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는 이 산사(山寺)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법당 뒤편, 아름드리 소나무 네 그루가 뿌리 채 뽑혔다. 빗물이 대지의 속살까지 질펀하게 적신 직후, 바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고목의 뿌리를 들어올려 버린 것이다.
산사의 사람들에겐 뜻밖의 산판 일이 생겼다. 기계톱과 손톱을 동원해 소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산 아래로 옮겨야 했다.
"사람은 하루에도 죽을 짓을 세 번 한다네."
만만찮은 일을 앞두고 민씨 노인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사실 초심자들에게 이런 일은 위험이 많이 따른다. 마르지 않은 생나무는 무거워서 다루기가 버겁고 그 무게를 못 이겨 발이 미끄러지거나 몸이 중심을 잃는 경우도 흔하다. 자른 통나무를 아래로 굴리다보면 그 구르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수도 있다.
"어르신, 나이테를 세어보니 80년은 넘은 것 같은데요."
나무 밑동을 들여다보던 내가 말하자 민씨 노인이 말을 받았다.
"내 나이하고 비슷하구먼. 죽은 나무라도 함부로 다루지 말게. 나무에는 나무대로 목신(木神)이 있는 법이니까. 사람하고 똑 같네. 영혼이 있는 것처럼."
중심줄기 옆의 팔뚝만한 가지의 밑동도 나이테를 세어보았다. 한 40년은 되어 보였다. 이 가지는 내 나이에 약간 못 미친 세월을 살았다. '연륜'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이 저 아름드리의 줄기와 팔뚝 굵기의 가지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노인과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80년 세월 앞에서 40년 세월의 왜소함을 보고 나는 순간 몸을 떨었다.
민씨 노인은 60년만에 이 산사를 찾았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에는 산채를 캐러 이곳 산에 올랐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이 산사에 들렸다. 지금은 상처(喪妻)를 한 후 노년을 추스르기 힘겨워 다시 찾았다. 부목(負木)을 자청했다. 제 때 밥술이나 얻어먹고 속 편하면 족하다 싶어서였다.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년놈들이 싸우는 걸 보면 꼭 나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네."
아들네, 딸네 집을 두루 다녀보았으나 편치가 않아 차라리 절집을 찾았다는 것이다.
민씨 노인은 15년 전까지만 해도 심메마니의 삶을 살았다. 그 동안 캔 산삼이 40여 뿌리는 됐다. 장가가서 분가했을 땐 집도 없었고 밭 두마지기가 전 재산이었다. 그러다가 산삼으로 형편을 폈다. 한때는 그랬다고 했다.
"니 밥은 묵고 사나? 나도 밥은 묵고 산다."
심메마니로서의 삶은 그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준 것처럼 보였다. 산이나 산에 사는 나무 등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두려움까지 담겨있기도 했다.
"산이 내주시지 않으면, 심(산삼)을 캘 수 없다네."
심메마니들에겐 금기가 많다. 그 금기들은 얼핏 보면 샤머니즘 따위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달리 바라보면 인간의 자기정화와 자연의 영성에 대한 외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대체로 그들은 입산하기 일주일 전부터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매일 목욕재계한다. 상가 문상을 비롯해 경조사에도 일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외부인이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에 금줄을 치는 경우도 있다. 부정(不淨)을 탈까 염려해서다. 육류만 해도 보신탕은 말할 것도 없고 닭고기와 달걀 따위도 먹지 않았다. 부부간의 성관계 역시 피했다. 산삼에 대한 욕심마저도 털어 내려 애썼고 다만, 자신이 산과 '소통'되기만을 기원했다.
심메마니 세계의 이런 규범을 오랜 세월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아무래도 그 안에 담긴 가치들이 일상적인 삶에도 스며들지 않았을까.
민씨 노인과 지내면서 새삼 느끼는 건, 노인은 가볍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힘이 빠져나간 탓일까. 그 빠져나간 힘의 정체는 육질적인 에너지일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의식(自意識)인 것처럼 보였다. 노인을 보면, 노인은 보이지 않고 그가 살아온 삶만 보였다.
노인은 한편 소리도 없었다. 고양이처럼. 나는 민씨 노인과 함께 일을 하다가도 종종 그의 기척과 자취를 놓쳤다. 주위를 둘러보면 노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마찬가지로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를 놓치는 것은 내가 일에 몰두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내가 말을 건넸다.
"어르신, 저는 이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몸이 이처럼 노곤노곤하게... ?"
문득 노인의 기척이 없다고 느꼈다. 뒤돌아보니 노인은 저만치 떨어져서 오고 있다. 또 놓쳤구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걸음이 빨라서도 아니고, 노인이 힘에 부쳐 뒤쳐져서도 아니었다. 노인은 몸을 움직이는 리듬이랄까 하는 게 나와는 달랐으므로, 다만 그것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이럴 때 노인이 보여주는 그 '느림'은 참 신비롭다. 어쩌면 삶의 본질과도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느림'은 적어도 속도와는 무관한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노인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곧 깊은 침묵의 시간이 되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