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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창랑지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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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창랑지수‘ <3>

그녀의 향기

***3. 그녀의 향기**

대학에 들어간 직후, 나는 아버지의 일생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다 억울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 그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한평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사람 좋다'는 것이 말이야 쉽지만, 아버지처럼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주도부한테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해 줄 가치가 있었을까? 그놈의 주도부는 돌아서자마자 아버지를 물어댔는데….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들에만 너무 오래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내 마음은 시야를 천하로 넓혀가려는 격정(激情)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낸다거나, 자기 자신만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그런 생활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고,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하고 사사로운 이익(私利)을 반지름으로 하는 그런 작은 원 안에 나 자신의 시야를 가두어 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범인들의 철학은 경박하기가 새의 깃털(鴻毛) 같다고, 가소롭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체험하겠다면 그거야 그 사람의 불쌍한 선택일 뿐, 나 자신은 절대로 그런 길을 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신비스런 목소리,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나를 일깨워주는 듯했다. 나는 나 개인뿐만 아니라 천하를 위해 살도록 운명지어졌다. 그것이 내 숙명이고,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는 속으로 물질의 소유와 향유를 인생의 최고목표로 삼는 인간들을 '돼지'라 불렀으며, 정신적으로 나와 그들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음으로써 정신적인 우월감을 느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다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하며, 그 의미야말로'생활'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즈음 농촌개혁이 막 시작되었다. 나는 여름 방학에 호일병, 유약진과 함께 가방을 메고 구산현(丘山縣)의 마을들로 조사를 떠났다. 이런 저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사정을 파악하고, 농민들이 말한 내용들을 작은 노트에 기록했다. 저녁에는 풀숲에서 잤는데, 겁나게 달려드는 모기를 부채로 쫓으면서 우리는 낮에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토론하다 보면 웅장한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풀숲에 누워 끝없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이지'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천하가 작게 보이는'(臨環宇而小天下) 그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에 따라 민족의 앞날, 혹은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기라도 할 것처럼, 한 문제를 가지고 한밤중까지 논쟁을 벌였다. 그렇게 이십여 일을 돌아다니다가 유약진네 집에 도착한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불과 며칠 안에 재빨리 삼만여 자의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국무원으로 부쳤다. 바다에 돌멩이 하나 던져 넣는 격이었겠지만, 우리 셋은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듯한 기분이었다.

대학 4학년 때인 1981년의 어느 봄날 저녁, 도서관에서 기숙사로 가던 중이었다. 생활관의 흑백텔레비전으로 축구경기를 중계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로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평소 축구경기를 즐겨 보지 않던 나였지만, 그날은 친구들의 정서에 감염되어 뒤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서서 게임을 보았다. 중국과 사우디 팀의 경기였다. 중국이 2 : 0으로 지고 있다가 결국에는 3 : 2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경기가 끝나자 모두들 흥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기숙사 밖에서 학생들이 고함을 지르자 모두 벌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어둠 속에서 의자 위에 올라서서 연설을 시작했고, 어떤 학생은 빗자루에 불을 붙여 횃불로 삼았다. 그때 위층에서 누군가가 트럼펫을 불기 시작하자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그 트럼펫 소리에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여. 우리의 살과 피로 다시 만리장성을 쌓자…."

불빛이 학생들의 얼굴을 비출 때, 그 얼굴들에 눈물 꽃이 반짝거렸다. 이어서 학생들은 손에 손을 잡고, 여덟 명이 한 줄이 되어, 자발적인 시위 대열을 만들었다. 시위 대열에 끼어 걸으면서 내 마음은 신성한 감정으로 가득차올라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문천상(文天祥)이나 담사동(譚嗣同)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뼈와 골수에 사무치도록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내 왼손을 잡고 있던 여학생이 갑자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희미한 횃불 빛을 빌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름 아닌 같은 반의 허소만(許小曼)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누군가가 외친"단결! 중화 부흥!"이란 구호는 곧 그날 밤의 구호가 되어 전 캠퍼스의 상공으로 울려 퍼졌다.

그날이 3월 20일, 북경의 거의 모든 대학들에서 교내 시위가 벌어졌다. "3.20 사건"으로 우리는 며칠 동안이나 흥분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흡사 내 영혼이 성결의 세례라도 받은 듯, 사회적인 책임의식도 극도로 분발되었다. 나는 자신의 신념을 굳혀갔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고 바뀌거나 움직일 수 없는 신념을.

시위가 있은 며칠 후, 나는 운동장 가에서 우연히 허소만과 마주쳤다. 내가 고개만 끄떡 하고 옆을 지나가는데 그녀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지대위!"

나는 얌전하게 멈추어 서서 몸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웃고만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말을 꺼냈다.

"허소만, 왜, 무슨 일이야?"

"뭐, 무슨 일이 있어야만 부를 수 있다는 법이라도 있니?"

나는 그 자리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게, 그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렸다. 나에게 오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 여전히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더니 집게손가락을 가볍게 까딱까딱 거렸다. 나는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나 그저께 약리분석 수업 빼먹었거든. 네 노트 좀 베끼고 싶은데, 좀 줘 볼래?"

나는 책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녀는 노트를 받아들고도 아무 말 없이 계속 나를 쳐다보며 웃고만 있었다. 순간 내가 당황해서 말했다.

"허소만, 또 뭐 필요한 거 있어?"

그녀는 계속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없어."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그녀의 발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불렀다.

"지대위!"

나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물었다.

"허소만, 무슨 일 있어?"

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냐."

가만히 서 있는데도 이마에선 땀이 났다. 나는 팔을 들어 소매로 땀을 닦았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손목을 위아래로 우아하게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냐, 가봐!"

며칠 후 수업시간에 그녀는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노트를 내게 돌려주었다. 옆에 있던 남학생들이 다들 놀라서 내게 눈길을 보냈다. 노트의 표지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안에 몇 군데 찢어졌던 부분도 전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매우 감동했지만, 다른 쪽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허소만이 나 같은 놈한테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녀는 우리 과뿐 아니라 전교에서 유명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기숙사의 남학생들은 종종 창가에 붙어 서서 그녀가 식당에서 밥을 타서 남자 기숙사 아래를 지나 여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한번은 그녀가 식당에서 죽을 먹고 있을 때였다. 다른 과의 남학생 하나가 그녀 옆에 앉아 어떻게 말을 좀 붙여보려고 하는데, 그녀가 수저를 그릇에 '탕!'소리 나게 던지더니 다른 자리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북경 출신인 데다가 아버지는 군(軍) 간부라고 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듣자 하니 우리 반에만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학생이 여덟이나 있는데, 반 친구들은 그들을'팔로(八老)'라고 불렀다. 그런 여학생인지라, 나는 여태 그녀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경이원지(敬而遠之)의 태도로 대해 왔던 것이다. 나와 그녀가 무슨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활 3년 동안, 나는 여학생들과 별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허소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내심 교만까지 부렸고, 그런 교만함을 공부 쪽에서, 특히 시험 결과로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나는 또 매우 현실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매달 이십일 원의 학비보조금으로 살아가던 나는 변변한 옷 한 벌 없었고, 캔버스 천으로 만든 군용 가방으로 책가방을 대신했다. 전교에서 그런 낡은 가방을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이전에 기숙사에서 남학생들이 허소만이 메고 다니는 가방이 인조 가죽이냐 진짜 가죽이냐를 두고 얼굴과 귀가 온통 새빨개지도록 말씨름하는 걸 보았다. 그래서 나중에 알아본 결과, 그 가방은 진짜 가죽, 그것도 호주에서 수입한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 차이들만 보더라도, 나는 정말이지 한 번도 나와 허소만이 무슨 특별한 관계로 묶일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마음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평온했고, 그 소위'팔로(八老)'들처럼 짝사랑 때문에 전전반측(輾轉反側), 밤에 잠 못 이루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허소만의 친절한 마음씨에 잠시 감격했을 뿐, 좋은 아이라는 생각 외에 다른 상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어느 날 밤 내가 교실로 자습하러 갔을 때였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허소만이 들어왔다.

"지대위, 너도 여기 있었구나."

내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더니 다시 몇 줄 뒤로 가서 앉았다. 책을 보면서 나는 뒤통수가 계속 저릿저릿한 것을 느끼고 뒤돌아보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꾹 참았다. 눈앞의 책이 점점 흐릿해지고 내 온 신경이 뒤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런데 잠시 후 허소만이 내게 오더니 모르는 문제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두서없이 뜻 모를 대답만 해주고 말았다. 그녀가 가고 난 후 나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몇 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한, 뭔가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오히려 체면만 구겨버렸으니…그녀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기원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그녀가 내게로 건너왔다. 이번에는 제법 조리 있는 설명을 해줄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묘한 꽃향내가 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자세히 설명하는 척하면서 코를 그녀 머리 가까이 대고 힘껏 그 향내를 들이마셨다.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서까지 나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엷은 꽃향내가 계속 내 전신을 간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저녁 나는 같은 교실로 가서 허소만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아홉시가 되어도 그녀가 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게 몇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지, 그런 일이 연달아 두 번이나 일어나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허튼 생각 말아야지, 그게 말이나 되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교실로 들어섰다. 나는 정말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에 힘을 주어 깜박여 보았다. 역시 그녀였다. 그녀는 살짝 웃었고, 나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숙이고 책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녀는 내 왼쪽 앞자리에 앉아 펜을 꺼내어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내 머리가 도저히 말을 듣지 않고 저절로 조금씩 기울어졌다. 나는 비스듬히 뜬 눈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코면 코, 귀면 귀,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어느 것 하나 있어야 할 제자리에 반듯하게 놓여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얼른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기를 몇 번, 나는 보고 또 보다가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고개 돌리는 것도 깜빡 잊고 여전히 입을 약간 벌린 채로 그녀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추궁하는 뜻으로 눈을 깜박이자, 나는 그제서야 내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른 눈을 책으로 돌렸다. 책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그 교실에 감히 다시 갈 수가 없었다. 허소만이 누군데, 그리고 나 지대위는 또 누구고?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이미 충분한 사치였다.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한 번도 여자 사귀는 쪽으로 재능을 키운다거나 발휘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내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그날 도서관에서 허소만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 그녀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말을 걸었다.

"지대위, 너 요즘 왜 계속 나를 피하니?"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던진 이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나는 감히 내 상상을 더 진전시킬 수도,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녀와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계속 양옆을 살피고 있었다. 친구들이 이런 나를 보고 '구로(老九)'라고 놀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대위, 너 뭘 그렇게 불안하게 살피니?"

나는 별수 없이 그 팔로(八老)에 대한 소문을 말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니? 그래, 그럼 가봐. 우리 내일 저녁 같은 장소에서 보는 거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이튿날 나는 감히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그 교실에서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가슴 속이 근질근질한 것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일층까지 뛰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 그렇게 열 몇 번을 혼자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소등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내가 혼자 공연한 오해를 했었나? 상대는 그냥 무심코 던져본 말인데 나만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인가?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 쪽에서 정말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나도 괜히 헛된 생각 품지 않았을 터였다.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들쑤셔서 마음만 산란해지게 만드느냐 말이다. 이렇게 한 번 뒤숭숭해진 마음 언제 다시 가라앉을는지.

이튿날 수업시간에도 허소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여학생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저녁 식사 전에 기숙사에서 왕귀발(汪貴發)과 오외(伍巍)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소만이 독감으로 인한 위경련으로 학교 병원에 입원했다면서, 자기들은 이미 병문안을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지만 아무 일 없는 척하다가 문을 나서자마자 냅다 학교 병원으로 뛰었다. 그러나 병실 문 앞에서 벌써 몇 명의 남학생들이 침대 주위에 둘러 서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다시 물러나왔다. 나는 창밖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그녀와 단둘이 만날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고, 일단 들어갔다 하면 삼십 분, 혹은 한 시간이 되어서야 나왔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는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한 명 더 오더니 그녀의 침대 앞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그냥 들어가 볼까 하고도 생각했다. 같은 반 친구인데 뭘! 하지만 곧 용기를 잃고 말았다. 돌봐주는 사람도 있고 지켜주는 사람도 있는데 네가 뭐라고 저길 들어가? 기숙사로 돌아가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올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내가 입을 열면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을 알아차릴 것 같아서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 남자는 아직도 가지 않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고 그 남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도 잠시 그 뒤를 따라 걷다가 그냥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이튿날 아침 나는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수업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학교병원으로 달려갔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그녀의 침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소만은 매우 흥분한 듯 말했다.

"대위, 너! 왜 더 일찍 오지 않았어?"

"어쨌든 너야 돌봐주는 사람 많잖아."

"나는 계속 너를 기다렸는데…."

"사실은 어제 저녁에 왔었는데 사람들이 계속 오기에, 문 닫을 때까지 지키는 사람이 있기에, 그냥 돌아갔었지."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바보야, 그냥 아는 사람이야, 별것 아니라고. 온다는 사람한테 내가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 속에 담겨진 의미가 확실한 것 같기도 하고 불확실한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는 한 쪽 손을 담요 밑에서 천천히 꺼내어 무심결에 그런 것처럼 침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내 손에 대더니 멈추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을 더듬어 손등 위를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더듬어 올라가서 내 손목 위를 어루만지다가 마지막에는 내 오른손을 꼭 잡았다. 점점 따뜻해질 때까지 꼭 잡고 말했다.

"난 네가 좋아."

그녀의 눈에서 순간 점화될 것 같은 어떤 에너지가, 기묘한 빛이 스며 나왔다. 나는 감동해서 울고 싶었다.

"정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왜 정말이 아니란 거야? 누가 안 된대?"

내 손을 더욱 힘껏 잡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일종의 습하고 따뜻한 기운이, 일종의 갈망이 전해져 왔다. 온통 그녀의 손에 집중된 내 모든 감각으로 그녀 손바닥 한가운데가 톡, 톡, 박자를 맞추듯 고르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거기에 자그마한 심장이 뛰고 있는 듯했다.

한참 행복해 하던 차에 그녀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내가"아주머니!"하고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퇴원하기 위해 짐을 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나의 두 손발이 몹시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녀 어머니가 그녀를 부축할 때에는 나도 달려가서 돕고 싶었지만 곧 앞으로 뻗었던 손을 도로 움츠리고 말았다. 허소만이 말했다.

"지대위, 이 짐 좀 들어줘."

나는 가슴이 훈훈해져서 그물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때 군인 하나가 들어오자 그녀 어머니가 말했다.

"이(李) 기사, 이 물건들 차에 갖다 실어요."

나는 고분고분 그물 가방을 건네주었다. 기사가 차에 시동을 거는 동안에도 나는 차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소만이 말했다.

"대위, 나 금방 좋아질 거야."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기숙사로 돌아와서 나는 오른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맡고 또 맡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다가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옷을 벗고는 전신을 위아래로 한 번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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