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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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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추위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5>

사나흘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다.

해거름 무렵의 여린 햇살을 받아서일까.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집이 해쓱해 뵌다. 빗질을 한 흔적이 선연한 토방과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헌 고무신 한 켤레, 자물쇠가 채워진 방문, 모두가 노을 빛으로 물들어 있다. 무슨 기척 같은 것도 없고 낯도 설다. 독(獨)살이 하는 집은 하룻밤만 밖에서 묵고 와도 남 같다더니 정말 그렇다.

그런데 방안에 누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내가 밖에서 채운 자물쇠는 그대로다. 여러 차례 겪어 온 일이지만, 사실 이런 집이야말로 만만찮다. 어떤 이는 이런 빈집 앞에서 '적막'을 보고 가고, 또 다른 이는 '침묵'을 느낀다. 이 침묵 속에는 '누구'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날도 추운데 또 오셨는가?"

결국 나는 빈집이 하는 말을 듣고 말았다. 주인(主人) 행세를 하는 빈집 앞에서 나는 객(客)이었다. 술도 사람이 안보는 데서 농익는다더니 집도 얼마간 비워두면 이렇다.

집안엔 한기가 가득했다. 물이란 물은 모두 얼어서 몸을 바꿨다. 그러고 보면 한기도 살아있는 짐승이다. 물을 빌려서라도 그 내색을 하니. 부엌의 동이와 대야에 받아놓은 물은 아예 바닥까지 얼었고 허드렛물이 들어있는 구들솥의 뚜껑은 열리지도 않았다. 마루의 물병과 미쳐 치워두지 못한 방안의 자리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냉장고 속만은 무사태평하다. 생수 병은 찰랑거리고 두부와 콩나물도 고운 색 그대로다. 역설적이게도 냉장고 안이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사실 나는 생리적으로 겨울이 맞는다. 우선은 몸이 잘 받아내거니와 겨울이 되면 구들장을 짊어지고 칩거를 하거나 내면으로 침잠하는 따위에도 의욕을 부린다. 하지만 겨울도 겨울 나름이다. 이번 겨울은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간 날들이 흔했다. 그 추위와 한기를 생각하면 겨울 예찬만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우리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거들랑 송장이나 치워주쇼."

이웃집에 사는 박씨 형에게 농 삼아 했던 말이다. 안방 구들은 쇠구들이어서 어지간히 불을 때서는 방바닥에 온기도 올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두툼한 담요 위에 다시 전기장판을 깔고 낡은 스토브도 구해다 켰다.

날이면 날마다 추위와 밀고 밀리는 백병전을 벌였다. 전력 소모량이 많은 스토브는 오래 켜둘 수도 없다. 스위치를 내릴 때마다 한기는 곧바로 방문을 두드렸다.

바로 그 무렵 눈 덮인 이 산골에서, 산야를 유랑하던 어느 <늑대> 한 마리를 운명처럼 만났다.

그 늑대란 다름 아닌 아파치족 인디언인 <뒤를 밟는 늑대>(Stalking Wolf)였다.

<추적자>(The Tracker)라는 책에서 저자인 톰 브라운(Tom Brown, Jr)의 스승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늑대는, <할아버지>(Grandfather)를 통해 그의 삶 전체를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란 아파치족 인디언 사회에서 어른과 선생을 뜻하는 말로, 뒤를 밟는 늑대의 별칭이다.

이 책들은 대자연 속에서 한 인디언이 고독한 방랑 끝에 찾아낸, 자연의 진리와 영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

인디언들의 방랑은 대체로 '영혼'의 부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무대는 주로 황야나 사막, 산 따위다. 그들은 그 방랑을 통해 '더 높은 존재'로부터 오는 비전(秘傳)을 탐색한다. 이는 종교적인 성자들이 설산이나 광야에서 고행을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 것과도 많이 닮았다.

늑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의 방랑은 데스밸리와 같은 사막이나 남미 아마존의 밀림, 북극의 툰드라지대 같은 극한지대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이 생존하기조차 힘겨운 곳이다. 그는 그런 곳에서 자연의 진리나 영적인 지혜를 구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죽음과도 맞섰다. 그렇게 홀로 떠돈 세월이 60여 년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숲 속, '마법의 오두막'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캠프.

주름살 투성이의 인디언 '할아버지'(뒤를 밟는 늑대)가 말했다.

"너희들의 옷을 나한테 다오."

두 소년(톰 브라운과 그의 친구 릭)은 할아버지 앞에서 스웨터와 셔츠, 바지를 벗었다. 맨몸에 걸친 건 팬티 하나 뿐.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에 다리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할아버지는 소년들의 옷을 차곡차곡 개어 들고 일어섰다. 소년들은 지금부터 맨몸으로 이 오두막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눈보라 치는 그 숲 속의 길은 곧게 가더라도 20리나 되는 먼 길. 일종의 생존훈련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추위는 네 형제이니라."

칼날 같은 바람에 눈 폭풍이 일고 있었으므로 할아버지는 다시 덧붙였다.

"바람도 네 형제이니라. 그러나 너희들은 바람을 적으로 취급해 왔다. 너희가 이렇게 벗은 몸으로 집에까지 갈 수 있다면, 너희는 다시는 바람의 칼날을 느끼지 않게 될 게다."

말을 마친 할아버지는 두 소년만을 남겨둔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던 소년들은 마침내 오두막을 나와 눈밭 속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모험은 무모하게 보였다. 가야 할 길의 절반도 채 가지 못해서 소년들은 춥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맛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형제'라고 하는 그 칼바람이 온 몸을 후려치는, 그 매운 손길을 겪어야 했다. 온 몸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몸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이빨이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 몸은, 이내 하얀 고치처럼 됐다.

"차라리 눈밭에 누워 편히 쉬어라."

매서운 바람이 지친 소년들에게 속삭였다. 소년들은 입이 얼어붙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년들은 넋을 잃은 채 한 걸음씩 옮겼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얼어죽을지도 몰랐다. 그때 문득 할아버지가 들려주곤 하던 얘기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가 자연과 하나가 된다면, 자연은 우리를 해칠 수 없느니라."

이 말에 소년들은 새롭게 암시를 받았다. 소년들은 곧바로 추위에 저항하기를 그쳤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다. 살을 에던 추위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인디언들의 이야기엔 영혼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러나 그들 세계의 영성적 진리와 지혜를 온전하게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톰 브라운의 기억은 더 이어진다.

한겨울인데도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개울을 찾아 목욕을 했다.

"나는 그분의 행동에서 아무런 '저항'도 읽을 수 없었고, 오직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만을 읽었다. 어떠한 발버둥이나 싸움도, 심지어는 소름이나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그분은 마치 추위의 일부이고, 어떤 식으로든 추위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본질적으로 그분은 추위 그 자체이고, 그 힘을 받아 더 튼튼해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말한 저항과 수용은 무슨 뜻일까. 노자의 <도덕경>에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라고 했으니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까. 앞에서 "추위는 네 형제이니라"라고 말했던 할아버지는, 어린 두 소년에게 수용을 '형제'에, 그리고 저항을 '적'에 비유해서 가르쳤던 것처럼 보인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던 겨울 한철 동안,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일상에 무디어진 내 마음을 일깨우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던져 주었다.

중국 당대(唐代)의 어느 선가(禪家)에서 오고 간 <한서(寒暑)>에 대한 문답은 또 어떨까.

도(道)를 구하는 이가 선사(禪師)를 찾아와 물었다.

"어떻게 해야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추울 때는 다만 추워할 뿐, 그 추위를 문제 삼지 말고 그저 내버려두게. 더울 때는 다만 더워할 뿐, 그 더위를 문제 삼지 말고 그저 내버려두게."

선사들이 도(道)라고 했던 평상심(平常心)은 선악(善惡)이나 호오(好惡), 가치판단 등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잘 뿐이다(饑來喫飯 困來卽眠)."

자연에 저항하지 말고 전적으로 수용하라 했던 할아버지의 마음도 이 평상심과 같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날은 추워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불쏘시개의 불땀이 쓸 만했던지 장작에선 곧 불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잉걸불에 언 손을 쬐는 내게, 추위가 형제였는지는 기억이 분명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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