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로 들어와 처음 맞는 그 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이른 아침나절부터 눈꽃바람이 불더니 오후로 접어들면서부터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구(未久)에 눈은 한 뼘 넘게 쌓였다. 폭설이었다. 앞산은 눈발 속에서 겨우 그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고, 앞산 너머 '산너머산'이라 이름 붙인 산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주막거리의 술집과 그 옆 최씨네의 유별나게 우뚝 솟은 굴뚝도 보이지 않았다. 까치박골의 김씨, 허씨네 집도 드문드문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자취가 없었다.
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도 자욱한 눈안개 속에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산과 들과 강을 덮고 모든 인가들을 덮어 이 세상이 하나로 연결되자 문득 독립된 존재로서의 내가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이럴 땐 도리 없이 막막해지기도 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윤사월의 눈 먼 처녀는 문설주에 귀 대고 꾀꼬리 울음소리를 엿듣고 있었는데, 나는 동지섣달 이 외딴집의 마루에 서서 무엇을 엿보고 있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요."
그때 옆에 서 있던 그녀가 내 바지춤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밥을 잘 먹는 것 아닐까요? 굶어 죽지 않게요."
어이쿠머니나, 이 년 말하는 것 좀 보게. 듣기에 따라서는 "사는 게 별거냐"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말문이 컥 막혔다
'그녀'는 다름 아닌 다섯 살 된 딸아이, 선재였다. 선재에게 그만 한 수 접히고 말았다.
그녀와 이 산골에서 보낸 그 겨울은 마음 같아선 봄날 같았다. 낮에는 연을 띄우고, 그녀는 그 연에 '연나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이 나는 게 나비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에헤야 디야 바람 분다 / 연을 날려보자 / 에헤야 디야 잘도 분다 / 저 하늘 높이 난다." 그녀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들녘을 뛰어 다녔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고,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숫눈' 위에 '넉장거리'를 하며 함께 벌렁벌렁 드러눕기도 했다. 하얀 눈을 송이송이 자꾸자꾸 뿌려주는 하늘나라 그 선녀님들의 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밤에는 가래나무의 열매를 까먹어 가며 그녀는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다. '은선이 언니'라는 제목의 예쁜 그림은 지금도 갖고 있다.
기나긴 밤엔 또 종종 그녀와 소꿉장난을 즐겼다.
"이게 몇 개게?"
나는 적적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눈부처를 바라보며 시나브로 물었다.
"한 개요."
그녀는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대단히 '쉽게' 보이는 물음이었지만, 그녀는 그걸 같잖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답하는 그 '즉시성'과 문답에 대한 단순한 '몰두'를 관찰하고 즐겼다. 어린 아이가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신비스럽다. 만약 그런 질문을 상투를 틀었거나 머리를 올린 '어른'들을 상대로 던졌다면 어찌됐을까.
"이 인간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대답은커녕 이런 정도의 말랑말랑한 응대만 해주어도 감지덕지 할 판이리라.
선재가 두세 살쯤 됐던 때였다.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우고 다시 말과 말을 연결해 하나의 문장을 만들 줄 알게 되었을 때, 내게 던진 첫 물음은 "이게 뭐야?"였다. 똑같은 물건을 두고도 수없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나는 한편으론 질려 하면서도 역시 똑 같은 대답을 수없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선재가 그 겨울밤 내게 '보은(報恩)'을 하고 있었다.
"한 개요." "한 개요." "한 개요."
선재는 한 열흘쯤 지내다가 떠났다. 그런데 목욕을 시켜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게 미안했다. 여자아이라서 아무래도 섬세한 손길로 '샅'을 잘 씻어주어야 할 텐데, 그게 끔직한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근대의 선승인 경허(鏡虛)가 그의 어머니 앞에서 펼친 '나신(裸身) 법문'의 얘기 한 토막.
충남 서산의 천장암(天藏庵)이라는 한 암자에서 있었던 일화다.
경허는 당시 그 암자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하루는 경허가 어머니를 위한 법문을 하겠다며 법회를 열고 대중에게 "어머니를 모셔 오라"고 말했다. 기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가 법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양구(良久). 법상에 앉아 있던 경허가 얼마간 침묵했다.
그 자체가 일종의 법문이기도 한 '양구'의 시간이 지나자 경허가 돌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경허는 곧 나신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화등잔처럼 눈을 크게 떴을 경허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이런 망칙하고 발칙한 법문이라니!
"아니, 이것도 법문이란 말이냐?"
마침내 경허의 어머니는 노여움을 못 이겨 자기 방으로 돌아가 구들장을 짊어져 버렸다. 대중이 경허의 어머니를 찾아가 경허의 법문에 토를 달았다.
"어머님, 노여움일랑 거두어 주십시오. 이게 바로 스님의 법문이랍니다."
법당에 남은 경허는 또 경허대로 통곡했다.
"나는 어머니를 여자로 보지 않는데, 어머니는 나를 남자로 보시는구나!"
어머니를 상대로 한 경허의 나신(裸身) 법문과 통곡은 일종의 '선적(禪的) 퍼포먼스'였다.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얘기가 한 폭의 아름다운 선화(禪畵)처럼 보인다.
경허의 나신 법문은 그렇다 치고, '샅'을 씻겨주는 게 끔찍해서 선재에게 목욕을 시켜주지 못하다니. 선재는 나를 남자가 아닌 아빠로 여기는데, 나는 다섯 살 난 선재를 여자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선재는 서울 집으로 올라가자마자 어찌된 영문인지 곧 수두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전화를 해 "우리 예쁜 공주님"하며 수작을 부렸더니 그녀가 곧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얼굴이 막 터지고 물이 나오고 그래요. 엉망진창이에요. 엉망진창이 예뻐요? 엉망진창이 밉잖아요? 엉망진창이 무슨 예뻐요? 누가 물어냈으면 좋겠어요. 수두까지 생겼잖아요. 뭐가 예뻐요? 왜 웃겨요? 왜 웃겨? 왜 자꾸 웃기냐구요? 왜 자꾸 놀리고 웃겨요? 왜 자꾸 장난치고 그래요?"
마침내 그녀의 장난기가 절정에 달했다.
"왜 자꾸 까불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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