949년 이후 줄곧 군사적으로 대치해왔습니다. 그 와중에서 수많은 대만 원주민들이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를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맹획(孟獲) 부분에서 다시 상세히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촉의 상태도 이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유장(劉璋)이 계속 통치를 했다면 촉 땅의 사람들은 별 피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도 없이 자연스럽게 위나라에 편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혼란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유비가 중원 땅에서 촉 땅으로 도망쳐 들어와서 군대를 만들고 틈만 나면 북벌(北伐)이니, 한실부흥(漢室復興)이니 하니까 촉의 백성들이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그렇다고 하여 전쟁이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모르되, 교두보 하나 확보를 못하니 촉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짜증스러운 일이었겠지요.
애당초 유비(劉備)나 손권(孫權)은 그 근거지가 천하 통일의 여건이 안 되는 지역입니다. 특히 촉나라는 당시 중국의 오지로 제갈량이 성도(成都)에 도읍을 정한 것도 수레나 우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험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절대 약체였던 촉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후일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때 보급로 문제를 겪게 하기도 합니다. 삼국이 멸망한 후 무려 5백여 년이 지난 후 당나라의 시전(詩仙) 이백(李太白)은“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로 오르기보다도 힘들구나(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고 하였습니다. 촉 땅은 참으로 두메산골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위(魏)나라는 중원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족의 중심무대로 산업 발전의 중심지였으며, 물자도 매우 풍부한 지역이었지요.
아무래도 유비가 한 개의 주를 차지하고서 황제를 칭한다는 것이 좀 심합니다. 영역으로 보면 원술(袁術)보다도 더 한심합니다. 중국의 그 넓은 천하에서 겨우 한 개의 주를 통치하면서 황제를 칭하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삼국지 예찬론자들은 침묵합니다.
위나라는 이에 대해 용납할 수 없어 두 번의 대대적인 정벌을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홍수 때문에 철수하고, 두 번째에는 큰 전투 없이 성도를 점령하고 촉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관도대전(200)으로 조조는 기존의 장안 - 낙양 - 연주 등의 지역을 아우르고 유주ㆍ병주ㆍ청주ㆍ기주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 때 중국은 사실상의 통일된 국가라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따라서 삼국지라고 하지만 삼국지로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나관중‘삼국지’에는 위·오·촉이 거의 대등하게 대립 투쟁한 듯이 나오는데 이것은 후대의 과장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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