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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놈과 베인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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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놈과 베인 놈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9>

산 능선 위로 펼쳐진 하늘이 몹시 푸르다. 구름도 한 점 없다. 그 푸르름이 너무 깊어 보여서 일순 막막하고 아득해진다. 그 와중에 세찬 골바람 한 줄기가 골짜기를 흔들며 지나갔다. 황갈색으로 물이 든 느티나무의 잎들이 그 하늘을 배경으로 우수수 날렸다.

가을이 깊어지면 농사 짓는 이들은 서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봄에는 입춘 뒤 88일째 부근에 내린다는 '88야(夜)의 이별서리'(늦서리)가 무섭고, 가을엔 첫서리부터 무섭다. 첫서리도 무서리이면 웬만한 작물은 그런 대로 견디지만, 된서리라도 내리는 날이면 농사는 사실상 마감된다. 고추나 호박 따위만 해도 된서리를 맞으면 먹지를 못한다. 얼었다가 녹으면 흐물흐물 물러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산사(山寺)는 고추 농사가 제법 컸다. 며칠 전엔 서리 걱정을 하며 산사 식구들이 모두 나서 고추를 따냈다. 내친 김에 오늘은 밭 정지 작업도 서두르기로 했다. 추위가 오면 밭일도 힘들어지는 탓이다. 작업은 고추의 쓰러짐을 막기 위해 박아두었던 지주와 고추끈 등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점심때를 막 지난, 미시(未時)의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겨울이 오는 낌새가 역력했던 아침나절엔 몹시 추웠던 만큼, 등과 어깨로 받는 이 햇살은 새삼 큰 위안을 주었다. 가을날의 이 햇살에서 만나는 따사로움은, 추위가 아직 덜 가신 그런 봄날의 햇살이 주었던 위안의 기억을 떠올려 주었다.

크게 힘을 쓰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낫을 잡은 손과 몸에서 힘을 뺐다. 몸도 느릿느릿 움직였는데 느낌이 좋았다. 손과 발을 쓸 때마다 그 움직임이 보이고, 그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도 보였다. 몸을 느리게 쓰는 일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몸을 일상적인 속도보다도 의식적으로 느리게 움직이려면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

어제 잠자리가 너무 냉한 탓이었을까. 한편 일을 해나갈수록 볼에는 열기가 느껴졌다. 감기 기운 같았다. 몸이 왠지 개운치가 않았다.

"뻐꾹! 뻐꾹!"

그때 깊은 산 속에서 갑자기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 녀석은 남쪽으로 떠나질 않고 지금까지 무얼 하고 있나? 상강(霜降)이 내일 모레인데.

그 순간, 틈을 비집고 일이 터졌다. 왼손 엄지손가락 끝에 예리한 통증이 왔다. 살펴보니 벌써 피가 솟는다. 면장갑까지 낀 엄지손가락 끝을 낫으로 베어내고 만 것이다. 채 떨어지지 않은 살점이 잘려진 장갑과 함께 달랑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인간하고는!

고개를 돌려보니 오른손은 낫을 든 채 망연히 허공 속에 머물러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베고 말았구나!
벤 놈은 누구이고 베인 놈은 또 누구인가.
그러나 두 손은 모두 말이 없었다.

요사채에 머물고 있던 노보살님을 찾아가 일회용 밴드로 손가락을 싸맸다.

"우짜꼬, 속살이 허옇게 보이네."

노보살님은 손가락의 베인 자리를 보고 연신 혀를 찼다.

서툰 낫질을 해서 수선을 피운 것 자체가 민망했다. 왼손에 새 면장갑을 꺼내 끼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핏물이 장갑 밖으로까지 새어 나오고 통증도 제법 심했다.

"이 손가락이 아픈 것인가, 아니면 그대가 아픈 것인가?"

일을 하는 동안 엄지손가락의 통증이 자꾸 물어왔다.

"처사(處士)예, 참 드시고 하이소."

멀리 밭머리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공양주보살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녀는 참을 얹은 쟁반을 머리 위에 이고 왔다. 오늘 참은 도토리묵 무침이었다.

오른손이, 손가락을 벤 왼손의 장갑을 조심스럽게 벗겨주었다. 밴드 밖으로 흘러나와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왼손도 오른손의 장갑을 벗겨 주었다.

무김치를 채 썰어 무친 묵은 별미였다. 묵을 먹다 보니 문득 두 손이 다시 보였다. 왼손은, 엄지를 뺀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묵을 담은 그릇을 받쳐들고 있고, 오른손은 그 그릇 안에서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역시 벤 놈과 베인 놈 모두 말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이.

왼손과 오른손이 보이고, 그 두 손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다시 보이는 이런 날은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니 그 푸르름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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