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탄것'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숨쉬는 일을 타고난 것'이라는 뜻이다. 곧, 모든 동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잼처 두루 살펴보면 숨이란 게 동물만 쉬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풀이나 나무 같은 식물도 숨을 쉬고, 옹기장이의 말을 들어보면 옹기도 숨을 쉰다. 집 짓는 이들은 또 벽도 숨을 쉰다고 한다. 내막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밤 하늘의 별이 속삭여 주었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효석처럼 메밀꽃이 핀 밤길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를 듣는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산하여 말하라"고 비분강개하여 소리친다. 별이나 달, 산하도 숨도 쉬고 말도 하는 그런 입이 달린 게 틀림없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숨탄것은 생물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이 자연, 우주의 모든 존재들로 받아들여진다.
숨탄것이란 말, 참 아름답다. 그러나 이왕이면 '것'보다는 '님'자를 붙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래서 '숨탄님'. 숨탄님이라고 하니 생명 있는 존재들의 그 더운 숨기운, 숨기척, 숨결, 숨소리가 한결 외경스럽게 다가오지 않는가.
'땅보탬'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 같은 그런 숨탄님들이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을 말한다. 한 중앙일간지의 '망자(亡者)'들의 소식을 전하는 난을 보니, 그 제목이 '부음' 대신 '궂긴 소식'이었다. '궂기다'라는 말에는 '상사(喪事)가 나다' '죽다'라는 뜻이 있다. 땅보탬은 궂긴 숨탄님을 땅에 모시는 것이다.
땅보탬은 장례문화의 한 형식인 '매장(埋葬)'의 뜻만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묻힌다는 말과 보탠다는 말의 어감을 비교해 보라. '묻힘'이란 말 속엔 땅과 주검이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분리'의 느낌을 준다. 반면 '보탬'은 대지(大地)와 주검이 혈연적일 만큼 일체감이 강하다. 대지 속으로 주검이 들어가면서 곧바로 주검은 대지가 돼버리는 것이다. 아니 숨탄님은 살아있을 때조차도 이미 땅, 대지였다. 삶과 죽음이 마치 물이 흐르는 듯이 순환하는 그런 느낌을 땅보탬은 주고 있다.
땅보탬 같은 말은 내겐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 말을 알고 난 후부터 몸이 달리 보이고, 죽음이라는 것도 훨씬 견딜 만한 제의(祭儀)로 다가왔다.
농사를 짓다 보면 숨탄님들의 숨을 타는 모습과 땅보탬으로 상징되는 죽음을 많이 만난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나 그 숨탄님들의 세상이나 사는 게 힘겹고 곡절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해 늦봄 마을 사람들이 '무당새'라고도 부르는 딱새부부 한 쌍이 우리 집 우체통에서 새끼를 쳤다. 내가 손수 만든 우체통이었다. 우체통은 딱새가 들락거리며 둥지를 틀기 시작했을 때 곧 사용을 중지했다. 알은 암컷이 포란을 한 지 열 사흘만에 부화했다. 그로부터 다시 열 사흘이 지나자 새끼들이 둥지를 떠났다. 우체통 속을 들여다보니 둥지 속엔 두 개의 알이 부화를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숨을 타지 못했다.
그 딱새의 알은 둥지와 함께 땅보탬을 해주었다. 떠나간 새끼들의 안부는 또 그것대로 걱정됐다. 떠날 때 보니 그 몸의 크기가 어미 몸피의 절반밖에 안될 만큼 여렸다. 우체통을 떠나기 직전 통 입구에 나와 앉아, 처음 보는 세상을 의혹이 가득 찬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언젠가 얘기했던 가래나무의 까치들도 청설모 때문에 결국 새끼를 치는 데 실패했다. 숨을 탄 새끼들을 청설모가 모두 물어 날랐다. 한번은 청설모가 둥지에서 새끼 까치를 물고 나오다가 어미 까치 두 마리와 대판 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다. 청설모는 그 와중에 입에 물었던 새끼 까치 한 마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새끼 까치를 주어다가 어머니와 함께 살려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그 새끼 까치도 가래나무 밑에 땅보탬을 해주었다.
숨탄님들의 주검은 들녁이나 야산에서도 종종 만난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건 멧비둘기의 주검이었다. 대체로 깃털과 핏자국만 남아 있는 것이었지만. 낮에 당했다면 황조롱이나 말똥가리 같은 맹금류한테 당했을 거고, 밤에 당했다면 족제비나 올빼미류에 당했을 거다.
차도에서 압사를 당한 족제비나 개구리, 땅 밖으로 기어나왔다가 바로 땅보탬을 할 처지에 놓인 두더쥐도 드문드문 만난다. 야행성인 두더쥐는 미명의 새벽에 땅 밖으로 기어나왔다가 아침 햇살을 만나 체온이 급상승하면 그만 쇼크사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곤충들의 궂긴 소식도 많다. 특히 늦가을엔 널린 게 곤충들의 주검이다. 생을 마감한 매미류, 잠자리류, 아, 어느 가을날 어치에게 걸린 잠자리! 어치가 잠자리를 낚아채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는 대추나무에 앉아 먹었다! 몸통만을 먹었는지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가 햇빛을 받고 '눈 부시게' 반짝거리며 낙하했다. 무엇일까, 저 반짝거림은? 잠자리의 영혼인가?
어떤 사마귀 한 쌍은 보기 드문 풍경을 보여주었다. 수컷이 암컷의 등 위에 올라 교미를 하고 있는 자세였는데, 그 수컷의 머리가 없었다. 교미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암컷에게 걸려든 게 분명했다.
숨탄님들은 종종 인간의 손에 종종 수난을 겪기도 했다. 오늘은 나도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게 있다.
두 해전 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마루의 출입문 앞에는 바더리가 집을 지었고 사랑방 출입문 앞에는 말벌이 집을 지었다. 처음엔, "그래 한 세월 같이 살아보자"고 느긋하게 지켜만 봤다. 한 달 남짓 지나자 벌집이 주먹보다 더 커져가고 벌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벌들이 특별히 내게 헤살을 부리는 일도 없어서 별 위협을 못 느끼고 살았다. 다만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말벌은 쉽게 볼 게 아닌 것 같아 사랑방의 그 출입문을 이용하는 걸 포기했다.
"형님, 저 왕퉁이집 내가 좀 따가도 되겠수?"
어느 날인가 마을 후배인 김군이 찾아왔다가 말했다. 왕퉁이는 다름 아닌 말벌이다.
"아니 뭐 하려고?"
"술 담을려고요. 저걸로 술 담아 먹으면 마누라 위에 한 번 올라가던 사람도 두 번은 올라간대요."
에끼, 이런. 그러나 갈수록 만만찮은 문제들이 벌어졌다. 5백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양봉을 치는 이웃집이 있었다. 그런데 그 댁 어른 말씀이 어디선가 말벌 녀석들이 날아와 자기 양봉의 벌통을 들락거리며 벌들을 죽이는 일이 잦다고 했다. 내가 우리 집의 말벌 얘기를 했더니 그 분이 무릎을 쳤다. 바로 그 놈들이 범인이라는 얘기였다. 결국 얼마 후 헐수할수 없이 그 분에게 말벌의 운명을 넘기고 말았다. 밤에 찾아온 그 분은 얼굴에 보호망을 두르고 기름에 적신 솜뭉치에 불을 붙인 다음 그 벌집을 불로 태웠다.
바더리집은 감때사납게도 내가 처치했다. 나는 그런 대로 살았지만 마을 분들은 우리 집에 오면 마루로 들어올 엄두를 쉬 내지 못했다. 워낙 많은 벌들이 윙윙대며 그 출입구 주변을 배회했기 때문이다. 애초엔 머잖아 겨울이 올 것이므로 조금만 참자고 했지만 곡절 끝에 결국 벌집을 따내서 화장(火葬)을 하고 말았다.
벼룩을 눌러 죽이며
입으로는 말하네
"나무아미타불!"
- 이싸(一茶)
두 차례에 걸쳐 숨탄님들을 살육한 후 내게 찾아온 건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였다. 순결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먹이사슬로 치면 인간보다도 더 상층에 있었던 그 옛날 '호랭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이제 인간의 천적으론 바로 자기 자신만 남게 되었다.
체로키족 인디언인 윌로 존 노인은 죽음을 앞에 두고, 굽고 뒤틀린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저기 있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게. 저 소나무는 많은 씨앗들을 퍼뜨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감싸주었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걸세. 내 몸이면 2년 치 거름 정도는 될 거야."
훗날 내가 땅보탬을 하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자란 풀과 나무에서 꽃이 핀다면 찾아올 손님이 있을 게다. 벌 친구들이다. 그 꽃 속에 꿀이나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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