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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나무집, 마침내 귀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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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나무집, 마침내 귀농하다

서연의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2>

귀농할 땅을 힘겹게 찾고 있던 시절, 농사를 짓던 한 선배가 말했다.

"땅은 사람을 쉽게 받아주질 않아요. 땅도 텃세를 하지요."

어떤 지역으로 귀농하든 진짜배기 텃세는 사람보다 땅이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땅을 바로 만나기도 어렵지만, 만나서 농사를 짓게 되더라도 그 '땅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했다.
예비농사꾼에겐 다소 겁나는 얘기였다. 땅을 대할 땐 늘 겸허하고 땅에 대한 외경심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한 인간이 자기 땅을 만나려면 부자지간 같은 천륜보다도 더 깊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

이런 오금을 박는 말도 있었다. 선배의 말에 실감이 안 날 도리가 없었다.

강원 횡성의 한 산골마을.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어렵사리 한 집을 만났다. 늦가을의 어느 날 마침내 입주를 했다.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외딴집이었다. 이 집은 호두나무의 사촌벌인 가래나무가 무척 인상적이다. 집 뒤편에 있는 아름드리의 이 나무는 수령이 100년도 넘어 보였다. 훗날 내가 이 집에 <가래나무집>이라는 문패를 달게 된 내력도 여기에 있다.

이 집에 딸린 밭은 모두 3천여 평. 시골 사람들이 흔히 '도조'라고 부르는 임대료는 1년에 백만 원이었다. 백만 원에 집 한 채와 밭 3천 평이라니! 여기로 들어오기 전 도시에서는 24평짜리 아파트를 7천만 원에 세 들어 살았었다.

도착했을 때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뒷산에 있는 산전(山田)이었다. 이 산전도 내가 임대 받은 밭 가운데 일부다. 지난번에 와서 답사할 때는 워낙 시간에 쫓겨 둘러볼 짬을 못 내고 말았다. 마루에 짐을 부리고 바로 산전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산길이 호젓했다. 길은 굴참나무와 자작나무, 화살나무 따위에 조팝나무와 으아리 덤불까지 어우러져 있었다. 종종 멧비둘기들이 낯선 방문객에 놀란 듯 요란한 날개 짓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산 깊숙이 활처럼 휘어진 길을 다시 U턴을 하듯 꺾어 올라갔다. 느린 걸음으로 15분쯤 올랐을까. 마침내 산전이 보였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산밭이었구나! 이런 산 속에 이렇게 숨어 있었다니!"

산 아래에서 보면 이런 곳에 밭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밭은 수심이 깊은 바다의 부드러운 파도 같았다. 완만히 솟아올라 둔덕을 이루었다가 다시 골을 이루고 또다시 솟아올라 거대한 둔덕을 이룬 채 누워 있었다. 그 형국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무슨 생명체처럼 보였다. 육중한 힘 같은 것도 느껴졌다.

밭 가운데는 또 마을 사람들이 '묵묘'라고 부르는, 오래된 무덤도 하나 있었다.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작은 무덤이었다. 그 무덤엔 신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고 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무성하게 뻗어 오른 노박덩굴도 보였다. 덩굴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작고 둥근, 빨간 열매들을 무수히 달았다. 이 무슨 조화 속일까. 아닌 말로 밭이 너무 예뻤다.

이 밭은 첫눈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우리는 종종 '홀로' 존재해야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무엇인가에 몰입하거나 혹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그렇다. 이 밭은 그렇게 존재하고 싶을 때 찾고 싶은 곳으로 먼저 다가왔다.

훗날 마을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이 산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밭에 트랙터가 올라 갈 수 있을까?
경사가 심한 '비알밭'이어서 트랙터로 밭을 갈기는 어려울 듯 싶은데.
천상 경운기로 갈아야 하나?
골은 뭘로 타지? 쟁기로 타야 하나?
소도 어느 집에선가 빌려야 되는데, 일을 제대로 배운 소가 드물 걸.
밭에 거름 내기도 만만치 않을 텐데?
밭 가운데는 또 작업하기 불편하게 무덤까지 있잖아.

그 밭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그런 짱짱한 '현실'이 있었다.
물정 모르는 초보농사꾼은 그런 밭에 반해 있었다.

이 집을 소개해 준 전형(全兄․43)이 저녁 무렵 찾아왔다. 저녁 식사는 '주막거리'에 있는 자기 집에서 하자고 했다. 전형도 도시에서 살다가 3년 전 이 마을로 들어왔다. 70을 바라보는 부모님이 장남인 그를 원했다. 귀농이 아닌 귀향이란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못 볼 줄 알았더니만, 이제 우리가 이웃사촌인가?"

지난 여름 뵈었던 전형 부친이 반색을 하셨다.

"요즘 젊은 친구들 말이야, 기계 좋다, 약 좋다 해서 농사를 참 쉽게 생각한데이. 나도 40년 남짓 농사만 짓고 살아왔지만, 농사 그거 우습게 볼 일이 아니야. 이왕에 땅 파고 살겠다고 나섰으니 열심히 해봐요. 그래도 그 집 밭들이 괜찮은 편이니까."

전형 부친은 3년 동안 농사를 배워온 아들에 대해서도 '아직 멀었다'고 말씀하셨다.

저녁 식사 후엔 메주 만드는 걸 좀 거들었는데 전형이 꿀을 넣어 숙성시킨 술을 내왔다. 한 댓 잔 마셨을까. 제법 술기운이 올라온다. 차로 바래다주겠다는 걸 사양하고 집을 나섰다.

귀가하는 길은 어두웠다. 개울을 따라 가다 큰길을 만나게 되면 다시 그 큰길에서 집으로 가는 좁은 샛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래도 반달일망정 달이 떴다. 길게 몸을 누인 길이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였다. 수많은 별들도 그 작은 빛들을 보탰다. 길옆에선 개울물이 소리를 내어 기척을 했다.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백제가요로 알려진 정읍사(井邑詞)의 첫 구절. 여인이 달을 보며 행상 나간 지아비의 밤길을 걱정하고 있다.

집을 찾아가는 길은 아무래도 서툴렀다. '가래나무집'에는 여인이 없었으므로 나의 밤길은 혼자서 걱정해야 했다. 가고자 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을까. 이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그래서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이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될 것들이 무엇일까. 어둠 속의 길이 문득 인문적(人文的)으로 다가왔다. 길은 문자 그대로 길이었다가 때로는 '도(道)'이기도 하구나!
기다리는 여인은 없었으나 밤길은 행복했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집에 돌아와 사랑방에서 의식을 치렀다. 잔에 술을 채웠다. 큰절로 삼배를 하고 기도했다.

"하늘님과 햇님, 달님, 별님이시여! 대지의 여신과 풀님, 나무님이시여! 새님, 동물님이시여!

여기 무지한 머리 검은 짐승 하나가 이렇게 기어들어 왔습니다. 농사를 짓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바라옵거니 제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생령 있는 모든 존재들과 제 자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서로가 하나 되어 살게 해주옵소서.
이 모든 님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만나게 해주옵소서."

기도는 새로운 삶에 대한 서원이기도 했다.

산골의 밤은 적연(寂然)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칠흑처럼 어두웠다. 도시에서 살다가 이런 산골로 들어온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만나는 게 이런 밤다운 밤과 어둠다운 어둠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온통 하얗다. 밤새 눈이 내린 모양이다. 집 뒤편의 가래나무와 떨기나무 수풀에도 온통 눈꽃들이 피어났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정작 눈이 내리는 소리는 듣지 못했구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아침을 준비했다. 어제 보아둔 집 옆의 밭을 찾았다. 텅 빈 밭에는 수확을 하지 않은 자잘한 배추 몇 포기가 남아 있었다. 우거지를 만들 셈으로 눈 속에서 배추를 캤다. 배추는 단단히 얼어 있었다.

끓는 물에 데치니 배추는 훌륭한 우거지가 되었다. 어머니가 보내 주신 청국장을 풀었다.
국거리를 눈 속의 배추에서 찾았던 것은 글쎄, 삶의 터나 그 살아가는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스스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을까.

산골마을의 첫날은 그렇게 갔다.

<필자 이메일: suna10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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