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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4>

2000년 소설(小雪) 무렵에 도시생활을 접었다. 횡성의 이 산골로 들어와 맞는 겨울도 벌써 세 해째다.

불을 켜지 않은 방안은 아침나절이 한참 지났지만 무척 어둡다. 집터가 서향인 이 외딴집엔 볕도 잘 들지 않는다. 더욱이 대설(大雪)인 오늘은 절기 값을 하느라 눈까지 내리고 있어 세상이 온통 어둑하다.

아침도 거르고 어둠을 핑계삼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아무래도 간밤에 마신 술이 너무 지나쳤던 듯 싶다.

어제 해거름에 이웃집에 사는 조씨 어르신이 눈발 속에서 찾아 오셨다.

"막국수 개시나 해주슈."

두 내외만이 사는 이 어르신네는 '잔병치레 많은 두 양주(兩主) 약값이나 해보자'고 겨울 한철 막국수 장사를 하신다. 닷새장날 읍내에서 만났을 때, 곧 개시를 하실 예정이라더니 날이 잡힌 모양이다.

어르신네 막국수는 단골손님들이 꽤 있다. 이 외진 마을에 손님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입소문이 나서 읍내나 원주에서도 찾는 이들이 적잖다. 아마 담백하고 투박한 맛 때문인 것 같다. 메밀도 맷돌에 손수 갈고 국수발도 골동품 같은 국수틀에서 직접 뽑는다. 국수발은 전분가루를 거의 섞지 않아 찰기가 없는 대신 투박한 게 별미다. 젓가락질을 하면 동치미국물 속에서 툭툭 끊어진다.

속이 출출하던 참에 내쳐 따라 나섰다. 올 겨울 어르신네 마수걸이 손님이 된 셈이다. 소반에는 국수와 엊그제 담은 김장김치 그리고 집안 동생이 말술로 갖다 주었다는 '조껍데기 술'까지 얹혀 나왔다. 이런 산골에선 노상 그러하듯 밥상은 곧 '물샐틈없는' 술상도 되었다.

"눈까지 내리는 날에 행복합니다요, 어르신."

"나도 장사할려고 부른 게 아니유."

창 밖에선 눈이 쌓여 가는데 술 사발은 계속 비워졌다.

"올 농사는 어르신네가 짭짤한 것 같습니다. 청양고추도 값 좋을 때 많이 내셨고요, 감자도 두 박스밖에 안 심으셨다지만 50박스도 더 거두시고요."

"그런가. 허긴 농사를 적게 짓는 게 남는 거라고 하니까."

비닐 두 필 깔 정도의 밭뙈기 뿐이지만 두 양주 농사 살림은 차라리 대농(大農)보다 낫다. 밑지지 않는 농사를 짓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부스럼이 커야 고름이 많이 나온다는 것도 이젠 다 헛소리가 됐어, 허허. 뭐가 좀 값이 된다 싶어 농사판을 크게 벌여 놓으면 수입산들이 들어와 떡을 치니."

막국수와 술이 있는 조씨 어르신 댁은 마을 사람들에겐 '참새 방앗간'이다. 이웃들의 얘기도 질펀하다.

얼마 전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다. FTA라니,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이 무슨 해괴한 문자 속인가. 졸지에 돼지목장을 하는 권씨네는 걱정거리를 한 보따리나 짊어지게 됐다. 칠레산 돼지고기의 경우 10년 내에 관세가 완전 철폐될 예정이다. 양돈농가에 연(年) 최대 5천억원의 피해가 갈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칠레가 FTA의 첫 '스파링 파트너'였다니, 앞으로 '메인 게임'에서 등장할 나라들은 또 어떤 나라들인가.

무와 배추농사가 주작목인 박씨네, 젖소를 키우는 진씨와 맹씨네 목장들도 입에 올랐다. 역시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우유만 해도 그렇다. 국내산도 남아 돌아가 우유 마시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판에, '혼합분유'라고 하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이 수입되고 있는가. 중국산 김치와 절임용 배추 역시 원산지 표시도 없이 시중에 대량 유통되고 있다.

'배추박사' 소리를 들어 온 박씨네는 배추도 이젠 못 심겠다며 홍화는 수지가 맞는지를 내게 물어왔다. 내가 홍화 농사를 짓고 있는 까닭이다. 홍화라고 예외이겠는가. 핍진하고도 핍진한 속사정들이었다.

물론 농업분야의 문제들이 우루과이 라운드(UR)나 뉴 라운드(NR) 등 무슨 '라운드 시리즈'랄지 또는 신자유주의나 세계화 따위의 외부적 요인에서 어느 날 갑자기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 등 서구세계가 주도하는 이런 새로운 흐름들이 제3세계의 농업을 치명적으로 황폐화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농산물의 경우 비교우위론에 따른 수입자유화와 관세 장벽의 철폐로 인해 외국산들이 무차별적으로 들락거린다. 올해 말로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조치가 해제되는 중국산 마늘은 벌써 마늘 재배 농가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생채기를 주고 있다. 고추, 양파 같은 채소류도 그렇고 사과와 배, 포도를 비롯한 각종 과일과 육류 등 대부분의 농축산분야 역시 외국산 앞에서 거의 무장해제 되어 버린 상황이다.

이런 현실은 단순히 농촌경제를 악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 삶의 뿌리인 농촌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근원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세계화'를 두고 '침몰해가는 타이타닉호에서 벌이는 포커게임'이라고 한 말은 이제 고전적인 표현이 되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침몰해가는 카페리호에서 벌이는 고스톱 판' 정도라고나 해야 되나.

밥술 깨나 먹게 되면서 '자발적인 가난'이나 '주체적인 청빈'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속뜻이야 아름답다. 하지만 농투성이들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다 보면 "찢어졌다고 다 입이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얼마 전 라디오방송에서 어떤 농민이 나와 쓴 소리를 했다.

"자발이나 주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빈곤이 문젭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하고 뭐가 다릅니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은행에서 빚을 못 얻어 쓴 사람이고 저는 갖다 써서 먹고 산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빚이 5천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80년대로 접어든 이후 지금부터는 '빵의 크기'가 아닌 '빵의 질'이 문제라고 주창한 생태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빵의 크기'는 대다수 농민들에겐 여전히 절박한 문제다. 생존과 직결된 까닭이다.

밤이 깊어져서 그만 일어서려는데 어르신이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한 말씀 주셨다.

"올 겨울에 몸이나 잘 만들어 놓으슈. 그래야 봄에 또 써먹지. 농사일이 없으니 몸 건사하기가 쉬워 보여도, 농사꾼 몸은 일이 없을 때 더 축이 나는 법이니까."

아주머니가 들려주시는 김장배추 몇 포기를 손에 들고 돌아오는 길은 춥고도 스산했으며 쌓인 눈 밑에는 눈석임물이 깔려 있어 미끄럽고도 미끄러웠다.

뒷산 자락 덤불 숲이 소란스럽다. 녀석들이다. 검은 색 넥타이를 맨 박새와 도무지 나 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루까지 쳐들어오기도 하는 쇠박새, 눈썹이 일품인 동고비, 지난 여름 얼마나 불나게 사랑을 했는지 그 수가 엄청 불어난 멧새와 노랑턱맷새, 하얀 머리띠를 두르고 다홍색 치마를 입은 곤줄박이 바로 그 녀석들이다. 우리 집 대문에 달린 우편함에서 귀여운 새끼를 본 딱새와 그 무리울음으로 소스라치는 놀라움을 주곤 하던 붉은머리오목눈이떼도 끼어 있다.

여름철새들은 모두 떠나가고 녀석들은 이렇게 자기들끼리만 남아서 무리를 짓고 겨울을 견딘다. 그 생명력이 참으로 경이롭다. 몸을 뒤척이며 창호지를 바른 동창에 귀를 기울인다.

녀석들의 노랫소리는 <가을 깊은데 / 옆방은 무엇 하는 / 사람인가>라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를 생각나게 한다. 간밤에 마신 술의 뒷치레를 하느라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내게 녀석들이 묻고 있다.

"겨울 깊어 가는데 그 방은 무엇 하는 사람인가?"

"............"

부끄러운 노릇이다. 농사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슴 속에 갈무리하고 들어온 많은 화두(話頭)들은 어찌 되었을까. 생태주의적인 삶과 공동체, 농부로서의 전형이나 전범 탐색, 채식과 명상, 노동선(禪) 등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일까. 지난 세 해를 뒤돌아보면 한겨울 어두운 새벽녘에 그믐달을 만났을 때처럼 속이 시리다.

가족들에게 준 상처는 또 얼마인가.

아리카라족이라는 인디언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낫을 벼릴 때와 마음을 벼릴 때가 다름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우리 선인들은 정월 대보름에 만나면 서로 눈빛부터 살폈다. 눈빛은 겨울 한 철 마음농사를 어떻게 지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었다. 마음부터 다시 추슬러야겠다고 '마음'이 '마음'에게 말한다.

몸을 일으켜 세워 마당에 나서보니 집에서 큰길로 나가는 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눈은 종종 이렇게 세상을 덮어서 서 있는 사람에게 가고자 하는 길이 어디인가를 묻는다.

이웃들에게 인기척이라도 낼 요량으로 빗자루를 들었다. 눈을 쓸어낸 길섶에선 망초와 꽃마리, 고들빼기, 보리뱅이 등 두해살이풀들이 보인다. 손톱만 한 어린 잎들이 서리에 얼어붙고 눈에 묻히면서도 한 오라기 햇살에 다시 언 몸을 녹여가며 겨울을 나는 모습은 가슴을 젖게 한다. 겨우살이의 모진 시련 때문일까. 녀석들의 엽색이 검붉게 물들어 있다.

*이 글은 (주)이장의 <월간 이장>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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