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에서의 염원을 '민족'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나요?/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황사영 (黃嗣永: 1775-1801)의 백서 (帛書) 사건만큼 미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역사적 사건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인척과 친우들을 포함한 거의 1백명의 교유들이 처형되고, 4백명이 유배지로 떠난 1801년의 무자비한 교회 탄압(소위 신유사옥: 辛酉邪獄)의 분위기에서 죽음을 앞둔 한 교도로서 백서에서 나온 과격한 상황 타개책이라도 강구해 볼만했었다는 것을, 가장 열렬한 민족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북경에 있는 프랑스인 주교 구베아 (Gouvea A. de)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그 백서의 내용을 보면, 동시대인이나 우리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수난을 당하고 있는 조선의 가톨릭 교회를, 황사영이 다음과 같은 방략으로 다시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1(백서).jpg> @교회사연구소
"이 나라는 방금 위태롭고 불안하고 문란한 지경에 처해 있어 무슨 일이나 막론하고 중국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주교께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시어 내가 조선에 성교(천주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듣건대 그 나라는 중국 조정에 속하여 있어 외국과 상통하지 아니한다 하므로 이렇게 청하오니 원컨대 폐하는 그 나라에 따로 칙령을 내리시어 서양 선교사를 받아 들여 그들로 하여금 충성하고 효도하는 도리를 가르쳐 백성들이 황조(청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케 하옵소서 하고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실하고 근실함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가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자(天子: 청나라 황제)를 끼고 제후(조선의 왕)를 호령하는 격이니 성교(천주교)가 평화롭게 나아갈 것입니다."
"[만약 조선의 왕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조선을 중국의 내부와 같은 행정 구역으로 삼아 의복을 중국과 차별없이 입게 하고 서로의 왕래를 터 이 나라 (조선)를 만주에 소속시켜야 한다. 중국 황제의 영토를 넓히고 안주와 평양 사이에 안무청 (조선 관리 관청)을 설치하여 친왕(親王)을 임명하고 조선을 감독 보호하게 하되 은덕을 후이 베풀어 민심을 굳게 단결시켜 놓으면 중국에 사변 (청나라 왕조를 위협하는 민중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요동과 심양 동쪽을 갈라 근거로 삼아 그 험한 산악 지대를 방위할 수 있고 또한 장정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가 유사시 출동시키면 이것이 튼튼한 기초를 만대에 이루도록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시킬 수 있는 계책이 또 있습니다.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미약하고 모든 나라 가운데 맨 끝인데다가 태평세월이 200년을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기와장처럼 흩어질 것이나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서양]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 5만-6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3-4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반드시 온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쫒지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계책이 어렵기는 하나 실현만 된다면 반듯이 조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형편이 허락하여 극력 추진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즉, 중국 황제의 권위로 조선을 눌러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거나, 중국의 반(反)만주 반란에 대비해야 하는 청나라의 안보상의 문제도 고려할 겸 조선을 중국에 합방시켜 만주족의 근거지로 삼아 중국과 같은 수준의 선교의 기회를 얻거나, 아예 서구의 병력으로 약하기 끝이 없는 조선을 굴복시키자는 내용입니다.
<2(정약용).jpg>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초상 @다산초당
조선이 신앙의 자유를 계속 불허하면 중국의 한 지방으로 청나라에 편입시켜 감독해야 한다는 내용이나, 서양의 큰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무력 시위로 조정으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를 인정케 해달라는 내용 등의 북경의 가톨릭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백서의 중요한 부분들은, 당시의 지식인이나 지금의 우리들을 경악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황사영의 인척이었던 정다산 (1762-1836)마저도 황사영을 역적으로 매도하지 않았습니까? 전통 시대의 황사영관(觀)을,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였던 이규경(李圭景. 1788~ ? )의 유명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관련 자료가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규경은, 황사영을 "간악한 무리"로 명명하고 그의 계획을 마치 서양 군함의 무력 시위도 아닌 서양 침략의 인도로 훨씬 더 과장되게 묘사한 조정의 문서를 그대로 백과사전에 실었습니다 (경사편 제3, 석전류 제3, 서학).
그 당시의 지식인들의 글을 보면, 황사영을 "외국 침략의 앞잡이"로 보는 것이 공통적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침략이 아닌 "종교 자유를 얻기 위한 외압"을 계획했던 것을, 세인들이 별로 생각해주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훈련을 받기도 하고, 불우한 근대사에서 외국 군함의 도래가 바로 최악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배운 우리 세대의 경우에는, 황사영이 처한 딱한 상황을 이해한다 해도 그의 계획을 민족 반역 그 이상으로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황사영이 민중을 혹사, 착취했던 세도가들에게 맞섰음에도 남한의 민중 사학자들이나 북한의 사학이 그를 맹목적인 사대주의자 내지 외세 의존적인 환상가라고 혹평하는 것은, 바로 근대사의 쓰라린 경험에서 나오는 민족주의적 감정과 연관돼 있는 것 같습니다.
<3(오주연문장전산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그 정서들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황사영의 백서의 의미를 과연 외세를 끌어들이는 계획만으로 축소시키면 됩니까? 13311자에 달하는 그 방대한 내용을 보면 가혹한 고문들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조선의 순교자들의 빛나는 사적들을 알리는 내용도 있고, 세도 정치로 기울어져 가는 그 당시의 조선의 형편을 사실 그대로 알리는 내용도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황사영의 지적은 과연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아닐까요.
"이씨(李氏)가 미약하여 실오리 같아 겨우 끊어지지 않고 여군(女君: 수렴청정을 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이 정치를 하니 세력 있는 신하들이 권세를 부리므로 행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그 당시의 집권자들이 듣기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내용이지만,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사리에 맞는 내용이 아닙니까? 아니면, 양반 집권층의 외국 사정에 대한 극단적인 무지를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어떻습니까.
"[집권자들이 천주교를 배척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안다는 것이 오직 송나라 학문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친지간의 큰 괴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유하면 궁벽한 시골의 어린 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 바깥사람을 못 보다가 우연히 낯선 손님을 만나면 반드시 깜짝 놀라 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 나라에 광경이 이와 같은데 실은 의심이 많고 겁이 많고 어리석고 무식하고 약하기가 천하에 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읽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내용이지만, 과연 사실이 아닌가요? "이양선"(서양 선박)들이 조선에 찾아와도 도대체 어느 나라의 배인지 그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은 그 당시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무지를 성토하는 황사영 자신이 과연 세계의 사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4(토굴).jpg> 황사영 백서의 산실인 배론의 토굴 @ 배론성지
이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보다 자세히 하자면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할 때, 하나의 대단한 허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찍이 한국 가톨릭 역사의 권위자인 고려대 조광(趙珖) 교수도 지적했지만, 그 당시에 황사영 등의 박해를 받는 조선의 가톨릭들이 마땅히 끌어들일 만한 외세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교황청이 프랑스 혁명(1789-1794)과 나포레옹 전쟁의 와중에서 무력화돼, 어찌 할 수 없이 반도의 괴수로 생각했던 나폴레옹과 1801년에 타협을 봐야 할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이라 해도 설령 극동에서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고 싶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1798-1801년간에 나폴레옹이 이집트의 점령을 시도해봤지만, 영국 해군의 공격과 현지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군대의 3분의 1이 사상자가 되며 나머지는 끝내 영국인에게 항복했습니다. 지중해 반대쪽의 이집트도 영토화시키지 못한 나폴레옹이, 과연 지구 반대쪽에 있었던 극동 지역에서 그 야심을 마음대로 펼 수 있었겠습니까? 중국이라는 잠자는 거인이 일어나기만 하면 전세계를 진동시키겠다는 나폴레옹의 명언이 잘 보여주듯이, 그에게는 조선의 외교적인 후견인이었던 청나라가 결코 만만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교황청이나 서구 국가들이 청나라 정부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도, 청나라가 신앙의 자유를 지켜준다는 것도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황사영의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반대로, 제사를 금지시키려고 했던 교황청의 조치에 대노한 18세기의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이 갈수록 약 20만 명의 신자를 거느렸던 중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을 계속 강화시켰습니다. 가경(嘉慶: 1796-1820)연간의 박해가 특히 심해, Jean Gabriel Taurin Dufresse(사천성의 주교 대리: 1751-1815)와 같은 거물급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해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강약의 차이가 없지 않지만, 19세기 초반의 조선의 가톨릭 탄압 정책의 상당 부분은 바로 청나라의 금교(禁敎) 정책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기도 했지요. 제국주의 세력들이 총칼을 앞세워 중국에서의 선교의 자유를 요구할 수 있는 시기가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이후에 왔으므로 그 전에 순교한 황사영을 외세 침략의 앞잡이로 보는 것이 엄청난 비약이지요. 설령 백서가 북경의 주교에게 전해졌다 해도, 죽어가는 조선 가톨릭의 처절한 외침에 응할 만한 외세가 전무했던 것은 뻔한 일입니다…
<5(아편전쟁).jpg> 아편전쟁(1840)은 동양과 서양 양대 문명의 대결이었다. 여기서 중국은 완패했다. @프레시안
제천 배론(舟論)의 토굴에서 숨어서 체포와 죽음을 앞두고 "큰 배들이 와서 이 박해를 멈추지 않는 한 조선의 교회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와 같은 절망이 뒤섞인 꿈을 꾸었던 천주교 청년 황사영… 청나라의 정세나 서구의 지리도 거의 모르면서 교황청과 청나라 황제를 세계의 중심이자 공평한 조정자로―중세의 세계주의적, 보편주의적 이상대로―인식했던 그의 몽상적인 신앙 자유의 획득 방안을 우리가 과연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할 권리와 필요성이 있는가요?
그가 꿈꾸었던 큰 배 파견이나 조선에 대한 감독은 보편적인 정의를 대표하는 세계 중심(교황청, 청나라)에 의한 일이라면, 그의 절박한 절규는 요즘의 유엔에의 탄원서 제출과 같은 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에게는 천주교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성교(聖敎)이자 서구인도 중국인도 다 같이 믿거나 믿으려고 하는 세계의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그와 다르다고 해서, 자신의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서 당대의 가혹한 지배자와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인 그를, 우리가 꼭 특수한 민족의 이름으로 성토해야 하는가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그를 외세 숭배자로 부르지만, 그가 진정으로 숭배했던 것은 오직 전지구인들이 공동으로 섬길 수 있는 보편적인 신(神)이었습니다. 종교인을 정치사의 기준으로 심판하는 데에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요?
어쨌든, 역사에 대한 판단을 현재의 민족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그 당시의 인식틀과 논리,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신앙과 신념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다원주의의 원칙에 의거해서 내리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객관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이 계속 오는 겨울의 땅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관용과 대화만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힘이 아닐는지요/허동현**
안녕하세요. 박노자 선생님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 16세에 진사가 된 신동의 손목을 잡고 정조(正祖)가 한 말입니다. 임금의 옥수(玉手)가 닿았던 손목에 붉은 천을 감고 다녔던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황사영. 그러나 그는 17세 되던 해 양반 관료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유(辛酉)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당시 배론의 한 토굴에서 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 및 교회 재건에 도움을 달라고 북경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요청하는 긴 편지를 흰 비단 천 위에 썼지요.
<6(정조).jpg> 정조 (1752~1800. 조선 제22대왕. 재위 1777~1800). 당시 정치문제로 되어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아래 유연하게 대처했다. @ 프레시안
소위 황사영 백서라고 불리는 이 서한은 사전에 발각되어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지 못했지만,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으로 외세의 개입―1) 서양제국의 재정원조 2) 북경교회와의 긴밀한 연락 3) 선교사의 조선입국 허용을 위한 로마 교황의 중국 천자에 대한 협조서신 발송 4) 조선교회의 안정을 위한 조선에 대한 중국의 보호와 간섭 5) 서양함대 및 병력의 조선 파견 등―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백서를 평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정치적ㆍ집단적ㆍ계급적 이해에 따라 극과 극의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천주교도 박해의 정당화를, 일제 식민주의사가들은 당파성론의 입증을, 신교측 교회사가들은 구교와의 차별화를, 그리고 유물사가들은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서의 천주교 공격을 위한 일급자료로 백서를 이용한 바 있습니다. 반면 호교론(護敎論) 입장의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황사영의 입장을 변호ㆍ옹호한 바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견해를 살펴보시지요.
<7(배론).jpg> 배론성지 전경 @ 배론성지
조선왕조 위정자 : "하늘과 땅을 다 찾아보고 만고에 걸쳐 살펴보아도 듣거나 본 적이 없는 흉모ㆍ음계(陰計)이다."( 「사학죄인사영등추안(邪學罪人嗣永等推案)」)
일제식민사가 : "순조원년(純祖元年) 즉 1801년에 돌발한 천주교 박해는 실로 시벽(時僻) 양파의 투쟁에 터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종교적인 일만은 아니었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황사영백서이다." (小田省吾, 「李朝の朋黨を略述して天主敎 迫害に及ぶ」,『靑丘學叢』1, 1930)
신교측 교회사가 :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이유는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 황사영의 백서사건에서, 청국의 조선병합과 서양으로부터의 무력침공을 제의한 것이…"매국"행위로 규탄받을 구실로 전용된 일도 있었다. 이런 것은 순수한 신앙 고백으로서의 순교 가치를 저하시킨 것이라 생각된다."(김재준 ,「한국사에 나타난 신교자유에의 투쟁」, 1966)
유물사가 : "황사영이란 남인 신자는 일단 법망을 벗어나 산곡에 숨어서 이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며 구원을 청하는 백서를 북경에 있는 천주교 주교에게 몰래 보내다가 발각되였는데 여기에는 조선에서의 포교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구라파 렬강의 무력간섭을 요청하는 매국적 내용이 들어 있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포교가 자본주의 침략 세력과 밀접히 련결되여 있다는 것을 자체 폭로한 것으로서 조선 인민들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봉건 통치배들은 내정을 개혁하고 국방을 정비할 데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만 광분하였다."(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통사』,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1956)
구교측 교회사가 : 오늘의 정치 역학에서 황사영백서를 보지 말고 그 당시 황사영 자신이 쓴 텍스트 안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백서를 편견 없이 그 시대적 상황과 그의 인물됨과 함께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안전과 입신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재건과 이 겨레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왕도체제에 과감히 도전하였기 때문에 진리 편에 서서 국가의 추한 면을 폭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 위주의 노선을 고수하면서 겨레를 구하기 위해 국가를 거슬러 고발한 왕도체제에 대한 도전이지 민족을 배반한 것은 아니다.…황사영의 백서는 박해로 인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부터 부당한 죽음과 어려움을 당하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국제적인 원조를 요청한 인권존중 옹호의 텍스트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실과 국가를 분리시키려고 한 최초의 문서로서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상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 출판사, 1992)
이처럼 백서는 신앙의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려 한 목적의 정당성과 외세를 동원하려 한 수단의 결함 때문에, 그 당시에서 오늘까지 그 평가를 둘러싸고 "흉서"ㆍ"매국의 계책"ㆍ"비상식을 극한 공상"ㆍ"외세의존의 반국가적 행위"ㆍ"몽상"ㆍ"매국적 편지"와 같은 혹평과 "조선교회 구출의 원대한 계획"ㆍ"인권존중 옹호의 텍스트"ㆍ"인권선언서"와 같은 찬탄이 엇갈리는 미해결의 화두(話頭)로 남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사영의 인물됨에 대해서도 "전대미문의 역적"ㆍ"민족 반역자"ㆍ"민족허무주의자"ㆍ"구라파에 대한 사대주의자"ㆍ"기만적 천주교리에 맹목된 광신자"와 같은 악평과 "신시대의 건설자"ㆍ"선각적 지식인"ㆍ"훌륭한 순교자"ㆍ"사회변혁ㆍ사상변혁을 시도한 개혁운동가"와 같은 호평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8(황사영).jpg>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 1775-1801)초상 @ 배론성지
개인과 전체. 밤새 물이 새는 제방을 고사리 손으로 막아 마을을 수몰의 위기에서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도록 강요받으며 자란 30~40대들은, 전체--국가와 민족--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교육받았지요. 인간이란 한 시대의 지배적 정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교회사가 문규현 신부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이제 황사영 백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이 백서는 북경의 주교에게 들어가기 전 압수되었으나 파문은 대단히 컸습니다. 피신지 충청도 배론의 토굴 속에서 작성된 백서는 교회의 입장으로 보면, 심각한 탄압과 위기에 처한 교회를 구하고자 하는 열렬한 청원과 기도입니다. 또 당시의 박해 상황과 교회 실태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서가 발각되자 나라 안은 발칵 뒤집혔고, 백서는 흉서(凶書)로 낙인 찍혔으며, 천주교인들에 대한 체포와 학살은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그처럼 외세에 의존하려던 모습들은 너무나 캄캄한 암흑과 고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기하면 다 되는 것인가?…오늘의 시선으로 찾아보는 교훈이긴 하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원동력, 힘은 민족의 현실, 민중의 삶의 자리에서 찾아졌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사 안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가 빛내었던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의 예언자적 소명이 그간의 과정에서 사위여 갔음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완고할뿐더러 민중의 고혈을 짜낼 줄만 알 뿐 위로하고 치유할 줄 모르는 봉건 정부를 향해 민중들과 일체를 이루고, 봉건 정부의 기반을 내부로부터 허물어 내리는 그러한 신앙운동이 펼쳐졌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이익을 배반해가며 지키는 교회, 한 민족의 존엄성과 그 구성원들의 오랜 삶의 터전, 그리고 소중한 문화전통을 쓸어내며 전파하는 복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 신교의 자유만 주어진다면, 그렇게 해서 '교회'를 지킬 수만 있다면 다른 가치들은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 Ⅰ』, 1994).
<9(묘).jpg> 황사영의 묘 @ 배론성지
그런데 고사리 손으로 제방의 균열을 막는 일이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일인가요. 혹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빌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 한 독재정권의 최면 걸기는 아닙니까? "개인"은 국가나 민족에 봉사해야 하는 종속적 존재가 아니며,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상식입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역사를 보는 눈도 바뀌는 법. 결국 개인의 발견이 없는 한 우리에게 진정한 근대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서 개인의 기본권인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려 한 백서의 역사성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 또한 백서를 인권 선언과 국제적 연대의 이정표로 재평가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을 같이 합니다.
왜냐하면 황사영이 강구한 수단과 방법이 현명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초래된 결과가 더욱 참담하였다 하더라도, 백서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우리 나라의 역사발전에 어떠한 교훈을 주었는가"라는 정신사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19세기 이래 세기말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꿈꾼 어떠한 세력도 주체성 결여와 외세의존이라는 공통의 약점에서 예외일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렇게 볼 때 백서는 지구촌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선 다원적 시민사회 구현과 국제적 연대의 이정표로서 그 의의를 자리 매김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를 넘어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며, 민족을 넘어 타자와 함께 하는 삶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話頭)이니 말이지요.
<10(백서부분).jpg> 황사영 백서의 일부분 @ 교회사연구소
하나 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황사영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자신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서양군사력이라는 또 하나의 물리력을 빌리려 했다는 점에서, 상대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조선왕조 지배층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는 전통적 제사 관습을 부정한 천주교의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격 포교전략이 자초한 것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논란 많은 백서 사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는, 세계 정세에 어둡던 박해 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화적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종교 사회인 우리 나라 안에서 다른 종교가 지닌 정신 문화적 가치와 사회 윤리적 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잘못도 고백합니다.…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쇄신과 화해(2000년 12월 3일)」)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참회함으로써 미래에 대비하는 천주교단의 과거 반성은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기를 꿈꾸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는 듯합니다. 자기만의 가치와 신념을 고집하며 지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면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관용과 대화만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힘이 아닐는지요.
봄의 문턱에 선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사용 논저>**
1. 인터넷 황사영 백서 (한글 번역): http://www.baeron.or.kr/100.txt
2. 여진천 편. 『황사영 백서 논문선집』. 기쁜소식, 1994.
3. 조광. 「황사영백서의 사회사상적 배경」. 『사총』21․22합집, 1977.
4. 노길명.「조선후기 한국 가톨릭 교회의 민족의식」, 『성농 최석우 신부 고희기념 한국가톨릭 문화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5. 허동현. 「근․현대 학계의 황사영 백서관 연구」. 『한국민족운동사 연구』28, 2001.
6. 정두희. 「황사영 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 바오로의 딸, 1999.
7. 방상근. 「황사영 백서의 분석적 이해」,『교회사 연구』13, 1998.
8. 하성래. 「황사영의 교회활동과 순교에 대한 연구」. 『교회사 연구』13, 1998.
9. 배은하 편.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 출판사, 1992.
10.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11. L. Ladany. "The Catholic Church in China." N.Y., Freedom House, 1987.
12. Anders Ljungstedt. ' a supplementary chapter: Description of the City of Canton'. "An historical sketch of the Portuguese settlements in China, and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Mission in China". 초판:Boston, 1836; 영인본: Hong Kong,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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