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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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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뭐길래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11>

어느 해 봄, 집 뒤란 가래나무에 길다란 수꽃이 치렁치렁 달릴 무렵이었다. 나무 우듬지에 있는 까치 둥지에서 "꺄악! 꺄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새끼 까치들이었다.

어린 생명들이 내는 소리가 반가웠다. 까치 녀석들이 둥지를 짓던 무렵, "그래 새끼 잘 치거라"며, 대신 "서로 피해 주지 말고 좋게 살자"고 씨알이 안 먹히는 얘기일지언정 해두었던 처지였다.

그런데 하루는 지나다보니 큰 사단이 벌어져 있었다. 까치가 둥지 주변에서 청설모를 상대로 대판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청설모가 까치 새끼를 노렸던 게 분명했다. 어미 까치 두 마리는 청설모 한 마리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둥지의 방어에 나섰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도 하고, 부리로 찍어댈 듯이 청설모의 머리 위로 바싹 근접 비행을 하기도 했다.

청설모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청설모가 둥지 속으로 들어가 까치 새끼 한 마리를 물고 나왔다. 머리와 등줄기에 털이 약간 돋았으나 온 몸의 살색에 아직 붉은 기운이 도는 새끼였다. 어미 까치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청설모는 까치 새끼를 입에 문 채 가래나무 옆 느티나무로 건너뛰더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청설모 녀석이 저렇게 맛을 들였으니, 까치도 올해 자식농사는 다 끝이 났네요."

엊그제부터 가래나무 밑을 오가며 나보다 먼저 그 낌새를 알아채고 계셨던 어머니에게 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청설모 저것도 참 징헌 놈이다야."

그 후로도 까치와 청설모가 싸우는 모습이 몇 차례 더 눈에 띄었다. 어떤 때는 청설모가 둥지 속으로 기어들지 못하고 퇴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결국 까치는 둥지를 떠나고 말았다. 새끼를 모두 잃은 것으로 보였다.

까치가 안되어 보였다. 청설모 녀석이 좀 심했지 않나 싶었다. 자연 생태계 먹이사슬의 한 풍경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소회가 그랬다.

몇 해 전 MBC에서 <어미새의 사랑>이라는 자연 다큐멘터리가 방송됐다. 뻐꾸기가 일명 '뱁새'라고도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둥지에 자기 알을 몰래 낳아 새끼를 기르는 내용이었다. 뻐꾸기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탁란(托卵)을 통한 육아였다.

뻐꾸기 알은 그 둥지에서 가장 먼저 부화했다. 둥지 안에서는 곧 살육이 벌어졌다. 뻐꾸기 새끼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새끼와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쳐내 버렸다. 자신이 생존하려면 경쟁자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 그 뻐꾸기 새끼를 자기 새끼인 양 길렀다.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 중엔 붉은머리오목눈이에게 연민을 느꼈다는 사람도 있었고, 뻐꾸기에겐 그 얌체 같은 짓에 미운 마음이 일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머리 검은 짐승'이 자연 속에서 살다보면 이처럼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까치 이야기나 <어미새의 사랑>만 해도 그랬다. 그런 생각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예닐곱 해 전쯤 될까. 노자의 <도덕경> 영문판을 보다가 내 무지에 탄식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엔 '자연(自然)'이 '네이쳐(Nature)'가 아닌 '셀프-소우(self-so)'로 번역돼 있었다. 자연의 한자말인 '스스로(self) 자(自)'와 '그럴(so) 연(然)'의 훈(訓)을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뜻은 '스스로 그러하다'가 되었다.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네이쳐'로 번역해서는 뜻이 통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자연은 곧 '네이쳐'라는 선입견이 워낙 강했으므로 이 번역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자연이라는 말은 노자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자연은 물론 서양의 그 '네이쳐'하고는 다르다. '네이쳐'는 산이나 강, 바다와 같은 실체가 있는 대상을 가리킨다. 숲과 풀, 나무 혹은 하늘을 떠가는 한 조각의 구름, 산새가 앉아 똥을 누는 바위와 같은 삼라만상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하다(self-so)'라는 노자의 자연은 어떤 실체가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그 자연은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이랄까 하는 것을 드러내주는 말이다.

산은 높거나 낮은 게 아니라 다만 스스로 그러할 뿐이며, 강은 넓거나 좁은 게 아니라 다만 스스로 그러하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다만 스스로 그러하다. 높고 낮다거나 넓고 좁다는 판단은 모두 인간이 자신들의 가치체계를 투영시킨 것일 뿐이다.

어찌 보면 '셀프-소우'는 '네이쳐'의 본성으로도 읽혀진다. '체용(體用)'으로 비유하자면, '네이쳐'가 '체'일 때 '셀프-소우'는 '용'일수도 있다.

그런데 서구의 '네이쳐'가 자연으로 번역되면서 노자가 말한 '셀프-소우'의 그 자연은 그만 실종돼 버렸다. 자연을 '셀프-소우'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셀프-소우'에 담긴 그 깊은 뜻을 생각할 때 엄청난 인문학적(人文學的) 손실처럼 보인다. 어쩌면 '네이쳐'가 자연으로 번역된 것은 동서양 인문학의 교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일지도 몰랐다.

까치와 청설모, <어미새의 사랑>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네이쳐'를 이루는 개개의 존재들이라면, 그들의 살아가는 풍경은 '셀프-소우'처럼 '스스로 그러할' 뿐인 그런 이야기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가치체계로 선악에 대한 판단을 하거나 호오의 감정을 낸다.

선가(禪家)의 문답에도 자연의 본성을 드러내줄 만한 얘기들이 있다.

당대의 선사였던 조주(趙州)에게 어떤 학인이 찾아와 물었다.

"대해(大海)는 많은 강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대해는, '모른다(不知)'고 말하고 있다."

"어찌하여 모른다는 것입니까?"

"대해는 어떻든지, '나는 많은 강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我納衆流)'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는 거야."

이 문답을 통해 조주는 말한다. 바다가 강물을 받아들이니 그렇지 않느니 하며 사물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는 쓸 데 없는 그런 짓은 그만 두라. 선문답의 맥락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한편 대해의 그 침묵은 바로 자연의 실상 혹은 본성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말이 없는 자연(네이쳐)은 다만 '셀프-소우' 곧 '스스로 그러할' 뿐이므로.

16대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한 정치인은 자신의 좌우명을 '해불양수(海不讓水)'라고 말했다. 직역하면 '바다는 (흘러 들어오는) 물을 사양하지 않는다'는 뜻일 게다.

조주와 학인의 문답에 비추어 말하자면, 이 역시 인간이 '스스로 그러할' 뿐인 바다에 부질없이 해석을 가한 말이다.

원주 치악산에는 까치와 구렁이의 전설이 남아 있다. 이 전설 속에서 인간은 아예 자연의 현상에 깊이 참견을 하고 있다. 까치 둥지 속의 새끼를 노리는 동물이 있었다. 청설모 대신 구렁이였다. 전설은, 둥지가 있던 그 나무를 기어오르는 구렁이를 본 한 나그네가 그 구렁이를 죽여 까치 새끼를 구해준다는 얘기였다. 한편 까치를 구해준 나그네는 그날 밤, 낮에 죽인 구렁이의 아내벌인 암컷 구렁이로부터 복수를 당해 죽을 처지에 놓인다. 이에 어미 까치들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던져가면서 그 인간의 은혜를 갚았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에는 까치와 구렁이의 관계가 선악의 구도로 설정되어 있다. 그 구도 속에서 인간은 약자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고, 강자의 불의를 응징한다. 도움은 받은 자는 다시 죽음까지 감내하며 그 은혜를 갚는다. 전형적인 유가적 윤리의 구도다.

역시 당대의 선사였던 동산양개(洞山良价)와 한 학인과의 문답을 보자.

학인이 물었다.

"뱀이 개구리를 삼키려는 것을 보았을 때 구해줘야 합니까, 그냥 내버려둬야 합니까?"

양개가 답했다.

"구해준다면 (그대의) 두 눈이 멀어버릴 것이고, 구해주지 않는다면 (개구리의) 형체도 그림자도 안 보이게 될 것이다."

구해주면 두 눈이 멀게 되니 '도(道)를 보지 못한다'. 구해주지 않으면 개구리가 생명을 잃게 되니 곧 '도(道)를 잃게 된다'. 도를 보면서 도를 잃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치악산 전설의 경우, 까치를 구해주면 도를 보지 못하고, 까치를 구해주지 않으면 도를 잃게 된다.

도를 구하는 사람이 찾아와 "무엇이 무위(無爲)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런 질문이야말로 유위(有爲)다"고 답한 선사가 있었다.

자연(自然)이란 게 무엇일까 하는 이런 얘기도 어찌 보면 참 부자연(不自然)스럽다. 입 다물고 그냥 있으면 별일이 없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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