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늘엔 눈이 있다**
십년 전, 아버지께서는 나를 데리고 이 삼산요(三山拗)라는 산촌으로 오셨다. 1967년, 내가 열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우익분자로 분류되셨다가 1962년에 그 오명을 벗으셨지만, 계급정리 운동 때 결국 현(縣) 중의원(中醫院)에서 쫓겨나셨다. 지난 십년간 아버지는 이 일대에서 의원으로 일하시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살리셨다. 그러던 분이 사흘 전 갑자기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신 것이다.
그날도 나는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려던 참이었다. 마을을 막 벗어나는데 누가 내 이름을 외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위(大爲)야! 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나는 대바구니를 내던지고 되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아버지께선 바닥에 누워 계셨고, 마을 사람들은 그 주위에 둘러선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달려가 아버지의 인중을 꼬집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진삼다(秦三爹) 영감이 말했다.
"보건소로 옮기자!"
누군가가 들고 온 대나무 안락의자에 남죽(楠竹)을 두 개 얽어매어 금세 들것을 만들었다. 마이호(馬二虎)와 진사모(秦四毛)가 들것을 들고 출발하고, 몇몇 젊은이들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교대할 준비를 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뒤를 따르다가 몇 번이나 넘어져 턱에서 피가 났지만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중간쯤 왔을 때 아버지의 몸이 자꾸 아래로 미끄러지자 진 영감이 자기 허리띠를 풀어 아버지의 몸을 들것에 묶어 매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묶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놀랍고 두려운 생각에 물었다.
"왜 그래요?"
진 영감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대위(大爲)야, 네 아버지 몸이 식기 시작하는구나."
의사는 아버지께서 뇌일혈로 돌아가셨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버지께서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온몸을 위아래로 어루만지고, 손을 아버지의 몸 밑으로 밀어 넣어 등을 만져보면서 따뜻한 부분을 찾아보려고 했다. 웃옷을 벗기고 가슴에 뺨을 대고 자세히 귀를 기울였다.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고, 점점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절망했다. 아버지를 들어 메고 삼산요로 돌아오자 온 마을 사람들과 이웃 마을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진 영감이 말했다.
"지(池) 선생에겐 후손이 있으니, 법도대로 합시다."
마(馬七爹) 영감이 자기 몫으로 준비해 두었던 관을 들고 와서 가슴을 두드리면서 내게 말했다.
"내 이 뼈다귀, 아직 삼년, 오년은 문제없겠지. 안 그래?"
내가 마 영감께 고맙다고 절을 하자, 마 영감이 말했다.
"내가 네 절을 받았으니 이 관은 네 아버지께 드리지. 네 아버진 정말 좋은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살아 계실 적에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 좋다는 건 정말 수지맞는 거다. 제일 수지맞는 장사야."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뜻을 대충은 알아들었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당신 자신은 늘 손해만 보시면서 뭐가 그리 수지맞는다는 것인지 충분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 좋다는 것은 정말 수지맞는 일이군요!
대나무 장막을 치고 그곳을 빈소로 삼았다. 나는 그곳에 꿇어앉아 아홉 근 세 냥의 종이돈을 태웠다. 그리고 그 재를 베주머니에 담아 아버지께 베개 삼아 고여 드렸다. 밤을 새우던 그날 밤, 마이호(馬二虎)가 산 아래로 내려가서 꽹과리패를 불러오고 조화(弔花) 두 개와 폭죽, 종이돈 묶음을 사왔다. 저녁에는 푹 익힌 고기요리 다섯 상을 차려내어 어른들을 대접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사발 하나씩을 들고 밥솥에서 퍼 담은 밥 위에 국을 부은 다음 다진 고추를 한 줌 얹어서 그것을 제삿밥 삼아 먹었다. 아홉시가 되자 꽹과리패가 연주를 시작했다. 만가(輓歌)를 부르는 사람이 곡조를 넣어 소리쳤다.
"효자는 나와서 절을 하라!"
내가 계속 가만히 있자 마 영감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나는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꽹과리패가 연주를 멈추고 폭죽을 한 묶음 터뜨리고는 다시 날라리를 불기 시작했다. 나는 평생에 그렇듯 처량하고 슬픈 곡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날아오는 소리인 듯 곡조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신 옆에 지핀 여섯 더미의 화톳불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고 날라리가 울리고 있으니, 흡사 인간 세상이 아닌 듯했다.
이튿날 새벽 발인을 앞두고 사람들은 서둘러 만든 수의를 아버지께 갈아입히고, 아버지 생전의 분부대로 흰 천으로 시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몇몇 청년들이 나를 아버지 시신에서 떼어냈으므로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이 고인에게 수의를 갈아입히고, 시신을 흰 천으로 감싸고, 생석회를 듬뿍 집어넣은 다음 다시 흰 천으로 한 겹 한 겹 덮는 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자 사람들은 나를 부축해 가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했다. 아버지께서 그곳에 누워 계신 모습을 보았다. 얼굴만 내놓고 주무시는 것처럼 누워 계셨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갑자기 슬퍼져서 몸부림치며 울다가 기절을 했다. 만가를 부르던 사람이 장엄하게 외쳤다.
"떠날 때가 되었다!"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청년 둘이 관 뚜껑을 덮자 마 영감이 그 위로 올라가서 길게 세 번 읍(揖)을 한 후 대나무 못을 박기 시작했다. 내가 몸부림치면서 관 위로 달려들자, 진 영감이 말했다.
"법도대로 해라!"
청년 둘이서 나를 꼭 붙잡고 땅바닥에 꿇어앉혔다. 상여꾼의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어이야, 일어섯!"
상여꾼 열여섯이 관을 들고 일어섰다. 상여의 가운데 있는 장대 앞쪽에는 양 날개를 꽁꽁 묶은 수탉을 세워 놓고, 뒤쪽에는 커다란 은색 종이학을 세워놓았다. 나는 아버지의 초상을 들고 앞장서 걷다가 상여를 교대할 때마다 매번 몸을 돌려 상여꾼들에게 절을 했다. 날라리 소리가 산간 소로(小路)에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날라리 소리가 일단 멈추면 이번에는 북과 징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그 메아리 소리가 사방 산 위로 퍼져 나갔다.
장지에 도착하니 구덩이가 이미 파여져 있었다. 진 영감이 수탉을 끌어내려 죽인 다음 그것을 거꾸로 들어 피를 구덩이 속으로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두 줄의 굵은 밧줄로 관을 매달아 천천히 아래로 내려놓았다. 나는 구덩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진흙 냄새가 물씬 났다. 저 세상의 냄새, 떫은 비린내가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장사 지낸 다음날, 진사모(秦四毛) 씨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여기 이 편지, 자네 거야. 전날 우체부가 자네 갖다 주라면서 나한테 준 건데, 내가 자네 부친께 드렸었지. 그런데 자네 부친께선 이 편지를 보시고 그냥 곧바로 쓰러지셨어. 내가 요 며칠 정신없이 바빠서 이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니면서 그만 깜빡했지 뭔가."
나는 그 편지를 받아 보았다. 그것은 바로 북경 중의학원(北京中醫學院)의 합격통지서였다. 내가 합격했다니! 그리고 아버지께선 이 편지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께선 이 편지를 받은 다음에도 한참을 편지 봉투만 뚫어져라 쳐다보시면서 말씀하셨단다.
"아마도, 아마도… 에이, 대위 녀석 돌아오면 그때 뜯어보지."
그러나 역시 참을 수 없었던 아버지께선 결국 그 편지를 뜯어보셨고,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셨단다.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 올리면서 큰 소리로 외치셨단다.
"그럼, 하늘엔 눈이 있지. 공정함이 시간의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야(蒼天有眼, 公正在時間的路口等待)!"
그리고는 그대로 쓰러지셔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 합격 통지서가 왜 아버지께 그처럼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지 나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그 해(1957년), 아버지는 우파로 분류되셨다. 사실 아버지는 정치에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이것은 1956년 중국 공산당의 정풍운동 당시 나온 표어들인데, 당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도록 권장되었다.--역자〕당시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아버지의 동료인 주도부(朱道夫)는 정풍회의 석상에서 현(縣) 중의원(中醫院)의 오(吳) 서기에게 세 가지 의견을 제시했는데, 당시 오 서기는 매우 허심탄회하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사정은 돌변하여 주도부가 내놓았던 그 세 가지 의견은 당을 향한 공격으로 간주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당하게 된 주도부는 그제야 조직을 향한 자신의 일편단심, 공표된 죄상과 당시 자신의 발언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그리고는 그날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증인이 되어 달라고 애걸했지만,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주도부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제발 나서서 공정한 말 한 마디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저 없이 승낙하셨다. 아버지는 그저 사람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을 뿐,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어떤 사실을 진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런 것을 따져볼 정도로 정치적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주도부는 당시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거듭거듭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정말 좋은 사람,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증언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오(吳) 서기가 웃으면서 아버지께 물었다.
"정말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아버지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제 인격을 걸고 보장합니다."
오 서기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인격이 그 정도로 값어치 있는 것이오?"
그리고는 아버지의 눈앞을 손가락으로 찍어대면서 말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자세히 생각해 보란 말이요!"
아버지께선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셨다.
"그게 얼마나 오래된 일이라고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거요? 사람은 언제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해야지."
오 서기는 아버지께 반문했다.
"당신의 말은, 그러니까 조직에선 실사구시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오?"
바로 그해에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께선 그 몇 분 동안의 대화가 여러 세대에 걸친 희생을 대가로 할 줄은, 그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하셨을 것이다. 내가 네 살 때인 1961년, 할아버지께선 그 일 때문에 화병을 얻어 식사도 못하시다가 결국 굶어 돌아가셨다. 나는 어릴 적부터 주위로부터 멸시에 찬 눈빛을 받으며 자라다가, 네 살 때에는 배가 고파서 하루 종일 어른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한 적도 있었다. 훗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시절엔 어른들조차도 굶어서 온몸이 퉁퉁 붓는 등 고생들을 했는데, 어린 나는 곧잘 문턱에 걸터앉아 밥그릇을 입에 꼭 대고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곤 했단다.
문화혁명(文化革命)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버지께 고깔모자를 씌워 징을 쳐대면서 조리를 돌렸다고 한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좋은 사람이 어떻게 조리돌림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왜 맨날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을까? 그때 내 머리 속에는 '반동 세력(黑幇)','잠복 간첩(潛伏特務)'같은 단어들로 가득했다. 정말 어떻게 그런 단어들과 아버지를 감히 연결시킬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반 친구들이"창과 칼 대신 펜을 잡고 힘을 모아 반동세력을 때려 부수자"는 노래를 함께 불러댈 때, 나는 정말이지 땅에 갈라진 틈이라도 있으면 거기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그 후 사람들은 곧 아버지를 잊어버리고'살아있는 호랑이'와'자본주의의 앞잡이들(走資派)'을 잡으러 다녔다. 그때 주도부는 곧잘 우리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곤 했다. 두 사람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에 있었다. 그러던 1967년 말,「인민일보」에"우리에게도 두 손이 있다. 도시에서 빈둥대며 밥만 축내진 않는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그리고 주도부가 갑자기 나서서 아버지를 고발했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이 어떠어떠한 반동적인 말들을 했었다고 하면서, 그때 자기가 했던 말들은 뱀을 굴속에서 끌어내기 위한, 즉 지영창(池永昶)으로 하여금 그 사상을 보다 확실하게 폭로하도록 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께선 깊은 산 속의 작은 마을인 삼산요로 쫓겨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다섯 살짜리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가셨다. 주도부는 이처럼 아버지를 고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우리 식구만큼 절실히'집안이 패망하니 처자가 뿔뿔이 흩어진다'(家破人亡妻離子散)는 말의 무게를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산으로 돌아와 인민공사의 사원(社員)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곧 나름대로 당신의 위치를 찾으셔서 그 일대에서 유명한 시골의사가 되셨다.
내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내게 맥 집는 법, 약초 캐는 법, 약 제조법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마음속으론 이러한 운명에 강하게 반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년이 지나자 나 역시 한 사람의 시골의사가 되었다. 나는 운명에 따르기로 결심하면서 내 운명에 어떤 전환점이 올 것이라는 사치스런 기대를 모두 버렸다. 내가 철이 들고 난 이래로 아버지께선 한 번도 나를 때리거나 꾸짖으신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내가 절망 중에 무심코 몇 마디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개돼지만도 못한 주도부 같은 인간을 왜 변호해 주셨느냐고 원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께선 갑자기 화를 내시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시면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놈아, 네가 아직 사람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구나, 사람 되는 법을!"
아버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후회했다. 아버지께서 신성시 하시는 것, 절대 모독해선 안 될 것을 내가 건드렸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께선 말씀하셨다.
"내 평생 가진 거 하나 없어도 그저 청백(淸白)하게 살기만을 바랐었다. 내가 죽거든 흰 천으로 내 몸을 싸다오. 절대로 잊지 말거라."
사람들이 내 혼담을 꺼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거부할 수 없이 다가오는 거대한 운명의 그림자가 느껴졌고, 나는 절망했다.
그날, 중학교 동기인 호일병(湖一兵)과 유약진(劉躍進)이 삼산요에 와서 내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중국의 대학들이 입학시험으로 학생들을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고등학교도 못 가게 하는데, 대학에 들여보내 주겠냐?"
그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가고 난 후 나는 이 소식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께선 한 잠도 못 주무시고 등잔불 아래서 머리를 푹 숙이신 채 줄담배만 피워대셨다. 나는 잠든 척하고 있었지만, 이불을 입으로 꼭 물고 있었는데 눈물이 베개를 흥건히 적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내 좀 내려갔다 오마."
그리고 읍내로 나가셨던 아버지께서 저녁에 가쁜 숨을 내쉬면서 돌아오셨다.
"너도 시험 볼 수 있단다! 내가 물어보았는데 너도 응시할 수 있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선 주먹으로 흙벽을 치셨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 후 세 달 동안 나는 정말 목숨 걸고 공부를 했고, 십일월에 전 성(省)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그날부터 아버지께선 매일같이 문턱에 앉아 시골 우체부가 다니는 작은 길 쪽만 바라보고 계셨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배달되는 편지를 아버지는 매일같이 그렇게 기다리고 계셨다.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약진과 호일병 모두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유약진은 무한(武漢)대학교 철학과로, 호일병은 복단(復旦)대학교 신문학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어서 사타구니에라도 머리를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떨어졌다 해도 그게 어찌 네 탓이냐? 아마도 사람들이 정치적 배경을 따지는 모양이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적이 모자라서 떨어진 거라면 내년에 또 응시하면 되지만, 만약 정치적 배경 때문이라면 제 한평생은 물 건너갔네요."
나는 속으로 내가 시험을 망쳤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래야 다음해에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입학 통지서가 결국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줄은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다.
북경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아버지의 무덤으로 가서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오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 몸을 비추고, 마른 풀을 흔들던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날려댔다. 이름 모를 새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매 한 마리가 혼자 하늘을 빙빙 돌다가 갑자기 화살처럼 절벽 가운데로 꽂혀 들어갔다. 무덤은 봉긋이 송곳 모양으로 쌓아올린 작은 흙무더기로, 비릿한 진흙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버지께선 이미 돌아가셨는데,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가슴에 맺힌 원한은, 그것이 도대체 누구에 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흙을 한 줌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다가 삼켜버렸다. 겹겹이 물결치는 듯한 산등성이들이 햇볕 아래 조용히 누워 있었다. 산에는 일년, 십년, 백년 같은 그런 시간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북풍이 윙윙 소리 내며 부는 것이 마치 하늘 저 편에서 불러대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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