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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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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3>

유비(劉備)가 쪼다라니?

***개요**

1910년대 우리나라는 신파극의 시대였습니다. 요즘은 드라마를 보고 신파극이라고 하면 비꼬는 말이 되지만 신파(新派)란 원래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에 대립하여 새로운 연극이란 의미로 사용된 말이죠. 이 신파극의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나라에서는 임성구(林聖九 : 1887~1921)였지요.

임성구는 신극 초창기의 연극인으로 대표작은'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 권총강도)'입니다. 이 작품은 경찰관이 흉악한 권총 강도를 잡으려고 목숨을 거는 내용으로 선과 악이 뚜렷합니다. 결말에서는 관객들의 감정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 위해 경찰관이 과장스럽게 죽는 것으로 나옵니다. 임성구는 여자 역을 남자로 대신 시키면서까지 공연했고 죽을 때까지 신극운동에 힘을 기울였지요.

그런데 말이죠.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임성구는 대부분 연극에서 주인공을 했는데 인력거꾼으로 나와도 비단옷을 입었고, 심지어는 거지로 나오는데도 비단옷을 입고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 문화계에는 큰 저항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유명한 스타여서 그럴까요?

***(1) 유비의 비단옷**

임성구의 비단옷은 아마도 여러분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나관중'삼국지'에도 유비(劉備)는 임성구의 비단옷을 입은 듯합니다. 유비는 나관중'삼국지'의 최고 스타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유비가 무슨 짓을 해도 항상 충의지사(忠義志士)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비를 충의지사로만 묘사하기에는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지면 관계상 나관중'삼국지'에 나타난 대표적인 것만 몇 개 뽑아서 정사와 비교하여 분석하겠습니다.

첫째, 유비는 동승(董承)과 함께 조조를 죽이기로 모의했지요. 동승이 유비를 끌어들인 것은 군대를 동원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비는 황급히 조조를 떠나고 동승과 함께 조조를 죽이기 위해 모의한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처형됩니다. 그런데 나관중'삼국지'는 동승의 어린 첩(妾)과의 치정(癡情)때문에 거사가 탄로 난 것으로 꾸며냅니다. 이것은 거사에 참여했던 수많은 충의지사들을 두 번 죽이는 꼴입니다.

둘째, 유비는 조조(曹操)와 연합을 하여 양봉(楊奉)을 죽이면서'노략질을 했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나관중'삼국지'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이 없지요. 양봉은 이각과 곽사의 난 가운데 그 혹한 속에서 묵묵히 황제의 어가를 화음현에서 낙양까지 모시고 온 사람입니다. 양봉은 낙양의 무너진 성들을 다시 수리하여 소궁(小宮)으로 만들고 지방을 다니면서 음식을 구해 와서 문무의 관료들을 먹였던 사람입니다. '후한서'에는 양봉은 이 공로로 흥의장군(興義장군 : 의를 일으킨 장군)ㆍ거기장군(車騎將軍)을 지냈다고 되어있죠. 적어도 충의(忠義)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비보다는 훨씬 충신입니다. 문제는 그가 이각(李傕 : 동탁의 부하)의 부하였기 때문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지요. 참, 어느 나라나 혈연(血緣) 지연(地緣)에 따른 차별이 문제인 모양입니다.

셋째, 유비는 자신과 온갖 고난을 함께 했던 양자(養子) 유봉(劉封 : ?~220)을 죽이면서 엉뚱한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책들에도 이 내용에 대해 침묵합니다. 유비는 유봉을 번성 유필(劉泌)의 집에서 만나 양자로 삼았지요. 유봉은 각종 전투에 참가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탁월한 전공을 세웁니다. 유봉이 상용성을 지킬 때 관우의 구원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비가 대로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우는 이미 오나라의 덫에 깊이 걸려있었고, 유봉은 당시 새로 점령한 지역이라 함부로 군대를 뺄 경우 모반의 위험성도 높아서 관우를 구원하러 갈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정사('유봉전')에서도 진수는 유비가 제갈량과 공모하여 유봉을 죽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비의 친아들인 유선(劉禪)이 황제가 되고난 뒤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삼국지를 역사적으로 고증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沈伯俊)은"유비가 유선을 위해 유봉을 죽인 것은 당시 촉나라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삼촌을 구하지 않아서 아들을 죽인다? 말이 됩니까?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을까요? 맹달(孟達)은 유봉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비의 친아들인 유선이 태어났기 때문에 유봉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니 위나라에 함께 투항하자고 했을 때 유봉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유봉은 무용이 뛰어나고 전공(戰功)이 탁월하여 제갈량은 평소에도 유비의 사후 친아들인 유선이 권력을 계승했을 경우 과연 유선이 유봉을 통제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필요할 때는 양자로 삼았다가 소용이 없어지니 엉뚱한 죄목으로 죽이는 유비나 제갈량의 행동을 과연 정당화될까요?

넷째, 유비는 툭하면 처자식은 물론이고 관우·장비 등도 버리고 홀로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장비도 줄행랑에는 선수지요. 뒷수습은 주로 관우가 맡아서 합니다(이 때문에 사람들은 관우를 좋아하는 것 같죠?). 물론 영웅은 잡히지 말아야 하겠지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도 이와 유사합니다. 유방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출전했다가 적에 쫓기자 마차가 무거우니 아들과 딸을 보고 "마차에서 내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남자들을 남편으로 맞은 여자나 아빠로 맞은 아이들은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모르지요. 그래서 황제는 정말 하늘이 내리는 건지.

다섯째, 여포(呂布)는 여러 번 유비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데 유비는 이것을 이용하여 결국 조조로 하여금 여포를 죽이게 합니다. 나관중'삼국지'는 물론이고 정사의 기록에도 여포는 유비를 끔찍이 생각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유비는 적어도 여포에 관한 한 의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유비를 충의지사로 묘사하려 한다면 결과는 여포가 아주 파렴치한이나 모리배(謀利輩)가 되는 수밖에 없겠지요. 당연히 나관중'삼국지'는 여포를 인간 이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냉정하게 살펴보면'삼국지'의 여러 전쟁들(관도대전, 형주침공, 적벽대전 등)은 유비가 영웅들을 이간질하여 일으킨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당대의 최고 실력자들 즉 여포-원소-조조-유표-손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사람이고 이들 세력들이 서로 싸우도록 직간접적으로 유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보다 더욱 한심한 일은 나관중'삼국지'가 유비를 지나치게 옹호하다 보니 엉뚱하게도 건달 도겸(陶謙 : 132-194)이 주공(周公)처럼 묘사되었다는 것이지요. 도겸은'삼국지'의 대표적인 유맹(流氓 : 속설로 양아치) 중의 하나인데,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조자룡만큼이나 멋있게 묘사되어 있지요. 이것은 유비를 충의지사로 묘사하다보니 유비를 도와 준 그 어떤 사람도 충의지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나관중'삼국지'에서는 도겸이'사람됨이 온후 돈독하고 순수하다'고 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도의심이 깊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고, 도겸이 서주(徐州)를 유비에게 물려주는 과정은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나관중'삼국지'에서 도겸은 단양(丹陽) 사람으로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서주목(徐州牧)이 되었는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도겸의 부하 장개에게 몰살을 당해 조조의 원한을 샀고, 조조의 침공에 항전하다가 유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도겸은 조숭의 죽음에 책임이 없으며 마치 선양(禪讓)의 도(道)를 발휘하여 유비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한 듯이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르지요. 실제로 도겸은 조숭을 죽인 사람이고 유비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리려 한 것도 궁지에 몰려서 행한 것입니다. 도겸이 죽을 즈음에는 이미 도겸이 통치할만한 영역은 없었고 조조의 침공에 멸망 일보직전이었으므로 도겸의 지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상황이었지요.

정사에 따르면 도겸은 도의를 위배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파렴치하고 악정(惡政)을 거듭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비성에서 궐선(闕宣)이란 자가 천자(天子)를 칭했을 때도 도겸은 그에게 빌붙어서 약탈을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가치관으로는 대역무도한 폭력배였지요. 도겸은 인덕도 없어 같은 고향 사람인 손책의 외가(外家)와도 사이가 나빠서 손책은 과부가 된 어머니가 도겸에게 핍박을 받지나 않을까 하여 서주에서 옮기도록 조치를 합니다.

물론 나관중'삼국지'를 소설로만 본다면 재미있게 꾸미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여러분 대다수는, 저와 같이 중국의 역사를 따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관중'삼국지'로 그 시대의 역사를 보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나관중'삼국지'처럼 한쪽에 치우쳐 역사를 보면 인물이 지나치게 전형적(典型的)으로 묘사가 됩니다. 즉 한번 악인은 영원한 악인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의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항상 고뇌하는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는 영원한 악인도, 영원한 선인도 없고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선과 악의 판단은 후세에 맡겨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나관중'삼국지'에는 인물이 지나치게 전형화되어 있어서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힘들게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람이 그렇게 다를 리는 없는데 나관중'삼국지'는 좀 심합니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는 자신이 편찬한'지림(志林)'에서"'삼국지'처럼 군자와 소인을 구별한 책은 백세가 지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물론 이 때의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가 아니라 이야기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삼국지'를 말하겠죠. 나관중'삼국지'는 이것을 모은 것이죠).

***(2) 유비가 '쪼다'라고요?**

유비ㆍ관우ㆍ장비의 모습을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잘 그릴 유명한 화백의 만화를 봐도 그렇고, '삼국지'에 대해 논평을 한 여러 책들에도 유비가'꺼벙이'니, '쪼다'니, '울보 유비'니 하는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관중 '삼국지'덕분으로 보입니다. 유비가 왜'꺼벙이'에 '쪼다'입니까? 제가 보기에 유비는 대단히 명석한 사람으로 요즘 회사나 조직에서 가장 사랑받는 히딩크식'올 라운드 플레이어(All round player)'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제갈량 이전의 전투를 주로 관우의 무공(武功)으로 이긴 듯이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전쟁은 한 사람의 무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죠. 후일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직접 군대를 통솔하지만 적어도 유비가 죽기 전의 대부분 전투는 유비가 수행한 것입니다.

유비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때로는 외교관으로 때로는 전략가로서 때로는 행정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했지요.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유비는 군주(君主)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추게 됩니다. 이것이 후일 유비로 하여금 촉을 건국하는 주요한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죠. 나관중'삼국지'에 제갈량의 데뷔전으로 나타나는 박망파 전투도 실은 유비가 치른 것입니다.

중앙 귀족이었던 원술, 원소나 조조와 달리 유비는 무(無)의 상태에서 전국적인 제후로 성장해나갔지요. 유비는 자수성가형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으니 일일이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지요. 유비가 있음으로써 제갈량도 있고, 관우도 있고 장비ㆍ조자룡도 있었던 게지요.

그런데 왜 주요한 전투에서 유비는 이기지 못했을까요? 그것도 당연합니다. 조조나 원소는 워낙 인재가 많으니 군사 전문가들이 전투를 수행했지만, 유비는 제갈량이나 방통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군총사령관에다 외교관에다 행정 책임자까지 도맡아서 해야 했습니다. 이러니 유비가 어떻게 전쟁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관우와 장비·조자룡이 있다고요? 지나친 말씀입니다. 이때의 전투들은 이미 대규모 보병전(步兵戰)이었습니다. 한 두 사람의 무예를 가지고 전투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관우나 장비·조자룡 등은 선봉장으로서 적합할지는 모르지만 전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지휘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유비가 이름 없는 제갈량을 능력이 출중하다는 말만 믿고 세 번이나 찾아다닌 것은 그래도 관우·장비·조자룡 보다 더 행정적인 경험이 있든지, 전쟁의 흐름을 읽거나 작전을 기획할 수 있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관우나 손건(孫乾 : 유비의 참모)보다만 나아도 자기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죠. 따지고 보면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주까지 밀려간 것이 아닙니까? 유비는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유표(劉表)가 유비를 받아들인 것도 나관중'삼국지'식으로 유비의 인격에 반한 것이라기보다는 유비가 조조와 싸운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표는 조조와는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표 생전에는 조조와의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조조가 형주 정벌에 나서려고 하자 조조의 공격을 그래도 방어할만한 유일한 사람이 유비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표는 유비에게 조조와 대치하는 지역의 방어를 맡긴 것이지요.

이 점에서 유비는 다시 평가해야 합니다. 유비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나관중'삼국지'는 왜 유비가 그저 인자하고 울기만 잘하는 식으로 묘사가 되었을까요? 이것은 성리학적 역사 해석과 무관하지 않지요.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적 군주는 덕치(德治 : 덕으로 나라를 다스림)를 하는 군주이지, 칼이나 창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성리학적 사고 관념에서 보면 군주의 이름 즉 시호(諡號)에'무(武)'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람은 폭군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주가 오죽 못났으면 칼과 창으로 사람을 다스리냐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볼까요? 조선의 선조(宣祖) 임금을 여러분들은 임진왜란을 자초한 분으로 한심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당시 성리학자들에게 매우 이상적인 군주로 그 시대를'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하였지요.

따라서 나관중'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전쟁 전문가라기보다는 덕(德)이 높은 지도자로 묘사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비가 안희현위(安喜縣尉 : 안희 파출소장)를 할 때 중앙 감독관을 매질하였는데, 나관중'삼국지'에는 이를 장비가 매질한 것으로 되어있기도 합니다.

***(3) 왜 중국인은 유비를 좋아할까요?**

유비(劉備)는 관우·장비와 함께 중국인들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물론 인기 순위는 관우가 제일 높은 편이지만(관우는 다소 정치적 목적으로 국가에 의해 크게 홍보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도'삼국지'하면 유비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중국인들이 유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유비가 중국인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조조나 원소는 아무나 쉽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러나 유비는 왠지 친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유비는 대표적인 자수성가형의 인물이 아닙니까?

유비는 어려서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돗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린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유비는 다른 제후들과는 전혀 다른 민중성(民衆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찢어진 가난 속에서도 유비는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합니다. 유비는 어릴 때 같은 아이들과 나무 밑에서 놀면서"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한 천자의 수레를 탈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때 숙부인 유자경(劉子敬)이 "이놈아, 집안이 망할 허튼 소리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유비 자신이 가장 좋아한 호칭은 황숙(皇叔)이라는 이상한 말이었다고 하지요? 이 말은 그저'황제의 삼촌'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공식적인 작위는 아니지만 유비 자신이 황제에 오르는데 그 정통성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암시이자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유비가 실제로 한나라 경제(景帝)의 후손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유비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비는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는 말을 듣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따뜻하게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니 따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여포도 여기에 반하여 일이 꼬이게 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워싱턴(Washington) 장군도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도 남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괜히 워싱턴의 눈치를 보더랍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워싱턴이 찡그리면'아이고, 이것은 아니구만!'이라고 생각했다는군요. 실제로 워싱턴은 속이 아파서 찡그린 것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정사에 따르면, 독서광인 조조와는 달리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개나 말, 음악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사람들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유비가 다소 여성적이며 부드럽고 섬세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다른 경쟁자들로 하여금 유비에 대한 경계심을 없애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유비는 외형적으로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다른 영웅들에게 주는 중요한 효과가 있지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비는 부드러움 속에서도 중국인 특유의 불패사상(不敗思想)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기면 이기는 것이고, 현재 지더라도 진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이죠. 유비는 정말이지 힘도 없으면서 끝없이 조조에 도전합니다.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르자, 유비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자신도 한왕(漢王)에 오르고, 조비가 황제를 칭하자 유비는 겨우 익주(益州) 하나를 차지하고서는 황제에 오릅니다. 이 불패사상은 중국인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실리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중국인들이 내세우고 있는 대의명분이라는 것은 실은 자기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요. 다만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 안 되죠. 유비는 이 점에 있어서 대표적인 중국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유비는 여러 영웅들을 천연덕스럽게 이간질하고 전쟁에 나서게 함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한 사람이죠. 그러면서도 유비는 자기만이 한나라 회복을 위한 충신이라는 대의명분을 홍보하고 충의지사의 역할을 탁월하게 연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비는 여러 허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로서는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유비에 대하여 나관중'삼국지'처럼 너무 미화하는 것도 잘못되었지만, 유비를 마냥 쪼다로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서 유비의 다양한 모습을 보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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