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5. 위생청 사람들**
그 무덥던 날 나는 오전에 성(省) 위생청 마당에 들어섰다. 나는 위생청 사무실에 신고한 다음 관련 서류를 중의(中醫)연구원에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건물 앞의 등나무 덩굴에 묘하게 마음이 끌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나무 잎들이 햇빛이 뚫고 들어올 틈도 없이 빽빽하게 하늘을 메우고, 암녹색의 줄기는 마치 소녀의 팔목에 비치는 실핏줄처럼 구불구불 감겨 올라가고 있었다. 주렁주렁 드리워진 열매 꼬투리에 붙어 있는 솜털이 몹시 귀여웠다. 초록색 잎사귀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는 동안 묘하게 마음도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젊은 청년 한 명만 남아 책상에 머리를 박고 뭔가를 쓰고 있었다.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 청년은 고개를 들고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머리를 숙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동지, 저 배속(配屬) 신고하러 왔습니다만….”
그는 고개는 그대로 두고 눈꺼풀만 천천히 위로 치켜뜨면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하시죠.”
나는 파견증을 책상 위에 놓으면서 손가락 끝으로 자연스럽게 ‘의학 석사’라는 글자 위에 줄을 그었다. 그는 눈을 비스듬히 뜨고 나를 한번 보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웃음을 짓고는 또 나를 무시했다. 나는 소파 쪽으로 물러나서 신문을 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론 내가 방금 그렇게 손가락으로 줄을 그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는 나한테 신경을 써 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걸어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말했다.
“동지, 저는 북경에서 이곳 중의연구원으로 배속된 사람입니다. 이미 동의서도 받았고요.”
그는 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말했다.
“동지, 지금 마(馬) 청장님께 올릴 보고 자료를 쓰고 있는 것이 안 보입니까? 마 청장님 일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그쪽 일이 중요합니까?”
그는 두 손의 손가락들을 모아 만지작거리면서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어느 쪽이 우선인가요?”
나는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와서 파견증을 들고 그냥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사무실 입구에 이르렀을 때, 이것도 하나의 관문인데 어떻게든 무사히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럼, 동지는 언제쯤 내 일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는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삼켰다. 그리곤 입술을 빨면서 천천히 말했다.
“오후에 오시오, 오케이?”
말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는 것이 경멸의 뜻인지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오후에 다시 찾아갔을 때, 그 젊은이는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마치 누가 박격포 발사 버튼이라도 누른 듯, 의자에서 벌떡 튀어 올라 문으로 달려와서 나를 맞았다.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그의 동작에 내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손도 늘어뜨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려 손을 내밀었을 때는 그의 손은 이미 움츠러든 후였지만, 그는 곧 다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는 힘껏 흔들어댔다. 그는 나더러 소파 위에 앉으라고 한 다음, 스탠드 선풍기를 내 쪽을 향해 돌리고 시원한 물까지 찻잔에 따라주면서 말했다.
“저는 정소괴(丁小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도둑고양이 보듯 하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황태자 대접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파견증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것 좀 처리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일단 앉아서 더위부터 좀 식히세요, 유(劉) 주임님이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마 청장님이 따로 분부하셨거든요.”
그는, 자기는 재작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위생청에 남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면서, 위생청에서 온통 잡일에 심부름만 하면서 허송세월 하고 있다고, 의사가 되어 환자를 보거나 연구직에 종사하는 편이 나을 걸 그랬다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그래도 위생‘청’인데요. 상어는 비늘 조각 하나가 붕어보다 크다고 하지 않습니까. 전도유망하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그는 마치 머리를 목에서 떨어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힘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앞길이 캄캄해요. 정말 전망 없답니다. 기껏해야 부과장(副科長) 정도까지 올라간 다음에 퇴직하는 것인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꿈이지,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정소괴와 얘기를 주고받다가 어떻게 마 청장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마 청장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년 전 우리 반 열두 명 학생들이 중의연구원에서 실습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바로 중의연구원 원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소괴가 말했다.
“유(劉) 주임님이 오셨나 봅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말이 끝나자 과연 문 앞에 쉰 남짓 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얼른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일어서자마자 그에게 손부터 붙잡혀버렸다.
“유 주임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유 주임님, 네, 네.”
“그쪽에 대해선 저희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위생청에 남아서 행정을 맡아 줬으면 합니다. 사실은 이것도 다 청장님의 뜻입니다. 마 청장님께서 직접 그쪽 이름을 지명하셨어요.”
나는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원래 저는 중의연구원으로 가려고 했는데요.”
“그쪽도 고학력의 인재가 필요하긴 하지만, 위생청에서도 더욱 필요로 하지요. 그러니까 위생 ‘청’아닙니까.”
그러더니 머리를 정소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안 그런가?”
정소괴는 머리를 계속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그래도 ‘청’인데요.”
유 주임이 말했다.
“내가 서(舒) 원장한테 전화해서 마 청장님 뜻이라고 말하지요.”
“그게, 저는 행정업무는 자신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대위 씨를 청에 남기자는 것은 마 청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입니다, 마 청장님께서.”
말을 하면서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으로 차 탁자 위를 톡톡 찍었다. 마 청장이 일부러 나를 지명해서 위생청에 남게 하라고 하셨다니, 그때 내가 마 청장에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가? 내 자존심이 의외의 존중을 받게 되자 나는 가슴속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동안 어쩔 줄 몰라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일 결정하면 안 될까요?”
나는 호일병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의논하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에 성(省) 방송국에 배속된 이래 계속 그곳에서 <사회경위(社會經緯)>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가 차를 몰고 나를 맞으러 왔다.
“유약진한테 가보자.”
유약진은 화중대학(華中大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위생청에서 나를 붙잡아 두려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유약진이 말했다.
“행정방면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냐? 결국엔 남는 것 하나 없이, 평생 동안 하다못해 베개 삼을 책 한 권도 못 내고 말 거야. 그렇다고 네가 행정업무인들 제대로 해낼 수 있겠어?"
호일병이 말했다.
“의사가 돼서 환자를 받게 되면 그냥 그렇게 환자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끝나지만, 위생청 안에서 지위가 올라가면 온 성의 인민들이 다 우러러볼 텐데.”
내가 말했다.
“그거야 청장쯤 올라가야 되는 거고.”
“헌법에 지대위는 청장 되지 말라는 규정이라도 있냐? 큰일을 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유약진이 말했다.
“석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남의 개 노릇이나 하겠다는 거야?”
호일병이 말했다.
“개에서부터 올라가지 않은 사람 어디 있냐?”
이튿날 위생청에 갈 때까지 나는 여전히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유 주임이 말했다.
“어, 늦었네. 마 청장님은 성 정부에 잠깐 가셨는데. 자네와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청에 남아서 이런저런 잡일이라도 하라고 하신다면….”
유 주임이 즉각 말했다.
“아니, 우리가 자네에게 잡일을 시킨다고? 청은 전 성(省)을 관장하고, 전 성의 정책을 관리하고, 성내의 전체 현(縣)을 관리하는 곳이야. 그런데 이렇게 큰 기구에 석사 학위 가진 사람이 몇 명인 줄 아나? 자네 하나일세. 자네가 처음이라고! 인재를 키우겠다는 마 청장님의 뜻에 따라서지. 인재를 키우겠다는 거야!”
정소괴가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렇고 말구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숙소 배정 통지서를 받으러 행정과로 갔다.
신(申) 과장이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지대위 씨?”
이어서 말했다.
“처음 오자마자 독방을 배정받다니, 위생청에선 여태껏 없었던 일인데…. 마 청장님께서 직접 분부하신 겁니다.”
나는 마음속이 훈훈해지면서 위생청에 남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윗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다니! 숙소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인정받기가 어디 보통 어려운 일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는 노력의 절반은 바로 이‘인정’이란 두 글자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성공은 또 무엇 때문에 추구한단 말인가?
신 과장은 내가 방을 보러 가는 데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자 그가 말했다.
“새로 온 동지를 보살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지요. 특히 지대위 씨 같은 인재라면 더더군다나 정성껏 모셔야지.”
가는 길에 그는 내게 위생청의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 건물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래야 몇 백 명 안 되긴 하지만, 숙소가 워낙 부족해서 말입니다. 마 청장님도 부임하신 지가 몇 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중의연구원에 살고 계신답니다. 매일 출퇴근하시느라 그 고생하시면서도 행여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할까봐 이사를 안 오시지요. 이게 바로‘3.8 정신(三八作風)’아닙니까!”
독신자 기숙사에 도착해서 4층까지 올라가는데 복도 안이 어두컴컴했다. 신 과장이 어디에서 스위치를 찾아 켰는지 금세 불이 들어왔다. 그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이 복도를 부엌 삼아 양 옆에 식탁이며 연탄난로 등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중간엔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공간만 남아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 건드렸는지 바닥에“꽝”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냄비였다. 안에는 죽이 아직도 들어 있는 채로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방은 제법 괜찮았다. 꽤 널찍한 방에 페인트칠도 이미 새로 해놓았고, 창 바로 앞까지 높이 자란 은행나무가 방 안에 제법 푸른 기운을 물들이고 있었다.
신 과장이 말했다.
“빈 방이 세 개 있는데, 일층에 있는 방은 바닥에 미꾸라지를 길러도 될 정도로 습하고, 육층은 여름에 생선을 구워 먹어도 될 정도로 더워요.”
내가 여관에 짐을 챙기러 가려는데 신 과장이 또 나를 따라 나섰다. 기숙사 아래까지 쫓아와서 그가 말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몇 년 동안 있었는지 한 번 알아 맞혀 보겠소?”
“삼년.”
그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좀더 올려 봐요.”
“오년은 안 됐겠지요?”
“맞힐 리가 없지. 그걸 누가 맞히겠어. 나라도 못 맞히겠다…. 팔년이요, 팔년! 팔년이면 팔로군(八路軍)이 항일전투를 다 끝낼 시간인데, 그 팔년 동안 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시오. 이런 식으로 한 이삼년만 더 앉아 있으면 이제 정년이 되고, 그리고 그냥 과장으로 퇴직하는 거지.”
“그래도 과장님의 그 진지하고 성실하신 모습은 모두가 익히 보아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가장 정확한 평가가 아닐까요?"
그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사람들 백 명, 만 명이 알아주는 것보다 그 한 사람이 알아주는 것이 더 중요해요. 만 명이 나를 좋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요? 그래 봐야 하고한 날 같은 자리만 지키고 있게 되는 걸. 사람이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괜히 서글퍼지고 눈앞이 캄캄해지기 마련이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여관에 도착해서 신 과장이 상자를 들어 옮기려는 것을 보고 내가 그것을 뺏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무거운 걸 신 과장님이 어떻게 드시려고요? 상자 가득 책입니다!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신 과장님께서 드시면 안 되지요.”
종업원이 들어와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영수증을 끊어 왔다. 나는 영수증에 사인을 하고 계산을 마쳤다. 신 과장은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참고 있는 듯했다. 내가 그를 보고 웃자, 그가 말했다.
“마 청장님과는 옛날부터 알던 사인가요?”
“몇 년 되었지요.”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 청장님과는 친척 사이?”
말을 하면서 왼손과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보였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마 청장님과 부친께서 옛날 함께 일했던 동료?”
이번에는 양쪽 손바닥을 한데 모아 보였다.
“사년 전에 실습을 나갔을 때 한 번 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생기셨는지 기억도 잘 안 납니다. 마 청장님이 위생청장으로 계신다는 것도 어제 알았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힘껏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뭐 이상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못 믿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매우 진지한 것을 보고 그제야 내 말을 믿겠다는 듯이, 그리고 유감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 청장님께서 정말로 인재를 중시하시는 건가?”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 과장님 생각은요?”
“아, 당연한 말씀이지, 당연하고말고. 누가 아니랍디까?”
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손뼉을 짝짝 소리가 나도록 치면서 말했다.
“아이고, 큰일 났군, 큰일 났어. 난 먼저 가봐야겠어요. 시간이 됐잖아. 늦겠네, 이미 늦었어.”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곧장 밖으로 뛰어 나가면서 말했다.
“다음에 와서 이사하는 거 도와줄게!”
문도 안 닫고 휙 나가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사무실 건물에서 마 청장님과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달려가서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면 너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자리에 그냥 서 있는데, 마침 계단을 올라가던 마 청장이 나를 보고 먼저 말을 거셨다.
“자네가 지군(小池)인가?”
그의 이 한 마디에 나는 크게 감동되었다. 그것이 몇 년 전의 일인데, 첫눈에 나를 알아보다니.
“마 청장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간단한 인사말 뒤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감사야 마음속으로 느끼면 되는 거지 굳이‘감사’나‘은혜’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도리어 세속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마 청장이 말했다.
“숙소는 정했나?”
이번에야말로 자연스럽게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입에선 고작 이런 대답만 튀어나왔다.
“예, 정해졌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마 청장이 말했다.
“자네 인상이 참 좋았어. 그래 내 자네 이름을 보자마자 서(舒) 원장한테서 자네를 뺏어온 걸세.”
나는 다시 한번 기회가 왔음을 느끼고, 이번에는 반드시 이처럼 나를 알아주시는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청장님께서 이렇게 저를 인정해 주시다니, 정말이지 인연인가 봅니다. 앞으로 위생청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청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가에서만 맴돌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고개만 기계적으로 끄덕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 청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밋밋하고 약했다. 아무 인사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나가던 사람한테 길을 물어보면서도 기본적으로 하는 인사가“감사합니다”인데 말이다.
사무실에는 창에서부터 문 쪽으로 책상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창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이 유 주임의 책상이었다. 그저께 유 주임은 중간에 있는 책상을 가리키면서 그 책상을 쓰던 원진해(袁震海)가 의정처 부처장으로 옮겨갔으니 그 책상을 나더러 쓰라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자 정소괴가 그 자리에 태연스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서랍을 열어 보이는 식으로 그에게 암시를 주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책상 서랍이 잠겨 있었다. 정소괴가 손으로 옆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쪽이 자네 책상이야.”
아니, 어떻게 주말 동안 책상이 바뀔 수 있지? 가만히 보아하니 그는 주말에도 한가하게 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책상의 배열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창가 쪽의 볕 잘 들고 통풍 잘 되는 곳은 당연히 유 주임 차지이고, 창가 쪽부터 지위에 따라 놓여지는 것이다. 말로야 누가 어디에 앉건 일하는 데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책상 위치가 곧 지위의 고하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그 느낌이 같을 수가 없다. 이런 조그만 차이들이 모여서 수많은 차이, 심지어 매우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를 이런 사소한 데서부터 구별해낸다.
형편없는 놈이지만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소괴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볼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이 꼭 집어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지대위가 이런 소인배랑 밴댕이 콧구멍만한 일로 싸우는 처지로 타락해서야 쓰겠나. 그때 정소괴가 일어서더니 보온병을 흔들면서 내 쪽으로 눈짓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물 뜨러 내가 다녀오지요.”
계단을 내려가면서 영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학력으로 보나 이런저런 자격으로 보나 내가 저 녀석보다 한 수 위인데, 도대체 저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명령을 내리는 거지?”
나는 내 마음이 약한 탓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못들은 척한다고 저 녀석이 나를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한 번 받아 주기 시작하면 나중에 가선 어떻게 손 쓸 수도 없을 텐데. 보온병 두 개 든다고 힘 빠져 죽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놈 눈빛은 너무나 거슬렸다.
그때 정소괴 역시 양손에 보온병을 하나씩 들고 물을 뜨러 들어왔다. 옆방 마 청장 사무실의 보온병이었다. 뜨거운 물도 귀천이 있다는 건가? 참 가소롭군! 나는 마 청장이 이런 보온병 두 개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 사무실에 올라왔을 때는 유 주임도 이미 출근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더운 물 뜨러 갔었나? 잘 했네.”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마치 앞으로 물 떠 오는 일은 내가 맡아야 할 일처럼 얘기가 되어버렸다. 나는 옆의 책상을 두드리면서 물었다.
“저는 여기 앉을까요?”
나는 속으로 그가 책상을 바꾸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바꾼 거야?”
그리고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됐네, 지군. 됐어.”
나도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정소괴가 방금 전까지 내 책상 옆에 놓여 있던 입식 선풍기를 어느 새 자기 책상 옆으로 갖다 놓았다. 이건 또 무슨 웃기는 짓인가! 이런 식으로 봐주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정말 큰일 나겠는걸. 이놈이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히. 나는 속으로 “소인배 같은 녀석!”하고 욕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내가 이런 문제로 저놈과 티격태격하면 나는 또 뭐가 되겠는가 싶었다. 다 쓸데없는 짓이지! 나는 입을 움찔움찔 대면서 가볍게 한마디 뱉었다.
“다 쓸데없는 짓이지!”
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 귀에나 들렸을 것 같았다. 이런 작은 일들로 재고 따지고 할 가치는 추호도 없었지만, 그러나 목에 무슨 닭 뼈라도 걸린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정소괴 네 놈이 감히, 네 놈이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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