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인기 연재됐던 박노자ㆍ허동현 교수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미국 이후를 제대로 대비하려면'에서 '후세인과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12개 주제에 대한 논쟁과 함께 이메일 논쟁에서 다하지 못한 두 연구자의 관점을 대담으로 풀어냈다. 특히 프레시안 독자들이 댓글을 통해 제시한 의견들을 반영해 두 필자가 글을 전면 새로 썼다. 토론문화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 이 책에 대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의 서평을 싣는다. 편집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이 속담을 비튼 것으로 '백짓장을 맞들면 찢어진다'는 우스개가 있다. 그럴 듯하다. 안 그래도 찢어지기 쉬운 백짓장을 두 사람이 맞들다 보면, 백짓장을 쥐는 힘의 균형이 깨져 찢어지기 쉽다. 토론과 논쟁에서도, 특히 그 주제가 첨예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다. 금방이라도 파열음이 날 듯한 일수불퇴의 팽팽한 긴장과, 한 수 물리는 걸 허락하는 여유가 적절히 갈마드는 토론과 논쟁. 맞들어도 찢어지지 않는 백짓장 같은 토론과 논쟁은 우리 주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지성의 풍토다.
<사진> <우리 역사 최전선>(허동현ㆍ박노자 지음, 푸른역사 펴냄, 379쪽, 1만3천원)
'최전선'이라는 제목의 말에서 예감할 수 있듯이 <우리 역사 최전선>(푸른역사)은 무척이나 첨예한 주제, '한국 근대 100년'을 다룬다. 빈 라덴과 최익현이 함께 거론되는가 하면 대원군은 실패한 정치가였는가?, 근대화 시계 10년 늦춘 갑신정변, 유교사상이 극동 사회주의의 밑바탕이 됐나?, 후세인과 박정희 등, 제목부터 군침 돌게 만드는 논제들이 범상치 않다. 이 찢어지기 쉬운 백짓장을 맞들고 나선 사람은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와 허동현(경희대) 교수다.
책날개의 소개에서부터 은근한 긴장이 느껴진다. '근대 국가 최고의 물신(物神)인 민족을 상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1996년 학위를 받을 때 가졌다'는 박노자 교수. 그는 '국가와 민족에 짓밟힌 개인들의 아픔의 역사부터 연구해야 국가와 민족이라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을 섬겨온 수많은 선배, 동료들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허동현 교수는 '방법론과 시각을 달리하는 한국 근대사학계의 양대 산맥 강만길 선생님과 유영익 선생님에게 지적 세례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그는 '고난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주된 관심사로, 특히 제2공화국 국무총리 운석 장면의 매력에 심취해 있다'고 한다. 맥락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마치 중국의 전국(戰國) 시대 묵협(墨挾)과 유자(儒者)가 만나 고금의 세상을 논하는 듯한 분위기다. 참된 길(道)을 찾는 데는 뜻을 같이 했으되, 그 분위기만은 서릿발과 봄바람처럼 달랐다는 정명도, 정이천 형제에 견준다면 과장일까?
'윤치호와 영어 배우기'를 주제로 한 일합(一合)을 자세히 살펴보자. 박 교수는 먼저 우리 사회의 영어 배우기 열풍을 거론한 뒤, 120년 전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운 최초의 조선인 윤치호(1865-1945)를 이야기한다. 어학의 천재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완벽하고 수준 높은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미국인들로부터 인종적 차별과 모욕을 당했다. 인종주의야말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윤치호는 '이 소위 자유의 땅에서 천부인권을 누리려면 일단 먼저 백인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박 교수는 윤치호의 적극적인 친일 행각의 가능한 요인으로,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의 마음 상태를 거론한다. '황인종의 맹주'와 '대 백인 침략 투쟁의 총사령부'임을 자처한 일제의 계략에 넘어간 그의 행동을 용서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 박 교수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다가 비참하게 무너진 한 조선 천재 이야기에서, 미국이 약자를 동등하게 대해주리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버리는 게 좋다는 의견에 도달한다. 용미는 가능하고 바람직할지 몰라도 지나친 친미는 좌절만 가져다 줄 확률이 많다는 것.
한편 허 교수는 박 교수의 의견에 일단 동감을 표한 뒤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을 이야기를 한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윤치호와 달리 유길준은 서구에 대해 극단적인 패배감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았고, 내면에 침잠해버린 윤치호와 달리 유길준은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자식의 식견을 동포들과 공유하는 데 힘썼다는 것이다. 대 미국관에서도 유길준은 미국은 통상 상대에 불과하며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고 일갈하여 동시대인들의 긍정 일변도 미국관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허 교수는 결론적으로 미국에 대한 극단의 시각을 경계한다. 한미 관계를 우리가 미국 측의 일방적인 전략, 경제적 이해타산에 휘둘린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비주체적이라는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 군사ㆍ정치ㆍ경제적으로 종속된 '식민지'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는 미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이를 이용하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본격 진출했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게 허 교수의 지적이다. 흥미롭게도 허 교수는 극단적인 대 미국관에서 탈피하는 것을 '득중(得中)의 길'이라는 표현으로 일컫는다.
전반적으로 박 교수가 예봉(銳鋒)과 공격이라면 허 교수는 방패와 수비다. 허 교수는 거대 담론 속에 희생됐던 개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 진짜 보수주의일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면서, 진보란 엑셀러레이터뿐만 아니라 '열린 보수'라는 브레이크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편 박 교수는 우리가 인류로 태어나 집단에 속해 살지만 그 집단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역사란 결국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의 집합체이고,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우리를 넘어서는 '나'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박 교수가 이 대목에서 '일종의 불교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만해 한용운을 거론한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스치는 생각 하나. '아하! 그렇구나. 박노자 그는 겹겹이 쌓인 역사의 업보 그 더께를 걷어내고 진아(眞我)의 경지를 꿈꾸는 사람일 수 있겠구나.'
이 책을 통해 발견한 (적어도 나에게는) 중요한 가능성이 하나 있다. 이른바 토론과 논쟁에서 하나의 개념을 놓고 서로 통하지 않는 제 나름의 풀이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말을 교환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도외시하고 제 각각의 규칙을 강요하기도 한다. 개념과 규칙의 갈피를 잡아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려는 쌍방의 노력이 부족한 때도 많다. 그런 고집과 강요와 부족의 결과는 뭇사람의 여러 가지 의견을 하나하나 받아넘기기 어려운 지경, 즉 중구난방이다. 이 책에서 박 교수와 허 교수가 보여 준 일합 일합이 위와 같은 고집과 강요와 부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면 다양한 '코드'가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면서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예증하고 있다는 사실. 이야말로 나로서는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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