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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바람 바람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7>

미당 서정주의 바람이 있었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 <자화상> 부분

세인들은 '기인'이라 부르고, 친구였던 작가 천승세는 '평화를 쪼고 있는 천계(天界)의 파랑새'라 불렀던 천상병의 바람도 있었다.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 <크레이지 배가본드> 부분

김수영의 바람도 있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풀> 부분

시인은 풀에서 민중의 생명력을 보았고, 바람에게선 그 민중을 억압하는 힘을 보았다. 바람은 보는 이에 따라서 그 얼굴을 달리 했다.

그런가 하면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의 바람도 있었다.

바람 바람 / 바람은 / 서 있는 / 놈이 / 없으면 / 바람도 / 아니야

지난 97년 <나락 한알 속의 우주>라는 책이 녹색평론사에서 발간됐다. '无爲堂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 책의 표지를 넘기면 장 선생이 친 묵란(墨蘭) 한 폭을 만날 수 있다. 난은 꽃을 단 채 바람에 나부끼는 풍란(風蘭).

그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크게 놀랐다. 그림에 달아놓은 화제(畵題)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화제가 바로 '바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화제로서도 백미였지만 진리를 담아낸 그 운문적 표현이 정말 아름다웠다.

"바람 바람 바람은 서 있는 놈이 없으면 바람도 아니야!"

장 선생의 자해(自解)를 직접 들어보진 못했지만 이 화제는 뭐랄까, 이 세상 혹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결국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상의성이랄지 또는 관계성 같은 걸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한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일 수도 있고,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둘이나 셋이면서도 결국 하나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일 수도 있다.

'서 있는 놈'은, 이 그림에선 난(蘭)이다. 난이 자신의 잎을 나부껴 주지 않는다면 이 그림을 보는 이는 바람의 존재를 '눈으로 볼 수 없다'. 난이 잎을 나부껴 주었을 때 바람은 비로소 바람으로 존재한다. 사소한 일상적 풍경에서 존재들간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이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장 선생의 직관이 참으로 놀랍다.

장 선생은 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해방구'로도 불렸던 원주의 정신적 지주였다.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80년대엔 박재일씨 등과ꡐ한살림ꡑ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원주의 그의 집은 무수한 민주화 운동 인사들과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곧잘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들은 장 선생에게 찾아와 위로를 받고, 지혜를 구했다고 한다.

<나락 한알 속의 우주>는 장 선생의 육성이 절절이 담긴 책이다. 장 선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종교였던 천주교를 뛰어 넘어 유․불․선을 넘나들고, 해월 최시형의 사상 등 동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깊은 사색을 보여 주었다.

농사 지을 생각을 하면서 현장을 기웃거릴 때 이 <나락 한알 속의 우주>를 만났다. 농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나침반이 될 수도 있는 책이다. 농사와 농사를 짓는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자연과 우주는 또 무엇인지, 그의 얘기들은 석간수처럼 명징하면서도 겸허했다.

장 선생의 육성을 몇 대목만 들어보자.

"일찍이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밥 한 그릇을 알게 되면 세상의 만 가지를 다 알게 되나니라'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멍텅구리라서 그 얘기를 몇 십 년 전에 보면서 이게 뭔 얘긴가 하고 수없이 더듬어 보았어요.

그런데 그게 다른 얘기가 아니야. 풀 하나 돌 하나, 예를 들어서 나락 하나도 땅과 하늘이 없으면, 물과 빛이 없으면, 공기가 없으면, 미물이 없으면, 나락 하나가 되지를 않는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나락 하나가 우주 없이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바로 그 나락 하나는 하늘이다 이거야."

장 선생은 또 "풀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돌이라든가 하는 일체의 중생과 나와의 관계는 동격(同格), 동가(同價)"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이라. 세상에서 다른 사람 앞에 서려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이야. 오늘도 내가 재수 없게 여러분들 앞에 섰지만 앞에 서지 말라 이 말이야. (중략)

꽃 하나, 벌레 하나, 풀 하나를 보더라도 다 하심(下心)으로써 겸손한 마음으로써 섬기라 이 말이야."

녹색평론사는 시 작품을 모집하는 사고에서, "진정한 시인은 본질적으로 가장 심오한 생태론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장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 아니었을까.

10여 년 전 한국화가인 한 선배로부터 쥘부채 하나를 받은 적이 있다. 부채를 펴자 그림 한 폭도 같이 펼쳐졌다. 바람은 그곳에도 있었다.

사군자 가운데 하나인 매화가 한창 꽃을 달고 있었는데, 그 나무 밑에는 한 사내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에 달아놓은 화제가 재미있었다.

"겨울 梅花 / 피기에 / 君子를 / 만나러 / 나갔더니 / 봄 들판에 / 바람난 사내만 / 서있더라"

갈대와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강가를 종일 걸었다. 바람도 바람 나름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길을 나섰던 것일까. 바람에 대한 글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리 쓰는 것일까.

선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좌선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 한 올 없었으므로 풍경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풍경의 침묵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가 한 순간 사무치게 느껴졌다.

"바람은, 그 간 데를 모르겠더니 소리 없는 풍경 속에 숨어 있었네!"

에라 만수!

<필자 이메일: suna10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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