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
나관중'삼국지'는 흔히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해 씌어진 책이라고 합니다. 춘추필법은 사실에 엄정하되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나관중'삼국지'는 폐쇄적 이고 국수적인 중화주의 필법에 씌어진 책일 뿐입니다.
***오늘의 내용**
(1) 도대체 춘추필법이 뭐죠?
(2) 중국인의,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을 위한 역사 해석
(3) 처칠의 보모
***들어가는 글**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 시간에 환관(宦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황제 가까이 있으면서 황제를 우롱하고 국정을 농단한다는 것이지요. 즉 정치란 공부를 많이 하고 인격적으로 고매한 사대부(士大夫)가 해야지 웬 환관인가 말이죠. 나관중'삼국지'에는 원소가 환관들을 보이는 대로 다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저는 별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환관은 항상 국정을 우롱한다는 생각과 남성 심벌이 없으니 경멸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종이를 발명한 위대한 채륜(蔡倫)이 환관이라는 데 놀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많은 세상의 변화를 보고 저도 나름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자 환관에 대한 평가는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관중'삼국지'에는 후한(後漢)을 약화시킨 주범으로 십상시(十常侍)를 지목합니다. 즉 열 명의 환관이 권력을 잡아서 나라를 망할 지경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죠. 그런데 권력은 부자(父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열 명이 권력을 나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들이 뭉쳐서 국가를 망하게 했다고요? 지나친 말이 아닐까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은 오늘날 정치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란 과거의 정치요, 정치란 현재의 역사이니까요. 그러면 나관중'삼국지'에서 보는 역사는 어떨가요?
***(1) 도대체 춘추필법이 뭐죠?**
유명 작가들이 한 목소리로 나관중'삼국지'는 춘추필법(春秋筆法) 혹은 춘추사관(春秋史觀)으로 쓰였다고 합디다. 이 말을 듣고서 저는 이 분들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나?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춘추필법이니 춘추사관이니 하는 말을 쓰시는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춘추란 공자의'춘추'에서 나온 말입니다. 춘추필법이란'춘추'와 같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되 옳고 그름을 가려 역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춘추직필(春秋直筆)'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시정(時政)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을 춘추관(春秋館)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춘추필법이란 사실만을 정확히 기록하면서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춘추필법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기록의 엄정성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 해설 방식은 정통과 의리를 중시하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의 발전으로 더욱 정교해집니다. 성리학적 역사 해석은 의리(義理)와 대의명분이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특히 나관중'삼국지'는 바로 이 역사해석 방식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입니다.
성리학적 역사해석의 바탕은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즉 중화주의는 천명(天命)을 받은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중심에 중화(中華)가 형성되고, 그 주변국은 이 중화와의 의리에 기반한 문화적 군신관계(君臣關係)를 형성함으로써 천하의 질서가 만들어진다는 사상입니다. 이 점에서 성리학적 역사 해석은 중국 민족주의 역사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천명(天命)을 받은 중국의 황제[천자(天子)]는 세상의 중심인 중국 민족과 천제(天帝)를 연결해주는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주변의 제후국을 문화(文化)로 감화시키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역별 국가 자치제의 완성을 추구해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후국들은 중국의 황제를 신뢰하고 본받아서 의사(擬似) 중화국(中華國)의 건설에 매진하여 천하의 평화를 달성해 가야 합니다.
따라서 성리학의 등장 이후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춘추필법은 의리(義理)와 대의명분(大義名分), 그리고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따른 정통성 등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성리학적인 역사관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역사를 통해서'천리를 밝혀서 인심을 바로잡는(明天理正人)'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즉 인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묘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중화주의에 따른 정통성에 입각해서 의리의 소재를 밝혀 사람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성리학적 역사해석은 역사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와 의리를 밝혀서 사람을 교화시킨다는 말은 어떨까요? 의리(義理), 좋은 말입니다. 저도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의리라는 것이 정말 객관적일까요? 그리고 그 의리를 판단하는 주체(主體)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리도 결국 그 사회의 지배층이나 권력투쟁의 승리자의 관점에서 기술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2) 중국인의,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을 위한 역사 해석**
'삼국지'로 돌아가 봅시다. 나관중'삼국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관우와 장비가 오직 의리만으로 유비를 따라다녔을까요? 다른 이유는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요? 물론 의리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관우와 장비가 조조나 손권에게 갔더라면 그렇게 후대를 받았을까요? 특히 조조 휘하에는 인재들이 넘쳐났습니다.
예를 들면 제갈량의 친구였던 서서(徐庶)는 제갈량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제갈량이 한 나라의 승상(국무총리)일 때에도 일 개 중랑장(군 장성)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조조가 투항한 관우에게 내린 벼슬도 편장군(偏將軍) 정도입니다. 별로 높지 않는 벼슬입니다. 장군들의 등급이 매우 복잡하고 많았는데 그 가운데 거의 꼴찌 수준으로 보시면 됩니다. 장비는 아마 다시 푸줏간으로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송나라 때 주자(朱子 : 1130~1200)는 성리학으로 다져진 춘추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전부 칼질하여 촉한의 유비를 정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조조(曹操)는 황제를 우롱하고 의리도 없는 무도한 사람이었을까요?
춘추사관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신하란 주(周) 무왕의 아우였던 주공(周公) 단(旦)입니다. 이 사람을 흔히 주공(周公)이라고 부릅니다. 주공은 무왕의 동생으로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고 동방정벌과 주나라의 기틀을 잡으면서도 권력을 탐하지 않고 왕의 지위를 그대로 조카에게 물려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비는 주공처럼 행동했습니까? 제가 보기엔 유비는 오로지 자기 이익대로 움직인 사람입니다.
유비는 제후들 간에 싸움을 붙이고 '삼국지'의 대표적인 건달인 도겸(陶謙)에게 더부살이했으며,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유장의 영토를 빼앗았고, 촉을 건국하고 난 뒤에 조조에게 시달리는 당시의 황제 헌제(獻帝)를 데려와서 황제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지요. 제가 보기에 헌제가 오는 것을 가장 반대할 사람은 바로 유비 자신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벌어들인 정치적 자산이니 자신이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니까 말이죠. 물론 촉 땅이라면 당시로 보면 오지(奧地) 중의 오지인데, 그 촌구석에 헌제가 따라 갔을 리도 없지요. 유비는 다음 시간에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조는 황제를 모시고 있으면서 통일 전쟁을 수행합니다. 그런 와중에서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일어납니다. 조조가 무조건 참아야 할 일일까요? 사실 이 당시 한나라는 이미 허울에 불과하고 황제의 권위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유행하여 음양가(陰陽家)가 유가(儒家)에 포함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조조 암살 모의의 구심점에 항상 황제가 있는데도 의리와 명분으로 조조에게 참기를 강요하는 것은 좀 지나친 얘기가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의리와 명분이라는 것은 그 속내를 살펴보면 참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역사적 사실과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나관중'삼국지'의 역사 해석 방식은 거창하게 춘추필법이니 성리학적 역사해석이니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나관중'삼국지'식 필법이라는 편이 옳지요. 이것은 폐쇄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중국 민족주의적 사관입니다. 한 마디로 중국인들의, 중국인을 위한, 중국인들에 의한 역사 해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리학 자체가 중세 중국의 민족주의의 표현양식이지만 성리학은 나름대로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국제적인 질서를 추구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성리학이 세계적으로 가장 발달한 나라가 우리나라 아닙니까? 답답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관중'삼국지'의 역사 해석은 사실에 입각한 춘추필법의 엄정성도 없고, 구시대적인 대의명분을 강요한다는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춘추필법이라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주자가 강조하듯이 이민족을 문화적으로 감화시켜 평화주의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한다는 성리학적 이상적 중화주의와도 관계가 없지요. 나관중'삼국지'는 주변민족을 비하하면서 오직 중국인들의 삶의 방식만이 옳고, 주변의 이민족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은 경멸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정사(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예외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나관중'삼국지'는 그저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중국에 복종하지 않는 이민족을 용납하지 않는 폐쇄적인 국수주의의 필법으로 씌어진 책일 뿐입니다. 이 점을 알고서'삼국지'를 읽으시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매우 많이 알 수 있습니다.
***(3) 처칠의 보모(保姆)**
나관중'삼국지'식의 필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대내적으로는 환관과 피지배층이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동북공정을 보세요). 지면 관계상 다른 문제들은 뒤로 미루고 환관 문제만을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부분은'삼국지'초반부를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관중'삼국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일반적인 역사 교과서에도 흔히 십상시(十常侍)의 난이라고 하여 후한말의 모든 사회적 병리의 원인이 마치 환관 때문에만 발생한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나라가 붕괴하는 것은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부실해져서 붕괴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 계층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지만 봉건 왕조들에 있어서, 나라가 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가 있습니다. 먼저 지속적으로 어린 황제가 등극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황제들이 골골하여 젊어서 죽으니 그 아이들이 어려서 그런 수도 있고 정권을 장악한 외척들이 황제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일부러 어린 황제를 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한 말기 상황이 바로 이 상황이었지요.
후한 말기에는 10세였던 화제(和帝)가 등극(89년)하였고, 이어 생후 100일 된 상제(殤帝)의 등극(105년), 13세인 안제(安帝)의 등극(107년), 15세인 순제(順帝)의 등극(126년), 2세인 충제(沖帝)의 등극(145년), 8세인 질제(質帝)의 등극(146년), 15세인 환제(桓帝)의 등극(147년), 12세인 영제(靈帝)의 등극(168년) 등이 이 상황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좀 심합니다. 누가 소설을 이렇게 썼다면 "야! 아무리 소설이라도 너무 꾸며 대지마, 당장 집어치워!"라고 하겠지요.
일단 황제가 자라면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장악한 권력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하는데 조정은 이미 이들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므로 어느 곳도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황제는 자신의 친아버지나 친어머니와 다름없는 환관에 의지하게 되지요. 아니 환관이 황제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라니요?
생각해보세요. 황제가 어린 황자의 아버지라고는 해도 자주 볼 수 있나요? 황제에게는 얼마나 부인이 많습니까? 옳은 아빠 구실을 하겠습니까? 얘가 무슨 참고서를 읽고 있는지 모의고사는 잘 치고 있는지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어찌하면 이 아이를 이용하여 대호족인 친정 세력을 키우는가? 또는 황제가 왜 자기에게는 안 오고 다른 후궁들에게 가는지 등등으로 몸살 날 지경이지요. 그러니 자식에 제대로 신경을 쓰겠습니까? 대부분의 황제의 자식들은 상궁들이나 환관들의 손에 자라게 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는 사실 환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영제(靈帝 : 헌제의 아버지)는 조충(趙忠)과 장양(張讓)을 아버지, 어머니로 불렀습니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 경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일은 자신을 키워준 보모(保姆)가 죽었을 때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아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처칠의 어머니는 런던 사교계의 여왕이었지요. 그녀는 아들 친구와도 염문(艶聞)을 뿌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처칠의 아버지는 유명 정치인이라 어린 처칠은 엄마 아빠 얼굴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어린 황제가 장성하여 대귀족들을 상대로 싸우게 되면 이 외로운 황제가 정말 의지할 사람은 그 넓은 궁중에 환관(내시) 말고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한나라 환제(桓帝 : 헌제의 할아버지) 때 외척 양기(梁冀)는 20여 년에 걸쳐 권력을 장악했는데 이 기간 동안 양기 일족은 7명의 제후, 3명의 황후(皇后), 6명의 귀인(貴人), 3명의 부마(駙馬), 2명의 대장군이 배출되었고, 조정의 요직에 있는 이가 57명이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완전히 독점한 것이죠. 이 때는 대부분 관리들도 어린 황제는 안중에도 없고 관리로서 임명이 되면, 먼저 양기에게 인사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환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황제의 권력을 찾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환관 선초(單超)와 구원(具瑗)과 피로써 맹세하고 궁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양기를 겨우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삭탈관직된 자가 3백 명에 달하여 중앙 조정이 텅 비어 버렸으며, 몰수한 양기의 재산이 1억 전이 넘어서 천하의 조세를 50% 경감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거대한 킹코브라를 죽이는 것은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작은 망구스이듯이 수많은 문무 관리를 거느린 외척이라는 대귀족(大貴族)에 대항하여 황제를 보호하고 받들 수 있었던 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성(男性)을 상실하고 가장 허약하게 보이는 환관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환관들은 학식 면에서 관료에 뒤지지 않았고(여러분들이 가장 비난하는 진시황 때 조고[趙高]는 당대 유명한 형법 전문가였지요), 무엇보다도 선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경험이 풍부하고, 궁중에 상주하는 등 만약에 어린 황제가 자라서 궁중 쿠데타(?)를 도모할 때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권력을 다시 찾은 황제는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게 큰 벼슬을 제수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통 지배계층인 문무 관리들은 이들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죠. 이들은 외척 세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대하면서도 환관들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문무 관리들이 환관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해서 환관은 무조건 나쁜 놈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한나라 말기의 환관들의 역할은 오히려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황제의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국가가 안정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말이죠. 따라서 원소가 환관들을 육니(肉泥 : smashed meat)로 만들고 수염이 없는 사람까지도 모두 다 죽일 만큼의 잘못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원소의 만행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하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역사를 보는 눈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된다는 것은 때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모든 역사를 재단하려 하면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미화되고 다수는 아주 파렴치하거나 반동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나관중'삼국지'는 국수적 중국 민족주의 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시도는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죠.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모택동(毛澤東)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든 역사를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공자나 소크라테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위인은 반동적인 봉건주의자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인들은 그 시대의 가치관을 인정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인간 사회는 다양함을 그 본질로 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만이 옳다는 가치를 강요하게 되면 인간 사회의 투쟁과 갈등은 해소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중동 지역이 왜 그리 시끄럽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들의 종교들이 하나같이 오직 자기의 신(神)만이 옳고 세상의 주관자요 창조주라고 믿고 도무지 서로 인정하려는 태도가 없기 때문인 듯 합니다. 마치 춘추사관처럼 그들은'이분법(dichotomy)'에 입각하여 선과 악이 너무 분명하고 상대방에 대하여 악이라고 규정하니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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