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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원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7>

***"'근대화'가 평가의 잣대가 돼서는 안됩니다" / 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업적 평가에 있어서 지금 두 가지 경향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가 기득권 세력과의 타협을 어느 정도 유지해왔다는 점이나, 쇄국 정책, 가톨릭 탄압 등의 그의 보수성에 주목하여 그를 역(逆)역사적인 보수적 개혁가로 보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대원군 시대에 대한 자세한 단행본을 낸 제임스 팔래 (James Palais)교수는, 대원군을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재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양반 세력들과의 본격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전통 지배계급의 전형적인 현실주의적 강국(强國) 지향적 정치가로 평가했습니다. 팔래 교수는 그나마 그 당시의 지배층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보수성이 다들 인정하는 당연한 세계관일 뿐이었다고 전제하여 대원군의 역(逆)역사성을 강조하려 하지 않지만, 국내의 몇 명의 사학자들이 대원군을 아예 시간만 낭비하여 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치명적으로 방해한 반(反)역사적인 인물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박정희 시대의 이선근(李瑄根)과 같은 관변 학자나 오늘날의 일부의 보수주의자들이 대원군을 반대로 우리 근대 개혁의 근원 내지 원(原)민족주의자로 치켜세워 그 정치를 아예 성공으로 보려고 합니다. 예컨대 최근에 나온 한국사 개설서에서 대원군의 부국강병의 성공과 그 시기의 국력 신장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쪽이 외피상 서로 반대의 의견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목적론적인 사관(史觀)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즉, 양쪽이 중세 그 다음으로 꼭 근대화라는 산업 사회에의 이동이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근대화 지향적인 정책을 순(順)역사적인 것으로, 그리고 근대화에 도움이 안 되거나 방해되는 정책을 역(逆)역사적인 것으로 각각 평가합니다. 그들 사이에서 대원군이 부국강병에 도움이 됐느냐 안됐느냐가 논쟁거리지, 근대화와 부국강병이 역사의 논리라는 점을 똑같이 인정합니다.

< 1(대원군).jpg>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 @국사편찬위원회

저로서는 바로 그것이 납득이 안갑니다. 19세기 중반 이전의 극동의 사회들도 물론 상업적 통화경제의 발전쪽으로 차차 가고 있었지만, 그 역사적인 전환의 속도나 형태는 서구의 그것과 같을 리가 만무하지 않았습니까? 서구는 1492년부터의 미주, 아프리카, 남아시아의 약탈로 빠른 시일 내에 군국주의적 근대 국가의 건설과 산업 혁명을 이루는 등 세계사적 차원의 압축 성장을 했지만, 외전(外戰)과 약탈이 아닌 안정적인 농본(農本)사회를 이념적으로 지향했던 극동에서 그러한 서구 류의 발전(?)은 이루어졌을 리가 없었습니다.

부국강병과 개발지상주의 등의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은, 극동 국가들에게 밖으로부터 19세기 중반 이후에 강요, 이식된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 외재(外在)적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그 이식 이전 시기의 정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오류가 아닙니까? 근대 지상주의적, 서구중심주의적 목적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원군의 치적을 그 시대의 민중의 욕망과 그 시대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해봅시다.

< 2(국조보감).jpg> 조선 역대 국왕의 치적 중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의 역사책인 『국조보감(國朝寶鑑)』@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왕조 말기에 와서 전국의 관료들이 하나의 커다란 부패망을 이루고, 삼남이나 평안도, 황해도의 감사가 1년6개월의 재임 기간 동안 환곡을 가작(加作)하여 그 잉여분을 사용(私用)하는 방법, 세곡을 훔치는 방법, 무고한 백성을 옥에 가두어 몸값을 갈취하는 방법(소위 勒奪), 향임(鄕任)을 파는 방법 등의 각종의 수법으로 5만 냥이라는 천문학적인 부정 축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國朝寶鑑』, 권 87, 철종2년윤8월).

이와 같은 부정부패의 만연에 대해서 정부가 몰랐던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1858년 10월에 관료들에게 특별히 명하여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1861년3월에 과거 때의 금전 거래를 금지시키기도 했고, 1863년1월에 세금의 지나친 징수를 금지시키도 했습니다. 문제는, 중앙의 세도가들과 지방의 탐관오리들이 서로 하나의 부패망으로 연결돼버린 상황에서는, 이 조치는 다 주효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대원군에 의해서 각급 관료의 기강이 어느 정도 바로 잡힌 뒤에도, 관료들의 대민 폭력 사건들이 계속 빈번히 터졌습니다. 몇 개의 예를 들어봅시다.

"1874년: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 신응조(申應朝)의 장계(狀啓)에 따라 민전(民錢, 백성의 돈)을 늑탈(勒徵)하고 현민(縣民)을 고치 (拷治, 고문으로 다스림)하는 양덕현감(陽德縣監) 신홍균(申弘均)을 파출나인(罷黜拿囚, 파직 체포)하고 늑탈(勒奪)한 민전은 감징(督徵)하여 환급(還給)토록 하다.(『高宗實錄』 高宗 11年 4月 25日)»

1877년: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계언(啓言)하여 목하(目下)의 재용 궁박(財用窘迫, 재정 부족)은 비단 연황(年荒, 흉년)에 따른 세액의 감소뿐 아니라 경외(京外)의 이속(吏屬, 하급 관료) ·선한배(船漢輩, 배주인)의 투롱(偸弄, 훔침과 농간)과 건몰(乾沒, 빼앗음)에도 연유하는 것이라 하고 한강의 선주와 이서배(하급 관료)로 1,000석 이상을 축낸 자는 효수하기를 청했다. 이를 윤허하였다.(『高宗實錄』 高宗 14年 6月 13日)»

1878년: «우의정 김병국(金炳國)이 다음과 같이 계언하다. … 상납세미(上納稅米)의 농간이 심하여 관리는 세곡 전부 다 배에 싣지 않고 배주인들은 높은 값으로써 축재하며 알곡 값이 낮으면 헐값으로 팔아치우는 이(利)가 사(私)에 돌아가고 알곡이 귀하면 건납(愆納, 조세 곡을 기한 내에 바치지 못함)의 해(害)가 공(公)에 미치는 이같은 폐단이나 건몰 (乾沒)의 환(患)이 바로 여기에 있다.(『高宗實錄』 高宗 15年 2月 17日)»

1881년:«형조(刑曹)에 명하여 전 황해도 장연현감(前黃海道長連縣監) 원상준 (元俊常)의 장물(臟物)은 그 가동(家僮, 하인)을 잡아 가두고서 독봉(督捧, 관리)케 하다. 준상(俊常)은 재직시에 수 없는 사람들의 돈의 늑탈(勒奪)과 구폐전(舊弊錢)의 건몰(乾沒) 등으로 7,100량을 모은 한 바 있다.(『高宗實錄』 高宗 18年 4月 25日)."

< 3(고종실록).jpg>1927년 4월 1일~1935년 3월 31일에 이왕직(李王職) 주관 아래 고종 45년간(1863~1907년)의 역사를 조선조 역대 실록의 체재에 준하여 편년체로 찬술한 『고종실록(高宗實錄)』@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위와 같은 기사들은, 1810-1890년대의 연대기들을 거의 일년마다 장식합니다. 정부는 백성의 돈을 훔치고 빼먹는 행위(偸弄), 백성에게 수취한 돈을 사용하는 행위(乾沒), 돈을 불법적으로 거두는 행위(徵捧), 백성을 위협하고 재물을 빼앗는 행위(威脅取財), 뇌물을 받고 송사를 결정하는 행위(受訟賂) 등에 대해서 하급 관료에게 사형을 내리고 양반 관료 중에서 가장 심한 자를 파직하여 유배 보낸다 해도, 해마다 부정 행위의 규모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커져갔습니다.

과거의 패스나 관직이 거의 공공연하게 금전으로 거래되는 마당에―그리고 조정의 측근들이 그 거래의 이득을 취하는 마당에―부정이 없어질리가 있었겠습니까? 연대기에 올라온 사건은 사실 그 당시 일상화된 부정부패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의 조선에서는, 불법 착취를 못 참아 사방으로 도망치거나 민란을 일으켰던 백성들이 진심으로 열망했던 것은 최소한의 공공성ㆍ공익성을 보유하는 깨끗한 정부이었습니다.

< 4(운현궁).jpg> 복원된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모습@종로문화원

***"몇 세도가들의 정치무대 장악이라는 상황은 과연 개선됐습니까?"**

그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대원군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그가 고리대로 변해버린 환곡제를 상당부분 폐지하여 그 대신 사창제(社倉制)라는 일종의 공동체적 상부상조 제도를 개편하여 확대 실시한 것이나, 일부의 탐관오리를 엄벌에 처했다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부패의 주된 구조적 원인인 몇 개 세도가들의 정치 무대의 장악이라는 상황은 과연 본격적으로 개선됐습니까?

일부의 남인들이 대원군 시기에 등용된 것을 대원군의 업적 중의 하나로 많이 언급하지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 가문들이 여전히 조정에서 포진하여 권병을 놓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대원군 때의 핵심 인물 보면 안동 김씨이면서 외가가 풍양 조씨인 김세균(金世均: 1812-1879), 안동 김씨 가문의 세력가 김병학(金炳學: 1821-1879, 1865년부터 영의정), 김병학의 동생 김병국(金炳國: 1825-1905), 또 한 명의 안동 김씨 세력가 김병기(金炳冀: 1818-1875) 등이 주를 이룹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정 책임자(선혜청 당상이나 호조판서)로 등용된 사람이 거의 다 유력 가문 (주로 안동 김씨)의 출신이었다는 점입니다.

대원군 집권 후기에 안동 김씨 등이 정치의 중앙 무대에서 퇴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대원군 독주에 대한 양반 관료 주류의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겁니다. 즉, 국가의 공적 기구들이 세도가들에 의해서 이미 사유화돼버린 상황에서 독재자 자질의 대원군이라 해도 세도가들과 협조하지 않는 이상 권력의 장악과 유지가 불가능했던 겁니다. 부정부패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구조를, 대원군은 본격적으로 바꾸지 않고 오히려 요령있게 편승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부정부패가 백성을 계속 괴롭혔고 각처의 민란이 잇따르고 국경 밖(노령과 만주)으로의 백성의 도주가 대규모화됐습니다.

< 5(이홍장).jpg> 이홍장(李鴻章, 1823~1901)@ 프레시안

당시의 재야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대변했던 황현이 대원군에 대해서 내린 전체적인 평가는 당연히 냉정합니다.

"대원군은 세도가 안동 김씨의 부귀를 탐내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뜻을 얻은 후로, 음행과 사치와 교만과 폭행을 자행하여 장동 김씨들보다도 더 지나친 일을 감행하였다. 그는 원기(元氣)를 손상시키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샀으며, 공연히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색당파를 두둔하였다(『매천야록』, 제1권)."

1882~1885년간에 청나라에서 감금을 당했을 때, 대원군이 청의 조정의 유력 대신들에게 엄청난 양의 뇌물을 바치기는 물론 (『매천야록』, 제1권), 아예 민비의 축출을 위하여 청나라의 대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조정을 감독케 해달라고 청의 권신 이홍장(李鴻章)에게 빌기도 했습니다 (『李文忠公 全集』, 제17권, 光緖 11년6월23일). 조선 임금의 아버지로서의 체면이란 간데 없이 사라진 겁니다.

그렇다면, 동학 농민 지도자의 일부를 비롯한 그 당시의 민중의 여러 대변자들이 왜 국태공 (國太公, 대원군)에 대해서 희망을 표명했을까요? 황현에 의하면, 그 후에 백성들이 대원군의 시절을 그리워했던 유일한 이유는, 대원군 이후에 집권한 민씨 족벌의 부정과 파행이 훨씬 더 심했기 때문입니다.

동학 농민의 무장운동 그 당시의 일본 신문들도, 부정부패와 비리의 원천인 민가를 살육하기 위해서 그 숙적인 대원군을 밀어준다고 비슷하게 분석했습니다 (『二六新報』, 1894년10월14일). 해마다 부정부패가 심해져 가는 절망적인 구한말 시절에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대원군의 감국(監國)을 바랬던 겁니다.

전통 시대의 인물인 대원군에게 왜 일찌감치 서구식의 개화를 지향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은 물론 무리입니다. 그것은 물고기에게 왜 새처럼 날아다니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격이지요. 서구식의 근대적 군사주의 국가 건설이나 자본화가 비(非)서구 지역에서 꼭 자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의 법칙도 없고, 서구적 근대 국가를 선(善)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주요 세력가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운현궁 앞에서 뇌물을 받곤 했던 대원군이, 비리에 신음했던 당대 민초들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도 결국 세도 정치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정치인은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대원군이라는 '물고기'도 '새'가 될 수 있었습니다." / 허동현**

박노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대원군은 분명 "물고기였지 새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이웃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 한 마리는 새로 둔갑하는 데 성공하였고, 다른 한 마리는 지느러미를 날개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가 물고기로서의 삶을 살 숙명을 갖고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왕조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던 당시 세 번―고종 즉위 초 10년(1864~1873), 임오군란(1882) 때 한 달여, 그리고 갑오경장(1894~1895) 때 4개월여―이나 집권하였으며, 갑신정변(1884)의 주도세력과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그리고 경복궁 점령에 나선 일본군도 대원군과 손을 잡으려 했던 역량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대원군이 맘만 먹으면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던 김옥균의 말처럼, 대원군은 마음만 먹었다면 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내학계가 해방이후 제기한 대원군 비판의 핵심은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을 단행하고 중국에서 양무운동(洋務運動, 1860)이 한참이던 시절 그는 왜 새가 되려하거나 날개라도 달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냐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서구식의 근대적 군사주의 국가 건설이나 자본화를 왜 자생적으로 이루지 못했냐"를 잣대로 질책을 가했던 것이지요.

<6(양무운동).jpg>금릉제조소(金陵製造)의 대포 서구의 군사기술을 받아들인 중국 양무운동의 결실이다. @프레시안

<7(명치유신).jpg> 왕정복고의 선언, 명치유신(明治維新)@프레시안

대원군을 "실용주의적 보수주의자(pragmatic conservative)"로 본 짐 팔레(James B. Palais)교수는 최근에 발간한 『유교적 경국책과 조선의 제도: 유형원과 후기 조선왕조(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 Yu Hyõngwõn and the Late Choson Dynasty,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6)』에서 실학에서 근대성을 찾으려는 국내학계의 연구 동향에 대해 일침을 가했습니다.

요컨대 유형원과 같은 소위 실학자들의 사상에 보이는 진보성은 근대지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유교적이며 전통적 규범의 범위 내에서 존재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서구 근대가 무엇이 좋다고, 잔인한 포식자의 삶이 무엇이 아름답다고 자꾸 일본처럼 되고 싶어하느냐는 비판으로 들리더군요. 마찬가지로 박노자 선생님께서도 꿈꾼다고 새가 될 수 없는 물고기에게 왜 새가 되려하지 않았냐고 채찍질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정글, 포식자와 먹이들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세상은 동화 속 세상에만 있는 것 아닌가요"**

선생님 말씀대로, "부국강병과 개발지상주의 등의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은 19세기 중반 이래 밖으로부터 강요ㆍ이식된 것이기 때문에 극동에서 서구류의 발전"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질 리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도대체 어떻게 새가 될 수 있었단 말입니까? 메이지 일본의 지도자들의 능력이 뛰어났다던가, 일본의 사회ㆍ경제적 발전 단계가 조선의 그것보다 수세기 이상 앞서있었다는 일본 우파학자들과 생각을 같이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양심적인 일본학자 몇몇은 일본이 새가 될 수 있었고 조선이 새가 될 수 없었던 이유를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근대 도입을 모색하던 시기 두 나라에 가해진 "외압의 차이"라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고 있더군요.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시간과 기회가 일찍 충분히 주어졌다면, 서구 근대의 이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 또한 서구적 모더니티 관점에서 역사의 발전을 단선적인 것으로 보고 서구의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아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구명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국내학계의 연구 경향이 자국의 강대국화를 꿈꾼다는 면에서 국수주의 사학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일란성 쌍생아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포식자의 삶을 예찬하는 근대 지상주의자들과 생각을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자연계의 포식자들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만큼 먹이를 사냥하는 데 반해 인간세계의 포식자들은 동종인 인간을 상대로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무자비한 살육을 범하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지요. 그러나 포식자가 되지 않으면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 아니던가요? 포식자와 먹이들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세상은 동화 속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 8(팔레).jpg>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프레시안

박노자 선생님의 말씀대로 "대원군의 치적을 그 시대의 민중의 욕망과 그 시대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민중의 욕망에 부합하는 치적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시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성공의 확률이 높은 모델을 도입하려 했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평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원군이란 토종 물고기의 제왕이 자기가 다스리는 웅덩이 안에 사는 쏘가리나 메기 같은 내부 포식자들의 횡포나, 외부의 잔혹한 포식자들이 던지는 그물에서 송사리나 미꾸라지 같은 민중 물고기의 삶을 얼마나 잘 지켜 주었나를 평가하려면,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같은 시대에 실재하는 모델을 기준으로 그 공과를 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겁니다.

당시 민중 물고기들에게 인간다운―인권과 경제적 생존이 보장되는―삶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잔혹하긴 하지만 서구 근대를 따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대원군에게 왜 새가 되려하지 않았는지를 아직도 따져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다시금 포식자들이 으르렁거리며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힘을 겨루는 마당에 우리가 다시 그들의 먹이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때 대원군의 시대와 오늘 우리의 세상이 놀랄 정도로 유사하기에 그의 실패를 거울삼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을 찾는 것이 우리가 대원군의 치적을 다시 살펴보는 가장 큰 이유이자 역사를 배우는 본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다시금 힘을 발하는 오늘에 비추어 대원군의 시대와 치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해 보려 합니다.

개혁이냐 미봉이냐. 5백년동안 조선왕조를 지탱해온 질서와 제도는 너무 낡아 여기 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 구멍 사이로 모기떼(포식자)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대원군이 내린 조치는 구멍에 가죽을 덧대 튼튼하게 누빈 것일까요? 아니면 바늘과 실로 얼기설기 엮어 눈가림만 해놓은 셈일까요? 전자라면 개혁이고, 후자라면 미봉에 지나지 않을 터.

< 9(척화비).jpg> 척화비 @프레시안

대원군은 양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를 사색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과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호포제(戶布制)와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한 개혁정치가이자 병인양요(1866)ㆍ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ㆍ신미양요(1871)와 같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를 지킨 원(原)민족주의자(proto-nationalist)라고 칭송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동학교도와 천주교도를 처형한 독재자이자, 일본과 중국이 양무운동과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서구를 배울 때 우물안 개구리로 시간을 허송한 시대착오적 정치가라고 비판합니다.

대원군은 "조선 근대의 괴걸이요, 유사 이래 어떤 제왕이든 감히 잡아보지 못했던 '절대'적 권리를 손에 잡고 이 팔도 삼백여 주를 호령하며, 밖으로는 불란서ㆍ미국ㆍ청국을 내리누르고, 안으로는 자기 백성의 복지를 위해 일생을 바친(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위인일까요?

아니면 "대원군의 몸은 과히 크지 아니하고 파리하나 원기가 있고, 그 눈은 항상 번득번득하여 보기에 무서우며, 성품은 조급하고 탐독합니다. 새 조정을 다스리는 대원군이 비록 모든 폐단을 고치고 없이 하겠다 하나, 흉악한 일을 마음대로 행하고 사람을 무수히 죽여도 어떻게 무슨 일로 죽이는지 알 수 없으니, 이 악독한 사람이 잠깐사이에 만들어 내는 환난을 우리가 면할는지, 나는 마음을 놓지 못하겠습니다(프랑스 선교사의 편지)"라고 할만큼 잔인무도한 독재자일까요?

<10(대원군초상).jpg>대원군 초상 @프레시안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대원군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미친 사람 흉내로 안동 김씨의 박해를 피하고 왕실의 조대비와 묵계를 맺는 기지를 발휘해 집권에 성공했다고 알고 있는 것이지요. 황현은 그가 권모술수만으로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철종도 일찍이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이 있었으므로 장김(壯金, 안동 김씨 세도가)도 이를 도왔다. 이에 김흥근(金興根)이 말하기를 '흥선군이 살아 있으니 이는 곧 두 임금이고, 두 임금을 섬기느니 차라리 흥선군으로 임금을 삼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했다. 김병학(金炳學)은 그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여 줄 것을 흥선군과 약속하고 외척의 세도를 유지하려 했다"(『매천야록』).

사실 대원군은 철종,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 세도가문, 그리고 노론계 원로대신 등의 보수세력들이 합의하여 내세운 위기 관리자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을 밀어준 보수세력의 이익에 반하는 어떠한 개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 대원군은 세도가문과 양반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양보만으로, 한계상황에 다다른 농민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 두 마리 토끼를 쫓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패한 정치가 같습니다.

대원군은 1860년대초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를 맞은 조선의 기성 집권세력이 합의해 옹립한 위기관리자였기 때문에 그를 추대한 보수세력의 이익에 반하는 이상적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보수 집권세력의 반발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전통속의 혁신"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추진한 개혁들이 이상적ㆍ체계적이 되지 못하고 실용적ㆍ미봉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정치적 여건상 불가피하였다고 여겨집니다.

***대원군 집권기와 냉전 붕괴 후의 오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요? 대원군 집권기와 냉전 붕괴 후의 오늘이 너무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질서와 냉전이 붕괴된 후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문호 개방(양요와 lMF)을 요구하고, 세도정권과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개혁의 목소리(민란과 노동운동)가 높아진 상황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3당 합당과 DJP연합을 통해 집권한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을 도운 세력의 이익에 결정적으로 반하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점도 비슷합니다. 어떤 점이 그러한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첫째, 사색당파의 고른 등용과 지역 편중을 넘기 위한 인사 개혁에만 초점을 맞추어 제도개혁을 소홀히 한 결과, 노론 중심의 문벌세력이나 영ㆍ호남 세력의 권력독점을 막는 데 실패한 점. 둘째, 경복궁 복원과 중앙청(조선총독부) 철거, 남북 정상회담 성사 등 왕권이나 정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업적 지향형 정치에 매몰되었다는 점. 셋째, 호포제와 사창제, 금융실명제와 의약분업 등 여러 개혁조치들이 변죽만 울리다 만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닮은꼴인 것 같습니다.

< 11(형구).jpg>천주교도 처형에 쓰이던 형구 @프레시안

시각을 넓혀보면 유사점은 남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고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전환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위정자들이 택한 대외정책은 대원군 시절의 시대착오적 쇄국정책과 다르지 않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나아가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8천명의 천주교도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북한의 반체제 인사들, 그리고 연명을 위해 간도나 연해주로 월경한 사람들과 탈북자들의 참상도 그때와 지금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다만 대원군 시대 실정의 책임이 대원군과 그를 둘러싼 양반 보수세력들의 몫이라면, 오늘의 실정은 시민사회를 사는, 시민임을 자각하는 우리 모두가 나누어 짊어져야 할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이 그때와 지금의 차이겠지요.

개혁을 꿈꾸는 집권자들이 대원군 이하 과거의 집권자들에게 얻을 수 있는 교훈 하나는 개혁의 성패는 자신의 집권을 도와준 세력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밤이 깊어 가는 연구실에서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성대경. 「대원군집정기의 권력구조」. 『대동문화연구』15, 1982.
성대경. 「대원군 집정의 원인적 제상황에 대하여」. 『인문과학』 10.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1.
성대경. 「대원군의 보정부담초 - 오여륜 대담기 -」. 『향토서울』 4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2.
성대경. 「대원군정권의 정책」. 『대동문화연구』 18.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1984.
성대경. 「대원군의 서원훼철」. 『천관우선생 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정음문화사, 1985.
성대경. 「대원군정권의 과거운영 - 문과를 중심으로 -」. 『대동문화연구』 19. 성균관대학교, 1985.
이광린. 「개화당의 대원군관」. 『개화파와 개화 사상 연구』. 일조각, 1989.
유영익. 「흥선대원군」. 『한국사 시민 강좌』13, 1993.
김의환. 「새로 발견된 '흥선대원군 약전'」. 『사학연구』 39. 과천: 한국사학회, 1987.
김정기. 「대원군 납치와 반청의식의 형성 1882?1894」. 『한국사론』 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권석봉. 「청영에 있어서의 대원군과 그의 환국」. 『동방학지』 2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1.
권석봉. 「청정에 있어서의 대원군과 그의 환국(하)」. 『동방학지』 2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1.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최병옥. 「대원군의 하야에 대하여」. 『서암 조항래교수 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
Choe, Ching Young. The Rule of the Taewon'gun, 1864~1873: Restoration in Yi Korea, East Asian Research Center, Harvard University. Cambrige, Mass, 1972.
James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이훈상 역. 팔레 저.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신원문화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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