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서연의 귀농이야기 '농막(農幕)에 불을 켜고'> 연재를 시작한다. 이 글을 쓰는 농부 서연은 40대 중반의 나이로, 도시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4년전 농촌으로 돌아갔다. 그가 전하는 농사와 자연, 생태, 생명, 환경, 공동체에 관한 얘기들을 들으면서 삶의 기본적 가치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연재를 시작하며**
분꽃이 마당에 가득했던, 동네 형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50줄에 접어든, 농사만 짓고 살아온 분입니다.
그 분은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놀림을 보노라니 우습기도 했습니다.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치고 있었지요. 두 손을 자판 위에 올려놓고 열 손가락으로 치는 게 아니라, 오른손 검지 손가락 하나로 글자판을 치는 타법입니다.
"형님, 타자 연습 좀 하시지 그래요."
제가 그래, 참견을 했습니다. 그 분이 미소를 짓더군요. 그러더니 손바닥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엔 제 손보다 두 배는 큼직한 손이 있었습니다. 거칠 대로 거칠어진, 햇볕에 그을려서 검붉어진 손이었습니다. 참으로 농사꾼다운 손이었습니다.
"언감생심! 이 손으로 타자 연습을 해보았네. 그런데 손가락 하나에 자판의 글자가 두 개씩 걸리더군. 그래 포기하고 말았네."
글자판의 크기에 비해 손가락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ㄱ'자를 치면 그 왼편에 있는 'ㄷ'자나, 오른 편에 있는 'ㅅ'자를 동시에 치는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를 아는' 농사꾼이었지만 기가 막힌 이유 때문에 컴퓨터도 마음 편히 다룰 수 없었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농사를 몇 해 지었다지만 아직도 살결이 고운, 여린 손이었습니다.
손의 크기는 쓰기 나름입니다. 농투성이로 살아온 삶이 그 형님의 손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그 형님의 삶은 그 삶대로,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제 삶은 또 제 삶대로 고스란히 그 손들에 담겨 있었지요.
이 글은 그 여린 손으로 쓴 글입니다. 그것도 농부를 자처하면서요. 글을 연재하다 보면 조만간 얼치기 농사꾼의 본색이 드러나겠지요.
저는 농사를 매개로 한 생태주의적인 삶에 반해 귀농했습니다. 귀농한 지도 햇수로 치면 벌써 네 해째입니다.
참 많은 걸 배웠던 세월이었습니다. 한편 힘들고 때로는 쓸쓸하기도 했지요. 정말 '쓸쓸함'은 이 시대의 농사의 본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 아버지께선 제가 농사짓는 것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고 계십니다.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답변을 궁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빚을 지지 않고 입에 풀칠을 한다는 것은 아닌 말로 '못 오를 나무'에 가깝습니다. 여러 생태적인 가치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쓸쓸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생존의 문제이니까요.
연재될 글에는 제가 살아온 분수대로 농사와 자연, 생태, 생명, 환경, 공동체, 명상, 선(禪) 등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담아볼 생각입니다.
드러내기엔 참 누추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미 멍석을 펴고 말았습니다. 차창으로 스치는 가벼운 '풍경' 정도로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냥'선생과 '그대로'부인**
지리산 자락의 폐교가 된 한 초등학교. 예전에 교사들이 살던 관사에서 며칠 묵게 됐다. 보일러를 놓은 방은 따스하기도 하고, 고즈넉하기도 해서 그런 대로 머물 만했다.
학교 입구에 서있는 은행나무의 잎들이 노랗게 물들면서 은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떡갈나무도 도토리를 떨궜다. 학교 울타리 노릇을 하던 찔레도 빨간 열매를 달았다. 가을이 깊었다.
뒤뜰 마당엔 생을 마감한 베짱이와 고추잠자리들이 자주 보였다. 드문드문 사마귀의 주검도 눈에 띄었다. 주검들은 바람이 불면 검불처럼 뒹굴었다. 겨울도 멀지 않아 보였다.
이 무렵 나는 농사 지을 곳을 찾느라 다소 지쳐 있었다. 귀농을 반대하는 가족과의 갈등도 만만찮았다. 오래 전부터 꿈 꾸어왔던 귀농이었지만, 머리 무거운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새벽녘 산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종종 잠을 깨웠다.
"눈 내린 아침 / 홀로 마른 연어를 / 겨우 씹었네."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가 뼛속까지 파고 들던 때였다.
어느 날 점심 후 요가수련원 원장이라는 분이 일행 몇을 데리고 찾아왔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 원장이 학교 주인에게 제안을 했다. 수행자가 한 분 계시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목적지는 하동의 한 대숲. 명상 수행을 하는 이의 이름은 <그냥>선생이라고 했다. 아니 <그냥>이라니, 이 무슨 괴이한 이름일까? 부인의 이름은 또 <그대로>라고 했다. <그냥>선생의 나이는 일흔 안팎. 내외 모두 구도(求道)의 길을 걸으며 도반처럼 사는 사람들이라 했다.
'그냥'이라는 말은 명상이나 선(禪)의 본질을 드러내는 유력한 낱말이다. 한자로 번역하면 '지몰(只沒)'이나 '단(但)' 정도이고, 영어로는 'merely'나 'only' 쯤 될까. 자기 나름의 가치기준에 따라 사물의 선악(善惡)이나 호오(好惡) 따위를 판단하지 말라고 할 때, 있는 그대로의 실상만을 보라고 말할 때, 단호한 모습으로 어두(語頭)에 등장하는 수사(修辭)이다.
"생각하면 노예요, 바라보면 자유인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학교 주인의 권유도 있었지만, 나도 내심 수행자들의 살림살이가 궁금하기도 해서 따라 나섰다.
들녘은 거의 비워져 있었다. 제 몫을 다한 허수아비들만이 눈에 띄었다. 길 옆에선 억새가 하얀 꽃 이삭을 흔들었다.
그 대숲으로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멀고, 미로 찾기처럼 굽이굽이 산 속으로 이어졌다. 산길로 접어들자 노란 꽃을 단 산국과 구절초, 쑥부쟁이들이 길을 따라 피어 있었다. 참취와 개미취, 미역취 같은 취나물류도 종종 보였다. 겨울이 멀지 않았으므로, 꽃을 단 야생초들은 다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마침내 대나무 숲이 보였다. 숲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무슨 출입구도 없어 보였다. 요가수련원 원장이 앞에 나섰다. 길은 없었으나 그가 앞장 서 대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고 일행이 그 뒤를 따르자 그게 곧 길이 되었다. 길 아닌 길이었다. 대숲은 깊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문득 작은 집이 한 채 나타났다.
"여기가 그 양반들이 공부하는 토굴입니다."
원장이 말했다.
아, 이곳인가. 순간 활의 시위가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가 있다. 아마 그때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뜻밖에도 딱히 인기척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우리가 올 줄 알고 비우셨을까요?"
원장이 <그냥>선생을 해명하듯 말했다.
마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당은 대 이파리와 호두나무, 참나무류의 낙엽들로 뒤덮여 있었다. 발로 밟으니 조금 푹신한 느낌이다. 물을 담아 놓는 돌확을 보니 바닥이 바싹 말랐다. 집을 비운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적조(寂照)라는 게 이런 걸까. 가까스로 숲을 뚫은 햇살 몇 올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방벽이 토담으로 된 집이었다. 방은 두 칸이었고 각 방문은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토방의 섬돌에 한 켤레씩 놓인, 눈처럼 하얀 고무신은 몹시 정갈해 보였다. 부엌문 고리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는 시늉뿐이어서 누구든지 빼낼 수 있었다. 실제로 일행 중 누군가가 그걸 빼내고 문을 열어 보았다. 장작과 불쏘시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고 바닥도 깨끗이 쓸어져 있었다. 딱히 세간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집은 정갈했지만 몹시 남루했다. 적빈(赤貧)이 느껴졌다. <그냥>선생 내외는 이 곳에서 끼니정도만 때워가며 수행을 했던 것 같다.
옛 선사들의 살림살이가 이랬을까. 시린 바람 한 줄기가 가슴속을 지나갔다.
다시 둘러보니 <그냥>선생 집 아래쪽에도 쓰러져 가는 폐가가 몇 채 보였다. 내려가 보니 마루엔 흙먼지와 쥐똥들로 범벅이었다. 방의 벽지는 뜯겨져 구겨진 채로 아무렇게나 나뒹굴었고, 반쯤 뜯겨진 창호의 창살은 거의 부서졌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 집의 큰방 부엌을 들여다보곤 그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이럴 수도 있을까. 예전에는 솥이 걸렸을, 그 아궁이자리에 왕대가 솟아 있었던 것이다. 그 왕대는 곧 천장에 막혀 더 이상 자라지를 못하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곧고 또 곧은 대나무가 그 본성이 왜곡된 채로 서 있는 모습은 황량했다.
주변의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미년(89년) 달력과 신문들이 방 도배지로 붙어 있는 집도 있었고, 그 신문들엔 <문익환 목사 입북, 문제 있다>와 같은 기사들이 실렸다. 또 어떤 집의 안방 입구엔 집주인의 회갑잔치 때 찍은 빛 바랜 가족 사진이 붙어 있기도 했다.
그날 그 대숲을 찾은 사람들은 그곳을 그냥, 그대로 떠나오지를 못했다. 일부는 낙엽에 묻힌 호두를 줍고 일부는 감도 땄다. 호두는 한 바케츠가 넘었다. 어떤 이는 그냥 선생 집 아래편의 폐가에서 항아리나 약탕기를 챙기고 복조리를 주어 온 이도 있었다. 주인 없는 집에서 수선들을 피웠다.
<그냥>선생이 누구인지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 선생 댁을 방문한 여운은 오래 갔다. 그곳에서 만난 그 남루함은 정갈하고 맑고 투명했다. 어쩌면 집주인이었던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알면 아는 것만큼만 보게 되지만, 모르면 그 미지(未知)는 종종 원시적인 풍요로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냥'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얘기 둘을 적는다.
<학교야, 공 차자>라는 책이 있었다. 시인 김용택이 엮었고, '작은 학교 열여덟 아이들의 동시집'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임실 마암분교 어린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2학년생인 서동수라는 어린이가 쓴 <사랑>이라는 시(詩) 전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좋다. 왜 그냐면
그냥 좋다."
선가(禪家)에서 자주 입에 오르는 <서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도 적는다.
화자는 무주선사(無住禪師)다.
한 남자가 높은 언덕 위에 서 있다.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저 사람은 분명히 길 잃은 양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아냐, 동료들로부터 떨어져 친구를 찾고 있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아냐, 바람을 쐬고 있다."
서로가 말다툼을 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세 사람은 언덕 위로 올라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길 잃은 양 새끼를 찾습니까?"
"아니오,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쐬고 있습니까?"
"아니오,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아니라면 도대체 왜 언덕 위에 서 있습니까?"
"나는 그냥, 서 있을 뿐입니다(我只沒立)."
(이 글은 귀농을 준비하던 해 초겨울에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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